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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마리아자매회의 영성과 공동체 삶
- 조 규 남 (한국 Canaam Friend, 행복교회 목사) -
Ⅰ. 시작하는 말
기독교마리아자매회(Evangelical Sisterhood of Mary)는 1947년 독일의 폐허가 된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독일의 잘못을
회개하는 독신 여성들이 모여 성경공부로 시작된 이래 세계 각국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한국 지부는 1981년 설립되었다가 1989년
철수하였고, 지금은 ‘가나안 메시지’를 통해 ‘가나안 영성’을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기독교마리아자매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큰 주춧돌이 있다. 기독교와 자매회의 속성이다. 수직적 영성 부분에서는 ‘기독교’를 토
대로 하고 있으며, 수평적 삶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나름대로의 특성은 독신 자
매들의 여성 공동체이며 수도 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독일 본부 안에는 프란시스칸 독신 형제들 그룹이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
이 전면으로 나서는 일 없이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기에 영성적인 부분에서나 삶의 형식 대부분이 자매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수직적 영성 부분에서 ‘가나안 영성’을 다루고, 다음으로 수평적 삶의 관계에서 ‘가나안 공동체성’을 다룬 후, 전체
적으로 이들의 ‘가나안 영성적 공동체 삶’을 조화시켜 다루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들을 풀어나
가는 작은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 이하 편의상 ‘기독교마리아자매회’ 명칭을 ‘가나안’으로 줄여 호칭하기로 한다.
Ⅱ. 가나안 영성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을 그 어떤 사람(단체)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그 앞에 어떤 접두어나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은 옳
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라면 ‘영적’(spiritual)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흔히 ‘영성 훈련’이란 말을 쓰지만, 어떻게
영성이 인간에 의해 훈련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영적 훈련’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가나안 영성’이란 말도 맞
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한 위(位)이신 성령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들어와 이런 저런 여러 모양으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나 편의상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영성’이란 말로 모든 것을 묶어 표현하여 사용키로 한다.
첫째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이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종말의 시대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의 존재로 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와도 같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깨어 있는 신부’의 영성으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영성’을 말한다.
둘째는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
게 내 몸(삶)에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말한다.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의 길인 십자가를 떠나서는 아무
능력도 나타날 수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예수는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십자가를 내세워 인류구원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당
연히 신랑 예수가 짊어지고 간 그 십자가를 또한 어린 속죄양으로서 함께 지고 가야 한다. 구체적 삶의 행동양식 면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영성’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영성: 우선 한 마디로 이들의 영성을 표현하라면 밝다는 것이다. 이들의 메시지에 심취하거나 이들과 직
접 대화하게 되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능동적이어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설령 그 메시지가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
이라 할지라도 밝다. 회개를 촉구하되 회개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 뒤에 따르는 기쁨을 강조하기에 그렇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항상 설레임으로 기대감이 충만하다. 정작 신랑을 만나서도 기쁘겠지만, 신랑을 기다리는 기다림과 기대
감만으로도 신부는 즐거울 수 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우울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표정은 밝다. 삶 자체가 무척 밝다. 과한 이야기 같지만, 이들이 예수 고난의 찬양을 부를 때에도 그 목소리의 청아함 때문
인지 슬프게 들리기 보다는 오히려 그 찬양을 통해 ‘천상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
만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라 하면서도 ‘기다리는 즐거움’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이다. 신부가 신랑의 약속을 믿지 못하
거나 또는 신부의 인내심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신랑의 다시 오리라는 약속에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신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부라면 그 기다림 자체가 즐거울 수밖
에 없다. 그는 이미 만남 이전의 그 기다림 속에서 ‘기다림의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행복해보이고, 항상
밝게 자신의 모습들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일정 기간 수련기를 거쳐 종신 서원의 자리에 서게 되면, 자신들을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기쁨으로 드려지는 신부
라고 생각하여 마치 결혼식을 방불케 하듯 손에 결혼반지를 끼게 된다. 이때로부터 그들은 ‘영원한 기쁨’(Eternal joy) 되시는 신랑
예수님과 연합하여 신부로서의 모든 삶을 바치게 된다. 신랑되신 주님 만날 그 때까지...
☞ 책 소개: ‘내 모든 것을 그분께’ (My all for Him) / Basilea Schlink 2009 / 예영커뮤니케이션 2009.
