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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쇼펜하우어의 철학 : 비관주의,“의지의 형이상학”
[1] 인물소개 및 의지의 철학의 내용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는
1788년 1월 22일에 태어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경(1788-1824)보다 정확히 한 달 어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 오랜 국제 무역의 역사를 지닌 도시 단치히[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 가문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철학자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1747-1805)는 성공한 상인이자 선주였으며 아들이 가문의 경영권을 이어받도록 교육시켰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철자가 같다는 이유로 아들의 이름을 Arthur로 신중하게 선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 태어나던 날부터 국제 비즈니스 무역의 미래를 구상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다섯 살이던 1793년 3월, 그의 가족은 자유 도시였던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된 후 자유 한자 도시인 함부르크로 이주했습니다.
1809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2년 동안 머물면서 처음에는 의학을 전공한 후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괴팅겐에서 그는 회의주의 철학자 고틀롭 에른스트 슐체(1761~1833)의 사상을 흡수했습니다. 또 슐체는 또 그에게 플라톤과 칸트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교(1811~13)에 입학하여 요한 고틀립 피히테(1762~1814)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 등의 강사를 만나게 됩니다.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물리학, 심리학, 천문학, 동물학, 고고학, 생리학, 역사학, 문학, 시 등의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25세에 박사 논문을 쓸 준비가 된 쇼펜하우어는 1813년 예나에서 남서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루돌슈타트로 이사하여 줌 리터라는 여관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의 저서 <충족이유율 네 가지 뿌리>(Ue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저서는 훗날 그가 당시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 즉 그의 전 스승이었던 J. G. 피히테와 F. W. J. 쉘링(1775-1854), 헤겔(1770-1831)을 비판하는 데 사용할 논증을 정리하면서 후기 철학의 중심을 형성하게 됩니다. 같은 해 쇼펜하우어는 인근 예나 대학교에 논문을 제출하여 결석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1818년 출판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란 책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형이상학적인 본질인 의지(意志)의 표현으로 봅니다. 쇼펜하우어의 특징적인 개념인 의지(意志).(Wille, will)란 단순한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의지는 보통 의지가 말하는 선하고 힘있는 결단력과는 다릅니다. 의지는 우주를 버티고 있는 실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가끔 (절대)의지라는 말도 합니다. 거기에 비하여 인간적, 개인적인 의지는 의욕.(Wollen)이라고 불립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본질적입니다. 현상과 본질이란 개념 쌍의 그 본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형이상학적인 원리라고 부릅니다. 굳이 더 말하자면 신(神)과 동등한 개념입니다.
그의 의지 개념은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보편적인 사상이었던 임마누엘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transcendental Idealism)의 논리에 기반을 둡니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철학을 제일 잘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 그는 칸트의 비판철학을 넘어섭니다. 칸트는 알다시피 형이상학을 포기했습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경험이나 현상을 초월한 것들 즉 신(神)이나 영혼 그리고 우주 혹은 자유 등을 다루는 철학입니다. 칸트는 이들의 존재가 경험의 요소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因果律) 등을 넘어선 존재 즉 상상의 존재이기에 이들을 철학적으로 서술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철학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면에서 칸트를 존경하고 당시의 독일철학의 주류였던 피히테, 셸링 그리고 헤겔 등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당시 헤겔이 총장으로 있던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어서 헤겔을 이기기 위하여 자신의 강의 시간을 헤겔과 같은 시간에 맞추어 수강생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수강생이 적어서 결국 폐강을 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고는 대학 강단을 떠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칸트에 큰 무게를 두면서도 칸트의 비판철학 내지 소위 선험적 관념론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한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다른 의미를 발견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은 현상이나 경험의 제약조건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는 개별화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라는 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개별화의 원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실체인 의지가 사람이나 동물 등 개별적 사물들에게 반영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가 눈에 보이는 사물들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참고로 헤겔의 경우는 이를 외화(外化) 혹은 소외(疏外)라고 합니다.
개별화 개념은 쇼펜하우어가 스콜라 철학과 다른 여러 전통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합니다. 즉 그에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충족이유율 등은 숨어 있는 본체 즉 의지가 자신을 현상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 비밀과 난점(難點)이 있긴 합니다. 그 자세한 분석은 철학과 석·박사과정에서나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세계는 나의 표상(表象)이다” - 이것은 모든 살아 있고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진리이긴 하지만, 인간만이 그것을 반성된 추상적 의식으로 가져올 수 있으며, 그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철학적 신중함이 그에게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표상이란 인간의 감각과 생각 등의 총체를 말합니다. 이는 혹은 이미지, 관념 등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인도 철학을 들어 표상 개념을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표상은 마야.(Maya)와도 같습니다. 마야란 힌두교에서 허상, 속임수 등을 말합니다.
텍스트.: 그것은 인간들의 눈을 감싸고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보게 하는 속임수의 베일, 마야이다. 그것은 꿈과 닮았고, 멀리서 온 여행자가 물로 착각하는 모래 위의 태양 빛과 닮았고, 심지어 뱀으로 착각하는 던져진 밧줄과도 닮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표상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만나는 경험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표상~마야~색즉시공.
이런 현상 혹은 표상 개념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또“세계는 나의 의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단순한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의지란 말은 임마뉴엘 칸트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한계를 벗어납니다. 물자체란 쉽게 말해서 인간의 정신 개념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를 인식의 한계로 놓았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의지는 물자체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지가 현상을 가능케 합니다. 이런 문제는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도 해당됩니다. 정신 역시 의지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텍스트.: 몸의 행위는 의지의 객관화된 행위, 즉 직관에 들어온 의지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직관은 감각이나 지각을 말합니다. 이런 1차적인 인식에 대조되는 것는 쇼펜하우어가 자주 말하는 2차적인 인식인 반성 혹은 이성입니다. 그러나 의지는 또 이들과도 다른 것입니다. 의지는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신체는 의지의 객관화 혹은 대상화된. Objectification 사물입니다. 직관과 이성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의지입니다. 의지는 나의 신체를 통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단 우리는 직관과 이성을 통하여 그런 의지의 활동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텍스트.: 의지는 신체의 선천적인 인식이다. 신체는 의지의 후천적인 인식이다.
이 말은 결국 의지가 앞서가고 신체는 뒤따라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내 신체의 활동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 점은 독자들의 숙고가 필요합니다.
텍스트.: 반성으로만 보면 의지와 행동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텍스트.: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그 현상과는 완전히 다르며 모든 형식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형식은 의지가 나타날 때만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객관성과 관련이 있고 그것과는 이질적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식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위의 문단에 나타난 형식은 결국 칸트의 시간 공간과 또 오성의 범주들을 지시합니다. 문제는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형식과 다르지만 의지가 나타날 때는 형식이 그 안에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물자체는 대상화됩니다. 요는 형식이 본질에 침투하여 현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개별성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를 스콜라 철학자 수아레스.(Suarez)로부터 빌려 옵니다. 스아레즈는 또 시간과 공간을 “실체적 형상”이라고도 합니다. forma substantialis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회의주의나 비판주의를 벗어 납니다. 개별성의 원리. principium individuationis.
텍스트.: 이 후자의 측면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을 '개별성의 원리'라고 부르며, 옛 스콜라주의에서 차용한 표현을 여러분에게 항상 기억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동일한 것을 다른 것으로, 서로 옆과 뒤의 다중성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뿐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원래 하나이면 동일한 존재인 의지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만물 속에 의지가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인간이나 동물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되지만 자연이나 물질 특히 운동하는 물체의 경우 등에서는 난점을 가집니다. 이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우리가 보통 물질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의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밀어 부칩니다.
텍스트.: 스피노자는 충격에 의해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돌이 의식이 있다면 스스로의 의지로 날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는 둘 다 일원적인 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에 해당하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입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충격을 의지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연의 일반적인 속성과 힘들을 의지의 낮은 수준의 객관화라고 표현합니다. 자연의 힘이란 예를 들어 중력, 침투불가능성, 전기력, 자기력 등이 포함됩니다.
텍스트.: 의지의 가장 낮은 수준의 객관화는 가장 일반적인 자연의 힘으로 표현됩니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의지의 객관화” 혹은 대상화 개념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개념입니다. 자연의 요소와 과정을 모두 의지의 객관화 개념으로 해석하는 쇼펜하우어는 그런 과정에서 자연의 대립적인 힘들을 주목합니다. 예를 들면 플러스와 마이너스 혹은 양자와 전자 혹은 원심력과 구심력 등의 요소입니다.
