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현장을 다녀와서
초근목피로 보리 고개를 힘겹게 넘던 50년대 초 소녀 김재옥은 스승의 길을 가려는 꿈을 품고 교사가 되어 동락 초등 학교에 첫 부임하여 근무하게 된다.
그로부터 5일 뒤 북괴의 6.25 남침이 시작된 초기 동락리 일대에 북괴군 15사단 병력이 집결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4km 거리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육군 제 6사단 11연대 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첩보를 제공해 주어 신속 과감한 기습작전을 대대 독단으로 펼쳐 대승을 거둔 전투다.
적 사살 2.707명 포로 170명 각종포 24문 박격포 7문 차량 65대 장갑차 7대 기관총 55정 소총 1,187정 무전기 다수 등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6.25전장에서 적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기만 하던 절대 열세의 우리 국군의 첫 대 전과로서 전승의 고삐를 거머 쥐게하는 쾌거를 이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적인 성과였다.
아군의 피해도 있었으니 전사 71명 부상 113명 소총 손실 22정이었다.(김우재 전승기념관 기록 인용).
이런 인연으로 하여 김재옥 교사는 이 부대소속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게 되고 자녀 4명을 나아 행복
하게 살며 이득주소위는 중령까지 진급하였고 김재옥 교사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하였다.
산 벚꽃이 희끗 희끗 수채화처럼 펼쳐놓는 봄날의 나들이길 유성 무공수훈자회원 41명을 태운 관광
버스는 꼬불 꼬불 돌고 오르내리며 충북 음성군에 소재한 목적지 동락 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반세기를 넘긴 시공의 흔적은 초등학교에 첫 부임한 한 여교사의 일생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
하고있는 공적비문에 녹아 숨 쉬며 읽는사람에게 흐느낀다.
순간 “이웃집에 오신손님 간첩인가 다시보자”라는 표어가 떠 올랐다.
김재옥 선생님은 교육받은 신고 정신을 실천하기위해 십리 길을 줄달음질쳐 군부대에 알렸고 이것이
작전으로 이어져 전승을 거두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재옥 선생님은 전쟁공포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피난을 가지않고 제자들의 배움터 학교를
지켰던 진정한 교육자 였으며 제자를 사랑하며 애국자였고 호국의 실천가 였다.
돌락초등학교는 전란의 화마속에서도 온전히 보전 될수 있었음은 학교를 지켜낸 이재옥 선생님의
애교정신에 힘입었음이 분명하다.
오늘의 교육현장은 어떻게 묘사되어야 할까?
소박한 청소년의 가슴에 먼저라야할 애국과 부모 어른공경, 예절과 배려 겸손 친절 정직등
선후를 구분할수 없을 만큼의 인성교육이 먼저임에도 그무슨 '학생인권장전'이란 소위 민주화된
학원 문화를 창조와 정착이라는 진보적 사고방식부터 주입하고 있음은 통탄스런 교육현실이라
하겠다.
저절로의 한숨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 어린시절에 자주 쳐다보았던 뭉게구름이
무리지어 정답게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 교육은 백년대계다.
배고픈 건 참고 견디며 극복 가능하지만 잘못된 교육은 백년 역사를 그르치고 국가에 큰 재앙을 불러오며 아니 소멸되어 버릴수도 있는 불행한 역사의 길을 닦는것과 같은것 아닌가?
토요일은 기념관을 열지 않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충혼탑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오늘 일정의 마침표를 찍는 아쉬움으로 귀가 길에 올랐다.
필자가 육군보병학교 교관근무시절 고등군사반 과정에서 ‘무극리 전투’ (동락 전투)에 얽힌 ‘김종수
소령의 지휘 사례를 소개하며 지휘관의 자질 론에서 '결단력'이야말로 전승의 고삐를 쥐고 있는것과 같다고 열강하던 그 시절 추억이 차창 밖 봄 볕처럼스쳐 내리고 있었다.
무극리 전승의 기억 한 편에는 또다른 비극의 참화가 있었으니 때는 1993년 10월, 강원도 인제에서발생한 이득주 중령 일가 비운의 소식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재봉 상병이 박 중령의 관사에서 가사 일을 도와주고난 후 군화 한 켤레를 훔쳐 들고
나오다 가정부에게 발각되고 가정부가 소리를 지르자 고재봉은 옆에 놓여 있던 도끼로 가정부를 위협
했다.
이 위협행동으로 살인 미수혐의가 되어 징역 7개월 형을 받고 육군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이 사건은 고재봉으로 하여금 박 중령(병기부대장)에게 보복의 비수를 갈게하는 게기가 되었고 출소
하면 박 중령을 보복할 것을 작심하고 있던 중 박 중령이 타부대로 전출하게 되고 그 관사에는 이득주
중령 가족이 이사와 살게 되었다.
박 중령에 대한 응징을 벼르던 고재봉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새로 이사와 거주하던 이득주 중령과 그의 부인인 김재옥 교사 가족을 박중령 가족으로 알고 일가족 5명을 모두 도끼로 살해하였다.
고재봉은 시민제보로 체포되었고 재수감 되었으며 1963년 사형을 선고 받은 뒤 다음해인 1964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고재봉은 수감생활 중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한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9절'이다.
죽음을 앞에 둔 고재봉에게 살 수 있다는 희망, 부활의 빛을 본 것이다.
‘조금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겠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사형 당하면서도 부활소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고재봉의 이 모습을 본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수감된 지 3개월
만에 총살형을 받고 사형당하기 전까지 3개월간 교도소 수용자 2천 명 중 1800명을 전도 했다고
전한다.
오늘이 예수님 부활한 "부활 주일"이다.
예수님 부활의 날 (2019년 4월 넷째주 일요일) 이글을 쓰다.
5월 11일/ 9월 19일 수정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유성지회
선양위원 김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