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 4. 30. 20:20
■ 응천사(應天祠)
경주이씨 27世 효자 은촌(隱村) 이동표(李東標)를 모시는 사우(祠宇)이다.
[세 계] 고려 말 평리공 인정(仁挺)의 후손
[소재지] 충남 천안시 수신면 백자3리
[향사일] 매년 음력 3월 12일
●응천사 묘정 비문(應天祠 廟庭碑文)
천안군 수신면 남쪽에 망경산(望京山)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 있으니 이곳이 은촌 선생(隱村)의 유풍이 전해 오는 경주이씨의 세거지 이다. 마을옆 기슭에 있는 응천사(應天祠)는 곧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은촌(隱村) 선생을 모신 사우(祠宇)이고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을 표창한 정문(旌門)이 서있다.
단기 4324년(서기 1991년) 2월에 유림의 공의로 성균관장에게 천거하여 정문을 세웠고 다음에 봄 3월에 선생을 사우에 봉안(奉安)하였다. 무릇 생폐(牲幣)을 드리고 제사를 모시는 것을 도덕을 존모함이니 도덕을 존모하면서 세덕과 선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원훈 좌명공신(新羅元勳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소판(蘇判)벼슬을 지내신 휘 거명(居明)이 기(起)세조이시다. 휘 금서(金書)는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시고 휘 핵(翮)은 호가 열헌(悅軒)이니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正二品)를 지내시고 휘 인정(仁挺)은 호가 성암(誠菴)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셨다. 그러나 직간(直諫)으로 임금의 뜻을 거스른바 되어 한때 불우한 처지에 있었으나 문정공 이지씨(文正公 李之氏)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휘 원선(元善)은 벼슬이 전서(典書)요, 휘 진(進)은 진사로서 감무(監務)를 지내셨는데, 문덕(文德)이 찬란하여 태종의 잠저(潛邸)때에는 교분이 두터웠다. 휘 식(植)은 어모장군 호군(禦侮將軍護軍)벼슬을 하셨는데 금성대군 옥사(錦城大君獄事 )에 연류 되어 청하현(淸河縣)에 은거하시다가 혐의가 풀린 뒤에 승지(承旨)벼슬에 추증(追贈)받았고 충절(忠節)로 정문을 명(命)하니 안성군 원곡면(安城郡元谷面)에 세웠다.
이분의 아들이 후(厚)인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한훤당 김선생(寒暄堂金先生. 김굉필)의 문인 이였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으니 곧 선생의 5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광전(光荃)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내셨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시고 순절하니 정려를 명하여 조손(祖孫)의 정문이 한곳에 서있다.
증조의 휘는 우신(又新)인데 집의(執義)를 배(拜)하였고 조의 휘는 문서(文瑞)인데 문과 진사(進士)로 광해조의 어지러울 때 시를 지어 이이첨(李爾瞻)과 절교(絶交)하였다. 고의 휘는 무(茂) 인데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승지벼슬을 추증 받았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이고 자는 중건(仲建)인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접견하지 않으셨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하셨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슬퍼하시며 정예(情禮)를 다하시고 장례를 모신 뒤에 6년 동안을 시묘하셨다. 깊은 산골이라 때로는 호랑이가 나와서 보호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사초가 말랐다고 한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꾸어서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였다.
장하도다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교육의 원천이니 어찌 동인의 감화뿐이랴 어사가 선생의 여막을 찾아보고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숙종께서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재수하셨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서 향인의 논의로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시니 훌륭하도다.
지극한 효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감흥 하는지라 신명이 감흥하면 풍속이 변하며 지명도 바뀌게 되나니 선생의 덕이 그러하기에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빛나도다.
선생의 묘정(廟廷)에 효조(孝鳥)가 서식하고 장송구목이 충해와 설화도 없으니 과연 신명(神明)의 감흥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아들은 만승(萬升), 만익(萬益)이요. 손자는 종진(宗震), 득헌(得獻), 성헌(聖獻), 종환(宗煥)이요.
증손은 경상(敬常), 경철(敬哲), 경천(敬天), 경노(敬老), 효순(孝舜), 효증(孝曾)이요.
현손은 태진(泰鎭), 형진(衡鎭), 헌진(憲鎭), 정진(定鎭), 관진(寬鎭), 원진(元鎭), 화진(華鎭), 좌진(左鎭), 익진(翼鎭),이요.
5대손은 응규(應奎), 학규(學奎), 환규(煥奎), 선규(善奎), 병규(秉奎), 화규(華奎), 인규(麟奎), 용규(龍奎), 완규(完奎), 철규(喆奎), 의규(毅奎), 준규(俊奎)이다.
이상 선조의 5대손까지의 위패(位牌)를 행렬의 순차로 같은 사우(祠宇)에 모시고 매년 가을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기로 하였다.
모름지기 세일제는 묘정(墓庭)에서 봉행함이 선현의 예전(禮典)이라 하겠으나 세속의 변천에 따라 사우(祠宇)에서 봉행케 됨을 조상의 영영(英靈)께서도 감흥(感興)하시리라 믿는다.
이 묘정비(廟庭碑)를 세움에 있어 규석, 규진, 종건(圭錫 圭鎭 鍾健)이 나에게 기문을 청함으로 제삼고사하다가 삼가 찬하노니 은촌선생의 덕행과 효성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단기 4325년(1992) 3월 일
진향 강인규는 삼가 짓다(晋陽 姜麟圭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