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전라남도의 중남부지역을 근거삼아 의진간의 연합전선을 주도하며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선생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먼저 1908년 10월에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으로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발족시켜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각각 편성되어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 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 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라고 함으로써 당시 일본측이 선생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9년 7월경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서 활동을 일시 중단하였다. 일제측은 “대토벌을 개시하자 적세가 조락(凋落)하여 지난날의 횡포가 없고 전, 심, 안(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 필자주)과 같은 대수괴는 일시 부하를 해산 혹은 분산하고 수괴는 어디론가 잠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제는 심남일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했는데,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결국 1909년 8월말 선생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일제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훗날을 기약하며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중군장 안찬재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보성에서 활동하던 임창모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의병장이었던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으며, 선생을 체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巨魁)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일본측조차 “현재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일컬었던 선생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후일 백암 박은식은 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평하였다.
그는 훤한 얼굴에 훤칠한 풍채로 재주가 뛰어나고 기지가 많았었다. 의병 70여 명을 모집하여 누차 기묘한 계책으로 토적하여 매우 위망이 있었으나 마침내 장흥군의 동쪽 산에서 패전하여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전사(체포: 필자 주)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