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니 올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계획해 본다.
올해처럼 많은 일이 있었던, 그리고 그렇게 깊은 상처받은 해가 있었을까 싶다.
반면 좋은 일도 많았다.
유년시절 아빠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보통 40대나 50대가 되어할 면사무소 계장이 20대에 되셨다.
결혼을 20세 너무 어린 나이에 해서인지 가족에 대한 의무나 책임감보단 자신과의 싸움이 더 치열했나보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엄마와 날 버려두고 늘 여수 시내의 허름한 만화방에 틀어박혀 엄마가 찾으러 갈 때까지
무협지를 읽었다. 일주일도 좋고 열흘도 좋고 한달도 좋았다.
이런 날이 계속되다가 결국 실직했고, 엄만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70년대에 도서벽지엔 학교를 짓는
것이 붐이 일어서 엄만 공사판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하셨다. 어떤 날은 3일,1주일, 10여일씩 아빠를 대신해서
내가 모르는 섬으로 떠나셨다. 난 부모님 없는 집에서 지내야했다. 어느날은 백야도에서 일해야 한다며 가셨다.
백야도...
공놀이 하면서 많이 불렀던노래 '백야도 등대 빠알간 등대불 우리마을 지켜주는 빨간 등대불' 이란 노래를 자꾸만 부르면서
엄마가 빨리 오시길 기다렸다. 식사는 옆집에서 먹여주셨지만 잠은 늘 한곳에서 자야한다는 엄마의 가르침 때문에
아무도 없는 방에서 문고리 걸어 잠그고 잤다. 혼자자는 그두려움이라니...
어떤 날 학교 음악 시간 '아빠하고 나하고'란 노래를 배우다가 아빠 생각이 나서 막 울었다.
그러다가 5학년때 아빠가 농협에 합격하시고 우린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율촌으로 이사갔고 나도 전학갔다. 거기선 일이 많아선지 무척 바쁘셨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빠가 백야도에 발령나셔서 6개월 우린 떨어져 살았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엄마의
주장 때문에 여름방학이 되자 우린 백야도로 이사갔다. 거기선 외지로 나가기가참 힘들었다. 그리고 딱히 문화를
즐길 것이 없어서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도시락 싸서 가족이 낚시를 다녔다.
몽돌밭으로 등대 갯바위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가족의 행복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나니 아빤 다시 개도로 발령나고 그 행복한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러다가 아빠가 45세 되던 해 우린 우리가족만의 집을 돌산에 지었다. 꿈에 그리던 그림같은 2층 집.
아빠, 엄마와 내가 모은 돈으로 우리들 만의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집이 눈물나게 좋았다.
이방 저방 다니면서 정말 좋아했다. 내가 결혼하는 날은 무남독녀가 결혼한다고 돌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축의금
내러 온 것 같았다. 방명록을 보니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조금을 냈다.
내가 결혼하고 엄마아빠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내가 낳았다. 두분의 그 행복한 모습이라니...
3년 후 아빠 양자로 호적에 올라있던 큰아버지의 아들 내 사촌동생이 결혼한단다. 아버지 아들이란 이름으로...
엄만 반대했지만 작은 아버지가 밀어부쳐서 결국 아버지의 아들로 청첩장을 냈다. 마실나갔던 엄만 딸 결혼 때 돈
거둬들인 것이 적어서 없는 아들 만들어 청첩장 냈냐는 동네 사람의 비아냥에 그만 쓰러지셨다.
그게 엄마의 명을 단축시키는 시초였을까?
엄만 계속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중병이 들었다. 내 남편은 엄마를 모시자고 했다.
어떻게든 건강하게 우리와 함께 오래살자고 하면서...
엄마가 우리집 와서 3개월 즘 되었을때 남편이 사고가 났다. 남편이 입원해 있는 전대병원으로 엄마가 있는 순천
성가롤로 병원을 오가면서 병간호를 했다. 남편과 있으면 엄마가 걱정되고, 엄마와 있으면 남편이 걱정되었다.
