1417년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
1418년 염포를 개항해 일본에 대한 문호를 개방,
1895년까지 경상좌도 육군의 중심지 기능을 했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울산도호부로 승격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폐지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娑王) 때 비로소 지변현(知邊縣) 설치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하곡현(河曲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초 흥려부로 승격
..........울산 '무거와 김신암.' 전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 때의 일이었다.
천년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말 귀족층의 분열.
신라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고 후백제의 침입.
신라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 구원병을 요청
1만 고려군이 도착 전까지 포석정에서 환락.
후백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염려.
둘째 왕자와 함께 하곡현의 영축산으로 간다.
그곳에서 문수대성 계시에 따를 결심을 한다.
태화사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한 동자승이 나타나 경순왕을 인도.
삼호 앞 태화강을 건너자 사라져버린 동자승
경순왕은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며 탄식.
하여, 월성에 환궁후 고려 태조에게 항복 결심.
이때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에 들어가 초식으로 생을 마쳤다
또 막내 아들은 화엄종 스님이 되어.. 범공
해인사에 머물다가 문수산 남쪽에 절을 지어
살았으니 그 절의 이름을 김신암이라 하였다.
하여, <김신기산>이라 하다가 지금은 남암산
이 절 김신대는 그가 풍류를 즐기던 곳.
지금은 김신암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훗날 이러한 전설이 전해내려와 '헐수정'
동자가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동이라 명명.
전설의 주인공 <짐부대왕> 또는 <김부대왕>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또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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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선사시대 유물·유적이 시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서생면 신암리에는 신석기시대 각종 토기와 석기 등
농소동·온산읍·언양읍 등 여러 지역에서는 청동기유물
특히 언양읍 서부리의 언양지석묘총 등 고인돌들,
울주 천전리 각석,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
큰 바위에 각종 그림과 글이 새겨진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 장현동·화봉동·신정동 등 시내 곳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무늬 없는토기 석기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열리는 처용제전·처용가장행렬·처용무·
다향제·쇠부리놀이·처용놀이·농악시연을 비롯해
한글백일장·울산국악제·처용미술제 등 다양한 행사
설화
〈헐수정과 무거동전설〉·〈처용암전설〉·
〈병영성전설〉·〈치술령망부석전설〉·
〈원효대사와 천성산전설〉·〈쌀바위전설〉 등
노동요
담바귀타령〉〈장타령〉〈멸치후릿배노래〉모심기노래〉
<후리질노래〉〈돈타령〉, 특히 〈불매노래〉 3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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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추절 전설.
신라 제 8대 임금인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위 하나가 나타나 미역 따는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행.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멘 세오녀는 바닷가 바위에서 남편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에 오르자 바위는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를 본 일본인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괴변.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겼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는 탓입니다.”
이에 신라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연오랑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비단을 짜 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라.”
그 말대로 신라에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하였단다.
...............해설........................
신라 8대 왕은 '아달라 이사금.'
5년(157) 왜인이 수교하러 왔다.
20년(174) 정월에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신라는 왜와 수교하였다
연오랑 세오녀가 아달라 왕때 일본으로 갔다는 설화
하여, 세오녀를 '비미호' 또는 '신공왕후'라고 추정.
9대 벌휴 이사금 10년(193) 6월
왜인 천여명이 기근으로 식량 구걸.
10대 나해 이사금 13년(208) 4월
왜인들이 신라 변경에 침입하므로
왕이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게 했다.
.............................................
덧 말.
이러한 삼국시대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와 왜는 옛부터 상호간 교역이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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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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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에 얽힌 전설은 우리나라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후지산의 화산폭팔은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백두산의 화산폭팔이 발해 패망 역사와 무관하지 않듯.
후지산을 모르고서는 지리산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지금부터 후지산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자.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
태평양 연안에 있고 1707년 마지막 폭발
BC 286년 일어난 지진 때문에 생성된 화산
'영원한 삶'이란 뜻이 담겨있는 후지산.
5개의 작은 호수가 후지 산 기슭에 있는데,
가와구치 호수에 거꾸로 비친 후지산의 영상
제지화학 산업, 농업, 무지개송어 양식, 낙농업
대칭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정상이 눈으로 덮힌 원뿔형의 화산
일본에서 늘 예술적 주제가 되어왔다.
