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중기 자연재해의 발생과 생활환경
1. 머리말
○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가운데 그것을 개발하고 이용하면서 발전해 왔다. 역사학에서 인간의 활동 주체로서 역할을 강조하면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다소 상대적으로 벗어났지만, 환경을 벗어난 인간의 활동은 인류역사상 한 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인간과 환경 사이의 '긴장관계'가 고조된 때는 역사학에서도 고찰을 통해 얻게 되는 사실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대상 가운데 하나는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 때이다.
○ 그동안 고려시대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발생 추세와 원인에 대해 고찰하는 가운데 특히 12세기 전반기와 14세기 후반기에 자연재해 발생 빈도가 높았고 그 원인으로는 기온저하를 비롯한 기후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 고려 중기에 빈번하게 발생한 자연재해의 경우, 이는 우선 기후변화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산림의 황폐화를 비롯한 자연환경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환경의 변화가 도시문제의 대두 등 당시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른 대응책의 마련이 요구되는 등 자연환경의 변화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킬 개연성도 지니고 있었다.
2. 자연재해의 발생과 대응양상
○ 고려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할 경우 각 시기별 자연재해 발생 기록은 전기 15.35%, 중기 44%, 후기 40.65%로 나타났다.
○ 고려 중기에는 우박, 서리, 때 아닌 눈, 대설, 이상저온 등 기후한랭 현상을 반영하는 기록도 이전 시기에 비해 증가하여 나타났다. 고려시대의 기후는 처음에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유지하다가 11세기말부터 한랭하게 바뀌기 시작해, 특히 12세기 전반기에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고려시대 자연재해 가운데 특히 큰 피해를 준 것은 한재였다. 발생 빈도가 높았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심각한 것은 해를 연이어 발생하여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점이다. 고려 중기 가운데 3년 이상 장기간 한재가 발생한 시기로는 숙종 3-6년, 예종 원년-4년과 6-9년, 명종 24-26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예종 대에는 원년부터 9년까지 한해를 재외하고 무려 9년간 한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 자연재해의 발생, 기후 한랭화 및 불규칙한 변화 등은 농업생산활동에 피해를 초래하였다.
○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기근·질병·전염병의 발생으로 연결되어 피해가 확산되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12세기 전반기 기운데 특히 예종 4-5년과 12년, 15년에 기근·질병·전염병 등이 크게 발생하였다. 이 시기는 농민의 대규모 유망 현상 등 당시 사회의 변화와 연결된 동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 이에 대하여 중앙정부에서는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농민유망 등 당시 사회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감무 파견을 비롯해 지방행정·조세·부역 등 각종 제도들을 정비하는 조처를 내렸다.
○ 주목되는 점은 이처럼 자연재해 발생이 빈번해 질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당시 사람들의 대응노력 또한 증가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명종 18년(1188) 3월에 중앙 정부에서는 수리시설로서 제언을 수축하여 저수함으로써 농경지의 황폐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한편, 뽕나무·과일나무 등을 심어 이익을 도모하는 내용의 교서를 내리고 있었다. 이것은 명종 18년 3월에 내려진 일련의 조처들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농민유망·토지탈점 현상과 부세제도·구휼제도의 폐단 등 당시 사회의 변화에 따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들이었다.
○ 이처럼 자연재해의 발생이 이전 시기에 비해 증가하고 있던 예종대·명종대의 경우, 이전과 달리 농업기술의 발달 혹은 권농정책의 내용이 보다 진전되어 나가는 모습이 점차 엿보이는 등 새로운 양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3. 산림 훼손과 자연재해, 전염병
○ 고려 중기처럼 자연재해의 피해가 컸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어떠했을까?
○ 고려중기의 경우 먼저 토지개간, 궁궐 조성 등을 통해 산림이 훼손되는 사례가 증가하여 나타나고 있었고, 이는 자연재해의 피해를 가중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고려 왕조에서 농경지의 확보와 확대는 사회와 국가를 유지·운영하는 관건이었다. 때문에 국초 이래 중앙정부에서는 토지개간을 적극 장려하여 왔는데, 고려전기에는 대체로 산전 개간이 진척되어 나갔다.
○ 산전 개간은 예종 대부터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한 유망민과 이들에 의한 산간 거주 및 화전에 의해서도 진행되어, 산림 훼손을 가속화 시켰다. 예종 원년(1106) 유망민의 안착을 도모하는 조처가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그 다음해(1107)에 화전을 금지하는 조처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농민층의 유망과 산림개간 상황을 짐작할 수 있께 해준다.
○ 산림의 훼손은 특히 궁궐 조성을 비롯한 각종 토목공사를 위해 벌목이 진행되면서 확대되었다. 현종 2년(1011)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궐과 태묘를 비롯한 민가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피해 복구 과정에서 송악성, 서경황성, 개성궁궐 등이 수리되면서 대규모 영작이 진행되었다.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황룡사탑을 수리하기 위해 그곳의 조유궁을 훼철하여 자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이와 같은 벌목을 통한 산림훼손은 이를 전후하여 잦은 산악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현종 4년(1013)부터 송악을 비롯해 산악의 붕괴가 자주 발생하였다. 예종 원년(1106) 송악산은 우수로 토사가 유출되어 암석이 드러나고 초목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 인종대 또한 이자겸의 반란으로 궁궐이 소실된 후 이를 다시 영조하는 과정에서 벌목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인종 5년(1127) 권세가에 의한 산림천택의 탈점을 금지할 정도로 그동안 산림천택의 상당부분이 사점되어 이용되면서 산림을 훼손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인종 10년(1132)과 14년(1136)에 수재의 피해가 컸던 사실은 이러한 산림 훼손과도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자연재해의 피해가 생활환경을 극도로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연재해의 피해가 전염병의 발생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전염병은 영양과 위생 상태가 불량한 상황에서 흉년으로 인한 기근은 쉽사리 사망과 질병·전염병의 발생으로 연결되었다. 기근은 거란, 몽골, 홍건적 등과의 전쟁을 비롯해, 지방관의 과도한 수탈 등 인위적 요소에 기인하여 발생하였다. 그러나 특히 자연재해의 피해가 장기간 지속될 때 피해 정도가 컸다.