엄마를 간호하면서 병자 특유의 냄새가 날까봐 싫다는 엄마를 씻기고 또 씻겼다. 신장에 이상이 생겨 엄마 몸이 부어서
100킬로에 육박했다. 뭐든지 남편이 다 도와주었지만 목욕은 나 혼자 시켜드려야 하니 많이 힘들었다.
변비걸려 심한 고생하는 엄마에게 과일을 많이 드시게 한 다음날 엄만 일곱번 변을 보셨고 그때마다
이불빨래며 엄마를 일곱번 씻겨 드렸다. 어떤날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토하기도 하고 남편은 운동시키고
점심시간 마다, 비번일 때마다 좋다는 한의원으로 침을 맞치러 다니고...
그렇게 간호하다가 마지막 6개월은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언제 운명하실지 몰라서 우린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낙엽지는 가을... 천국으로 이사가셨다. 평소 정신이 드실 때마다 장례식 때 상주는 양자에게
맡기지 말고 나와 내남편이 꼭 해주길 원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하시기로 해놓구선 그 아이가 오니까 상주를 바꿨다.
작은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작은아버지께 따졌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 장례식장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아들로 태어 나지 않은 것이 엄마의 마지막 유언도 지켜주지 못하는 그렇게 큰 고통인지 몰랐다.
그것 때문에 사돈끼리 멱살잡이 하고 장례식장은 수라장이 되고 작은엄만 술 먹구 와서 빈소를 뒤집어 엎었다.
난 다 필요없다고 다들 가라고 악다구니를 했다.
입관하는날 친척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빈소를 비워두고 나와 남편, 아버지 세사람이 입관했다.
교회식구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아무도 없는 빈소를 보며 다들 울었다고 한다.
엄마 첫번째 기일(엄마 기일 11월 27일 아버지 선본날 12월 22일)을 1주일 앞두고 아버지가 선보신단다.
작은엄마가 소개한 여자란다. 난 기일 지나고 만나시라고 했다. 그게 엄마에 대한 예의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던 아버진 약속을 어겼다.
선 본지 2주만에 결혼하고 싶단다. 것도 그해가 가기 전에...배신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이 날 설득한다.
이해해줘야한다고 엄마랑 부부관계한지가 6년이 넘었는데 이해해야 한단다.
하루가 1년같다는 아버지 말씀에 그러시라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넣어두었던 보험금 보상금으로
두분이 사실 아파트를 산단다. 새어머닌 굉장히 미인이었고 멋쟁이었다. 아빤 알뜰한 엄마하곤 정반대의 여자를 골랐다.
교회서 간단하게 결혼식도 했다. 교회선 성탄절과 연말을 앞두고 있어서 매우 정신없이 바쁜데 결혼식까지 준비해야
해서 친분있는 집사가 막 투덜거리는 걸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몇개월은 우리가족에게 끔찍하게 잘했다. 난 새엄마가 첨부터 울엄마였음 하는 생각까지했다.
얼마간 내게 주기로 했던 아버지의 재산이 다 새엄마의 오빠 아이들에게 간다.
1년도 안되었는데 집안의 도배를 바꾸고 갈때마다 세간살이가 확 바뀐다. 1년도 안돼서 미국으로 중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아버지랑 새엄마가 쌍꺼풀 수술에 보톡스를 맞는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햇던 돌산집도 판단다.
주위에서 자꾸 뭐라 한다. 난 내것이 아니니까 아버지 재산이니까 관심없다했다. 근데 저렇게 하다간 아빤 재산
다 잃고 병들어 내게 올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아끼고 모은 재산 다 털어먹게생겼다. 최소한 내것은 갖고 있어야 겠다.
