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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息(안식)의 意圖(의도)를 아는가?(창 2:1~3)
◾쉼은 삶의 完成완성이라는 것을 아는가?
◾安息(안식)을 經驗(경험)할 때에 하나님을 穩全(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안식은 영원의 원천과, 천국의 근원과, 내세에서 이루어 지는, 삶의 뿌리라는 것을 아는가?
🔥 예화 자료
1.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2. 초월 감사/ 윌리암 캐리
3. 거위와 같은 교인/ 행함이 없는 교인들
4.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배케트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 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And on the seventh day God end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sanctified it: because that in it he ha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and made"(KJV).
✔ 성경은 말한다. 일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일은 단지 삶을 위한 수단이다. 삶의 목적은 쉼이다. 이처럼 일보다 쉼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 일은 목적을 향해서 나아 가는, 하나의 노정일 뿐이다. 그러나 쉼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다. 쉼은 우리의 삶의 완성이다.
안식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늘과 땅과 만물들이 완성되었다.
✔ 창세기 2장에서는, 창조의 완성과 쉼이 평형선을 이루고 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쉼이 없으면 완성도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쉼과 일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는 명료하다. 즉 쉼이 없다면,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은, 쉼에서 이루어 진다.
일은 시간을 소비해서, 무엇을 생산하거나, 공간을 점유한다. 그러나 쉼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 지는, 영원의 체험이다.
천지를 창조하는 6일 동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날짜(시간)의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6일 동안에 없었던, 쉼이 첨가되었다.
그러므로 쉼으로 대표되는 일곱째 날(안식일)은, 시간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영속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영원을, 하나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아브라함 헤셀은, 랍비 하임의 말을 인용해서, 안식일의 쉼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식일은 영원의 원천이다. 안식일은 천국의 근원이다. 안식일은 내세에서 이루어 지는, 삶의 뿌리"라고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안식일의 맛을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과, 영생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내세인 천국에서, 영원의 맛을 즐길 수가 없다.
✔ 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삶의 의미도 모른다. 이는 쉼을 모르면, 하나님의 세계도, 경험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쉼(안식)은, 창세기 2장 2절의 "안식하시니라"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인 ≪샤바트≫에서 찾을 수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샤바트≫는, "그치다"와 "중지하다"와 "쉬다"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다.
안식일에 모든 일을 그치는 것은, 일 자체에 대한 그침만이 아니라, 경쟁과 성취와 생각까지도, 완전히 그치라는 말이다.
✔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을 저항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쉬는 불안에 대한 저항이고, 강요에 대한 저항이고, 배타주의에 대한 저항이고, 과중한 일에 대한 저항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일곱째 날을 설명하는 ≪샤바트≫는, 안식일을 설명하는 ≪누흐≫와, ≪헤니아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따라서 창세기 2장의 쉼은, 일의 그침과 단순한 쉼을 넘어서, 온전한 안식과 행복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행복한 가운데로, 인간이 참여하는 시간이, 진정한 쉼인 안식이다.
그래서 헤셀은 말하기를, "엿새 동안에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는, 우주에는 무엇이 없었는가? ≪메누하, 안식≫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 안식≫가 왔다"라고 했다.
천천히 걸으면 걸을 수록,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일을 그치면, 비로서 자신의 존재를 볼 수가 있다.
✔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우리의 정신이 내 안에서 편안할 때에, 비로서 나는 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가 있다.
✔ 우리는 시간을 사용해서, 공간(집, 부동산, 별장, 농장 등)을 차지한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된 성공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데 있다.
✔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운 사람은, 영원(구원, 영생, 천국)을 획득한 복된 사람이다.
안식일이 시간의 모양인 영이라고 하면, 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안식과 쉼과 평화 가운데서, 머무는 시간이다.
✔ 쉼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쉼 가운데서, 자신의 내면을 찾고, 쉼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계를 깊이 묵상한다.
✔ 우리가 하나님의 쉼 속에, 머물면 머물 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깊어 진다. 쉼은 믿음을 길러 내고, 믿음은 더 깊은 쉼으로 인도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성취하고 공간을 차지하고, 부를 쌓아야 평안을 느낀다. 그러나 경건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에, 비로소 평안과 만족을 느낀다.
1주일에 6일이 아니고, 7일을 일하면, 더 많이 성취할 수가 있다.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다. 1년 365일 쉬지 않고 일을 한다면,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다.
✔ 그런데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가 되는 날에는 안식을 하셨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6년을 일하고 7년째는 쉬었다. 그 해에는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게 했다. 7년째는 거둘 곡식이 없는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 뿐만 아니라 7년의 7번 째인, 50년 째는 희년의 해이다. 희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은 시험을 받았고, 삶에 불안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굶어 죽지 않고 살았다.
