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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와 함께 걷는 길,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도보여행, 강화나들길이 이제 후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졸업에 앞서 시작을 함께 못했던 길동무들이 동행을 합니다. 2월 3(토)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에서 추억거리 남겨봄이 어떨까요? 동행하실 회원님은 댓글 남겨주세요
1. 장소 :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리더 : 소그미)
2. 교통편 : 지하철 5호선 송정역 1번 출구에서 중앙 버스정유장 강화행 3000번 영등포역 : 88번, 인천 : 90번, 일산 : 96번
3. 모이는 장소 그리고 시간 : 송정역 대합실 07시 30분 또는 강화터미널 대합실 09시
4. 소요시간 : 약 6시간 30분(중식시간 포함)
5. 코스 : 강화터미널 ~ 동문 ~ 성공회강화성당 ~ 고려궁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문 ~ 북장대 ~ 오읍약수 ~ 연미정 ~옥개방죽 ~갑곶성지 ~ 갑곶돈대
6. 점심은 : 매식(연무정 식당 032-933-9377 )
7. 유적지 입장료 또는 신분증 지참
8.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개인 보험이 필요 하신 회원님은 보험에 가입하세요.
강화나들의 시작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강화산성 동문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이어 만나는 성공회 강화성당, 그리고 용흥궁, 고려궁지, 강화향교, 갈 길은 빠쁜데 볼거리가 너무나 많아 걸음이 늦어진다.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 강화의 중심부를 걸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넘나든다.
강화나들의 시작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강화산성 동문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강화산성 동문의 북쪽 수령 약 600년의 느티나무다. 본래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가 아니고 성곽의 축조와 관련되어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원불교 교당과 주택들이 인근에 자리하여 길목의 쉼터가 되었다. 나무의 형세가 매우 왕성하면서도 균형을 갖추고 있어 아름답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동서양의 미를 조화시킨 한옥 성당이다. 토착화 선교를 지향했던 성공회 정신이 담겨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특이하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1900년 11월 퓨전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동서양 건축법이 조화를 이룬다. 내부 구조도 독특하여 외삼문, 내삼문은 사찰의 구조와 같다. 성당 안에 십자가가 새겨진 범종은 절의 범종과 흡사하고, 본당에 걸린 ‘천주성전’이라는 편액도 사찰의 양식이다. 그러나 천장이 높고 중앙ㅇ부 양쪽에 날개가 달린 것은 바시리카 양식으로, 기독교 예배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단. 축조이후 증측 등을 하지않아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전설의 마녀' 촬영지다. 여성 길동무들은 추억거리 하나씩 남겨봄이 어떨까?
용흥궁이다. 비운의 임금이 된 강화도령의 잠저인 용흥궁은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 임금이 19세까지 살던 잠저다. 잠저란 법통을 이어받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을 말하는데 용흥궁은 원래 세 칸짜리 초가였다. 철종의 본명은 이원범으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사도세자다. 현재 건물은 내전과 외전 그리고 별전이 각각 1동씩 남아 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라는 잠저구기비각이 서 있다.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의 유형을 딴 소박하고 질박한 기풍이 있다.
김상용 순절비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에 대항하다 순국한 김상용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비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청국과의 화의를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를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용은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청군이 강화들을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그는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 숙종 때 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기가 후대에 발견되어 순조 때 유수 김매순이 건립한 신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강화문학관이다. 강화출신의 수필가 故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하여 건립한 강화문학관은 조경희 선생께서 2005년 8월 타계하시며 강화군에 기증하신 소장품 팔천 여 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아울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고인의 수필문학에 끼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층 전시실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2층 수필문학관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과 미술품 40여 점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 고려궁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으며 사적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강화는 39년 동안 고려의 도읍이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송도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긴 후 1270년 개성 환도 때까지 고려의 중심이었으며 조선시대 왕들의 피난지이기도 했다. 조선 인조 9년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거의 불타 없어지고 동헌과 이방청 등만이 남아있다. 조선의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과 강화지방의 관원들이 사무를 보던 유수부 동헌, 육방의 하나인 이방이 사무를 보던 유수부 이방청 등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 있고 일부는 복원되어 궁궐 터를 지키던 아름다운 고목들과 함께 고려궁지 또는 고려궁터 로 불리고 있다.
강화 유수부 동헌이다. 강화 유수부는 1627년(인조 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한 것으로 종2품 관청으로 삼았다. 1638년(인조 16)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송나라 미남궁체를 잘 쓰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윤순(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규모는 정면 8칸, 측면 3칸, 건평 24칸이고 구조는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에 이른 것인데,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건물로서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
외규장각이다. 조선시대 왕립 도서관격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서적의 안전한 관리를 목적으로 1781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하여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 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
강화부종각이다. 보물 11-8호 강화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강화동종의 균열이 심해져서 타종할 수 없게 되자, 1999년 10월에 강화동종과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 강화부종각에 설치하고,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이 종각은 원래 강화산성 남문 동쪽에 있었고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고려궁지로 옮겼다고 한다.