텍스트. :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모든 곳에서 투쟁, 전투, 승리의 교대를 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의지에게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의지의 객관화의 각 단계는 타자 속에서 물질, 공간, 시간을 서로 다투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인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분열과 투쟁 등이 모두 의지의 객관화라는 것입니다. 즉 의지 속에 이미 자기 분열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로서 인간의 삶에 내재된 고통과 절망 그리고 분열과 투쟁 혹은 노력 등의 현상이 쇼펜하우어 철학 속에서 설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의지의 철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질병과 죽음 등 역시 설정이 됩니다. 의지가 우리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왜 때로 의욕을 상실하는가? 혹은 의지를 잃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지의 자기 분열과 자기 투쟁 개념을 통해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의지를 잃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그것을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여기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텍스트.: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의지가 모든 즉각적인 인식 가능성에서 멀리 떨어진 맹목적인 충동.(Drang), 어둡고 둔한 활동.(Treiben)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단순하고 약한 형태의 객관화입니다.
맹목적인 충동과 어둡고 둔한 활동 역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는 “의지의 대상화”“의지의 객관화”의 한 단계입니다. 본능적인 욕구도 여기 포함됩니다. 이런 현상은 흔히 범죄로 나타납니다. 살인이나 강간 등의 무시무시한 인간들이 겪는 충동과 폭력 등입니다. 여기서 윤리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즉 보통은 인간의 원죄(原罪) 죄악성 등을 의지의 철학은 낮는 의지의 단계로 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없고 의지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한 의지의 출현이 아니라 그 의지의 인식 정도가 문제가 됩니다.
요는 의지의 현상이 의지의 본질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지의 본질은 철학에서나 겨우 파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난점을 피하기 위하여 쇼펜하우어는 이념.(Idee)이란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차입(借入)합니다. 흔히 이를 이데아라고 부릅니다. 이데아 역시 의지와는 다릅니다. 이런 의지를 굳이 절대의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데아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미학이론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들. 화가들도 절대의지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데아입니다.
[2] 미학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권은 이 철학의 인식론, 존재론 등이 서술되어 있고 3.4권은 미학과 윤리학이 주된 내용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미학 혹은 예술철학을 물자체로서의 의지 개념과의 관계에서 설정을 합니다. 그는 예술을 (절대)의지의 본질 직관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술 역시 하나의 인식방법으로 봅니다. 즉 그는 예술을 창조의 측면보다는 예술가의 태도와 인식의 관점에서 봅니다. 일단 예술 특히 미술 등은 (절대)의지도 아니고 경험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이데아의 반영이다 라는 관점을 취합니다. 즉 예술에는 현실의 묘사나 반영이 아니라 경험적인 사실을 떠난 새로운 현상 혹은 직관으로 봅니다.
예술이란 작가는 자신의 인격적, 경험적인 개성을 떠나고 예술의 대상 역시 개체가 아니라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낼 때 예술성이나 아름다움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역시 물자체로서의 의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예술은 위에서 말한 플라톤의 이데아를 암시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텍스트.: 예술 대상을 관찰할 때 우리는 자신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주체로 파악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상을 개별적인 사물로 보지 않고 이데아로 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술 속에서 만족과 기쁨을 맛봅니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실은 칸트의 미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미적 체험이란 우리가 체험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목적없는 합목적성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극히 개인적인 만족 속에서도 인간은 보편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칸트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다시 이원론에 빠집니다. 즉 절대적인 실체인 의지를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미적인 체험 가운데서는 만족과 해방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비관주의로 행하게 됩니다. 즉 실체를 알면서도 실체와의 합일은 안됩니다.
물론 이데아 등을 통해서 상당히 실체.(=의지)에 접근을 하지만 이데아와 의지는 다릅니다.
여기서 한가지 해결책은 플라톤의 진 선 미 이데아들을 실체의 속성으로 두면 되는 데 쇼펜하우어는 이를 피합니다. 즉 의지와 아름다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부인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자연의 법칙 혹은 현실을 초월한 대상들 상호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를 종종 플라톤의 이데아와 연결을 시킵니다.
예술은 작가(주관)이나 대상(객관)이나 현실이 아닙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의지가 없는 순수한 주관 그리고 충족이유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충족이유율 즉 영어로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이란 보통은 어떤 사실에 대해 왜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왜냐하면”이라는 형태의 설명이 있을 것이다 라는 원리입니다. 이를 처음으로 창조한 사람은 라이프니쯔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좀 더 확장했습니다.
그가 1813년에 저술한 박사학위 논문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에서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합니다. 1. 생성.: 인과율. 2. 존재.: 시공간. 3. 인식.: 이성. (논리규칙). 4.: 행위: 동기.(의지) 등을 말합니다. 이는 결국 현실과 경험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을 말합니다.
이런 규칙들을 어길 때 어떤 사건은 허위이거나 환상으로 전락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현실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세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연속적으로 진행이 되는 세상 곧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세상, 누가 나를 때리면 내가 아픈 세상입니다. 이를 흔히 현상계. appearance 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핵심 기반이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다른 말로 생명에의 의지.(Wille zum Leben)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의지는 생명과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의 의지와 관련이 없는 것이 미(美)입니다. 예술가가 미에 집중하면 그는 동물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법칙 곧 충족이유율을 잊어버리고 대상을 직관합니다. 흔히 “멍때리다” 라는 말을 쓰는데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물아일체 라는 말을 쓰는데 바로 그런 상태가 예술적 직관의 세계입니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순수한 주관 혹은 의지력 없는 주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주관과 순수한 객관의 만남이 바로 예술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그림을 볼 때 현실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물이나 사람들이 어울어져 묘한 분위기를 이룹니다. 예술가들은 이렇게 때로 현실을 무시하고 사물들간의 조화를 찾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데아 개념입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말하면 충족이유율을 무시하는 상상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멋진 세계입니다.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예술의 세계입니다.
쇼펜하우어의 근원적인 존재인 (절대)의지는 인간의 고통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비관주의입니다.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백팔번뇌(百八煩惱)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불교와 똑 같습니다. 단 차이점은 불교는 인간들의 무지 혹은 착각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고 산다고 하고 쇼펜하우어는 그게 아니라 우주의 본래 모습이 (절대)의지라고 합니다. 그러니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는 해탈(解脫)이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철두철미한 비극의 세계, 고난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의지를 숭배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보편적인 의지를 상상하기에 그 의지는 개별적인 인간 즉 살아있는 현존들에게는 항상 고통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 혹은 이데아의 세계는 이런 현실의 필연성과 구속을 무시합니다. 한 마디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념 혹은 이데아를 표방하는 만큼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미술과는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텍스트.: 이데아와 인식의 순수한 주체는 항상 필요한 상관관계와 동시에 의식에 들어온다. 이 때 모든 시간의 차이는 즉시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둘 다 모든 형태에서 충족이유율에 완전히 이질적이고 그것에 의해 설정된 관계 밖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터넷 독일어 AI 번역판) 이하 “독일어판” 으로 압축함
이런 예술적 상황의 한 예를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예술 혹은 그림이나 조각의 모델이 되는 세계는 일상적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나라 혹은 충족이유율이 설치는 나라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사라지고 인과율 등 현실의 법칙과 다른 규칙이 예술의 창작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충족이유율 밖에서, 이를 초월하여 새로운 공간이 설정된다고 합니다.
텍스트.: 건축 작품은 빛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달빛이 비추는 날에는 전혀 다른 효과를 보여줍니다. (독일어판)
특히 쇼펜하우어는 예술로 표현된 사람의 모습을 높게 평가합니다. 회화나 조각 등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 곧 아름다운 사람, 멋있는 사람을 묘사하는 작품이 최상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텍스트.: 인간의 아름다움은 인식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의지의 가장 완벽한 객관화, 즉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전히 표현된 인간 일반의 이데아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표현입니다. (독일어판)
여기에는 비너스 상이나 그 밖의 많은 인물 묘사 그림들이 있습니다. 예술에 나타난 인간의 아름다움이 의지의 객관화라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쇼펜하우어는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라오콘 군상(群像)을 분석합니다.