(우리 친군 그여자를 보면 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연인 데릴라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내게 오시더라도 최소한 남편에게 미안하지는 않겠다. 그래서 내것 달라고 했더니 딸은 출가외인이란다.
아버지가 자살해서 죽어버릴 테니 보험금타서 나더러 쓰란다. 1년도 살지 않은 새엄마 편에 서서 41년 동안 알아왔던,
자기 자식을 부정하신다. 울 남편은 처갓집 재산이나 탐내는 파렴치한으로 몬다.
아파트 사준대도, 대형차 사준대도 거절한 남편이었다.
그날 그렇게 큰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아무말도 없이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이 감기걸려 난 아들방에 자는데 새벽4시쯤 방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온다. 가만히 누워 손을 잡는다.
왜 안자고 왔냐는 내물음에 남편의 목소리가 젖어있다.
'진아야, 나도 남자지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흉보거나 욕하는 거 아니다. 남잔 다 그러는가보다
이해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앞으로 내가 너한테 잘할게 상처 받지 마라. 니가 너무 불쌍하다.
장모님 사진 보니까 이제 나밖에 널 지켜 줄 사람이 없는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제 니 눈에 눈물나게 하는 사람은 다 가만 안 둘거다."
우여곡절끝에 돌산집을 겨우 내 명의로 돌렸다. 근데 그거 팔면 이천만원을 달란다. 각서를 쓰라고 해서 써주었다.
기본적인 도리만 하기로 했다. 어쩌다 아버지 집에 가면 또다른 말로 상처를 잔뜩안고 온다.
명절 때나 아버지 생신 때 만나기 전에 남편은 예상질문을 하면서 내가 상처 받지 않도록 항상 연습을 시킨다.
지난 11월 4일 엄마 세번째 기일엔 잊어버렸는지 오시지도 않았다. 남편이 그런다.
혹시 전화오면 괜찮다고 저희들 끼리 지냈다고 마음쓰시지 말라고 하란다. 며칠뒤 전화와서 남편이 일러준 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좀 편안하다.
기일지내고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엄마 생각하면 꼭 백야도가 생각났다.
엄마가 보고싶을 때 우연히 백야도를 갔다.그리고 카페에서 행복했던 시절의 친구들을 만났다.
요즘 난 참 행복하다.
올해가 가기전에 내게 깊은 슬픔과 아픔을 주었던 아버지랑 그여자를 용서해 주고 싶다.
첫댓글 후미 이걸 어케 말해야하지 넘 가슴아프냉 맘고생이 무지하게 심했구낭 난 8남매에 6째라 형들 등살에 못살겠다구 했는데 호강에 겨워서 ㅠㅠ 진아야 힘내 우린 그래두 조금 젊은게 애덜보구 웃고 살장 홧팅
챙피하고 가슴아픈 가정사를 썼던 이유는 이렇게 글이라도 올리고 나면 더 많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곳에 써봤어. 글로 쓰니 구구절절한 얘긴 다 못올리고 내 감정이 반감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마음에 용서하는 맘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안고 있던 짐을 조금 덜어 버린 것 같고... 용기주고 같이 가슴 아파 해 주는 친구들을 찾게 되어서 난 무지 행복하다. 하도 큰 일을 겪어선지 요즘은 두려움이 없다. '불행 너 오기만 해봐 내가 문제없이 이겨 줄게' 이렇게 변했다. 이제 난 무섬도 두려움도 없다. 이런 맘 가지는데 친구들도 한 몫 한다는 사실 기억하기 바란다.
