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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북포루입니다. 북포루에서 본 통영항. 통영항 2. 통영항3. |
여황산 정상(북포루)
통영성의 북포루란 정자가 있다. 통영성지안내문과 통영성도(그림), 벤취, 화장실, 수도시설이 있는 공원으로 조망이 좋은 장소이다. 여황산(鎭山,主山,北山,後山, 안뒷산) 통영시가지의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등을 각각 경계짓는 해발 약 174m의 단아한 형세의 산이다. 산정의 북포루(北?樓)를 비롯하여 남쪽 기슭에는 세병관 및 충렬사가 위치해 있으며, 그 아래로 시가지를 감싸안은 형세를 이루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고을을 진호한다는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산이다. 즉 이곳 여황산 기슭에 연해있는 통영항 강구(江口) 해안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열린 산에는 동남향으로 휘감아 좌청룡 망일봉(望日I峰)을 맺고, 서쪽으로 길게 뻗어 천함산(天函山)이 우백호를 이루었다. 시가지 남쪽에는 안산(案山)이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으며, 수구(水口)를 이루는 바다 건너변에는 미륵산(彌勒山)이 조산(朝山·客山·案對山)으로 좌정하여 고을의 국(局)을 열고 있다. 오(吳)나라 임금이 지극히 아끼던 화려한 배 여황을 적국 초(楚)에 빼았겨 애통해 하다가 결국 이를 되찾아 설욕했다는 전사(戰史)가 전한다. 이로 인해 후세에 여황은 호화롭게 장식한 배의 대명사 그리고 나아가 훌륭하게 군세를 갖춘 큰 전선(戰船)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여황산」 또한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산이름을 고대 중국의 배이름에서 딴 연유는 임진란 당시 왜적의 침략을 이곳 앞 바다에서 여지없이 무찔러 설욕했던 우리 수군의 한산승첩을 옛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에 견주었음직하며, 이 고장에 통제영을 설치한 이래 더욱 정비된 삼도수군의 당당한 군세와 함께, 나아가 통제영 군영을 진호하는 산이란 크나 큰 상징성에 걸맞는 산이름을 갖추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풍수지리적 지명인 「진산(鎭山)」·「주산(主山)」 이외에 고을의 뒤편 북쪽에 위치해 있는 산이라 하여 「북산(北山)」 또는 「후산(後山)」이라고도 일컬었다. 토박이지명 「안뒷산(안띠산)」 은 주택의 안채에 딸린 뒷간을 「안뒷간(안띠깐)」 그리고 안채 뒤에 있는 마당이나 뜰을 「안뒤곁(안띠꼍)」이라 칭하는 바와 같이 큰 고을의 중심지역을 이루는 마을 뒷산의 뜻으로 「안뒷산」이라 칭한 것이 이 고장 토박이 발음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된소리로 변하여 「안띠산」이라 일컫게 되었다. 한편 여황산의 「여황」을 단순히 배의 이름, 「나룻배(거룻배)에서 화려하게 꾸민 배」 또는 「임진왜란 때의 배이름」 그리고 「사람이 죽어 영혼이 극락정토의 도솔천까지 타고 가는 배의 이름」이라는 불교 지명설 등 종래의 여러 지명유래설이 었다.
▼남해안 길 12. 남파랑 28.29코스 (통영선촌항-세병관-해저터널). 2
09 : 19. 우측 동피랑길로 들어서고
09 : 24. 동피랑 마을길 안내도.토영이야~길.
확대해 본 동피랑마을 안내판.
통영시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에 위치한 이 마을의 이름은 '동피랑'으로, '동쪽 벼랑' (비탈의 지역 사투리 '비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피랑 마을 위에서 강구항을 볼 수 있으며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길에 있는 담벼락마다 벽화가 그려져있다. 통영시 정량동, 태평동 일대의 산비탈 마을로 재개발 계획이 수차례 변경 수정 되어 왔다.[2] 벽화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되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 집 3채만 헐고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이후 철거 대상이었던 마을은 벽화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게 되었다.[1]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저소득층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언덕마을에서 바라보는 해안도시 특유의 아름다운 정경을 가지고 있다.[2] 2014년 7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의 모범적사례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 공식프로젝트' 인증을 획득 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통영시와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동피랑 벽화마을조성 초기 당시 진행되었던 '동피랑 사생대회'를 개최했다.
