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닛켄 어은존 예하님의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강의 제1회 | [어서 해설 기획연재]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弘安二年十月 五十八歲 御作 니치렌(日蓮) 이를 찬(撰)함
대저 일대성교(一代聖敎)란 통틀어 五十년(年)의 설교(說敎)이며, 이를 일체경(一切經)이라고 하느니라. 이를 나누어 二로 하니 一에는 화타(化他)요 二에는 자행(自行)이니라. 一에는 화타(化他)의 경(經)이란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의 四十二년(年)동안 설(說)하신 모든 경교(經敎)이며 이것을 권교(權敎)라 하고 또는 방편(方便)이라 이름하느니라.
이것은 사교중(四敎中)에는 삼장교(三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의 삼교(三敎)이며·오시중(五時中)에는 화엄(華嚴)·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로서 법화이전(法華以前)의 사시(四時)의 경교(經敎)이니라.
또 십계중(十界中)에서는 전(前)의 구법계(九法界)이고, 또 꿈과 생시중(生時中)에서는 몽중(夢中)의 선악(善惡)인데, 또한 꿈을 권(權)이라 하고, 생시(生時)를 실(實)이라 하느니라. 이런 고(故)로 꿈은 임시(臨時)로 있으며 체성(體性)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권(權)이라고 하느니라.
생시(生時)는 상주(常住)로서 불변(不變)한 심(心)의 체(體)인 고(故)로 이것을 이름하여 실(實)이라 하느니라. 고(故)로 四十二년(年)의 모든 경교(經敎)는 생사(生死)의 꿈 속의 선악(善惡)의 일을 설(說)하는 고(故)로 권교(權敎)라고 하는데, 몽중(夢中)의 중생(衆生)을 유인(誘引)하여 경각(驚覺)케 해서 법화경(法華經)의 생시(生時)로 하고자 생각하신 준비(準備) 방편(方便)의 경교(經敎)이므로 권교(權敎)라고 함이라. 이에 의(依)해서 문자(文字)의 읽는 법(法)을 바르게 하여 이해(理解)할지니라.
고(故)로 권(權)을 가(假)라고 읽으며, 임시(臨時)인 것의 본보기로는 꿈으로써 본(本)으로 함이라. 또 실(實)은 참됨(實)이라고 읽으며, 실사(實事)의 본보기는 생시(生時)이니라. 고(故)로 생사(生死)의 꿈은 가(假)로서 성체(性體)가 없으니 가(假)인 것의 본보기이며 고(故)로 망상(妄想)이라고 하느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는 실(實)로서 생멸(生滅)을 벗어난 마음이므로 진실(眞實)의 본보기이며, 고(故)로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니라. 이로써 권실(權實)의 이자(二字)를 규명(糾明)하여 일대성교(一代聖敎)의 화타(化他)의 권(權)과 자행(自行)의 실(實)과의 차별(差別)을 알지니라.
고(故)로 사교중(四敎中)에는 전(前)의 삼교(三敎)와, 오시중(五時中)에는 전(前)의 사시(四時)와, 십법계중(十法界中)에는 전(前)의 구법계(九法界)는 동일(同一)하게 모두 몽중(夢中)의 선악(善惡)의 일을 설(說)하는 고(故)로 권교(權敎)라고 한다. 이 교상(敎相)을 무량의경(無量義經)에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설(說)하셨느니라 이상(已上). 미현진실(未顯眞實)의 제경(諸經)은 몽중(夢中)의 권교(權敎)인 고(故)로 석첨(釋籤)에 가로되「성(性)은 다름이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환(幻)에 의하여 환(幻)의 기(機)와 환(幻)의 감(感)과 환(幻)의 응(應)과 환(幻)의 부(赴)를 일으킴이라·능응(能應)과 소화(所化)는 더불어 권실(權實)이 아니로다」이상(已上),
이는 모두 몽환(夢幻) 중(中)의 방편(方便)의 교(敎)이니라. 성수무수(性雖無殊) 등(等)이란 꿈꾸는 심성(心性)과 생시(生時)의 때의 심성(心性)과는 오직 하나의 심성(心性)이며,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할지라도, 꿈 속의 허사(虛事)와 생시(生時)의 때의 실사(實事)와 이사일(二事一)의 심법(心法)으로써 본다고 생각함도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석(釋)이니라.
지금까지 각 포교구(布敎區)의 친교(親敎)를 개시(開始)한 이래(以來) 「개목초(開目抄)」를 배독(拜讀)해 왔습니다만, 전번에 그것이 종료(終了)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해도(北海道) 제이(第二) 제삼(第三) 포교구(布敎區) 친교(親敎)부터는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感文敎相廢立)을 강의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긴 어서(御書)이므로 일, 이회(日,二回)로는 도저히 배독(拜讀)할 수 없습니다. 아마 십회(十會)정도는 걸린다고 생각됩니다만, 오늘은 그 첫 번째로서 어서(御書)의 최초(最初) 부분부터 배독(拜讀)하려고 생각합니다. 이「삼세제불총감문교상페립(三世諸佛總脚文敎相廢立)」이란 어서(御書)는 홍안이년(弘安二年)에 집필하신 어서(御書)이고, 또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을 도현(圖顯)하신 십월(十月)에 쓰셨습니다.