텍스트.: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이 작품은 1506년에 로마에서 발굴되어 바티칸 미술관에서 대중에 공개된 이후 가장 유명한 그리스 조각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례적으로 플리니우스가 극찬한 조각상과 매우 비슷하다.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바다 뱀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인물들의 크기는 실제 인간의 크기보다 크며, 높이는 10미터가 약간 넘는다.
이 군상은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형적 상징이었으며, 예수의 수난이나 순교를 나타내는 기독교 예술에서 묘사되는 고통과는 달리, 이 군상의 고통은 어떤 속죄의 힘이나 보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고통은 일그러진 얼굴 표현으로 나타나며, 분투하는 몸체, 특히 모든 부분이 뒤틀리는 라오콘의 몸체와 조화된다. (위키백과)
이런 라오콘 조각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많은 관심을 나타냅니다. 우선 그는 라오콘이 무서운 공포와 바다 뱀의 공격을 당한 상태에서도 울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당시에도 레싱을 비롯한 독일의 미학계에서는 이 문제가 흥미를 끌었습니다. 가장 격렬한 육체적 고통과 두려움이 갑자기 시작될 때 고요한 의식은 완전히 달아 납니다. 정신이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런 경우 고함을 지르고 외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라오콘의 입을 보면 그는 도리어 어두움 속에서도 비교적 차분한 입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과 다릅니다. 즉 자연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를 그의 철학적인 관점에서 봅니다. 즉 라오콘 조각상의 입 모습은 분명 큰 소리를 지르지는 않고 있지만 입에서 니오는 공기를 통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구세주를 찾고 침략자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이고 고통적인 순간에서도 예술은 삶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레씽 같은 사람들은 소리지르지 않는 것이 예술적이다 즉 다른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고 형식의 미를 추구한다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텍스트: 유명한 군상(群像)에서 라오콘이 소리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에 대한 일반적이고 반복되는 놀라움은 그의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울부 짖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가장 격렬한 육체적 고통과 가장 큰 육체적 두려움이 갑자기 시작될 때 조용한 묵인을 가져올 수있는 모든 성찰이 의식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자연은 비명을 통하여 공기를 만듭니다. 자연은 그 공기를 통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모두 표현하고 구세주를 소환하고 침략자를 위협합니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독일어 AI 번역판)
조각 예술 혹은 형성적 예술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쇼펜하우어는 시에 대해서도 많이 분석을 합니다. 그는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 순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미학을 수립해 갑니다.
텍스트.: “나는 내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일부가 된다 : 그리고 나에게
높은 산은 느낌이지만 인간 도시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고문이다.”- 조지 고든 바이런, 차일드 해롤드 순례기 (독일어판)
여기서도 자연과 정신의 교감이 일어 납니다. 자연은 그의 물자체인 의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사상을 담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문학은 문자를 쓰는 만큼 그 속에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인 내용이 포함됩니다. 즉 문학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 등을 때로 나타냅니다. 위의 바이런의 서사시 차일드 해럴드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 A Romaunt는 Lord Byron이 쓴 4부작의 긴서사시 입니다 . 이 시는 1812년과 1818년 사이에 출판되었습니다. "Ianthe"에게 바친 이 시는 쾌락과 환희에 찬 삶에 환멸을 느끼고 외국에서 오락을 찾는 젊은이의 여행과 성찰을 묘사합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혁명 이후 와 나폴레옹 시대 의 전쟁에 지친 세대가 느낀 우울과 환멸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제목은 기사 작위 후보였던 젊은이를 지칭하는 중세 칭호인 childe에서 유래했습니다.
위의 텍스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텍스트.: 삶의 과정에서이 두 가지 주제, 즉 일반적으로 머리와 마음은 점점 더 서로 분리되어 주관적인 인식과 객관적인 인식을 점점 더 분리합니다. 아이에게는 둘 다 여전히 완전히 융합되어 있습니다. 주변 환경과 자신을 구별하는 방법을 거의 알지 못하고 주변 환경과 흐릿합니다. 청소년의 모든 지각은 무엇보다도 바이런이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감각과 기분이며 심지어 그들과 섞여 있습니다. (독일어판)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아이와 청소년의 인식 기능을 구분합니다. 즉 아이에게는 주관과 객관이 융합되어 있고 청소년의 경우는 이보다는 구분이 더 되지만 지각과 감각 혹은 기분 등이 주변 환경과 섞여 있습니다. 즉 대상을 아주 주관적, 기분적으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부분이 바이런의 표현 나는 내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일부가 된다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이 사물의 생생한 외관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이며, 이것이 바로 그가 서정시에만 적합하고 극적인 시에는 성인(成人)만이 적합한 이유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예술의 형태를 관찰하고 해석한 쇼펜하우어는 드디어 그가 가장 중시 여기는 음악의 세계로 들어 갑니다. 그에 따르면 다른 예술들은 이데아 혹은 이념의 복사판인데 비하여 음악은 의지의 반영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그의 의지 개념은 세계 그 자체, 신 그 자체 라고 강조했었습니다. 물론 그의 의지는 생(生)에의 의지.(der Wille zum Leben) 개념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생명의 의지 혹은 생활의 의지와 직결이 되긴 됩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단순히 개인적인 혹은 인격적인 의지와는 다릅니다.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음악의 위치를 높이는 것은 아무래도 음악의 시간성 때문입니다. 음악이 시간의 예술이고 항상 박자와 속도 등이 필요하고 강.약(强弱) 등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즉 음악이 삶의 흐름과 비슷하고 거기다가 템포 강도 등의 요소가 삶의 의지를 많이 반영합니다.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텍스트.: 그러므로 음악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결코 이념.(이데아)의 이미지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이미지이며, 그 객관성 또한 이념.(이데아)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음악의 효과는 다른 예술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관통력이 있다: 이들은 그림자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음악은 본질을 말하기 때문이다. (독일어판)
음악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본질을 말합니다. 그것은 의지를 표현합니다. 마치 심장의 박동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박자입니다. 리듬입니다. 우리의 삶이 단순한 생각이나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박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음악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호의 체계를 가지기 때문에 좋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다시 봅니다.
텍스트.: 나는 화성의 최저음, 다시 말해 기초 저음에서 의지의 객관화에 있어 최저단계를 인식한다. 즉 무기적인 자연, 유성의 집단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높은 음은 움직이기 쉽고 음향보다 빠르고 낮은음의 버금울림으로 생긴 것으로 간주해야 하며, 고음은 이 낮은 음이 울리기 시작하면 언제나 희미하게 공명한다. 그리고 저음부와 조화할 수 있는 고음은 사실 버금 울림으로 그 저음부와 동시에 울리는 음 (즉 그 조화음)뿐이라는 것이 화음의 법칙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권기철 역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p.314. 이하 “의지”로 압축)
쇼펜하우어는 화음 속의 각 음들에 관하여 아주 철학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기초 저음은 의지의 대상화의 최저단계라는 것입니다. 즉 예를 들면 도,미,솔로 이루어지는 화음, 으뜸화음에서
기초저음은 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의 대상화의 최저단계입니다. 이를 다시 그는 “무기적 자연” 혹은 “행성 덩어리” (.유성(流星)의 집단) 라고 합니다. 무기적 자연과 유성의 집단 즉 태양계 등은 우주의 구성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화음의 기초음이 바로 무기적 자연에 해당합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그 중심에 있고 나머지 행성들은 모두 태양의 주위를 돕니다. 이 태양이 화성의 경우에 있어서 가장 저음인 기본음에 해당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태양계의 시스템을 화성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는 으뜸화음과 버금화음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 다음 높은 음인 미와 솔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해석은 위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높은 음은 움직이기 쉽고 음향보다 빠르고 낮은음의 버금울림으로 생긴 것으로 간주해야 하며, 고음은 이 낮은 음이 울리기 시작하면 언제나 희미하게 공명한다.
다음에는 선율.(멜로디)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을 보겠습니다.
