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The Interpreter 2013-7-8 (번역) 크메르의 세계
[특별기고] 훈센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의 캄보디아
Cambodia: After Hun Sen wins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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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Reuters)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 |
기고 : 밀턴 오스본 (Milton Osborne)
캄보디아 국민들이 오는 7월28일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투표를 마치게 되면, 훈센(Hun Sen) 총리의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승리할 공산이 크다. 그러한 결과는 지난 1997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집권 CPP가 계속해서 그 주도권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훈센 총리의 세계 최장수 총리 기록이 더욱 더 길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훈센 총리는 '캄보디아 국제연합 과도행정기구'(UNTAC)가 캄보디아 상황 안정화 작전을 벌이기 시작한 1991년보다도 훨씬 이전인 1985년에 총리직에 취임한 인물이다.
캄보디아 총선이 다가오면서, 캄보디아 상황의 전개에 관한 외부의 논평들은 압도적으로 비판적 논조가 많고, 많은 경우 훈센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훈센 총리의 과거 전력 및 그의 정당인 CPP가 만연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고, 정부 고위층에 연줄을 댄 사람들에 대한 면책의 문화를 고려한다면, 그러한 반응들은 결코 놀라운 것이 못 된다.
가장 최근에 호주인 기고자들이 발표한 논평들은 현재 캄보디아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병리현상들을 지적했다. 루크 헌트(Luke Hunt) 기자가 <더 디플로맷>(The Diplomat: 외교) 지에 기고한 글 "선거에 초조해하는 캄보디아 집권층"(Cambodian Rulers Dogged by Pre-Election Jitters)이나, 팀 프레워(Tim Frewer)가 <뉴 만달라>(New Mandala)에 기고한 글 "선거철을 맞이한 캄보디아"(Election time in Cambodia)가 바로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훈센 총리가 다시금 집권에 성공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프놈펜에 주재하는 관찰자들이 집권당(=훈센이 장악한 당 및 국가) 내에서 불안감을 보이는 징후에 관해 보고하기 시작했지만, 간단히 답변하자면 "노"(No: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라는 것이다.
일부 관찰자들이 보고한 바대로, 여당 내에서 새로운 분파주의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장기판을 두고 있는 훈센이 그러한 경향들을 충분히 체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논평가들은 장시간 연설을 하는 방식의 훈센 총리의 대중적 가면극이 유권자들에게 점점 진부한 느낌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도 살펴보고 있고, 특히 시골지역에서 더욱 더 그러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관해서도 회의적이다. 외부인들이 보기엔 진부해보이는 일일지라도, 지도층들의 기나긴 전시회(=연설)가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환영을 받기까지 하는 공동체에서는 외부인들과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야권 주요 후보들의 선거참여 배제를 위해, 훈센은 무자비한 행동과 모호한 명분의 사법 조치를 통해 그나마 야당이 집권 CPP의 우위를 조금이라도 상쇄시킬 여지조차 무너뜨려 놓았다. 야권에서 가장 저명한 정치인인 삼 랑시(Sam Rainsy) 총재의 경우, 귀국 시에 징역형을 살 위험에 빠져 해외에 망명 중이고, 여당은 '6월 국회에서 야당 의원 27명이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시켜 그들이 총선 후보로 나오는 데 제약을 가해버렸다.
또한 훈센에 대항하는 야권은 자책골까지 넣으면서 스스로 족쇄를 차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례는 통합야당 '캄보디아 구국당'(CNRP)의 껨 속하(Kem Sokha, 껨 소카) 부총재 겸 총재 권한대행이 '베트남이 S-21 고문센터의 증거를 날조했다는 발언'하여 설화에 휩싸인 것이었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 속에서, 아직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것이지만 훈센의 정치적 지배력과 관련된 또 다른 요소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캄보디아의 정치체제에 있어서 왕실의 역할에 관해 훈센이 감소된 역할을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훈센은 캄보디아의 왕실, 특히 국왕이 정치적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고, 그것은 자신이 총리인 한에 있어서 자주 강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훈센의 그 같은 입장은 고(故)-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임 국왕이 캄보디아에 귀국하여 국왕으로 복위한 1993~2004년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종종 날카로운 이견의 교환이 발생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훈센이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현 국왕의 역할이 입헌적 역할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고수하는 상황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훈센은 때때로 왕실의 관습을 보존하는 공적 역할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가령 '왕실 농경제'(Ploughing the Sacred Furrow ceremony) 같은 행사들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훈센은 자신의 이름을 16세기의 캄보디아 국왕이었던 스다잇 깐(Sdech Kan: 꼰[Korn])과 종종 관련을 짓기도 했다. 스다잇 깐은 농노 출신으로 국왕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몇몇 보도들에 따르면, 훈센은 지난 2009년에 자신이 전생에 스다잇 깐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논평가들은 훈센 자신이 스다잇 깐의 재림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평가들도 훈센이 자신의 이름과 스다잇 깐의 이름을 연관시키는 일이, 국왕제에 대한 우호적 성향을 갖는 캄보디아 사회에서, 최소한 자신이 왕실과 동등한 수준의 지위를 누리는 방안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훈센은 '스다잇 깐의 전기'를 저술하고 출판하는 데 재정적 후원을 했고, 스다잇 깐의 동상들을 세우는 일도 환영했다. 그리고 훈센이 미천한 출신에서 국가의 최고 권력으로 부상한 일과 스다잇 깐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생애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의미하려는 시도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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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껌뽕 짬(Kampong Cham) 도, 뽄히어 끄렉(Ponhea Krek) 군, 다운 떠이(Daun Tey) 면에 위치한 '흘룽 쁘레아 스다잇 깐'(Hlung Preah Sdech Kan) 공원에서, 2009년 11월 29~30일 사이에 주변 도들에서 출전한 용선들이 '물축제 보트 경주대회'를 펼치고 있다. 껌뽕 짬 도는 훈센 총리의 고향이며, 스다잇 깐 국왕 동상의 얼굴은 훈센 총리의 얼굴을 닮아 화제가 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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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끄라와 [Sacrava] 화백의 만평. 2010-2-7.
- 훈센 왈 : "어떤 이들은 내가 스다잇 깐의 화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칼 막스, 피델 카스트로, 중국, 베트남, 북한 정권이 등장하기도 전에 사상 최초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스라이 소꾼밧 왕은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그를 살해했다. 하지만 내가 만일 전생에 스다잇 깐이었다면, 이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스다잇 깐 왈 : "기억하게 훈센 대공. 나는 결국 참수를 당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배후에 '베트남 오랑캐들'(요운)을 업고 있지도 않았다네." |
다가올 7월28일의 총선을 앞둔 상태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들 속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훈센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확고한 자세를 보인다는 점이며, 중국을 해외원조의 가장 주요한 제공자로 유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훈센의 이러한 중국에 대한 확고한 태도는 작년(2012)에 캄보디아가 개최한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순회 의장국 캄보디아가 남중국해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철저히 대변'하는 현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여타 '아세안' 국가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중국과 캄보디아의 이 같은 협조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 관계가 쇠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크메르의 세계'는 한국 탐사보도의 새 장을 연 '뉴스타파'를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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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생하셧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