◉하나님의 어린양 영성: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해 속죄의 제단에 바쳐지는 어린양과도 같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
는 길은 십자가를 통한 회개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이자 승리의 상징이고, 더 나아가 죄와 사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구원받은 자들의 기쁨’의 근원이 된다. 십자가와 회개가 외쳐지는 이들의 메시지에서 밝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한 회개의 기쁨이 선포되고 강조되기 때문이다.
속죄의 제단에 드려지는 어린양의 십자가는 철저한 자기부인이며 자기포기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
체성을 부인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천국시민으로서의 주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세상적인 욕심을 버린다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구원얻은 하나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가 하나님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다. 모든 기독교의 메시지가 그렇겠지만, 가나안의 메시지는 처음
부터 계속하여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Reality of God)을 체험한
다. 실제로 독일 가나안 공동체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바로 그곳에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심
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나안에서의 십자가 영성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용해되지 않은 채 내 안에 응고되어 독(毒)으로 남아 있어 나 자신과 내 이
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 안에서 녹아지고 승화되어 아름다운 작품(作品)이 되게 한다. 바
로 이것이 가나안의 큰 능력이다.
이들이 믿음의 길(Faith mission)을 갈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하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순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의 십자가 고난이 결국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고, 바로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영성의 믿음이 결국 승리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 책 소개: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 Basilea Schlink 1989 / 엠마오출판사 1989, 도서출판 가나안 2003
Ⅲ. 가나안 공동체성
가나안 공동체를 성격적 분류로 할 때 공동체로 모여 사는 생활공동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 어린양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수도공동체를 함께 말할 수 있다. 대부분 수도적 생활공동체가 갖는 특성이 개인적이며 내향성인데 반해 이들은 그렇지 않
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외향적인 면이 많다. 그들이 밖으로 세계 지부를 설립하는 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그들의 사역
또한 무척 외향적이다. 그들은 일반인들과 구별된 수도복을 입고 생활하면서도 오히려 교회가 하지 못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과
감히 사회 현실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하나님을 모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면 그 어느 것에나 과감히 도전하여 그리스도 승리의 깃발을 꽂는다.
가나안 공동체가 가지는 특성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묵묵히 하나님 어린양의 길을 감으로서 자신들의 믿음의 길에 동참코자 하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아주 조용히 연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과 연대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가나안 프렌드’(Canaan friend) 역시 어떤 특별한 사역을 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자
신의 삶의 터전에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며 가나안 메시지를 통한 ‘가나안 영성’으로 살아가면 된다. 물론 필요시에
서로의 교분을 통해 특별한 일들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의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일반적으로 가나
안을 좋아하는 ‘가나안 친구들’(Friends of Canaan)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관계로서의 ‘가나안 프렌드’는 현재 한국에서 조규남
목사가 유일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자신들만의 공동체성을 갖고 있기에 가나안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이 그냥 쉽게 세상의 다른 곳들에 접목되기를 거부
한다. 예를 들면 현재 광림수도원에 있는 기도의 동산에 설치된 조형물들은 가나안의 ‘예수 고난의 동산’에서 컨셉을 따온 것이다.
광림수도원에 이 조형물들이 세워지기 전, 그곳 관계자들이 가나안에 요청을 하여 가나안의 조형물들을 그대로 복사하여 세울 수
있도록 승낙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결국 부결되어 광림수도원 자체에서 나중에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이에 대한 가나안으로서의
대답은 모조에 의한 영성의 훼손이었다. 이렇듯 이들은 철저히 자신들만의 독창성과 그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쓴다.
또한 1980년대 한국에 머물던 세바스티아나 자매와 파쇼나타 자매의 철수 후에 그 누구에게도 독자적인 지부를 허가해 주지 않았
다. 여러 사람들이 가나안의 한국지부적 성격으로 한국에도 세워져 더욱 많은 활동들을 하고자 노력했으나 가나안은 자신들 안에
서 자신들과 일생을 같이 하기로 헌신되어 훈련받은 자기 멤버들이 아니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적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고, 아울러 자신들이 직접 관장하지 않는 한 지부적 성격의 모임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이들의 이토록 까다로운(?) 공동체 특성상, 이로 인해 가나안 공동체는 확장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이들의 특별한 노력으로 지금껏 가나안은 처음 설립 때와 같이 그들의 순수성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지
금은 설립자인 마더 바실레아 슐링크(M. Basilea Schlink)가 2001년 소천한 후로도 그들의 그 순수성이 변질되지 않고 잘 지켜져
오고 있다.