✔ 그러나 그들은 쉼 속에서, 하나님 언약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쉼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쉼이 곧 이스라엘을, 믿음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헨리 나우웬의 영성의 새로운 지평은, "로드레이"(Rodleigh)의 이야기이다. 이는 바로, 가족과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서커스단의 가족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의 글은 물론 삶까지 달라졌다. 그는 서커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강한 망설임과 두려움이 밀려 왔다.
✔ 그가 그네타기를 곡예에, 마음이 온전히 사로잡힌 것은, 그네에서 손을 놓고 날으는 사람과, 손을 잡은 사람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날으는 사람은, 군중들 위로 높이 그네를 타다가도, 겁도 없이 그네를 놓아 버린다. 그네를 놓아 버린 사람은, 공중에서 자기 손을 잡아 주기만을 기다린다.
✔ 로드레이는 나우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으는 사람은, 절대로 잡는 사람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을 믿고서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의 줄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우리의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데 있다.
✔ 우리는 쉼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할 때에, 비로서 온전히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다.
✔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안식을 누리면서 쉴 때에,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고요와, 평안과 쉼과 솰롬을 경험하게 된다.
일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월급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일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일을 좀 더 열심히 하고, 좀 더 잘하고, 좀 더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 결코 풍성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폴 스티븐스, Paul Stevens).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第) 칠일(七日)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安息日)을 복(福)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마이클 호튼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작금의 미국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종되었다고, 강력하게 비판을 한 호튼 교수는,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을 잃어 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잘살게 만드는 재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도, 아주 잘사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이다.
✔ 최근 미국에서 부흥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행복과 형통과 성공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 어떤 교회는, 환경보호와, 평화와, 정의와 같은 가치에, 집중을 한다.
✔ 이러한 것들이 위험한 이유는, 성도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고, 믿음과, 교리와,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경험만을 원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집중을 해야 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인 하나님의 복음은, 성공과 행복과, 인생의 그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놀라운 복과 은혜이다.
✔ 복음을 가리어 버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사상에 빠지지 말고, 참된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잘못된 유행에 가리워진 유사 복음을 조심해야 한다.
🔥 초월 감사/ 윌리암 캐리 선교사
✔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라고 설교를 했던 윌리엄 캐리는, 설교한 대로 위대한 생애를 살았다.
✔ 그는 인도에서, 다양한 사역을 펼쳤다. 교회 개척과, 성경 번역과, 신학교 설립과, 사회적 악습 타파와, 인쇄술과, 출판과, 과학 도입과, 최초의 원예 체계와, 저축 은행과,신문 제작과, 도서관 도입과, 아시아 최초의 대학 설립 등...
그는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 이 일화를 보면, 그의 열정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1812년 그가 산책을 나간 뒤에, 강아지가 촛불을 건드려서, 집에 화재가 났다.
✔ 이 불로 인해서, 8년 동안 번역한 언어 사전기, 문법책과, 완역한 성경 원고 1100페이지가, 모두다 불에 타버렸다. 우리 같으면 그 강아지를 욕하거나, 폭행을 했을지 모른다.
✔ 그러나 캐리는, 강아지를 끌어 안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번역한 원고가 부족하니, 완벽하게 번역하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번역을 하겠습니다”.
감사하기가 힘든 상황에서, 감사를 하는 것을 초월 감사라고 한다. 초월 감사는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초월 감사를 하면, 수많은 시련을 이길 힘을 얻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 초월 감사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 가도록, 안내와 인도를 하는 네비게이션이다. 결과적으로 초월 감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
🔥 거위와 같은 교인/ 행함이 없는 교인들
✔ S. Kierkegaard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을, 거위와 같다고 했다. 거위 교인들은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열심히 듣는다.
설교자인 거위가 설교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이 좁은 장소에만, 머물 필요가 없다. 저 높은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다. 더 먼 지역과, 더 축복을 받는 땅으로 날아갈 수 있다.
✔ 거위들은 매 주일마다, 같은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날아서 집으로 가야 할 때에, 거위들은 날아 가지를 않고,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 간다.
✔ 이 우화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고, 순종을 하지 않는 교인들을 풍자한다. 거위의 모습이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모두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아멘! 아멘!한다. 그러나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신앙이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신앙에 불과하다.
🔥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배케트
✔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다. 두 노인이 함께 시골의 나무 밑에서, "고도"를 50년 이상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고도를 왜 기다려야 하는지? 고도가 언제 오는지? 전혀 알지를 못한다. 그냥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누군가 작가에게, 고도가 누군지 물었다. 그러자 작가는 대답을 했다. 고도를 내가 알았다면, 내가 작품에 썼을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되묻는다.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 무엇을 그토록 기다리며 사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허무한 것을 기다리다가, 오직 한 번 뿐인 인생을, 다 흘려 보내고 마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는 기다림의 신앙이다. 지금 이 시대와, 내가 처한 상황이 심히 절망적고,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다림에는 희망이 있다.
막연히 기다리다, 우연히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반드시 정하신 때에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 어둠과 죄악으로 만연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