「총감문초(總感文抄)」는 표면(表面)의 어법문(御法門)으로는 일단 석존(釋尊)일대(一代)의 화도(化導)에서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라는 것을 기본(基本)으로 하여 그것으로 부터 불법(佛法)의 정의(正義)를 어지남(御指南)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대한 어서입니다. 이것에 대해 니치칸상인은 불법(佛法)의 본원(本源)인 구원명자(久遠名字)의 보신(報身) 혹은 구원원초(久遠元初)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라는 부처를 배(拜)하고 또 거기에 대성인(大聖人)의 불법(佛法)의 제일 근본(根本)법체(法體)를 나타내고 계시다고 배(拜)하고 계십니다.
특히 석존(釋尊)을 중심(中心)으로 한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일체(一切)를 묶은 가르침의 중대(重大)한 기본(基本)이 설(說)해져 있고, 여기에는 대단히 소중한 어법문(御法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용(內容)이 교리적(敎理的)인 이야기가 되어 어려운 면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배설(拜說)하겠습니다.「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勸文敎相廢立)」이라는 어서(御書)는 크게「자행(自行)」과「화타(化他)」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자행(自行)이란 「스스로 행(行)한다」는 것이고, 화타(化他)란 「타(他)를 지도(指導)한다」는 것이며 이는 대성인(大聖人)의 삼대비법상(三大秘法上)으로는 말법(末法)의 수행(修行)이 됩니다.
「지금 니치렌(日蓮)이 부르는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라는 어지남(御指南)대로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의 가르침은 근본(根本)의 법체(法體)이고 일체 인간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의 대직도(大直道)이므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부분에 자행(自行)도 화타(化他)도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형태의 신심수행(信心修行)이 중요(重要)하다고 어지남(御指南)하셨습니다. 위의 어문(御文)은 대성인(大聖人)의 삼대비법(三大秘法)중 본문(本門)의 제목(題目)에 대한 어지남(御指南)입니다만, 석존(釋尊)의 경우는 일대(一代) 오십년(五十年)이라는 긴 동안에 낮은 가르침부터 점차 높은 가르침을 설(說)하고, 그중에 권교(權敎)나 실교(實敎)같은 단계(段階)가 숙익(熟益), 탈익(脫益)의 화도(化導)로서 존재(存在)합니다.
그에 대해 대성인(大聖人)의 경우는 하종(下種)의 어본불(御本佛)의 화도(化導)이므로 제일 중심부분을 곧바로 설(說)하십니다만, 그것은 석존(釋尊)의 가르침의 절차상으로 대성인(大聖人)의 가르침이 말법(末法)에 나타나오는 의미(意味)가 있는 것입니다. 즉 법화경(法華經)의 결요부촉(結要付囑)으로서의 묘호렌게교(妙法蓮華經)의 본연의 모습은 권실(權實) ․본적(本適) ․종탈(種脫)의 상대(相對)로 종천지심(從淺至深)하고 그 제일 근본(根本)에 있는 구원원초(久遠元初)의 불법(佛法)의 본원(本源)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체(法體)를 본문(本門)의 삼대비법(三大秘法)으로서 말법(末法)에 나타내고 계시다는 점에서 석존(釋尊)의 불법(拂法)도 대성인(大聖人)의 어지남(御指南)속에서 배(拜)하여야 합니다.
「오로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부르면 된다.」라는 것은 당연(當然)합니다. 그것만으로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길은 열려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에는 인생(人生)의 여러 가지 內容(내용)이나 문제(問題) 또 사종교(邪宗敎)등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最近)에는 오음진리교(眞理敎)같은 이상한 것도 있고 이런 것이 나오는 것도 지금의 일본불교(日本佛敎)의 모순 자체(自體)가 불법(佛法)의 본의(本義)에서 떠나 혼란(混亂)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서 정법정의(正法正義)를 믿고 그리고 연(緣)이 있으면 「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一文一句)라도 설(說)할 지어다.」(御書 668)라는 어지남(御指南)하에 승속(僧俗)이 하나 되어, 절복(折伏)을 해서 불도(佛道)의 정의(正義)를 나타내 간다는 것이 중요(重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당(當) 어서(御書)에 지적하신 것처럼 석존불법(釋尊佛法)의 출처(出處) 진퇴(進退)를 배우는 것이 중요(重要)합니다.
그러면 본문(本文)을 배독(拜讀)하겠습니다. 「대저 일대성교(一代聖敎)란 통틀어 五十년(年)의 설교(說敎)이며, 이를 일체경(一切經)이라고 하느니라.」 석존(釋尊)은 일대(-代) 오십년(五十年)동안 많은 성교(聖敎)를 설(說)하셔서 이것을 석존(釋尊)의 일체경(一切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체경(一切經)은 정원(貞元), 개원(開元)의 경장목록등(經藏曆綠等)에 의해 오천권(五千卷) 내지 칠천권(七千卷)이었다고 하며, 실로 많은 경권(經卷)이 인도(印度)에서 중국(中國), 그리고 일본(日本)에 전(傳)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전부를 읽어봐도 한문(漢文)이므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엤날 불교가(佛敎家)도 모두 일대(一代) 오십년(五十年)을 어떻게 구분해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또 가령 알았다고 자신은 생각해도 그것은 제멋대로의 생각이고 오해(誤解)하고 있는 면이 많았습니다. 고로 바른 견해(見解)로서 이것을 구별(區別)하여 이(二)로 한다. 「일(一)에는 화타(化他) 이(二)에는 자행(自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화타(化他)라는 것은 석존(釋尊)이 숙익(熟益) ․ 탈익(脫益)의 화도(化導)의 경우 중생(衆生)에게는 여러 가지의 기근(機根)이 있어 그중에 정도(程度)가 낮은 사람에게는 낮은 가르침을, 혹은 중(中) 정도(程度)의 사람에게는 정도(程度)에 맞는 가르침을 설(說)한다는 형태(形態)로 설(說)하는 가르침의 내용(內容)을 상대(相對)의 기근(機根)에 맞춤으로 화타(化値)에 대한 가르침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자행(自行)은 석존(釋尊)이 스스로의 성불(成佛)을 위해 행(行)한 가르침으로 그것은 근본적(根本的)인 부처의 깨달음 자체(自體)의 내용(內容)을 가진 것입니다. 이 이행(二行)의 문(文)이 일대성교(一代聖敎)를 모두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경(經)을 각각 해석(解釋)하는데 우선 화타(化他)를 가르칩니다.
