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 유구중학교에 있을 때 <영웅문>을 열심히 읽는 선생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무협지는 <와룡생>무협지가 최고이고 나머지는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저자가 와룡생이 아닌 김용의 <영웅문>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살고 있어서 방학 때 서울에 가서 지낸 적이 있었다. 서울 집에서 할 일이 없어서 방에서 빈둥거리다가 보니 방구석에 두꺼운 무협지가 있어서 그 책을 읽었다. 그 때 삼국지는 5권으로 된 월탄(박종화)삼국지를 많이 읽었는데 세로짜기에 이단으로 되어 있고 글씨가 작아서 한 페이지에 글자가 엄청 많았다. 이 무협지도 삼국지만큼 두꺼웠고 세로짜기에 이단으로 편집되었고 4권이었다. 이 무협지가 와룡생의 <야적>이었다. 처음 읽은 <와룡생 무협지>였다. 이때 읽은 <야적>의 내용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재미있어서 여러번 읽은 모양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임무심>이었고, 소림사와 무당파의 승려와 도사들 이름까지 생각이 난다. 백대대사, 백인대사와 현월도장, 현진도장이 나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무림을 정복하려는 <남궁세가>의 음모에 맞서서 정파의 무림인을 규합해서 <임무심>이 활약하는 내용이었다.
그후에 <와룡생 무협지> 중 <군협지>, <무유지>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군협지>의 내용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걸 보니 안 읽은 모양이다. <무유지>는 틀림없이 읽었지만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등장인물 중에 뜨거운 불길이 나오는 <적염장>을 사용하는 사람과 차가운 얼음같은 바람이 나오는 <한빙장>을 사용하는 사람이 서로 원수지간이어서 수없이 대결하지만 서로 사용하는 무공이 상극이어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는 내용은 재미있는 설정이어서 기억이 난다. 그외에도 만화방이나 도서관에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많은 <와룡생 무협지>를 읽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짜가 하도 많아서 흥미를 잃어서 <와룡생 무협지>를 안 읽게 되었지만 여전히 무협지는 <와룡생>무협지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동방불패>는 무협영화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동방불패>는 김용의 <소오강호>를 각색한 영화이다. 이연걸이 맡은 주인공 <영호충>을 비롯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출연한 것 말고는 원작 소설과 거의 상관이 없다. 동방불패가 여자처럼 변하는 것은 맞지만 <임청하>처럼 예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고, 영호충과 사모하는 사이도 아니고 애인이 따로 있다. 소설 속에서 동방불패는 많이 나오지도 않고 크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다.
<규화보전>이라는 천하제일의 무공비급이 있다. 천하의 무림인들은 이 비급을 노리지만, 문제는 <규화보전>의 무공을 익히려면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자라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자가 되면서까지 무공을 익힐 생각을 못하지만, 야심이 있고 음험한 인간들은 기꺼이 고자가 되어 무공을 익히고 만다. 그리고 규화보전의 무공을 수련할수록 여자처럼 변한다. 동방불패는 일월신교의 2인자 였는데, 규화보전의 무공을 익혀 일월신교의 교주 임아행를 몰아내고 자기가 교주가 된 것이다.
2년 전 중국의 화산에 갔을 때, 잔도 중에 제일 험한 <장공잔도>가 있었다. 이 장공잔도를 건너가면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이 영호충이 화산파의 규율을 어겨 그 벌로 1년 동안 면벽수련으로 무술을 익힌 <사과애>라고 한다. <소오강호>는 소설인데 화산에 <사과애>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은 원나라 때 전진교 도사가 만든 동굴이므로 역시 영호충하고는 상관이 없는 곳이다. 김용의 소설이 너무나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을 실제 있는 것처럼 만든 것이다.
중국 화산에 올라갔을 때, <화산논검>이라고 씌어진 비석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김용의 소설 중 사조삼부곡(영웅문 시리즈 :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화산논검>이 중국 화산 정상에 비석으로 기념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와룡생 무협지는 연대를 알 수 없고 실존인물도 전혀 나오지 않는 순수 판타지 소설이다. 그렇지만 김용의 무협지는 역사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연대가 정확하게 나오고 실재 인물과 가상 인물이 교묘하게 엮여져 있어서, 소설 속 가상 인물도 그 당시 중국 어딘가에 살았던 인물로 느껴진다.
<화산논검>은 누구의 무공이 제일 뛰어난가를 가리는 무공대결을 말한다. 사조삼부곡에서 3차에 걸쳐 화산논검이 있었다. 1차에서 왕중양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을 받아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1차 화산논검에 참여한 다섯명의 고수인 동사(황약사), 서독(구양봉), 남제(단지흥), 북개(황칠공), 중신통(왕중양) 이 다섯 사람을 5절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왕중양은 전진교를 창시한 실존인물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은 뛰어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예전에도 봤고, 근래에도 봤는데 무슨 내용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등 홍콩의 대표적인 배우들이 총 출동한 영화이다. 사촌형이 <동방불패>를 재미있게 봐서 <동사서독>도 <동방불패>처럼 김용의 원작이므로 같은 류라고 생각하고 기대를 하고 극장에 갔지만, 칼싸움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등장인물들도 뭐라고 하는지 잘 이해 안되는 말만 지껄이고, 이제나 저제나 칼싸움이 나오기를 기대하던 사촌형은 결국 중간에 극장을 나오고 말았다.
"김용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 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굴까"하는 질문을 많이들 한다. 또는 10대 고수를 고르기도 한다. 인터넷과 유투브를 찾아보니, <천룡팔부>를 아직 읽지 않았는데 그 소설에 나오는 <무명승>이 최고 고수로 인정받고 있다. 여러기연으로 여러가지 심오한 무공을 익혔고 자신도 천하제일의 무공 <암연소혼장>를 만든 양과(신조협려의 주인공)와 특기가 <항룡십팔장 >밖에 없는 곽정(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사람들은 당연히 양과가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답은 승부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절급의 고수가 되면 어떤 고수를 만나도 이기지는 못해도 질 수는 없게 된다는 것이다. 뛰어난 여러개의 무공이 직렬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병렬연결이 되는 것이어서, 하나의 뛰어난 무공을 제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 나오는 무술 대결의 몸사위가 아름답다. 실제 고수들의 대결도 아름다울까? 올림픽에서 태권도 결승전에서의 대결이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화려하기는 커녕 답답한 진행으로 "태권도는 재미없다."는 말을 듣는 것 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두 고수가 대결하면 영화와는 달리 거의 개싸움이 된다고 한다.
주성치 영화를 보면 김용의 소설이 여기저기 많이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식신>에서 <암연소혼장>이 음식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영화 <녹정기>의 주인공을 맡은 주성치는 김용의 소설 <녹정기>에 나오는 주인공 위소보와 싱크로율이 100%일 정도로 똑같다. 무술은 전혀 못하는 인간이 안면에 철판을 깔고 번지르한 말로 그때 그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고, 청나라 황제 <강희제>와 반청복명을 꿈꾸는 <천지회>의 총타주인 진금남과 친구가 된다. 강희제는 천지회를 말살하려고 하고, 천지회는 강희제를 죽이려고 한다. 그렇지만 위소보는 두 사람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두사람의 두터운 신뢰를 얻게된다. 그러면서 중간에 농간을 부려 엄청난 재산을 착복한다. 또 강희제와 천지회에 의리를 지키는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다. 결국 양다리 걸치기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양쪽이 다 모르는 곳으로 은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