텍스트.: 마지막으로 “선율.(Melodie)은 노래하고 전체를 인도하며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지로 “하나의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있는 연관을 유지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전체를 나타내는 주성음(主聲音)이다. 나는 이 성음에서 인간의 사려깊은 생활과 노력인 의지의 객관화에 있어 최고의 단계를 인식한다. (···) 그러므로 음악은 언제나 감정과 격정의 언어이며, 언어는 이성의 언어라고들 말했다. 이미 플라톤은 음악을 “영혼이 격정에 사로 잡히는 경우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낸 선율의 운동”이라 설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리듬과 선율은 소리에 불과한데 왜 마음의 상태와 비슷한가?”라고 말하고 있다. (의지 p 316)
음악과 화음 등에서 이렇게 깊은 철학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음악은 최고의 예술이며 그 안에서 다른 예술들은 자리를 잃어 버린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있어서 화성과 리듬보다 멜로디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 모두 자신의 철학적 경향에서 유래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선율.(Melodie)은 노래하고 전체를 인도하며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지로 “하나의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있는 연관을 유지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전체를 나타내는 주성음(主聲音)이다. 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선율을 자유의지로 보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란 여기서 (절대)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개인적 영혼의 관조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본능이나 개인이나 인격의 특성 혹은 욕구로부터 해방되어 우주의 결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영혼의 승화로 날개를 치게 되는 것이 바로 멜로디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예술 중에서도 음악을 최고의 덕성으로 봅니다.
텍스트.: 내가 말했듯이 음악 속에서 모든 다른 예술은 사라진다. 그런 음악은 현상의 반영, 더 정확하게는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를 직접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예술과 다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에 대한 물자체를 나타낸다. 예술을 통해서 인간들은 단기적인 열반(涅槃)의 상태를 맛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 즉 인과율과 현실을 무시한 주객합일, 물아일체의 상태, 미적인 관조의 상태는 곧 깨어집니다. 그러나 예술의 관조에서 사람들은 의지력의 지배를 벗어나고 자아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에의 의지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독일어 AI 번역판)
음악은 의지의 객관화, 대상화가 아닙니다. 이는 의지의 개별화의 원리로서의 개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를 직접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예술과 다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에 대한 물자체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의지의 개별화가 아니라 의지 자체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음악은 예술의 형이상학이며 현상이 아니라 물자체입니다. “예술의 관조에서 사람들은 의지력의 지배를 벗어나고 자아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에의 의지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입니다”라고 합니다.
(3) 윤리학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순수하게 그 자체로 간주되는 의지는 인식할 수 없으며 맹목적이고 멈출 수없는 충동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모든 우주와 인간의 삶의 본질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합리한 의지와 충동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옳은 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이런 원리에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문제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답변은 유적(類的) 개념입니다. 즉 개체는 사망하지만 인간 집단은 살아남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절대)의지는 죽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별)인간들이 자살을 해도 실은 죽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도의 고유 사상인 윤회(輪回)를 한번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사람이 죽든 말든 (절대)의지는 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추진한다는 그런 사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살이 나쁘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이 문제는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의지의 철학하에서 나타나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의 넘어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맹목적인 충동이 인간의 삶의 본질인데 이런 상황하에서 전통적인 도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즉 쇼펜하우어는 의지철학의 관점에서 이타주의, 이기주의, 사랑, 미덕, 자유, 용기, 인내, 악, 살인 등의 의미를 다시 한번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나타나는 하나의 다른 문제는 이런 도덕적 덕목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답을 먼저 소개하면 이런 여러 가지 덕목들 혹은 행위의 각종 원리들은 의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혹은 이성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의지가 인생을 지배하는 데 인간들을 동물과 달리 거기에 단순히 순응하지 않고 이를 피하거나 혹은 더 개선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고 다른 인간들 혹은 민족들을 노예화시킵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인간의 정신적인 면들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도덕성 역시 실재.(=의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일반적인 윤리학의 가르침 즉 선(善)과 악(惡)을 분명히 구별하고 선은 권장하고 악한 일은 하지마라는 요구가 약합니다. 단 한가지 쇼펜하우어가 선으로 유일하게 권장하는 덕목은 동정심. (compassion)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이론을 따라가면 인간의 인식 능력은 물자체인 의지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지 자체는 맹목적인 충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에의 의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우주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그 힘과 영향력은 인간의 능력인 감각, 지각 혹은 이성보다 훨씬 장엄합니다. 인식은 존재를 방해하거나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텍스트.: 의지는 스스로를 긍정한다, 즉 그 객관성, 즉 세계와 삶에서 그 자신의 본질이 개념으로서 완전하고 분명하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 인식은 결코 의지를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히 이렇게 인식된 삶은 그때까지는 인식 없이 맹목적인 충동은 이제는 인식과 함께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의지가 된다. (독일어판)
우리가 의지를 인식한다고 그것이 의지의 작용을 방해하거나 억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의지의 인식이 의지의 작용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이 운명.(의지)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A) 자유의 문제
(절대)의지의 철학에서 자유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 어떤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의 기초도 바로 자유 혹은 자유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경우 그는 이런 자유 혹은 의지의 자유 개념을 부정합니다. (절대)의지가 운명을 결정하는 이상 인간의 자유는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우리의 경험과 상당히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유를 기초로 판단이 되고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유를 일단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즉 a. 선천적 자유 b. 후천적 자유 혹은 경험적인 자유입니다. 그는 a는 부정하고 b는 긍정합니다. 선천적 자유는 (절대)의지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론은 아니고 (절대) 의지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이에 비해서 후천적인 자유란 자유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사태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텍스트.: 자유가 없다 착각이다 경험적인 자유는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A도 할 수있고 B도 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식당에서 요리를 주문하는 경우 등입니다. 선천적인 자유란 가령 그 식당에서 내가 B는 포기하고 A를 선택한 경우 과연 나는 진짜 완전히 자유롭게 A를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심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A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주장을 흔히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대부분 결정론을 믿습니다. 겉보기에는 자유지만 잘 알고 보면 벌써 결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은 모두 인과율, 충족이유율 등에 의해 연속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예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그러나 이것은 마치 균형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 수직 기둥의 경우 “오른쪽으로 기울거나 왼쪽으로 기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서 '기울 수 있다'는 주관적인 의미일 뿐 실제로는 '우리에게 알려진 데이터에 비추어 볼 때'라는 뜻이다: 객관적으로는 흔들림이 발생하자마자 넘어지는 방향이 이미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판)
이런 것이 우리가 아는 자유이고 실은 경험적 자유입니다.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이 흔들릴 때 그것은 좌로나 우로나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그 기둥은 그런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둥에게 주어진 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둥은, 예를 들어,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필연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 Seneca의 명언 즉“벨레 논 디스시투어. (Velle non discitur)입니다. 이 말의 뜻은“의지는 배울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쇼펜하우어는 여러번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의지는 배울 수 없다 혹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말은 여기서 의지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절대적 의지 혹은 보편적 의지라는 것입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지식이고 교훈입니다. 그러나 의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같은 객관적인 존재입니다. 의지를 배운다고 한다면 그런 의지는 실은 성격이나 동기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약자를 명백히 구별합니다.
텍스트.: 인간이 실제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 그의 가장 내면적인 존재의 노력과 그에 따라 추구하는 목표는 외부의 영향이나 지시에 의해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말합니다. : 의지는 배울 수 없다. (독일어판)
위의 맥락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혹은 변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성격이나 동기 혹은 인식입니다. 위 글에서 말하는 “내면적인 존재의 노력과 그에 따라 추구하는 목표”는 다름아닌 (절대)의지입니다. 인간이 내면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미덕 혹은 가치관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충동 그리고 의욕 등은 보편적인 힘 곧 (절대)의지입니다. 삶에의 의지라는 말도 씁니다.
텍스트.: 그러나 그의 노력 자체는 이 때문에 변하지 않았고, 그 자신은 더더욱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때 그때 매우 달랐지만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의지는 배울 수 없다. (독일어판)
여기서 “의지는 배울수 없다” 는 말의 의미를 한번 보겠습니다. 배울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의지는 본능과 같습니다. 본능을 배울 필요는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의지도 그렇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행동은 그때 그때 다르지만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B) 고통의 문제
의지와 자유의 관계를 다룬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문제에도 접근을 합니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정신적 고통이 더 크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문제로 공부도 하고 책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둘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정신적인 기능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실연(失戀)을 당한다든지 자식이 일찍 죽은 경우는 그 정신적인 고통이 하도 커서 자기 신체를 자학(自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절망을 하는 경우 무서운 육체적인 손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강렬한 정신적 고통의 경우 단지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유발합니다”라고 합니다. 즉 추상적인 생각 혹은 관념적인 고통 때문에 현실의 고통, 신체적인 고통을 가볍게 보게되고 때로는 신체적인 고통을 일부러 만듭니다.
