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원문보기 글쓴이: 75대 황제
행치령 고개넘어 백자동 고개넘어 하늘이 버리셨나. 바람도 스산하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마의태자 / 박재홍 “중국 금(金)나라는 여진(女眞)으로 망명한 마의태자 후손이 세웠다.” |
월악산 덕주사 -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어린곳
제목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라고 하니 뭐 거창한 로멘스가 나올 법도 합니다. 우리 옛이야기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선화공주와 서동'등 '공주'가 들어가면 그럴듯한 로멘스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덕주공주는 경순왕의 딸로 마의태자의 동생입니다. 로멘스가 있다면 그것은 '막장 드라마'겠지요.
월악산 월악계곡 학소대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자 가장 비통에 젖은 것은 '마의태자'겠지요. 바로 다음이 자기의 차례인데, 차라리 아버지 경순왕이 왕건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말았다면 그래도 '태자'라는 신분으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요. 비탄에 젖은 마의태자는 신라 재건국의 꿈을 가지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때 마의태자의 뒤를 따라간 사람이 덕주공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금강산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해서 姸殮沮� 왔을 때 공주는 병이나고, 마의태자는 공주를 두고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공주가 머무른 절이 본래 월형산 월악사라 불리던 절이었으나 월악산 덕주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덕주공주는 신라의 재건을 꿈꾸며 부처님께 기도드려 지금 월악산 마애불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전설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옛이야기라 조금씩 다른 말도 전합니다.
월악산 덕주산성 구조도 - 안내판 촬영
그러나 정비석선생의 '산정무한'이란 글에 보면,
비로봉 동쪽은 - 글쓴이 주 ; 지도상으로는 비로봉에서 옥녀봉으로 가는 길가이니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 맞습니다. -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 든 곳이 애화(哀話)맺혀 있는 용마석---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철책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라는 구절과, 수렴동 입구 명경대에서 마의태자가 수련을 했다는 말이 있은 즉 완전히 헛말인것은 아닌듯 싶습니다.
월악산 덕주산성, 그러나 이 성벽은 근래에 들어 쌓은 것이다.
덕주사 가는 길은 수안보 휴게소에서 좌회전해서 충주호반을 따라 가다가 월악나루에서 우회전 해서 '송계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과, 수안보온천을 지나 미륵사지에서 좌회전하여 송계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주변 경치가 좋은 계절이라면 충주호반길이 좋겠고요, 주변 경치가 나쁜 계절이라면 역시 충주호반길이 좋겠습니다. 한겨울에 미륵사지 가는 고개를 오르기란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대웅보전
덕주사는 월악산 계곡길이 뚫려 마당 앞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사를 크게 일으켜 개울가 옛 터를 버리고 양지바른 곳에 넓직하니 자리를 잡고 단아한 대웅전을 세우고 했습니다.
처음 덕주사를 세운 것은 신라 진평왕 9년(586)이라고 합니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는 '상덕주사'가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는 '하덕주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덕주사는 1951년 불타 없어지고, 하덕주사는 어느때 없어졌는지 기록조차 없다고 합니다. 1996년 성일화상이란 분이 덕주사를 재건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대웅전을 1998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월악산 덕주사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있는 덕주산성 북문.
덕주사 들머리길에는 육중한 산문이 일주문 대신 길을 가로막고 서있습니다. 이것을 '덕주산성 북문'이라고 하는데 우람한 석성과 연결되면 천혜의 요새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월악산에는 '덕주산성'이라 불리는 산성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이나 '고려사'에 보면 처음 성을 쌓은 것은 백제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려때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나 임진왜란 때에도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크게 했다고 합니다 - 월악산 안내판 - 아마도 미륵사지 옆으로 '하늘재길'이 옛날에 중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지리적 요충지로서 큰 역활을 하였던것 같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
하덕주사앞에서 개울을 건너 산길을 접어들면 안내판에는 1.5km라고 하지만 관광객이 걷기에는 꽤 되는 거리에 '마애불'이 있습니다. 물론 악(岳)자가 들어간 산은 '악- 소리 나게 힘들다'라고 합니다만 마애불 까지는 힘든 코스가 없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매애불 두상부분의 '닫집前室)'흔적
보물 406호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堤川 德周寺 磨崖如來立像)으로 불리는 이 마애불은 터만 남은 상덕주사 화강암 바위에 조각한 전체 높이 13m의 마애불입니다. 얼굴 부분은 조금 부조(浮彫)형식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몸통으로 가면서 선각(線刻)만 되어있습니다. 크기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잃고 있는 것등으로 보아 고려의 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위 벽에는 나무를 끼웠던것 같은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마애불을 감싸고 있는 '닫집(전실前室)'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매애불 앞 극락보전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앞 극락보전 마당에 있는 작은 사리탑 저 아래 요사채가 보인다.
옛 절터는 비워두고 왼쪽 언덕위에 '극락보전'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이 마애불을 '아미타여래'로 보고싶은 마음인듯 합니다. 극락보전 앞마당에 작은 탑같기도 하고, 부도 같기도 한 석물이 있습니다. '저것이 무엇인가?' 올라가 보니 쌍둥이 같이 똑 같은 것이 '마애불' 정수리 부근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아마도 주술적인 무엇을 기대하는 석물인듯 합니다.
월악산 덕주사 매애불 극락보전 앞의 사리탑과 건너편 마애불 정수리의 사리탑.
월악산 덕주사 앞의 남근석.
덕주사 앞에는 사진과 같은 돌이 세개 있습니다. 옆의 안내판에는 낮뜨겁지도 않은지 '남근석'이라고 명명하고 이 남근석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덕주사의 봉우리가 여자 얼굴 모습이다.' 또는 '월악산이 음기가 왕성한 산이다.' 등 그래서 음기를 누르려고 남근석을 배치했다고 쓰여있습니다. 요즈음 절집에서 왜 이렇것에 매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은 그저 염불만 열심히 외면 됩니다. 중들이 뭘 안다고 풍수를 들추고 그럽니까? 산의 그림자가 여자 얼굴 모습이라니 도통 그런 것을 구별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예로부터 지리산같이 흙으로 둥그마니 이루어진 산은 여성의 산이요 - 그래서 지리산 최고 산신은 '마고할미'입니다. - 설악, 월악,등 바위로 이루어진 산은 남성의 산이락 일컬었습니다. 그러자 말고 차라리 처 가운데 돌멩이의 받침이 복련인 것이나 기둥의 끝 부분이 돌출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어느 석물의 부분인가를 연구하면 더 좋겠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산신각
그러나 진짜 덕주사의 멋진 물건은 '산신각'이었습니다. 하나의 바위였는데 온달장군이 칼로 내려쳤는지, 정말 산신령이 지팡이로 두드렸는지 둘로 쪼개진 틈에 묘하게 산신각을 모셨습니다. 요즈음 건축하였지만 그 아이디어가 빛나거니와 정말 산령님이 거처할 것 같은 신비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