신성시되는 후지산은 일본의 상징
해마다 여름이면 수천 일본인들
정상에 있는 신사로 등산을 한다.
'후지-하코네- 이즈 국립공원.'
.....................주.................................
북서쪽에는 오무로산(大室山)을 비롯한 기생 화산들.
남동쪽 사면에는 1707년에 호에이 산의 폭발 분화구.
고미산(2,314m) 고후지는 후지산보다 오래 된 화산.
781~1707년까지 10 여 차례의 화산폭팔 기록.
그 중 800년, 864년, 1707년의 분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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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어원은 원주민 아이누족 언어인 아이누어
'후찌'나 '푸슈' 우리 말로 해석하면 '분화'란 뜻.
백제어 '불', 말레이어 '푸지(멋지다)', Huge(크다).
후지산의 전설에는 <카구야 공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타케토리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있었다.
할아버지는 대나무를 베어 바구니와 소쿠리를 만들어 팔았다.
구름 한점 없는 가을 아침,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대나무를 베러 갔다.
대나무숲 속에서, 할아버지는 뿌리 쪽이 빛나는 대나무 한 그루를 발견.
그 대나무를 베어내자 그 안에 반짝거리는 작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키울 마음을 먹고 손바닥 위에 얹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 참 행운이군. 우리가 키웁시다."
"어머나! 귀여운 여자애!! 그렇게 해요."
할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려오자 할머니는 몹시 기뻐했다.
부부는 파란 대나무 바구니를 짜서 그 안에 아이를 키웠다.
집안에 활기가 넘칠수록 부부는 더욱 아이를 소중히 키웠다.
그 후부터 할아버지가 자르는 대나무 안에서 자주 보물이 나왔다.
생활은 점점 좋아졌고 여자 애는 3개월 만에 보통사람만큼 자랐다.
여자 아이는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 온 집안이 훤히 밝아질 정도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이에게 '카구야히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곱고 아름다운 카구야히메. 현명하고 빛나는 카구야히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구혼자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카구야히메는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은 천황에게까지 알려져 천황도 청혼했다.
"아니오, 저는 천황과 결혼할 수 있는 몸이 못 됩니다."
천왕의 사자를 만난 카구야히메는 겸손하게 사양했다.
천황이 궁중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천황은 카구야히메를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해의 봄이었다.
카구야히메는 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두 부부는 매우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떻게 된거니? 왜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니?"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윽고 가을이 되었고 한가위가 가까워졌다.
카구야히메는 매일 밤마다 훌쩍훌쩍 울었다.
두사람이 연유를 묻자 카구야히메가 대답했다.
"아! 영원히 두분 곁에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달나라 사람입니다.
이번 한가위엔 달나라에서 데려갈 듯..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기에 슬퍼 웁니다."
그녀는 원래 달나라 사람으로 죄를 지어 잠시 지상에 왔던 것.
하지만, 이젠 죄를 다 갚았기에 오는 8월 15일에 보름달이 뜨면,
달나라에서 내려온 사신과 함께 돌아가야 할 몸이라고 고백했다.
두사람은 놀라 천황에게 부탁했다.
"부디 저희들의 딸을 지켜 주십시요."
드디어, 한가위가 다가왔다.
천황의 부하들이 많이 와 있었다.
활과 칼을 들고 집 주위를 애워쌌다.
천황 역시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날이 저물었다.
동산에서 둥글고 큰 달이 솟았다.
할머니는 카구야히메를 창고에 숨겼다
할아버지는 그 창고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 : "제발 영원히 이 집에 있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 : "소중한 딸을 이대로 넘겨 줄 수는 없다."
달이 뜨자 주위는 낮과 같이 밝아졌다.
어딘가에선가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다.
달나라에서 황금마차가 구름타고 내려왔다.
천황의 부하들은 눈이 부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창고 문은 저절로 열리자 카구야히메는 밖으로 나왔다.
"여러모로 신세졌습니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달밝은 밤에는 아무쪼록 저와의 일들을 생각해 주세요."
카구야히메는 달나라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달빛에 비친 카구야히메는 한층 더 아름다웠다.
카구야히메를 태운 황금수레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천인들의 음악도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카구야히메가 떠나기 전에 할아버지와 천황에게 남긴 편지와 불사약.