이 화타(化他)의 경(經)에 대해 교법(敎法)과 비유(譬喩)라는 두개가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도 방편품(方便品) 다음에 비유품(譬喩品)이 있고 방편품(方便品)으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법(法)이 설(說)해진 뒤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비유(譬喩)가 설(說)해져 있습니다.
이같이 대성인(大聖人)도 석존(釋尊)의 불법(拂法)의 화타(化他)에 대해 설(說)하실 때 비유(譬喩)를 가지고 말씀 하셨습니다.「일(一)의 화타(化他)의 경(經)이란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의 사십이년(四十二年)동안 설(說)하신 모든 경(經)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 사십이년간(四十二年間)의 가르침이 화타(化他)의 경(經)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권교(權敎)라 하고 또는 방편(方便)이라 이름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만,
이「권교(權敎)」라는 것은「실교(實敎)」에 대한 말이며 또「방편(方便)」이란 진실(眞實)에 대한 말입니다. 여러분도 읽으신 법화경(法華經)의 방편품(方便品)의 「방편(方便)」은 석존(釋尊)이 사십이년간(四十二年間) 설(說)한 가르침은 방편(方便)이라는 방편(方便)의 진짜 이유(理由)를 법화경(法華經)에 설(說)하고 있기 때문에 방편품(方便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거짓말도 방편(方便)」 이라는 말도 있들이 석존(釋尊)은 성불(成佛)이라는 진정한 목적으로 중생(衆生)을 인도(引導)하기 위한 手段(수단)으로서 여러 가지 형태(形態)로 법(法)을 나누어 설(說)하고 계십니다. 예(例)를 들면 탑(塔)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 디딤틀을 짭니다만, 이 발 디딤틀이 방편(方便)이 되는 셈입니다.
탑(塔)이 완성되면 발 디딤틀은 필요 없으므로 제거합니다. 결국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고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방편품(方便品) 제이(第二)에서는 왜 이런 방편(方便)을 만들었는가 하는 이유(理由)를 밝히면서 진정한 가르침에 즉(卽)하는 방편(方便), 이것을 「비묘방편(秘妙方便)」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에 의해 바른 가르침으로 인도(引導)하는 것입니다.
「방편(方便)」의「방(方)」은 방법(方法),「편(便)」 은 소식이므로 여러 가지방법(方法)으로 목적에 끌고 간다는 의미(意味)입니다. 석존(釋尊)의 사십이년(四十二年)의 설법(說法)은 어디까지나, 이 목적을 위한 手段(수단)이며 이것을 화타(化他)의 경(經)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이것은 사교중(四敎中)에는 삼장교(三藏敎)와 통쿄(通敎)와 별교(別敎)와의 삼교(三敎)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사교(四敎)」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문(御文)에는 「삼장교(三藏敎)와 별교(別敎)와 통교(通敎)」라고 삼교(三敎)를 들고 있습니다만, 사교(四敎)에는 또 하나 「원교(圓敎)」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삼장교(三藏敎)와 통교(通敎)와 별교(別敎)가 방편(方便) 화타(化他)의 권교(權敎)이고 그에 대해 원교(圓敎)는 실교(實敎)에 들어가므로 여기서는 생략(省略)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교(四敎)가 나왔습니다만, 이 부분은 중요(重要)함으로 좀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려 합니다. 즉 가르침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부모(父母)가 자식(子息)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도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보시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모두 각각 작은 일에 걸려 잡혀서 자기자신(自已自身)이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중생(衆生)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만, 거기에는 반드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가르침 중에는 반드시 가르침의 내용(內容)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사(醫師)가 환자에게 병(病)을 고치기 위해 처방(處方)하는 약(藥)은 반드시 적절한 내용(內容)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간(世間)에서는 의사(醫師)에게 치료(治療)받는 사람이 꽤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잘 보면 단지 육체적(肉體的)인 병자(病者)도 있지만, 또 마음의 (病)이 그 원인(原因)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身體)는 일단 건강해 보여도 마음의 병(病) 자체(自體)가 생명(生命)속에 미혹(迷惑)되어 각각의 생활(生活)속에 고통(苦痛)이나 비참(悲慘)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신심(身心)의 병(病)을 고치기 위해 부처님이 주시는 약(藥)의 내용(內容)이란 무엇인가라고 생각 하겠지만 이것은 바른 진리(眞理)라는 규준(規準)이 있어 거기에서 약(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진리(眞理)가 셋이 있는 중의 하나는 「공(空)」이라는 진리(眞理)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은 과거(過去)로부터의 인연(因緣)에 의해 생겨나고 있는 것이고 그 선(善) ․악(惡), 행(幸) ․불행(不幸)의 모습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저런 부모(父母)밑에 태어났다는 것이 싫다. 다른 부모(父母) 밑에 태어났으면」 한다 해도 현실(現實)에 태어난 이상 그것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현재(現在) 자기가 가난하든 어떻든 그 같은 현실(現實)의 모습은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過去)로부터 인연(因緣)에 의한 과보(果報)이고 따라서 그 자기(自己)의 인연(因緣)을 앎과 동시에 타(他)의 인연(因緣)도 알아가는 것에 의해 바른 인생(人生)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오로지 고민하고 원망하고 하는 것은 역시 진리(眞理)에서 벗어난 모습입니다. 이 인연(因緣)에 의한 만상(萬象)의 상하승침(上下昇沈) 유위전변(有爲轉變)의 진리법칙(眞理法則)을 「가(假)」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일체(一切)의 사람들이 현실(現實)에 사물(事物)이 존재(存在)한다는 집착(執着)을 갖는데 대해, 인연(因緣)에 의해 임시로 화합(和合)되어 있는 것은 인연(因緣)이 다하면 반드시 변화(變化)한다는 의미(意味)의 현실적(現實的)인 것을 가리키는 진리(眞理)가 가제(假諦)입니다. 그리고 변화(變化)가 진리(眞理)에 배(背)하느냐 아니냐에 의해 선악(善惡)의 가치(價値)에 의해 좌우(左右)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공(空)이라는 것, 혹은 가(假)라는 것이 진실(眞實)이라고 집착(執着)해 버리는 모습에서 그 양방(兩方)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립(對立)되는 「중도(中道)」와 그 양방(兩方)을 모두 구비(具備)한 「중도(中道)」 의 진리(眞理)가있습니다.