이방청이다. 이방청은 강화 유수부 내 육방(六房:예·병·공·이·호·형방) 중의 하나로서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1583∼1661)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1735∼1788)이 내부를 개수하여 계홀당이라는 당호를 게시하였다.
한옥마을을 걷다보면 '북관제묘’ 를만난다. 이름은 관우(關羽)요 자(字)는 운장(雲長), 관운장은 소설 삼국지에서 보듯이 출중한 무장이었는데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무신 및 재신으로 모셔졌다. 우리나라에는 임진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동관묘가 세워진 이래 관우신앙이 퍼져나갔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관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더욱 관우 숭배를 강화했기에 서울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서고 지방에도 많은 관왕묘가 세워졌다. 이곳에 세워진 관제묘도 그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 뒤로 관우숭배는 종교나 무속의 영역으로 남아 무가에서는 장군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에는 부자되고 싶은 이들이 관운장상 앞에 향을 올리려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강화향교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국립교육기관인 강화향교는 성현들엑 제사를 지내고 교육을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강화향교는 1232년에 갑곶리로 옮겼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서도면으로 이건하였다. 그후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의 송악산(지금의 북산) 옆에다 복원하였으며 1629년에는 명륜당을 세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1766년에 유수 이은이 중수하였는데, 이때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은수물이다.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해서 은수물이라고 불리는 우물이다. 강화향교 서편에 있는 은우물은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이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한다. 우물 아래쪽에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수도시설이 생기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성의 북문이다. 이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내성은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리고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하였으나,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것을 효종 3년(1652)에 일부를 개축하였다. 북문은 고려궁지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문루에 이름은 진송루이다.
북장대 터다. 장대는 성곽을 지키는 장수의 지휘소이다. 강화산성에는 북산에 북장대와 남산에 남장대가 사방이 잘 보이는 정상 부분에 있었다. 남장대는 2010년에 복원되었고, 북장대는 복원을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강화산성 북문 밖에 있는 샘물이다.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하여 성을 쌓을 때, 가뭄이 심해 장정들이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었을데, 문득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급으 오읍약수터 위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나 장정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한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였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울고, 신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온 강화 백성들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다섯 오(五)’ ‘울 읍(泣)’ 자를 써서 오읍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에서 바라보는 북녘땅이다.
월곶돈대ㆍ연미정이다. 북녘 땅을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저 멀리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월곶돈대는 53돈대 중 하나다. 이곳에는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어 병자호란까지 이어진 비운의 정자, 연미정이 있다. 연미정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경관이 매우 뛰어났지만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가 지난 2008년에 완전 개방되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불리운다.
황형 비다. 황형 택지는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1520년)의 옛 집터이다. 황형은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dhowur을 크게 무찔렀고, 1512(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황형은 평안도,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였고 이곳 월곳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후손들이 파손된 비석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연미정이 있다. 연미정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경관이 매우 뛰어났지만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가 지난 2008년에 완전 개방되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불리운다.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에게 명하여 구재생도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에서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내려주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다. 숙종 때 강화도에 진보와 돈대를 설치 할 때 월곶진을 두었다.
옥계방죽이다. 옥계라면, 옥같이 맑은 냇물이라는 뜻이다. 강화읍 옥림리 옥개에 있는 방죽이다. 이 옥개방죽의 수로는 저어새와 황로 등 철새가 자주 오는 곳이다. 근처의 옥창돈대는 월곶진의 관리 아래에 있던 강화 53돈대 중 하나이다. 동남쪽의 바깥 석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쌓았던 중성의 북쪽 끝 지점이다.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이다. 참전용사기념비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조성해 놓은 공원이다. 이 공원은 당초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위치한 곳에 참전용사의 뜻을 기리기 윙해 조성됐다.
갑곶 순교성지로 들어선다. 지난번 평일에 이 곳을 통과할 때 출입문이 닫쳐 망서리기도 했던 곳인데 출입할 수 있는 길이 나있다.
갑곶성지는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개국의 성지 강화는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으로 상고시대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다가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다. 현재의 지명 강화는 940년(고려 태조 23) 이래의 것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방위상 중요시되어 사진의 하나가 되었으며, 연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마리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드넓은 강화의 관문 갑곶돈대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의 소규모 관측ㆍ방어시설이다. 강화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갑곶돈대이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5년) 5월에 완성되었는데, 1977년 옛터에 보수,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 돈대 안에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외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특히, 돈대 안에는 선조들의 업적을 기린 강화 비석군과 400년 된 광화갑곶리탱자나무가 있다. 아름다운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갑곶돈대 비석군이다. 갑곶돈대 비석군은 갑곶돈대 안에 60여 기의 비석이 열 지어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 강화에 부임해 왔던 관리들의 업적을 칭송한 영세불망비, 선정비들이다. 그 외에 삼충사적비, 하마비, 금표도 포함되어 있다. 본래 강화읍 관청리 강화군청 입구와 용정리, 갑곶리 등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은 것이다.