날개옷을 입고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승천한 카구야히메.
그 아픔으로 노부부는 병이 들었다.
천황도 그녀와의 사랑을 잊고 싶었다.
천황은 그녀가 남긴 편지와 불사약을 후지산에서 태우게 했다.
천황은 많은 부하들을 호위하게 해 그 일을 무사히 치루게 했다.
하여, 그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후지산은 불사약의 후지(不死)와 병사가 많다는 후지(富士)란 뜻.
우리나라 최동단 지점인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
새천년 해맞이의 고장 답게, 매년 1월1일 해맞이 축전
이곳은 장기반도의 가장 꼭지점에 해당하여 일출의 명소
일년 중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알려진 후
전국의 관광 인파가 신년 해맞이 여행을 오는 곳
호미곶 독수리 바위, 그곳 광장의 조각 '상생의 손.
거대한 손 모양의 조각상 사이로 떠오르는 해맞이
왼 손은 육지에 있고, 오른손은 바다 가운데 있다.
호미곶은 바닷가에 들어갈 수 없지만,
좌측의 갯바위들을 딛고 들어가서 보면
갈매기 떼들이 무리져 앉은 모습이 장관
...................포항 과매기......................
포항 구룡포, 대보지역의 겨울 특산품으로 `과메기’
과메기는 원료가 '꽁치'지만 원래 청어로 만들어졌다
청어가 감당할 수 없을만치 파도에 밀려와 잡힌 구룡포
갈고리로 끌어 담을 정도로 흔하게 잡을 수 있던 곳
겨울의 매서운 해풍을 받아 만든 청어 과메기가 유명.
.......................................................
호미곶은 오늘날 국제무역 항구로 성장한., 포항.
신라시대 호미곶 용덕곶 장기곶은., 오늘날 영일만.
영일만, 포항, 신포항은 신라시대 제철 무역의 중심.
'북한에 있는 신포항은 포항에서 유래된 지명.'
....................영일만(迎日灣)...................
경북 포항시 중심으로 북으로 흥해읍 용덕곶,
남으로는 대보면 장기곶 그 사이에 있는 만.
포항시 중심지와 흥해읍·동해면·대보면에 싸여 있다.
신라 때 아호 근호지변, 고려 때 어룡담·어룡호·용담만
일제 때 영일만이라 개칭되었고 옛부터 천혜의 국제 항구.
영일만은 북동쪽으로 열려 있으며,
입구 너비 12㎞, 만내 너비 약 10㎞,
수심이 16~19m로 깊고 해안단구가 발달.
형산강이 경북 경주시·포항시를 거쳐 만내로 유입하고,
냉천·여남천이 흘러들며, 연안에 포항평야(형산강 평야)
1940년 대 현대적인 해수욕장으로 개장된 송도 해수욕장.
2㎞에 이르는 반달형의 모래사장과 맑은 물,
방풍림으로 조성된 울창한 해송림과 흑백나무
영일만은 형산강지구대의 북동단에 있으며,
포항에서 울릉도를 잇는 여객선이 매일 운항
영일만 포항은 한때 고래잡이 양식업 수산도시
부산항과 원산항을 잇는 항로가 개설되기도 했다.
1962년 국제무역항 지정 1967년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그후 본격적인 동남해안공업지대의 거점지역으로 성장.
...................................................................
...................포항시(浦項市)......................
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된 도농통합시.
1970년대에 포항제철(주)이 들어서고 시설확장
세계적인 제철도시이고 관광자원도 풍부한 지역.
포항시는 옛 영일현지역 포항창이 설치된데서 유래.
삼국시대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오량지현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영일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1018년(현종 9) 경주 속현이 되었다가 1390년에 독립
1732년(영조 8) 통양포(通洋浦) 아래 포항창을 설치하고
이 창의 곡식으로 함경도 진휼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이 일대는 함경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
...............신포항(新浦港)....................
함경남도 신포시에 있는 어항.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한 편이며,
남쪽 앞바다에 마양도가 자연방파제
부두에 2,000~3,000t급 배들이 정박
연안 일대는 한류 난류 교차지역으로 세계적인 어장
명태·대구·청어·정어리·고등어·연어·송어 등
특히, 신포 마양도 부근은 예로부터 유명한 명태어장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명태 어선들이 성시를 이룬다.