그러면 어문(御文)으로 다시 돌아갑니다만 삼장교(三藏敎)라는 것은 공(空)중에서도 대단히 낮은 공(空)이고, 만물(万物)에 대한 유견(有見)에 집착된 기근(機根)이 낮은 사람들에게 설(說)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有)의 집착을 깨기 위해 「너희 생명(生命)은 본래(本來) 공(空)이다. 」라고 해도 모르는 사람에게 머리카락 하나를 떼서「이것이 당신의 생명(生命)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요. 또 신체(身體)중의 아주 일부(一部)의 세포(細胞)를 가지고 「이것을 당신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하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전부를 취해 보면, 결국 당신 자체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분석(分析)해 가며 「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라며 공(空)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멸(生滅)의 이(理)라 하고 대단히 어리석고 치우친 공(空)이지만, 생(生)한 것은 멸(滅)한다는 견해(見解)로 공(空)을 설(說)하고 미혹(迷惑)으로부터 작은 깨달음에 들게 하는 것이 삼장교(三藏敎)입니다. 다음 통교(通敎)는 체공(體空), 즉 모든 것의 그 자체(自體)가 공(空)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알게 되면, 그 안에 현실(現實)의 가(假)의 모습이 있고, 그리고 중도(中道)도 있다는 부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고로 통교(通敎)에는 높은 가르침에 들어가는 「통입(通入)」이란 의미와 기근(機根)이 낮은 사람은 전(前)의 삼장교(三藏敎)에 되돌아간다는 형(形)의「통동(通同)」이란 뜻의 양방(兩方)이 있습니다만, 어떻든 이것은 대승(大乘)의 초문(初門)이라고 합니다.
또 별교(別敎)는 중도(中道)를 설(說)하는 한 단계(段階) 높은 대승(大乘)의 보살(蓄龍)의 가르침입니다. 삼장교(三藏敎)나 통교(通敎)에는 보살(菩薩)이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가르침이 있지만 별교(別敎)는 단지 대승(大乘)의 보살(菩薩)만의 가르침입니다. 보살(菩薩)은 이승(二乘)과 달리 자비(慈悲)를 가지고 중생(衆生)의 고뇌(苦惱)를 구(救)하는 원(願)을 세우므로 중생(衆生)의 각각의 인연(因緣)을 알아야 한다. 고(故)로 공(空)의 진리(眞理)를 배움에 의해 또 그들 위의 중도(中道)의 이(理)를 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중도(中道)는 진실(眞實)이 아니라 방편(方便)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 별교(別敎)의 삼교(三敎)라는 것은 그러한 독립(獨立)된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중생(衆生)의 기근(機楓)에 따라 삼장교(三藏敎)에는 단공(但空)의 법문(法門), 통교(通敎)에서는 체공(體空)의 법문(法門), 별교(別敎)에서는 공가중(空假中)의 셋이 각각 독립(獨立)되어 설(說)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교(圓敎)에서 비로소 진실(眞實)의 가르침으로서 공가중(空假中)의 전부가 하나이고, 또 셋이라는 것이 설(說)해지는 것입니다.
즉 공(空)안에 중도(中道)가 구비되고, 또 중도(中道) 그대로 가(假)이고, 가(假)가 그대로 공(空)이다라는 식으로 설(說)하신, 한 가르침 안에 전부가 구비(具備)되어 있다는 대단히 소중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모든 것에 참된 가치(價値)를 부여해가는 진리(眞理)의 내용(內容)이 설(說)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융(圖融)의 삼제(三諦)라고도 호구(互具)의 삼제(三諦)라고도 하는 원교(圓敎)의 진리(眞理)의 내용(內容)입니다.