Ⅳ. 가나안 공동체의 삶
천국은 정말 있을까? 죽어서만 가는 천국 말고, 살아서도 맛볼 수 있는 천국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땅 위에서 천국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을까?...
지금은 모새골에서 ‘영성의 삶’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있는 임영수 목사가 예전 영락교회에서 시
무하고 있을 때 고민했던 것 중의 하나가 ‘천국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고, 그 ‘천국의 모형’을 이 지상 위의 교회를 통해 발견하
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분열되며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모습들을 대하게 되면서 ‘천
국의 모형’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들에 아파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기독교마리아자매회의 본부인 독일의 가나안 공
동체를 방문하여 ‘이곳이야말로 진정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천국의 모형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다’라고 고백하고 그 후 그는 새로운
힘을 얻어 더욱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 천국은 결코 혼자 있는 곳이 아니다. 에덴에서 아담의 홀로 있음을 보고 측은히 여겨 그의 갈빗대를 뽑아 그를 돕는 배필
의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서로 동거함’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
된 공동체성을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야 하고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는 이 땅 위에 천국의 모
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나안 공동체는 어떻게 천국의 모형으로서의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가? 몇 가지 그들 나름의 독특한 공동체 삶의 방식이 있
다.
◉회개기도: 이들의 공동체 삶에 있어 그 출발은 회개이다. 세계2차대전 때에 독일이 저지른 죄악들에 대한 회개운동으로 시작된
모임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 가나안에는 예수고난 동산이 있어서 이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날마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기에 힘쓴다. 이렇게 시작되는 기도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위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
든 일들을 위한 그들의 중보기도의 힘으로 연결된다.
◉빛가운데 교제: ‘회개기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수직적인 기도라면, ‘빛가운데 교제’는 서로간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참회와 용서
를 구하는 교제 행위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마음으로나 행동으로 지은 죄가 마음에 걸릴 때 특정한 시간을 정해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서로에게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므로서 공동체 안에 그 어떤 막힌 담이 있지 않도록 한다.
‘빛가운데 교제’는 가나안 영성을 대표할만한 특성이라 말할 수 있고, 이는 우리의 공동체 삶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적용 부분
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된다. 공동체 안에서의 마찰과 갈등을 서로 간에 어떻게 해결해나가고 있는가를 너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빛가운데 교제’는 [요일 1:7]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가 빛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
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일은 어떤 특정한 룰이나 공식적 제도 없이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신들 안에서 일어나는 필요에 따라 리더격
되는 자매들의 회의와 결정을 따라 시행된다. 전체적으로 모여 하기보다 각 공동체(부서) 마다 자체적 별도의 모임으로, 언제 어디
서나 모여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간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닌, 오직 일에 관한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과정에서 일에
관한 것이기 보다 개인감정에 의해 상처받은(준) 내용이라고 생각될 경우 이는 각 개인에게 연결된 상담자매에게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과 연결된 상담자매는 어느 특정인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건 다른 자매로 자신
의 상담자매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사실 ‘빛가운데 교제’는 상담관계가 잘 되어 있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열려 있듯 서로에
게도 열려 있는 관계라야 가능하다.
천주교는 매 주일(필요에 따라 주중에도) 고백성사 통해 자신의 문제 털어놓고 해결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
인적 상담관계가 통로화 되어 있지 않아, 목사님 설교 통한 일방적 해결방식에만 의지하게 된다.
◉말씀 카드: 회개기도와 빛가운데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죄를 용서받고 누리는 자유의 기쁨이 소극적이라면, 가나
안 곳곳에 비치해 놓은 말씀 카드함에서 그때 그때 필요한 말씀을 뽑아 그 날이나 그 사건의 지표로 삼는 ‘말씀 카드’ 활용은 적극
적인 신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카드 뽑기 방식은 우리 한국교회 안에 널리 보급확산돼 송구영신 예배 때와 같은 특별
한 절기에 많이 사용되기도 하고 있다.
Ⅴ. 끝맺는 말
"Everything God does is love even when we do not understand Him."
위의 말씀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가나안 메시지의 한 구절이다.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다.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어야만이 하나님
이 베푸시는 기적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가나안에는 있다. 그곳에서 믿음의 실체, 천국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 그곳에
하나님의 실체(Reality of God)가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있다기보다, 그들의 믿음의 길이 뻗쳐 있는 곳이기에 그들이 바라보는 그
끝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 그들, 가나안 공동체의 삶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