또는 나라를 잃은 경우 백성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도 결국은 (절대)의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삶도 죽음도 모두 (절대)의지 때문입니다.
텍스트.: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통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실제 현재에 있지 않고 단지 추상적인 생각에 있습니다. 종종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동물성의 모든 고통이 매우 작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육체적 고통이 종종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는 강렬한 정신적 고통의 경우 단지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유발합니다: 따라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 속에서 우리는 머리카락을 찢고, 가슴을 때리고, 얼굴을 찢고, 바닥에서 구르고; 이 모든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생각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폭력적인 수단일뿐입니다. 정신적 고통은 훨씬 더 큰 고통으로서 육체적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이나 병적 불만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이전에는 안락한 상태에서 자살에 대한 생각에 반발했더라도 자살이 매우 쉬워집니다. 마찬가지로 걱정과 열정, 즉 생각의 유희는 신체적 질병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몸을 지치게합니다. (독일어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55장)
여기서 동물과는 다른 인간 존재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 예를 들어 취직 시험에 떨어졌다 는 경우 그 심적인 고통은 큽니다.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텍스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의 먹잇감이 되었고, 죽음은 잠시 먹잇감을 가지고 놀다가 삼켜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독일어판, 57장)
삶이 아니라 죽음이 최후의 승리자라는 극도의 비관주의 철학입니다. 그러면서도 쇼펜하우어는 “자살은 나쁘다”는 경고를 자주 날립니다.
(C) 의지와 노력의 문제
자유와 고통의 문제를 다룬 쇼펜하우어는 의욕과 노력의 의미를 추적합니다. 의욕과 의지는 비슷합니다. 의욕은 wollen이고 의지는 Wille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주제는 의지입니다. 이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의욕은 심리학적인 의지로 보입니다. 즉 의욕은 보통 우리가 쓰는 의지와 같습니다. 이는 인간에 한정되는 개념입니다.
텍스트.: 의욕과 노력은 인간의 모든 존재이며, 이는 전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갈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욕의 기초는 궁핍과 결핍, 즉 고통이며, 따라서 그는 이미 본래부터 그리고 본질적으로 고통의 대상입니다. 반면에 의지 대상이 부족하여서 너무 쉽게 만족하면 의욕은 즉시 다시 자신을 상실하게 되고, 끔찍한 공허와 권태에 사로잡혀 자신의 존재와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짐이 된다. 따라서 그의 삶은 고통과 지루함 사이에서 진자처럼 앞뒤로 흔들리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그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지옥으로 옮긴 후 천국에는 지루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매우 이상하게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독일어판, 57장)
위의 인용문을 보면 의욕과 노력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정적입니다. 비관주의자, 염세주의자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욕의 기초를 결핍에서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의욕의 대상이 크면 의욕을 만족시키기가 어렵고 또 그 반대로 의욕의 대상이 작으면 의욕 자체가 사라집니다. 의욕의 완성은 만족인데 문제는 만족이 어려우면 고통이 오고 만족이 너무 쉽게 되면 지루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상당히 그럴싸한 논리입니다. 다시 말해 의욕 혹은 의지는 고통 아니면 지루함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연속적인 도전과 성취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A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다시 B라는 목표를 세우고 또 성취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낙관주의인데 이런 경우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고통과 지루함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행이 사람들의 끊임없는 재앙이듯이 지루함은 고귀한 세계의 재앙입니다. 시민 생활에서 권태는 일요일로 대표되며, 불행은 일주일의 6일로 대표됩니다” 라고 합니다.
(D) 성욕의 문제
위의 여러 가지 삶의 문제, 의지의 문제를 다룬 쇼펜하우어는 이제는 성욕의 문제를 다룹니다. 성적 욕구의 만족을 쇼펜하우어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성욕은 인식이 아닌 순수한 신체의 표현이며 그런만큼 이는 (절대)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봅니다. 성욕은 심지어는 이 세계를 넘어서 영원한 미래까지 보장하는 (절대)의지의 작용입니다.
텍스트.: 생식기는 다른 어떤 외부 신체 부위보다 의지에만 종속되고 인지에 전혀 종속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의지는 인식이 없는 자연에서와 같이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단순한 자극을 계기로 식물성 생명, 번식을 제공하는 부분에서처럼 인식과 거의 독립적으로 여기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잠재력에서 죽음이 배설일 뿐인 것처럼, 번식은 새로운 개체에게 전달되는 재생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어판, 60장)
위의 글을 보면 생식기는 신체의 여러 기관 중에서도 인지 곧 지식에 전혀 종속이 되지 않고 (절대)의지에만 매달려있는 기관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른 기관들 특히 감각기관들은 단순히 지각하는 것을 초월하여 상상과 생각 혹은 고정관념 등의 지배를 맏을 수 있습니다. 시각의 경우 “아는 만큼 보인다” 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이 대상에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아는 것 즉 지식의 지배를 맏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우리는 지식과 이성이 (절대)의지와 별도의 기능으로 작동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지적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성기의 작용을 쇼펜하우어는 단순한 본능의 차원을 넘어서 “번식은 새로운 개체에게 전달되는 재생산일 뿐이다”라고 설파합니다. 이는 흔히 우리가 듣는 이야기 즉 생물은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이라는 두 개의 본능이 있다를 연상시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을 관통하는 거대한 우주적인 의지입니다.
텍스트: 내면의 본질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인 자연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모든 힘을 다해 번식에 몰두하게 합니다. 그 후 자연은 개인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고난 다음에는 개인의 몰락에 무관심합니다. 자연은 삶의 의지로서 종의 보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연의 내적 본질인 생명 의지는 성적 본능에서 가장 강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고대 시인과 철학자인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에로스가 만물이 생겨나는 최초의 창조적인 원리라고 매우 의미심장하게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4권 참조) (독일어판, 60장)
자연은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라고 합니다. 한국어 자연(自然)의 의미도 그와 유사합니다. 즉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자연이 동물과 인간들을 스스로 번식에 몰두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종족보존에는 무관심하게 성적 행위를 추구합니다. 모두 욕정과 본능에 끌려 이성에게 접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이의 출산과 함께 종족보존 혹은 가족보존의 의미를 체감하게 됩니다. 자연의 내적 본질인 생명 의지는 성적 본능에서 가장 강하게 표현된다고 합니다. 성적 본능은 (절대)의지의 가장 확실한 표현입니다. 자연은 동물이나 인간들의 종족보존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몰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서 몰락은 자연사(自然死)일수도 있고 아니면 동물이나 몇몇 곤충들의 경우 교미를 하면서도 암컷에게 먹히는 경우도 있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혹은 산란후 죽는 물고기떼를 상기시킵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런 동물들의 교미와 번식 그리고 죽음 등의 사실에서 보편적인 의지의 발현을 본다고 합니다. 성적인 본능은 생명의지를 나타냅니다. 현대는 이런 자연의 섭리를 모르고 생명과 출산 없는 성행위를 많이 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순적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성적 본능의 만족은 그 짧은 시간을 채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넘어 개인의 죽음을 넘어 무한한 시간으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라고
성본능을 칭송합니다. 성적 본능의 만족 속에서 개인은 관능적인 즐거움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죽음을 넘어 무한한 시간으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라고 최고의 찬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E)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이기주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을 차용하여 펼쳐 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세네카의 명언 의지는 가르쳐질 수 없다를 통하여 보편적 의지 개념을 확립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기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는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상을 가져옵니다. 홉스는 사회계약설을 창안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 사회의 최초의 형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합니다. 이를 자연상태라고 합니다. 이런 흉악한 자연상태를 억제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인간들은 자신들의 타고난 자유를 국가에 양도하여 법과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 홉스의 사회계약론입니다.
그런에 쇼펜하우어는 보편적 의지와 그 반영인 개체들의 의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홉스의 만인투쟁론을 열거합니다. 그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개념을 인간의 선천적인 이기심으로 변형을 시킵니다. 이는 상당히 훌륭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투쟁은 욕심이나 이기심에서 생긴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의지의 형이상학과 연관을 시키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합니다.