09 ; 26. 도자기로 만든쉼터.
뒤 돌아 본 통영항과 뒤로 미륵산.
진짜 사람인줄 알았다.
가끔 찻집도 있고 09 : 43.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로 올라간 동포루.통영시가와 북포루 서포루가 건너다 보인다.
동포루.
동포루에서 본 문화회관(좌)- 통영항의 구름다리-미륵산.
동포루에서 본 북포루와 세병관(좌측끝).
동포루에서 본 서포루(좌)와 세병관(우). 충렬사는 가운데 고개 넘어에.
동포루
동피랑끝. 10 :08. 중앙시장.
세병관입구. 10 ; 22. 사적 402호인 삼도수군통제영.국보 305호인 세병관.관람료 개인 \3000. 경로는 무료.
한바퀴 돌아보고 산중턱의 도로따라
망일루. 사진 우측에 매표소.
국보 305호인 세병관.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세병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육지인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객사건물이다. 세병관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 「세병마」에서 가져온 것으로, 성인 남자의 키보다도 더 큰 현판의 글씨를 보고 있자면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에 각각 수군절도사를 두어 지휘하게 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여금 조선의 수군을 담당하게 하는데 처음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전쟁 후에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던 통제영이 통영에 자리 잡은 것은 선조 36년(1603년)으로, 6대 통제사인 이경준에 의하여 세병관을 비롯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그 이후 통영은 삼도수군의 중심지로 통제영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지금도 통영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나전칠기는 그때 통제영에 물건을 댈 요량으로 만들어졌던 12공방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망일루를 거쳐 삼문인 지과문을 지나면 세병관이 나온다. 여수의 진남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목조 건물로 작지 않은 크기를 자랑한다. 바깥으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고 안으로는 분합문이 들려져 있다. 들여다보면 내부에 한층 더 높이 만들어진 작은 방을 볼 수 있는데,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고 한다.
지과문 옆의 2층 정자인 수항루는 통영시내에 있던 것이었으나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온 건물로 이름 그대로 왜장에게 항복문서를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병관 앞으로 이경준의 치적을 담은 두룡포기사비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간 통제사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세병관 주위로 옛 통제영지 복원 공사가 2013년에 완료되어 12공방, 백화당등의 건물이 복원 되었다.
출처:(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최정규, 박성원, 정민용, 박정현)
기삽석통.
통제영 창건 당시 심어졌다는 전해지는 둘레 5m에 수령 400년 이상 되는 느티나무.
건물들이 많다. 이 샛길로 중턱의 2차로로 올라가서 충렬사로 간다.
통제사 비군.
두룡포기사비.
10 ; 56. 삼거리 고개. 좌측으로 가면 바로 서포루이나 충렬사를 가려면 직진해 내려간다.
11 : 12. 사적 236호인 충렬사. 이순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
사적 제236호. 1973년 지정. 면적은 9,049m2이다.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06년(선조 39)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으며, 1663년(현종 4)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충렬사는 본전(本殿)과 정문(正門) ·중문(中門) ·외삼문·동서재·경충재·숭무당·강한루·유물전시관 등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1년(숙종 7)에 제60대 민섬 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이며 충무공 후손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보물 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 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두산백과)
강한루.
강한루
東入西出 들어갈땐 사진 우측문으로 .나올땐 사진 좌측문으로
통영충렬묘비
충렬사
충렬사 내부.이순신장군 영정과 방명록,헌성금함.
11 ; 18. 큰 도로에서 좌측길로 올라간다. 서피랑 이야기판.