갑곶리 탱자나무다. 갑곶돈대 안에 있는 탱자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4,2m이다.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곳이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 지역이어서 의미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78호.
갑곶돈대는 조선시대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사시설을 설치할 때 세워진,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라 불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산성을 점령하였다. 1971년에 옛터에 옛 모습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이 마치 강과 같다 하여 염하라고 부른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가 됩니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으며,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습니다.
첫댓글 동행 1. 감사 !감사합니다!
주제대로 역사박물관인 듯
제가 길동무 고참인데 강화 나들길 첫 코스를 불참했을까요?
치매 중증 많이 죄송하고 지송합니다 2코스 보충해야 합니다
2코스 보충해야 한다는 열망 때문에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일단은 강화터미널에서 뵙겠습니다
2코스 동행하실 분 안 계십니까?
이거 뭔 말씀?
번복은 아니되옵니다. 걍 함께 1코스 걸으시면 어떨지
2코스는 나랑 설 담날이나 주중 언제라도 불러만 주면 나갈 수 있는데
@화수분 샘!
약속을 번복했으니 부끄러버라
설날 맏며느리 바빠요
아마도 후유증이~~~ 그러다 보충 못 합니다
혹시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2코스 변경은 ㅎㅎㅎ 평지로만 이루어진 2코스로 초대합니다
남장대 내리막길 만만치않습니다ㅎㅎㅎ
길동무 가는 길 걸림돌 있으리 만무하죠^^!
2코스 시작점 갑곶돈대는 강화터미널에서
어떻게 접근하는지요?
혼자 걸어도 그닥 어렵지 않은 코스라니
날 좋은 날 혼자라도 나가볼까 해서요
@화수분 역사박물관에서 우로 방향 바꿔
도로 따라가면 초지진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고
봄 여름 꽃길 따라가는 길이라 난이도 하 중 하
샛길로 빠질 리도 없고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어요
잔디 위로 그렇게도 걸어보세요 넘어져도 안 다쳐요
유경험자 제가 약 간 똘끼가 있거든요^^!
@화수분 1코스를 끝내면 자연히 2코스 접근하는 방법을 알게됩니다.^^*
@화수분 빙고입니다
3000번 타고 강화터미널 못 가서 현대아파트에서 하차 1km 도보하시면 강화 전쟁 박물관 도착 1코스 종점 쉽지요?
친정 아빠 21일 병원 오시면 그 주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걷는 날 소문내시면 제가 중간이라도 합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출발할 때 소리 내고 가세여~~~
1코스를 간다는것인지요?
댓글만으로는 아리송해서..
그렇습니다. 1코스를 걷지 못한 길동무들이 걸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수명산 넵~~^^
안녕하세요? 거창한 리딩이라고 하기 보다는, 자잘한 초보들이 서로 힘을 도와 보충수업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미르 저는 수명산님처럼 못해요.. 능력도 안되고요..^^
@소그미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늘 계획은 세우는데 실천이 어려운 1인인지라.. 고민중이기에.. 댓글 감사합니다.
동행 2 강화터미널
감사할 따름입니다**
넘 멀다요ㅠ
상황표입니다... 토란님, 화수분님 참고하세요. 날씨는 오늘보다 약간 쌀쌀하지만 괜찮을것 같습니다. 영하 17도도 다녀왔는데 뭘~...
내일 날씨입니다. 참고하세요... 좀 쌀쌀할것 같습니다. 바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넵
동행 3 강화터미널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반걉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제2 도읍지 강화(심도)의 역사와 문화길에서 멋진 추억거리 남기세요. 내일은 구석 구석 다 돌아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오늘 가입한 구름나나 님은 다음 11코스 바람길에 동행해 보겠다고 합니다. 고려궁지에서 한옥마을로 들어서면서 칠백살 먹은 은행나무, 북장대에서 내려서면서 연리목 놓치지 말아요^^*
석모도. . 넹
저는 내일 우리 신랑한테 사정하고 협박하여 5코스 갑니다
넹 그럼 송정역에서 뵙는건가요?
코스가 다르니 따로 가야할듯 한데요~~ 혹시 운 좋으면 만날수도 있게지요
넹 그럼 수고하셔요 저는 9호선 대기중입니다 종합운동장
@소그미 신논현 지났어요
저는
현재 강화 -9도 체감온도 -14도
서해5도 강풍주의보라네요
바람막이 단단히 하시고 오셔요
네 감사합니다 저는 신정역 통과 중 입니다
길동무 파이팅입니다. 1코스에서 그리고 5코스에서 많은 추억거리 남기세요. 다시 한 번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