우선 거대한 우주의 의지와 왜소한 인간의 의지가 대립이 됩니다. 인간의 의지를 의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리 말하지만 인간은 의지 외에 이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의지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상상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앞의 두 가지 의지를 쇼펜하우어는 대우주 즉 마크로코슴. Macrocosm라고 하고 인간의 의지를 소우주 즉 미크로코슴 Microcosm 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경우 미크로코슴들 간에는 투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특히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됩니다. 어쨌든 소우주가 자신을 대우주로 착각을 하게 되는 현상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텍스트.: 이제 한계없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무로 환원되는 모든 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고, 실제로 자연의 관점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자신의 존재와 안녕을 고려하고,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자아, 이 바다의 방울만을 조금 더 보존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의 모든 것에 필수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독일어판, 61장)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세계에서 자기중심주의 혹은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바다의 물방울만한 자아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상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에고이즘은 소우주와 대우주의 대립, 즉 의지의 객관화가 개체화의 원리라는 사실에 그 존재와 본질이 있다 라고 합니다.
여기 또 개체화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이 나옵니다. 앞에서도 한번 다룬 개체화의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의지)가 외적인 형상을 띠게 될 때 소우주와 대우주는 대립합니다. 이런 부분은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사상입니다. 이기주의 혹은 개인주의가 이렇게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립 혹은 의지의 객관화에서 발생합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물자체와 현상은 대립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칸트의 물자체에 해당한다고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소우주가 대우주(大宇宙)를 모방할 때 소우주(小宇宙)들 간에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쉽게는 이해가 안되지만 하나를 말하자면 우주의 핵심이 의지라는 점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우주가 신이나 정신이라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소우주들간의 갈등 특히 인간의 경우는 각자 이성, 정신 혹은 상상력 등이 있기 때문에 개체들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이런 면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도 연결이 됩니다.
텍스트.: 홉스가 그의 책 “시민에 관하여.”De Cive의 첫 번째 장에서 훌륭하게 묘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가 한 번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종종 한 사람이 사소한 이득으로 자신의 복지를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삶 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독일어판, 61장)
이런 면에서 볼 때 쇼펜하우어의 인간관, 사회관은 극히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나 사회의 사악(邪惡)한, 범죄적인 측면을 단순한 사실로 보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형이상학적인 본질가까이로 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소한 이득으로 자신의 복지를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삶 전체를 파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이렇게 인간과 그 사회의 범죄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이런 인물들이 벌써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의 재정에 손해를 입히고 또 법을 어기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텍스트.: 위에서 모든 생명에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밝혀진 고통의 주된 원천은,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고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는 즉시, 모든 개체의 투쟁인 에리스, 즉 삶에 대한 의지가 내적으로 괴로워하는 모순의 표현이며, 그것은 개별성의 원리. (principium individuationis)를 통해 가시화된다: 동물의 싸움은 그것을 직접적이고 눈부시게 설명하는 잔인한 수단이다. (61장)
위의 문단에 나타난 에리스.(Eris)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불화(不和)의 여신입니다. 삶의 의지가 내적인 고통이며 때로 잔인한 수단을 나타냅니다. 삶이란 물론 평화와 조화 그리고 사랑을 기초로 하지만 불화와 투쟁 등의 면도 반드시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입니다. 의욕이나 의지는 반드시 대립과 분열을 수반합니다.
인간사에서 사람들 간에 흔히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 불화를 몰고 다니는 한편, 더 나은 결과와 최고의 자리를 갈망하는 본능을 가진 인간들이 경쟁이나 대회에서 우열을 겨루고 서로 이기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도록 경쟁심과 호승(好勝)심,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맡았다. 공의로운 경쟁과 명예를 중시하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겐 필수불가결한 여신이었다. (나무 위키.: 에리스)
(F) 동정심
쇼펜하우어의 도덕 철학은 위에서 본 것처럼 도덕적 가치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보편적 의지의 개별화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계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正義), 자유, 선(善) 등의 도덕적 가치를 그 자체로서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느냐는 기준에서 그 타당성을 찾습니다. 이런 종류의 윤리학을 전문적으로는 자연주의 윤리학이라고 합니다. 즉 옳다는 것이 자연의 어떤 속성을 반영한다는 윤리이론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쾌락주의 도덕철학이 있습니다. 즉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옳다 혹은 좋다는 생각입니다.
일종의 자연주의 윤리학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제대로 칭찬을 받는 덕목이 바로 동정심 혹은 연민. (Mitleid) 입니다.
텍스트.: 그런데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설명의 마지막으로, 어떻게 사랑이 (우리는 개별화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 이 사랑의 근원과 본질이라고 인정하지만) 사람을 해탈에까지, 즉 삶에 대한 의지, 다시 말해 모든 의욕을 완전한 포기에까지 이끌고 나아가는지를 보이고, 어떻게 해서 또 다른 하나의 길이, 그렇게 온당하지는 않지만 이것보다 더 자주 사람을 똑같이 해탈에까지 이끌고 가는지는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여기에 역설적인 명제를 언급하여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명제가 역설이 아닌 진실한 것이며, 내가 설명하려는 사상의 완벽을 기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랑은 동정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p. 439 이하
윗글의 괄호친 부분의 뜻은 이렇습니다. 즉 사랑의 본질 역시 개별화의 원리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성적인 사랑 곧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 곧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혹은 자선입니다.
그래서 독일어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Alle Liebe. (agape, caritas) ist Mitleid. “모든 사랑(아가페, 카리타스)은 연민이다.
사랑 역시 개별화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것으로 규정한 쇼펜하우어는 그러나 사랑 속에서 (절대)의지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역설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어 번역에서 해탈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단순히 포기를 말합니다. 생에의 의지를 의욕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속에서 의욕을 포기합니다.
이 것외의 다른 도덕적인 개념들 예를 들어 인(仁)과 의(義) 혹은 선(善) 등은 모두 (절대)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윤리적인 개념들은 사람의 원천적인 본능과 욕심 그리고 의욕을 포장하는 허위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맞지 않지만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이와 다릅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기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은 빠집니다. 위에서 말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아가페적 사랑) 그리고 자비(慈悲) 등은 순순한 사랑이라고도 하는 데 이런 사랑은 이기적, 본능적 욕구를 초월합니다. 마치 이들은 예술과 같은 기능을 가집니다. 이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우주적인 원리 즉 (절대)의지를 한 순간 끊고 이타적인 자아가 됩니다. 동정 혹은 연민 만이 순수한 사랑으로 여겨집니다. 다음의 문단에서 쇼펜하우어의 진심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텍스트.: 이제부터 다음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앞에서 삶 전체에 있어 고통은 본질적인 것이며, 삶과 고통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또 모든 소망은 어떤 욕망, 결핍, 고통에서 생기는 것이고, 만족이라는 것은 고통이 제거된 상태에 불과하며, 적극적인 행복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 기쁨은 그 자체가 적극적인 재물인 것처럼 소망을 기만하지만, 실제로는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하나의 재앙이 없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선의, 사랑, 의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든 간에,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준다. 이것들을 움직여 착한 일과 자선사업을 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남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자기고통으로 이해되고 자기 고통과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랑은 그 본성에 따르면 동정이 있는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p. 441)
위의 문단의 초두에서 보는 것처럼 쇼펜하우어의 인생관은 비극적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가 이렇게 철저히 비관적으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는 말하기를 “삶 전체에 있어 고통은 본질적인 것이며, 삶과 고통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라고 고백합니다. 필자의 경우 이런 사상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즉 저는 어린 시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여 애들을 키우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항상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행복이란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정이 화목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비로소 행복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즉 행복이란 말은 교과서에나 나오지 실제로는 없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필자가 철학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즉 세상에 왜 행복과 그 반대인 불행이란 대립이 있을까? 였습니다.
하여간 이런 비관적인 세계관을 대변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시대 상황에 따라서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또 요새 한국에서 그의 사상과 철학이 큰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의 현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쁨 역시 쇼펜하우어는 소극적으로 봅니다. 가령 아기를 낳아 환희로 가득찬 부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보통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서 기쁜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를 다르게 설명을 합니다. 즉 애기를 낳는 것은 (절대)의지의 작용이다. 인간은 원래 종족보존을 그 본능으로 한다. 따라서 후손이 없다면 그는 이런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 못 시켰기 때문에 우울할 것이다. 즉 자식 없는 사람은 항상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우연히 결혼도 하고 출산까지 하게 되면 그는 기쁨으로 미쳐 날 뛸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를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결핍의 소멸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어떤 하나의 재앙이 없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합니다.