특히 이곳에서 어획되는 명태는 '북청명태'라 하여 유명.
그밖에 가자미 멸치 까나리 등이 어획되며,
미역·다시마·해삼·조개류 등이 채취된다.
명태 알을 가공한 '신포명란'이 특산물로 유명
그밖에 수산물가공품으로 통조림·냉동제품·염장·
건어물·젓갈류·어묵·창란젓·어유 등이 생산된다.
원양어업기지 신포수산연합기업소를 비롯한 어업사업소
육대·신호·호남·남흥 등 10여 개의 수산협동조합
조선소·어유공장이 있는 신포항은 북청 들어가는 관문
남으로 원산, 북으로 단천·김책·나진·선봉 정기선 운항
신포와 마양도 간에 매일 수차례 정기여객선이 왕래,
마양도 동단에 등대가 있고 해안따라 평라선(평양-나진)
신포역을 지나며, 신포에서 홍원과 북청 사이를 잇는 도로.
................................................................
철.
장작불과 흙이 만나면., 도자기
숯불과 철광석이 만나면., 철기.
도자기를 구울 때 최고 온도가 1,350℃,
숯불 최고 온도는 100℃ 더 높은 1,450℃
인간이 숯을 처음 쓴 시기는 약 50만 년 전 북경원인 때
그러나, 숯이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숯은 뜬숯(消炭)
남해 창선과 삼천포 대방 사이에 놓인 연륙교
그 사이에 3개의 섬., 즉, 늑도 초양섬 모개섬
1998년 늑도에서 BC 17년 중국 동전 반량(半兩)이 발굴
부뚜막과 남방형 온돌이 숯부스러기(뜬숯)와 함께 발굴
옛날 어머니들이 재래식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청솔가지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뜸 냄새가 나면
아궁이 불덩어리를 끄집어내 물을 끼얹어 만든 뜬숯
이 불덩어리 적외선(넘붉은살)은 자궁암에 효험.
우리나라에서 불(火)의 발명자는 고시례(高矢禮)
호랑이에게 돌진 돌이 바위에 맞아 번쩍하고 불
하여, 고시례가 처음으로 부싯돌을 발명
철기시대 야금용 숯이 필요해 복소법(伏燒法) 개발
장작(薪炭)으로는 1,000℃ 이상 올리기 어렵기 때문.
철(鐵) 자는 금(金)과 동이의 이(夷)를 합쳐 만든 글자.
중국 한나라보다 선진 제철기술을 보유했던 동이(東夷)족
한반도 서북지역 주조철기는 BC 3∼4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동이)에서 철기문화는 가야에 이르러 눈부시게 발전.
가야국을 건국한 김수로왕은 벼농사와 수산업을 비롯
제철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했다.
하여, 수로왕의 성이 쇠 금(金)이고 가야 연합국의 맹주.
양산 동래 마산 창원 진해 등지의 철광석으로 철을 생산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침 철검 철낚싯바늘 철주 쇠갑옷
등을 만들어 쓰는 한편 철정을 만들어 화폐로도 사용했다.
이로써 가야국은 완전한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
마한 예 왜 대방 등이 가야를 찾아와 철을 수입
창원시 한복판 성산 패총은 기원전 가야의 야철지
여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 중국 엽전 오수전이 출토.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4대 탈해왕
“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
탈해왕은 사로(서라벌→쇠벌)로 이주한 대장장이
헌강왕 6년 9월 9일 서민들도 밥지을 때 숯을 사용
이때 이미 숯이 대량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 : (사로 - 서라벌 - 쇠벌 - 서울 - 수도)
신라는 진한에 소속된 사로국에서 출발한 작은 나라
풍부한 철광석과 철 생산으로 7세기 경에 삼국을 통일
철기문화 발달이 신라의 삼국통일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룡사 장륙존상.
장륙존상은 진흥왕이 야철 기술을 과시
무려 21톤이나 나가는 동양 최대의 철불
당시, 인도 중국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실패
신라 만이 거대한 불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라의 제철기술이 동양 최고의 수준인 사례.
..............황룡사 구층탑..................
황룡사는 황궁인 용궁(龍宮) 남쪽에 진흥왕 때 완성
그로부터 79년 지난 후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 완공,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왕성 월성(月城)의 동쪽.
신라 황룡사 9층탑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