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10일 화요일]
『대동야승』 제8권 [해동야언 Ⅱ] 성종기(成宗紀) 성종
저자 허봉은 成宗(이혈 李娎 1457~1495. 본관 전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현의 《용재총화》 등을 인용한 기록을 남긴다.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용재총화》이하 동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다.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다.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다.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성종은 13살에 왕이 되어 25년간 재위하다가 39세에 졸했다. 좀 더 살았다면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 되었을 것이고, 연산군의 학정도 없거나 늦추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허봉 등 역사의 기록을 쓴 사람들은 한 자 한 자 쓸 적마다 무척 고심했을 것 같다. 책이 귀한 그 시대에 한 권의 저술은 곧 세상에ㅡ널리 알려진다. 그러니 특히 왕실에 관한 글을 쓸 적에는 최대한 조심하며 공경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라 했는데, 兩聖 중에서 세종은 가하지만 세조는 불가하지 아니한가. 세조가 학문을 좋아했다는 말은 어느 책에도 없다. 무인 기질이 승해서 주위에는 무인들이 들끓었다. 오히려 문사들을 많이 죽였다. 그런데도 兩聖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아부사이다.
이어서 성균관에 대해 성현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 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성균관에 존경각, 전사청, 향객청,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리와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은 좋은데, 왕이 장전(帳殿)에 앉고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에,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 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대단한 잔치였다.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으니 얼마나 성은이 망극한가. 그리하여 한명회와 같은 반열에 오른 ‘나(성현)’이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라며 감탄할 수밖에.
이후 성균관이 공부하는 학당이었는지 취하고 배불리 먹는 식당이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