다음의 「 오시중(五時中)에는 화엄(華嚴)과 아함(阿含)과 방등(方等)과 반야(般若)로써 법화(法華)보다 전(前)의 사시(四時)의 경교(經敎)이니라.」라고 있습니다만, 석존(釋尊)이 설(說하신 일대(一代)의 가르침에는 우선 화엄경(華嚴經) 육십권내지 팔십권이 있습니다. 또 아함경은 잡아함 ․중아함․ 장아함․ 중일아함의 네 개가 있습니다만 불교(佛敎) 이외(以外)의 외도(外道)의 잘못된 것을 타파(打破)한 내용(內容)의 것인 동시(同時)에 조금 전에 삼장교(三藏敎)란 의미(意味)의 소승(小乘)의 가르침을 설(說)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등(方等)」의 「방(方)」은 넓다는 의미 「등(等)」은 평등(平等)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널리 공가중(空假中)의 삼제(三諦)의 법문(法門)이 전부 들어 있고 또 삼장교(三蘿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의 네개의 내용(內容)이 전부(全部)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등부(方等部)부터는 대승교(大乘敎)가 됩니다.
다음의 「반야(般若)」란 많은 반야부(般若部)중의 반야(般若) 즉, 대승(大乘)의 지혜(智慧)를 설(說)하는 경(經)입니다. 이 안에는 통교(通敎)와 별교(別敎), 그리고 진실(眞實)의 가르침인 원교(圓敎)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진리(眞理)의 내용(內容)이 약미(藥味)로 설(說)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원교(圓敎)라는 완전(完全)한 부처의 가르침으로 해서, 가제(假諦)라는 인연(因緣) 화합상(化合上)에서 가령 아무리 불행(不幸)한 상태(狀態)라 해도, 그 가제(假諦)가 그대로 중(中)과 공(空)의 전부(全部)에 걸친 원융(圓融)되었으므로 현실(現實)의 불행(不幸)한 모습만이 진실(眞實)이 아닌 것입니다.
즉 가(假)의 자유(自由)와 공(空)의 평등(平等)과 중(中)의 존엄(尊嚴)의 덕(德)은 그대로 법계(法界)의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구비(具備)되고 그 사람의 생명(生命)이나 경우의 어떤 것도 그것이 삼제원융(三諦圓融)상으로 말하면 자유(自由)와 평등(平等)과 존엄(尊嚴) 특히 그중에 존엄(尊嚴)이라는 한없이 거룩한 생명(生命)이 어떤 것에도 구비(具備)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원교(圓敎)입니다.
그런데 「법화이전(法華已前)에도 삼제(三諦)가 있으나 부서진 구슬은 보물(寶物)이 아님과 같으니라.」(御書 1728) 라는 어문(御文)이 있듯이 순수한 원(圓)은 법화경(法華經)뿐인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화엄(華嚴) ․방등(方等) ․반야(般若)등에도 무애자재한 원(圓)의 법문(法門)은 일단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法華經)에는 이승작불(二乘作佛)이 있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법문(法門)이 있습니다만, 화엄(華嚴), 방등(方等), 반야(般若)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화엄(華嚴), 방등(方等), 반야(般若)가 완전한 원(圓)이 아니기 때문이고, 즉 이들 경전(經典)에는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등 사교(四敎)중의 전삼교(前三敎)에는 방편(方便)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편(方便)이 혼재(混在)해 있기 때문에 진실(眞實)의 원교(圓敎)의 작용(作用)이 나타나지 않고 이 가르침들을 아무리 배워도 참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안심(安心)하고 몸과 마음을 맡겨 부처님의 경계(境界)에 달하는 수행(修行)의 내용(內容)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십계중(十界中)에는 앞의 구법계(九法界)이니라」 라고 있습니다. 이 「구법계(九法界)」라는 것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성문(聲開),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말합니다. 이 안의 보살(菩薩)은 우수한 경계(境界)입니다만, 그래도 아직 수행(修行)중이므로 완전(完全)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타(化他)의 권교(權敎)는 이 구계(九界)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華嚴). 방등(方等), 반야(般若)등의 가르침에 부처의 가르침은 없느냐는 의문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권교(權敎)에도 부처는 법(法)을 설(說)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구법계(九法界)라 하느냐 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이유(理由)는 이들 권교(權敎)는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의 미혹(迷惑)에 응동(應同)하여 설(說)해져 있으므로 그 내용(內容)은 어디까지나 구법계(九法界) 즉 부처님이 설(說)한 가르침이라는 참된 불계(佛界)의 마음을 설(說)하신 것이 아니므로 구법계(九法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법화경(法華經)은 불계(佛界)안에 중생(衆生)의 생명(生命)이 들어가고 부처님의 참된 깨달음과 일체(一切)되어 모든 구계(九界)가 불계(佛界)에 들어가 십법계(十法界)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분(部分)을 구분(區分)하면, 권교(權敎)는 구법계(九法界)까지 밖에 설(說)하지 않고. 따라서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의 이전경(爾前經)은 구계(九界)에 대한 교법(敎法)을 설(說)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교법(敎法)을 꿈(夢)과 생시(生時)로 비유(譬喩)하십니다. 즉 화타(化他)의 권교(權敎)는 또 꿈(夢)과 생시중(生時中)에서는 몽중(夢中)의 선악(善惡)이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생시(生時)라는 자(字)는 「오(寤)」라고도 읽고 현실(現實)이라든가, 진실(眞實)이란 의미(意味)가 있습니다. 꿈은 현실(現實)이 아닌 일들을 말하고 생시(生時)는 현실(現實)의 확실(確實)한 두뇌(頭腦), 명석(明晳)한 생각을 가진 마음의 상태(狀態)를 말합니다.