자신감 좋쿠요 너무 자심감 갖지마러 그러다 난티 이기것다구 팰라 ㅠㅠ ^^
과거는 늘 현재와 공존을 하지...세상 엔 여자와 남자가 공존을 하고... 누구에게나 감추고싶은 비밀이나 아픔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인생이 아닐런지
뚜껑 열고 보면 아픔 없는 인생이 얼마나 있을까...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지만 이제 시작하신 두분 부디 해로(偕老) 하시길 바라고....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떠나 당신도 당신 인생이 있는것이니....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좋은관계 유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 머리는 그래야하는데 그여자 내게 욕하고 엄마 모신거는 자식된 당연한 도리라고 글구 그여자 아이들이 울아버지한테 아부지 아부지하는데 머리 돌겠더라. 그 여자 내 앞에선 딴소리 아버지앞에선 또 딴소리를 해대서...울 외삼촌 고소하면 나까지 엮기게 되었는데 변호사 소개받고 일 다 봐놓았더라. 그래서 그냥 아버지란 단어를 마음에서 제쳐두었다.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도 아버지니까..부모와 자식은 천륜인데 나 보고만 자식노릇 강요하는 그런 말 들으면 싫어. 아버지가 자식을 먼저 부정했으니까...
비단 진아 아버지 뿐만 아니라 왜 남자들이란 나이가 어리나 많으나 합리적이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할까....(울 친구들만 빼고..ㅎ)진아 아버지한테 하는말은 아니지만......늘 보면 나쁜 남자 뒤에는 요부가 있드라.....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마음이 좀 누그러들때까지 서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댓글 쓰면서도 많이 생각했다...나야 제3자니 좋게 생각하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막상 그 입장이면 어땠을까....아마도 눈에 뵈는게 없었을것 같어....힘내라 친구얌!!....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자식으로서 할수 있는 거라면 머든지 해라..그래야 하늘에서 억울하지 않으실거야~
공감!! 백배!!! 네 말이 젤루 맘에 든다. 기냥 내가 잘 사는 거 보여드리는 게 엄마께 가장 큰 기쁨 드리는 걸 거야. 그래서 난 씩씩하게 잘 살아간다. 가끔 엄마가 꿈에 예지도 해 주시는걸?
그래...진아야,네 글을 읽는 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함이 또 한번 가슴 아프다...모습 보이기 싫다해도 억지로라도 문병을 했었어야 옳은 일이었는데..엄마기일이 다가오면 마음 더욱 아프드라고...하나님이 너가 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주는 연단이려니 생각하고 ...그래도 아버지니까 사랑하자...아빤 마음이 너무 착하고 정이 많으셔서 그래,...미안하다...이런 정도의 위로 말 밖에 해줄 수 없는 내가...정말 미안하구나...새해엔 더욱 더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면서 사랑하며 살자...아빠의 사랑대신 내가 많이 안아줄게...글구 남편에게도 늘 감사하구요~~~잘하지만...ㅎㅎㅎ
아니야. 그래도 너랑 고등학교 때 친구들 왔다 가면 기억하시더라. 병환중일때 엄만 기억도 왔다갔다 했어. 그렇게 예뻐했던 우리 아들도 엄마 조카로 이야기 하시더라. 아버지도 기억 못할 때도 있었고... 나두 우리 이모로 착각하고...우리 남편만 빼고 다들 몰라봤지 지내 놓고 보면 항상 엄마 가슴아프게 하고 잘해 드리지 못한 것만 생각나더라구. 나두 너희 부모님께 잘 못한 것 반성하게 된다. 내 아이들 크는 것 보고 가셨으니까 참 감사하게 생각해. 내 친군 아이낳을 때 엄마가 안계셔서 많이 울더라. 거기에 비하면 난 얼마나 감사한지...
밝은 글귀속에 묻어나는 외로움이 단지 무남독녀이기 때문 이겠거니 생각했지 이런 아픔이 있었는지 몰랐다.그 어떤 위로도 너의 깊은 상처가 쉬 아물지 않겠지만 옛말에 시간이 약이란 말도 있듯이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워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에 대한 아픈 마음도 아버지에 대한 미운 마음도 조금씩 엷어지지 않을까...내가 감히 아버지를 용서해라 함은 미운 마음으로 인해 너의 마음이 더 이상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