○ 예종 4년(1109) 4월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한편 오부에서 온신(瘟神)에 제사를 지내고 있어, 개경에 전염병이 발생한 사실을 알 수 있다. 5월에 개경 내 백성의 다수가 사망할 정도로 전염병이 유행하여, 정부에서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치료해 주고 시신을 수습해주었다. 12월에 송악과 제신사에서 질병 해소를 위해 제사를 거행하였다. 예종 5년(1110) 12월 흥화· 운중·서해·남경·광주·충주·청주 등 각 지역에 관료를 파견하여 기민을 진휼하였다. 예종 4-5년의 전염병은 기후한랭 현상을 비롯해 한재·풍재 등 거듭된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과 기근에 말미암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시기가 여진과의 전쟁, 9성 개척과 민호의 이주, 9성 환부와 주민 복귀 등을 겪은 직후인 점을 감안할 때, 그 과정에서 외부와의 접촉에 따른 영향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이상고온 현상과 같은 기후변화는 질병·전염병의 확산을 부추겼다. 예종 15년(1120)의 한재로 인한 흉작은 전염병의 발생을 가져왔다. 한재가 다음해에도 이어진 가운데 특히 이상고온 현상은 예종 17년(1122)의 전염병 확산을 가져왔다. 인종 9년(1131) 6-7월 기근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이상고온 현상마저 있게 되면서, 이듬해(1132)에는 경성에 기근이 들고, 물가가 폭등하여,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 한편 소와 말 등 동물의 전염병 혹은 이에 의한 사람의 감염 사례도 찾아진다. 인종 20년(1142) 서남로 주군에 우마역이 발생하였고, 충렬왕 5년(1279)에는 탄저병으로 추정되는 우역이 발생하여 이에 접촉한 사람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살이 벗겨져 죽었다.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하여 혹은 일본원정, 원둔전 설치 등을 통해 말·소 등 동물의 유입 혹은 유출이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4. 개경 내 생활환경과 도시문제의 심화
○ 고려의 수도 개성은 정치·경제·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 개경의 인구가 증가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무신정권시기를 전후하여 지방으로부터의 상경종사자가 증가한 점을 고려할 때, 이 시기에 개경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 그런 만큼 환경변화에 따른 영향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수도 개경의 사정을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 개경 성곽 내에 인구가 집중되어 생활공간이 형성되었다.
○ 개경 나성 내부에는 사리, 시전을 비롯해 주점, 다점 등 도회적 면모를 지닌 각종 시설물이 존재하였다.
○ 개성 나성 외곽지역에도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성의 서쪽 문인 오정문 밖으로부터 서강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는 기록이나 전쟁 혹은 반란의 발생시 나성 외곽의 인원이 성내로 이동하였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중기에는 개성 나성 외곽지역으로 거주지가 보다 더 확대되어 나가는 모습이 엿보여 주목된다.
○ 일반백성의 거주지 또한 나성 외곽에 증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개경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개경 외곽지역의 개발에 따른 경관 변화가 나타났다. 개경 주변 거점도시의 발달 모습이 나타나 주목된다. 개경 남쪽지역의 거점도시로서는 남경이 11세기 중반 이후 위상이 높아져 갔다.
○ 남경의 위상 제고와 개발은 자연히 개경~남경 혹은 남쪽지역 사이의 인적, 물적 교류를 증가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취락조성, 도로망 정비 등 주변 경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 개경 및 인근지역을 비롯해 남경과 같은 거점도시의 개발은 생활환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인구집중은 새로운 문제를 발생 혹은 이전부터의 문제를 확대시켰다.
○ 개경 내 시설물과 주택의 건설은 환경의 오염으로 연결되었다.
○ 개경으로의 인구집중과 도시화의 진전은 자연재해로 인한 농사작황에 따라 물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도 가져왔다. 현종 3년(1012)에는 전해(1011)의 수재·한재 피해로 곡가가 급등하였고, 현종 5년 (1014)에는 반대로 물가가 급등하여 布의 가격이 쌀 8斗에 이르렀다. 인종 10년(1132)에는 거듭된 한재로 기근이 들고 미가가 급등하여 은병 1개의 거래 가격이 쌀 5석으로 떨어지고, 소마 1필이 1석, 자우(牸牛) 1頭가 4斗에 거래되었다.
통상적인 은병의 가격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어 정확한 물가변동 상황을 알기 힘들지만, 고려후기 은병가격이 대체로 쌀 15-16석 혹은 18-19석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급격한 미가의 변동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농사작황에 물가에 변동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경시서와 같은 물가조절기관의 중요성이 보다 부각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인구집중에 따른 물가변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 활동의 안정과 증대가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고려시대 농업의 발달사에서 12세기 이래 토지개간, 수리시설, 시파기술, 농학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성과가 있었던 점은 이와 관련하여서도 그 의미를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