故로「꿈(夢)과 생시(生時)중에서는 몽중(夢中)의 선악(善惡)이니라.」란 이전경(以前經)에서의 불도관(佛道觀), 선악관(善惡觀)은 몽중(夢中)에서 존재하는 선악(善惡)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물론 이전권교(爾前權敎)에서도 나쁜 것을 설(說)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육도(六道)의 수행(修行)이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고상한 가르침도 있고 인간(人間)이 여러 가지 미혹(迷惑)을 떠나기 위한 사제, 십이인연(十二因緣), 팔정도(八正道)등의 많은 가르침은 있지만, 이들 이전경(爾前經)의 가르침은 결국 꿈속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꿈이니까 깨어나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리듯이 이전경(爾前經)은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실(確實)하게 비유(譬喩)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또한 꿈을 권(權)이라하고 생시(生時)를 실(實)이라 하느니라. 이런고로 임시(臨時)로 있으며, 체성(體性)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권(權)」이라하느니라. 생시(生時)는 상주(常住)로서 불변(不變)한 마음의 체(體)인 고로 이것을 이름 하여 「실(實)」이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최초(最初)에 자행(自行)은 실(實), 화타(化他)는 권(權)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번에는 꿈 쪽이 권(權)이고, 생시(生時)쪽이 실(實)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故)로 사십이년간 설(說)하신 가르침은 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시(生時)인 법화경(法華經)은 현실(現實)의 확실한 생각에 근거(根據)한 것이므로 실(實)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런 고(故)로 꿈은 임시로 있으며 체성(體性)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권(權)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생시(生時)는 늘 변(変)하지 않는 것이므로 여러분들은 언제나 그제의 생활(生活)과 오늘의 생활(生活)과는 시종(始終) 맥락(脈絡) 관련(關聯)하여 현실(現實)상에 존재(存在)합니다. 그 같이 현실(現實)의 모습은 확실(確實)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꿈은 여러 가지의 것을 보아도 곧 사라져 버립니다. 꿈에는 길몽(吉夢), 흉몽(凶夢), 악몽(惡夢), 원몽(圓夢), 잡몽(雜夢), 이몽(異夢), 상몽(想夢), 마몽(魔夢), 귀몽(鬼夢)등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길몽(吉夢)이란 기분좋은 꿈, 또 좋은 일을 알려주는 꿈입니다. 흉몽(凶夢)이란 흉사(凶事)나 불길한 것을 보고 또 흉사(凶事)를 알리는 것 같은 꿈입니다. 악몽(惡夢)은 여러 가지 나뿐 일이 일어나는 꿈이고, 이것은 마음씨 나쁜 사람들이 보는 꿈입니다. 그리고 원몽(圓夢)이란 편안한 꿈이고, 대단히 침착한 안정감(安定感)이 있는 생활(生活)을 하는 사람이 꾸는 느긋한 좋은 꿈입니다. 잡몽(雜夢)은 왠지 의미(意味)없는 듯한 꿈이고 여러분도 많이 꾸시지요. 그리고 과거(過去)의 업(業)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꿈이 업몽(業夢)이고 이몽(異夢)이라는 것은 평시와 다른 꿈입니다. 예를 들면 강 속에 일본(日本)에는 없는 코끼리등이 있고 쪽 강을 따라 올라가는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보통 때는 그다지 꾸지 않는 꿈입니다만, 그런 꿈은 이몽(異夢)중에 듭니다. 그런 꿈을 꿈 해몽가(解夢家) 에게 상담하면 「그것은 나뿐 꿈입니다. 」 라고 엉터리 말을 듣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몽(想夢)은 마음속의 생각이 꿈에 나오는 것입니다. 특히 남녀 관계 등이 많지만 남자나 여자가 각각 그리워하는 사람의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또 무서운 꿈인 마몽(麗夢)이라든가 귀신(鬼神)에게 습격당하는 귀몽(鬼夢)도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며 소리치거나 가위 눌리거나 또 과거(過去)에 살인(殺人)을 했던 것 같은 사람은 이를 갈면서 허공(虛空)을 잡으며 신음하거나 하는 것은 업몽(業夢)입니다.
어째든 그 같은 여러 가지 꿈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오(寤:生時)의 본심(本心)에서 본다면 마음의 미혹(迷惑)의 표현인 것입니다. 고(故)로 생시(生時)의 실재(實在)의 생활감(生活感)에 의거하여 생활(生活)을 바르게 교도(敎導)해 지도(指導)해 가는 불법(佛法)의 지침(指針)만 있으면 어떤 꿈을 꾸든지 또 과거(過去)에 어떤 업(業)이 있든지 괴로워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意味)에서도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고 생시(生時)는 아닙니다.
다음 문(文)에 「고(故)로 사십이년(四十二年)의 모든 경교(經敎)는 생사(生死)의 꿈속의 선악(善惡)일을 설(說)하는 고로 권교(權敎)라 하느니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의 생사(生死)의 괴로움으로부터 구(救)하기 위해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옳은 것이다라고 불계(佛界)의 공덕(功德)에 이르지 못한 구계(九界)의 미혹(迷惑)중의 선악(善惡)을 설(說)해 놓은 것입니다.