그러나 동정 혹은 연민은 이와 다릅니다. 이는 인간의 감정 혹은 상상력의 기능을 말합니다. 그것도 순수한 기능 즉 (절대)의지의 작용을 초월하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동정심을 도덕의 기초로 보는 윤리학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민경제학의 창시자 아담 스미스가 그런 경우입니다. 반면,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 임마뉴엘 칸트는 여기에 반대합니다. 하여간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동정심은 남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자기 고통으로 이해되고 자기 고통과 동일하게 보는 작용입니다. 이는 의지나 의욕을 벗어난 객관적인 인식 혹은 중립적인 인식입니다. 순수하다는 말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기쁨이나 슬픔 등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모두 나의 입장에서 본다고 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의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서울대에 붙어서 엄마가 말할 수 없이 기쁘다는 경우를 봅시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 이는 아들이 잘되어 기쁜 것이 아니라 나의 소원이 이루어져 기쁘다는 논리입니다.
남의 고통을 고통으로 보는 것이 동정심이고 연민입니다. 고통이란 (절대)의지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이 항상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런 고통을 고통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의지의 작용을 받지 않고 의지를 의지 자체로 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정의 순간 인간은 우주의 본질을 본다는 말입니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직관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텍스트.: 사랑으로 줄어드는 고통이 크든 작든 간에, 채워지지 않는 소망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다. 따라서 우리는 칸트와 정반대이다. 칸트는 진실한 선과 덕을 추상적인 반성에서, 또 의무의 개념이나 정언명령의 개념에서 나온 것인 경우에만 참된 선이나 덕으로 인정하려 했으며, 감정으로서의 동정은 약점이지 덕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순한 개념은 순수한 덕에서는 순수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고,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정이며, 동정이 아닌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할 것이다. 이기심은 에로스(eros, 애욕)이고, 동정은 아가페(agape, 순수애)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p. 441)
위의 문단에서 “효력이 없다”는 말은 의지가 작용을 못한다 즉 (절대)의지가 나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기심을 벗어난다와 같습니다. 욕망이나 의욕에서 벗어나 대상의 상태를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타인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순수한 사랑으로서의 동정심입니다. 연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임마뉴엘 칸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칸트는 동정심을 윤리와 분리시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에 대한 동정심이 때로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습니다. 동정과 연민 등은 이런 약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동정의 경험적인 약점보다는 그 순수함에 주목을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동정의 감정을 쇼펜하우어는 심지어 순수예술과 견주고 있습니다. 또 그는 동정을 순수한 덕(德)이라고도 합니다.
눈물의 중요성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을 논구해 나갈 때 울음 현상도 다루게 됩니다. 즉 울음을 동정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그는 우는 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는 것이 반드시 자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 때문에 울 수도 있지만 이는 바로 동정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때문에 울든 타인 때문에 울든 모두 동정으로 판별됩니다. 본문을 한 번 보겠습니다.
텍스트.: 냉혹한 인간이나 상상력이 없는 인간은 쉽게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한편으로 착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겨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울 수 있는 사람같으면 반드시 사랑, 곧 다른 사람에 대해 동정도 할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정은 방금 말한 방법으로 울음을 일으키는 기분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가 그의 감정을 소박하고 진실하게 표현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에 설명한 그대로이다.
사색에 잠기면서 산책을 하면,
갑자기 ‘나 자신을 동정하고 싶은 심정’이 강하게 일어나,
가끔 소리 높여 울게 된다. 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거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p. 442)
르네쌍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나타난 자기 연민의 감정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시 동정 그리고 눈물의 주제를 찾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기 연민과 눈물 사건에서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동정 혹은 연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관조를 말합니다. 의지와 의욕입니다. 그것도 불합리하고 충동적인 의욕을 직관합니다. 인생의 모순을 본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럴싸한 이유 혹은 대의 등으로 포장되어 있는 나의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됩니다. 눈물과 연민을 최상의 덕목으로 놓고 있습니다. 이런 철학은 본 적이 없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최정상은 바로 눈물입니다!
(G) 금욕주의
쇼펜하우어는 기존의 종교를 금욕주의로 규정합니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이 모두 금욕주의라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달리 말해서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입니다. 이 점에서 종교는 동정심과 다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정심은 순수한 인식이며 자기나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금욕주의는 이기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란 (절대)의지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의 평균적인 태도입니다. 자기 중심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실은 고통과 번뇌에 차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이런 이기적이고 고통에 찬 삶의 모습에 반성을 하고 그런 고생을 벗어나려는 태도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개별화의 원리에 사로잡힌 세속의 삶을 부정하고 승화를 노리는 태도입니다. 여기에 대한 본문을 보겠습니다.
텍스트.: 그런데 개별화의 원리에 대한 간파, 즉 의지가 그 모든 현상에서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명확하게 되면, 이 인식은 곧 그 이상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눈앞에 걸려 있던 마야의 베일, 개별화의 원리가 없어져서, 그 사람이 이미 자기와 남을 이기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도 자기 고통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관심을 가지며, 그리하여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남들의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할 것이다. 그 결과 이러한 사람은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자신의 가장 깊고 참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의 무한한 고통으로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전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p.444)
힌두 철학에서 “마야”(Maja)는 "현상 세계 즉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또 그 안에 살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데 문제는 이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현실을 힌두철학에서는 마야라고 불려집니다. 이처럼 실재로 믿어지는 현상계를 힌두 철학에서는 마야라고 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합니다. 이는 또 "마술 쇼,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인도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나타난 “마야의 베일”은 이런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마야의 베일을 다시 풀이하여 이를 개별화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입니다. 그는 자기 철학의 원리를 외국 종교의 개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마야의 원리는 개별화의 원리입니다.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의 승려들은 이런 현상계의 모순을 깨닫고 그 탈출 즉 해탈을 추구합니다. 이들을 흔히 깨달은 자라고도 합니다. 도를 깨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달한 상태를 해탈 혹은 니르바나 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상태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위에서 인도계 사상을 바라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들의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할 것이다. 라는 구절은 가령 불교의 경우 소위 대자대비(大慈大悲) 즉 중생들의 고통과 비극을 계몽시켜 그들을 성불의 경지로 올리려는 승려들의 태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텍스트.: 이와 반대로 전체에 대한 인식, 곧 물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의욕의 진정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의지는 삶을 떠난다. 이제 의지는 자기 긍정이라고 여기는 삶의 쾌락들이 무서워진다. 그래서 사람은 자발적인 단념, 체념, 참된 평정과 완전한 무의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밖에 우리처럼 마야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도, 때때로 자기의 고통을 강하게 느끼거나 남의 고통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삶의 공허함과 쓰라림에 접근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히 결정된 체념을 통하여 욕망의 가시들을 꺽고, 모든 고통의 통로를 차단하고, 자기를 정화하고 성스럽게 되어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 다시 현상의 망상에 현혹되어, 의지는 새롭게 현상의 동기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해탈할 수 없다. 희망의 유혹, 현재의 알랑거림, 쾌락의 달콤함 등 고통스런 세계의 비애 속에서 우연과 오류의 지배를 받으며 우리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 행복들은, 우리를 이 세계로 다시 끌어내려 새로 굳게 결박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닻줄이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말했던 것이다. (p.444 이하)
위의 문단을 보면 종교적인 인식에 대한 거의 불교적인 교훈이 엿보입니다. 즉 해탈이나 니르바나(열반)에 대한 묘사가 보입니다. 단 두 번째 문장의 의지는 바로 그 앞 문장에 나타난 의욕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본래적인 의지 개념은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절대)의지라고 재정의(再定意)한 바 있습니다. 그 반면 의욕은 이 의지가 개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의욕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힌두교적, 불교적 해탈을 쇼펜하우어는 금욕이라고 재해석합니다. 여기서는 금욕주의라고도 부르겠습니다. 아래에서 금욕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한번 보겠습니다.
텍스트. : 금욕주의(禁慾主義, asceticism)는 정신에 속하는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육체에 속하는 본능이나 욕구를 악의 근원, 또는 악 그 자체로 보는 견해에 바탕을 두어 육체적인 욕구·본능을 되도록 억제하는 것이 도덕에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금욕이나 고행(苦行), 그 자체도 선으로 보게 된다. (위키백과)
텍스트.: 자이나교, 고대 불교, 스토아 학파, 영지주의 등이 이러한 사상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도가 사상, 에피쿠로스 학파 등의 사상도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 기독교는 교리상으로 금욕 자체만을 목표로 추구하거나 떠받들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도, 전통적으로도, 그리고 많은 교파들에서 현재에도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께 다가가 구원받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금식 기도나 철야 기도와 같은 형태로 금욕적 신심 행위를 하기도 한다. (나무위키)
쇼펜하우어가 보는 금욕주의는 바로 위의 문장 즉 우리처럼 마야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도, 때때로 자기의 고통을 강하게 느끼거나 남의 고통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삶의 공허함과 쓰라림에 접근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히 결정된 체념을 통하여 욕망의 가시들을 꺽고, 모든 고통의 통로를 차단하고, 자기를 정화하고 성스럽게 되어보려고 한다.