서피랑 99계단이나 피아노계단은 좀더 내려가서 좌측인데 남파랑길은 여기서 들어간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마주보고 있는 서피랑(서쪽의 비탈)이 '제2의 동피랑'을 꿈꾸고 있다. 서피랑을 걷다보면 윤이상과함께학교가는길, 서피랑문학동네, 99계단과 음악정원, 보이소 반갑습니데이! 인사거리, 뚝지먼당 98계단, 피아노계단 등 서피랑의 숨은 보물길을 만나게 된다. 서피랑은 동피랑과 함께 지역 내 대표적인 달동네로, 해방 이후 집장촌이 형성되면서 지역민조차 찾기를 꺼리는 천덕꾸러기 동네로 전락했다. 2000년대 들어 집장촌은 자연스레 정비됐지만 마을은 이미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2007년 동피랑이 철거마을에서 벽화마을로 거듭날 때까지, 서피랑은 어떠한 변신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200m 길을 '인사하는 거리'로 지정하면서 활력을 점차 찾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일에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집장촌을 오르내리던 서피랑 99계단은 벽화와 조형물이 조성된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민들이 직접 제작한 크고 작은 예술품이 마을 곳곳에 내걸렸다. 99계단은 첫 계단부터 끝까지 1부터 99번의 숫자가 계단마다 한 켠에 작품으로 그려진다. 단정하게 혹은 비뚤게, 더러는 뒤집어진 채, 선 걸음으로 넉넉하게 읽을만한 크기로 씌어지고 있다. 그런데 시작 계단은 99부터 맨꼭대기 1까지로 거꾸로 새겨진다. 한계단 마다 한 숫자씩 빼면서 오르게 하는 이유는 안그래도 힘든 인생길, 숫자 하나씩의 무게를 비워가며, 줄여가며 오르다보면 힘도 덜 든다는 나름의 의미다. 가위 바위 보를 하든, 그저 묵묵히 걸어 올라보든 꽉 찬 수, 9가 쌍으로 만나는 아흔 아홉계단을 걸어 올라가 볼 일이다. 나머지 하나는 본인이 채우게 될 듯하다.
역사 유적을 스토리텔링화한 마을만들기 사업도 병행했다. 서피랑 아랫마을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출생지이자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배경지로 서문고개, 간창골, 명정샘 등이 등장하는 문학 동네인 것을 활용했다. '박경리 문학 동네(서피랑) 골목길 투어'를 수시로 개최, 전국 문학인들이 몰려들면서 서피랑 이미지 변신에도 성공했다. 행정자치부의 '2015 희망마을 만들기사업'에도 선정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초등학교 등굣길을 활용한 '윤이상 학교 가는 길'과 서피랑 내 가장 가파른 서호벼락당에 피아노 계단도 조성했다. 피아노 계단은 기존 140개 계단을 활용해 '높은음자리표'를 형상화하고 이 중 24개 계단은 실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건반과 음악정원도 함께 조성되었다.서피랑 정상에 위치한 서포루에서는 통제영과 통영의 중심항인 강구안, 맞은편 동피랑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비경을 자랑한다. 서포루는 전국 사진작가가 선정한 사진찍기 명소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11 : 23. 서피랑터널. 서피랑공원. 좌측으로 가면 좀전에 지나간 삼거리다. 우측으로 올라간다.
11 : 34. 서포루.세병관과 북포루. 동포루와남망산, 통영항.미륵산조망이 좋다.
서포루.
서포루에서 성항과 미륵산.
서포루에서 북포루와 세병관.
서포루에서 통영여객터미널.
서포루에서 마리나리조트(맨 좌측와 통영국제음악당-미륵산
서포루에서 남망산-문화회관-강구안(통영항)
남망산-강구안. 11 : 48. 서호시장. 한바퀴 돌아보고 먹을곳찾아 이리저리돌아
서호시장. 12 : 05/46. 통영항앞의 풍만복국집에서 참복지리(\15000*2)로 점심.
12 : 51. 통영항여객터미널.
우측으로 13 : 12. 해저터널.1932년 동양 최초의 해저구조물로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해수면아래10m.
통영해저터널은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해저터널이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너비 5m, 높이 3.5m이다. 그 전의 미륵도는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때는 도보로 왕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어민의 이주가 늘면서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해저터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양쪽 바다를 막고 바다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을 만든 것으로 터널 입구에 쓰여 있는 '용문달양(龍門達陽)'은 '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문'이라는 뜻이다. 통영시내 당동 쪽 터널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터널 내부는 포장된 경사로이며 약 483m 길이이다. 안쪽에 통영 관광 명소들에 대한 소개 판넬이 전시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로 약간 음침한 분위기이지만, 우리 역사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장소이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2-04-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