생명(生命)의 전제적(全體的)인 본질(本質)상의 선악(善惡)에 이르지 않는 부분적(部分的)인 선악(善惡)은 결국 종잡을 수 없고 즉 끝까지 꿈속의 선악(善惡)이고 일시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문(文)에 「몽중(夢中)의 중생(衆生)을 유인(誘引)해 경각(驚覺)케 하여 법화경(法華經)의 생시(生時)로 하고자 생각하신 준비 방편(方便)의 경교(經敎)라고 하느니라.」 라고 있습니다만, 꿈속의 생사(生死)에 헤매는 중생(衆生)에 대해 그것을 이끌어 경각(驚覺)시키는 즉, 놀라게 해서 눈을 뜨게 하는 것에 의해 법화경(法華經)진실의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준비 즉, 준비로서 방편(方便)의 경(經)들이고 이것을 권교(權敎)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량품(壽量品)에도 「늘 비감(悲感)을 품고 마음 드디어 성오(醒寤)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만, 아이들이 의지하고 있는 부모(父母)가 정말 없어져 버린것에 의해 늘 비감(悲感)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의미(意味)의 늘 익숙치 못한 마음 놀란 마음을 갖게 해서 본심(本心)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인 것입니다. 또 「나무(南無)」라는 어(語)에는 머리를 땅에 대고 경례(敬禮)하다, 계수구아(稽首救我)라는 것과 그리고 귀명(歸命)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만, 또 경각(驚覺)이 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이(安易)한 곳에 꾸물거리고 있는 생명(生命)이 놀라서 진실(眞實)로 향(向)하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경각(驚覺)시킨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법화경(法華經)의 생시(生時)로 눈을 뜨게 하려는 방편(方便)이고 방편(方便)의 가르침이므로 권교(權敎)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권(權)」이라는 말의 읽는 버릇, 읽는 법에 대해 정중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글의 뜻이라 해서 읽는 법 요컨대 「권(權)」을 일본어로는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의해 문자(文字) 읽는 법을 바르게 하여 이해(理解)할 지어다. 고(故)로 권(權)을 가(假) 임시, 거짓이라고 읽으며 가(假)인 곳의 본보기로는 꿈으로서 본(本)이라 하느니라. 또 실(實)을 진짜라고 읽으며, 사실(事寶)의 본보기는 생시(生時)이니라.」고 하듯이 권실(權實)이라는 것은 「거짓」과 「진실(眞實)」이라고 읽으므로 꿈(夢)과 생시(實)라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 고(故)로 생사(生死)의 꿈은 가(假)로서 성체(性體)가 없으니 가(假)인것의 본보기이며 고(故)로 망상(妄想)이라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생사(生死)속을 나아가 거기에서 다음 장소에 나갔다고 생각해도 거기도 역시 생사(生死)속인 것입니다. 또 다음 곳으로 가도, 또 생사(生死)라는 것에서 아무리 나가도 생사(生死)에서 빠져(說) 나을 수 없다면 그것은 끝까지 꿈에서 꿈으로 방황(彷徨)하는 것인 고(故)로 「체성(體性)이 없으면 권(權:假)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故)로 그런 일로 범부(凡夫)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망상(妾想) 즉 무분별한 거짓 생각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는 실(實)로서 생멸(生滅)을 벗어난 마음이므로 진실(眞實)의 본보기이며 고(故)로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니라. 이로서 권(權) 실(實)의 이자(二字)를 규명(糾明)하여 일대성교(一代聖敎)의 화타(化他)의 권(權)과 자행(自行)의 실(實)과의 차별(差別)을 알지니라.」라고 망상(妄想)의 꿈에 대하여 생시(生時)의 실상(實相)을 설(說)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본각(本覺)이란 말이 나왔습니다만, 이것은 본래(本來)의 깨달음이라는 것이고 본래(本來) 생명(生命)에 구비(具備)되어 있는 진실(眞實)의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 맥락(脈絡)도 없이 갑자기 태어난 것 같이 생각하지만 본래(本來)는 우주법계(宇宙法界)를 몸으로 하는 무시(無始)의 색심상(色心上)의 묘경묘지(妙境妙智)이고 거기에 본각(本覺)이라는 의미(意味)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각(本覺)이라는 것은 깊은 의미(意味)가 있고 그 오(寤) 생시(生時)라고 지적하신 현실(現實)과는 생명(生命)의 본질(本質) ․본체(本體)로서의 참된 마음이고 그것은 실(實)로 생멸(生滅)을 떠난 마음 즉 상주(常住)의 마음인 것입니다.
역(逆)으로 생(生)하는 것과 멸(滅)하는 것에 집착되어 있으면 꿈속의 생사(生死)에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故)로 실상(實相)」이라고 한다고 나타내셨습니다만, 저 방편(方便)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실상에는 깊은 의미(意味)가 있고 사십여년의 권교(權敎)라는 꿈에 대한 참된 실상(實相)이 법화경(法華經)에 설(說)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고(故)로 사교(四敎) 앞의 삼교(三敎)와 오시중(五時中)에는 앞의 사시(四時)와 십법계(十法界)중에는 앞의 구법계(九法界)는 모두 몽중(夢中)의 선악(善惡)을 설(說)하는 고(故)로 권교(權敎)라 한다.]의 문(文)까지가 한 구절(句節)이고 교법(敎法)에 꿈(夢)과 생시(生時:寤)의 두개가 있다는 비유(譬喩)로 권(權)․ 실(實)을 가려내어 화타상(化他上)의 (權)의 모습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에 이 교상(敎相) 이하(以下)의 어문부터는 경석(經釋) 즉 문증(文證)을 인용(引用)하십니다. 도리(道理) 문증(文證) 현증(現證)이라는 것이있습니다만 대성인(大聖人)의 어지남(御指甫)은 늘 文證이라는 것에서 경석(經釋)을 꼭 인용(引用)하고 계십니다. 결국 이와 같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의 본의(本義)에서 대성인(大聖人)이 확실하게 틀림없이 설(說)하고 계신다는 것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교상(敎相)을 무량의경(無量義經)에「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설(說)하셨느니라. 미현진실(未顯眞實)의 제경(諸經)은 몽중(夢中)의 권교(權敎)이니라.」 라고 여기에 확실하게 무량의경(無量義經)의「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末顯眞實)」이라는 경문(經文)을 들고 계십니다.