이런 상태입니다. 체념을 통하여 욕망의 가시들을 꺽고 모든 고통의 통로를 차단하고, 자기를 정화하고 성스럽게 되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 주변의 절간에서 행해지는 수도승들의 생활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적 태도 역시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즉 위의 글에서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곧 다시 현상의 망상에 현혹되어, 의지는 새롭게 현상의 동기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해탈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우리는 해탈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해탈은 본문에서는 찢어내다.(losreissen)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금욕과 해탈의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욕구와 고통을 억제하고 관념적으로는 득도(得道)의 경지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신체가 있고 동물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님들의 경우는 수련 증진을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오래 지속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뒤에 나오겠지만 크리스트교의 금욕주의적인 수도승들도 그런 노력을 꾸준히 합니다. 이런 금욕과 체념 상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비유로 나타냅니다. 즉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 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4)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금욕주의, 해탈은 아무 관계가 없으나 쇼펜하우어는 성경 구절을 자기의 철학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이용했습니다.
이렇게 해탈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해탈도 가능한데 문제는 이를 보편화시키면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진다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즉 모두 머리를 밀고 절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모두 여자를 멀리하고 애도 안낳고 해서 결국은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금욕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쇼펜하우어는 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텍스트.: 그의 육체는 건강하고 강하며, 생식기에 의해 성욕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부정하고 육체의 거짓을 꾸짖는다. 그는 어떤 조건 아래서도 성욕의 만족을 원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완전한 동정이 금욕, 곧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에 있어서 첫걸음이다. 동정은 금욕으로 개인적인 생명을 뛰어넘은 의지 긍정을 부정하고, 동시에 이 육체의 생명과 더불어 육체로 되어 나타나는 의지 또한 소멸함을 나타낸다. 자연은 언제나 진실하고 소박하기 때문에 만일 이 원리들이 보편적으로 된다면, 인류는 전멸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제2권에서 모든 의지 현상의 연관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최고의 의지 현상이 없어짐과 더불어 더 약한 반영인 동물계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완전한 빛이 없어지면 반그림자도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식이 완전히 폐기됨과 더불어 저절로 그 밖의 세계도 무로 돌아간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기 때문이다. (p.446)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특이한 논리를 퍼붓고 있습니다. 금욕주의 윤리는 개인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욕구 즉 의지를 부정한다. 이것이 특이한 사상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인류는 전멸하고 자연은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한번 말한 것처럼 해탈은 불가능하다 가 정답인 것 같습니다. 만약 진정한 해탈을 할 수 있다면 동물과 인간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고 자연도 소멸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소멸되면 왜 짐승들도 소멸할까요? 그 이유는 생물 체계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동물들과 운동과 감각의 공통점은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 인간은 거기다 플러스 알파하여 정신이 더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위에서 “나는 최고의 의지 현상이 없어짐과 더불어 더 약한 반영인 동물계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 것입니다.
또 이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바로 그의 근본원리의 하나인 개별화의 원리.(principle of individuation)입니다. 즉 우주는 근본적인 의지에 의해서 통치가 되는데 그 의지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개별화될 때 개별적인 생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이를 거부할 수 있다면 다른 동물들, 생물들도 그럴 것이고 따라서 자연 자체의 존립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혹은 최고의 의지 형태가 사라진다면 자연히 다른 생물들과 자연도 사라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해탈은 불가능하다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종합하면 해탈의 순간적인 실행은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한 해탈 혹은 열반을 불가능하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 여기에서 비로소 모든 신화적 요소를 떠나 추상적이고 순수하게, 자신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의욕의 진정제가 된 뒤에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으로 나타나고 신성함, 자기부정, 자기의지의 근절, 금욕 등의 내적인 본질이 표명된 셈이다. 성자나 금욕자들은 모두 이것을 인식하고 행동으로 표명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내적 인식은 같더라도 일단 저마다 이성에 받아들인 교의에 따라 아주 다른 말을 사용했다. 곧 이들의 교의에 따라 인도의 성자, 그리스도교의 성자, 라마교의 성자는 각각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문제의 본질에서는 같다. 어떤 성자는 불합리한 미신에 사로 잡혀 있을 테고, 또 어떤 성자는 반대로 철학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가 성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행위뿐이다. 행위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와 그 본질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된 직접적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p.446)
금욕주의는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자기부정, 자기의지의 근절, 금욕 등의 내적인 본질이 표명된 행동입니다. 이는 종교의 교의에 따라 각각 인도의 성자, 그리스도교의 성자, 라마교의 성자는 각각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문제의 본질에서는 같다. 라고 합니다. 힌두교, 불교, 라마교 그리고 그리스도교까지 그 본질은 같다. 라고 합니다. 즉 모두 금욕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의는 모두 하늘과 땅만큼 다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같다고 합니다. 그들 모두 자기 욕구의 부정이라는 행동을 합니다. 즉 욕망을 극복하고 그 고통을 참고 인내합니다. 종교에서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금욕(禁慾)자에 불과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유신론적인 종교에서 출발하건 무신론적 종교에서 출발하건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합니다.
112. 쇼펜아우어의 철학 소개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최근 한국 사회에 많은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의 철학 내용이라기 보다는 주로 그의 인생론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강의는 좀 어렵기는 하지만 주로 철학을 논의합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입문 및 내용을 다룰 것입니다.
그의 철학의 기본 사상은 비관주의입니다. 이것 때문에 한국에서 그의 사상이 유행을 타는 듯합니다. 우리 나라 역시 저출산, 고령화 문제 등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주된 사상은 의지입니다. 이 의지는 보통 말하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우주적인 원리입니다. 하나의 보편적인 의지 혹은 절대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계는 이 절대적인 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의지는 사고와 합리성이 없는 맹목적인 거대한 힘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쇼펜아우어의 의지는 신(神)이 아닙니다. 정신도 아닙니다. 생육번식을 밀어 부치는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 외에 정신과 이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갈등과 투쟁이 쉬지를 않고 이기주의가 생명을 밀어 부칩니다.
물론 예술과 윤리 등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인간은 이런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벗어나 환희와 해탈을 누립니다. 또 인간들은 그들의 본능과 욕구의 성취를 통해서 집착을 벗어나지만 그 순간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욕구와 의지는 끝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불교와 비슷합니다. 인생은 백팔번뇌요 일장춘몽입니다. 그러나 불교와 차이점은 불교의 경우 인간이 번뇌와 고통 속에 사는 이유는 착각과 무지몽매(無知蒙昧) 때문이며 이는 수도와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쇼펜하우어는 우주의 실체가 불합리한 의지력이기 때문에 해탈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점입니다.
이렇게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형이상학이기는 하나 예술과 도덕 등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서구의 온갖 철학과 예술 그리고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를 막라하여 자신의 학설을 펴가기에 공부를 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동영상 시간표
1분 : 생애 및 작품 소개, 6분 : 세계는 나의 표상 8분 : 정신
9분: 신체와 의지, 10분 : 개별성의 원리 11분 : 만물과 의지
12분: 의지와 자연, 13분: 의지와 죽음, 15분: 플라톤과 이데아
17분: 칸트 미학 19분: 충족이유율, 인과율 20분: 의지와 생명
21분: 예술의 세계, 비관주의, 23분: 인간의 아름다움
24분: 라오콘 조각상, 28분.:바이런의 시, 30분.: 음악
34분: 선율, 37분: 윤리학, 40분: 동정심과 자유, 44분: 세네카
46분: 고통, 50분: 자살, 52분: 만족과 의욕, 53분: 성욕
57분: 홉스와 이기주의, 59분: 소우주, 대우주, 62분: 범죄
64분: 동정, 연민, 70분: 출산, 73분: 칸트의 윤리학,
77분: 금욕주의, 79분: 힌두교, 마야, 82분: 해탈,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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