즉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의 사십여년의 경경(經經)에는 부처의 진실(眞實)한 마음이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아직 진실(眞實)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기 직전(直前)의 무량의경(無量義經)에 어김없이 설해져 있습니다. 이「미현진실(末顯眞實)」이라는 것이 꿈속의 권교(權敎)라는 것을 우선 거론하시고 그것을 다음에 또 석첨을 인용하여 술(述)해었습니다. 이「석첨」이란 천태대사(天金大師)가 저술(著述)한 「법화현의(法華玄義)」에 대한 묘락대사(妙樂大師)의 주석서(註釋書)입니다.「고(故)로 석첨에 말하기를 「성(性)은 다름이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환(幻)에 의하여 환(幻)의 기(機)와 환(幻)의 감(感)과 환(幻)의 응(應)과 환(幻)의 부(赴)를 일으킴이라 능응(能應)과 소화(所化)는 더불어 권실(權實)이 아니로다.」 이는 모두 몽환중(夢幻中)의 방편(方便)의 교(敎)이니라」이것은 좀 어려운 문(文)입니다만,
요컨대 마음은 하나이지만, 그 하나의 마음으로 꿈도 꾸고, 또 꿈에서 깨어 날 땐 오(寤:生時)의 본심(本心)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느 쪽의 마음이 진짜냐 하면 그것은 본래(本來) 하나이고 하나의 마음에서 꿈도 꾸고 현실(現實)에도 돌아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實際), 꿈(夢)속의 이전권교의 사십여년간의 가르침은 묘락대사(妙樂大師)가 말하듯 「성(性)은 다름이 없다.」즉 마음은 다르지 않지만 방황(彷徨)하는 중생(衆生)에게는 꿈에 보는 것은 무엇을 보아도 실제(實際)가 아니고 환상(幻想)이므로 부처의 인도(引導)를 받는, 방황(彷徨)하는 중생의 감각이 그대로 「환의 기(機)와 환의 감(感)」이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 부처가 진짜를 설하지 않고 중생의 기근(機根)에 맞도록 환(幻)의 응(應) 즉 환(幻)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 쪽에서 응(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衆生)의 기근(機根)에 응(應)하면 어찌되는가 하면 「환(幻)의 부(赴) 즉 부처가 중생(衆生)을 향(向)해 오시는 즉 부처님이 출현(出現)하셔서 일대(一代) 오십년중(五十年中) 사십이년간(四十二年間) 방편(方便)의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입니다.
「능응(能應)」 이라는 것은 잘 응(應)한다는 부처의 의미(意味)이고 소화라는 것은 화(化)하는 중생(衆生)의 일입니다만 이 방편(方便)의 화도(化導)에 있어 부처와 중생(衆生)은「함께 권실(權實)이 아니다. 」진실(眞實)의 화도(化導)도 아니며 진실(眞實)의 설(說)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권(權)도 실(實)도 아니라는 것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즉 실(實)이라는 것 중에는 권(權)즉실(實), 실(實)즉권(權)이고 십계호구(十界互具)인 셈이지만 거기에 원융중도(圓融中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의 깨달음은 그대로 불계중(佛界中)의 십계(十界)인 것입니다. 이것을 체내(體內)의 권(權)이라 해서 실교(實敎)의 진실(眞實)의 체중(體中)에 들어있는 권(權)인 것입니다. 전체가 부처의 깨달음이기도 하고 그 안에 일체(一切)의 중생(衆生)을 인도(引導)하는 제일의 근본(根本) 원인(原因)이 있다. 고(故)로 십계호구(十界互具)의 진실(眞實)의 교(敎)는 그대로 모두 권(權)이 모두 체내(體內)에 담겨있는 것이고, 이것이 진실(眞實)의 권(權)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생(衆生)에게 환(幻)의 화도(化導)를 한다는 것은 즉 실교(實敎)안에 있는 일부분(一部分)의 법문(法門)만을 집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故)로 끝까지 체내(體內)의 진실(眞實)의 가르침에서 떨어져 나온 권(權)이므로 진실(眞實)의 체외(體外)의 권(權)입니다.
따라서 체외(體外)의 권(權)에만 집착되어 있는 자(者)는 「더불어 권실(權實)이 아니다. 즉 진실(眞實)의 권실(權實)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故)로 「이 모두 꿈속의 환(幻)중의 방편(方便)의 가르침」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의 「성(性)은 다름이 없다 할지라도」 등은 꿈꾸는 심성(心性)과 생시(生時)의 심성(心性)은 그저 하나의 심성(心性)으로 모두 다르지 않다고 해도 꿈속의 허사(虛事)와 생시(生時)의 사실(事實)과 이사(二事) 일(一)의 심법(心法)으로서 본다고 생각함도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석(釋)이니라.」라는 것은 대성인(大聖人)이 묘락(妙樂)의 문(文)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고 꿈을 꿀 때의 마음도 생시(生時)의 마음도 그저 하나이다.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꿈속의 허사(虛事)와 생시(生時)의 사실(事實)과는 결국 두개가 하나의 심법(心法)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본다고 생각하는 것도」즉 환상(幻想)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이라는 석(釋)이다. 라는 것에서 말하는 꿈(夢)과 생시(生時:寤) 허사(處事)와 사실(事實)이라 함도 그 마음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술(述)하고 계십니다. (一回 說法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