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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님,
아래에 옮기는 글들은 하나로 님이 읽으신 글도 있을 것입니다.
긴 글이니, 길더라도 끝까지 꼭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꼭 읽으셔서,
연중론의 교과서 {영혼의 의사}는 왜 폐기돼야 할 책인가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연중론은 왜 논의해야 할 가치가 없는 중생론인가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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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예명}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
-1-
나그네 ( 2011.12.29. 14:20 )
다음은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 초판 174쪽, 175쪽에 있는 강설입니다. 숫자 ‘①, ②, ③’은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새로운 생명이)’라는 글은 제가 더합니다. 읽기 쉽게 제가 문장을 구분하거나 칸을 띄웁니다.
신학적으로 엄격히 구분할 때
① 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②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①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②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
①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셔서
②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확실해지는데, 그 방향은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으로 흘러가던 것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지배적인 성향, 거버닝 디스퍼지션(governing 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③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까지를 신학적으로 중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룹니다.
현재 {양무리 마을}에서 다루고 있는 중생론은 김홍전 목사님 “포괄적인 의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은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네째판 156쪽~157쪽에서 정의한 중생 개념입니다. 각주는 생략합니다. 읽기 쉽게 제가 문장을 구분하거나 칸을 띄웁니다. 숫자 ‘①, ②’는 제가 적습니다.
1. 세 가지 의미에서 중생
성경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겨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 중생이다.[요 3: 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 1: 18. 벧전 1: 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중략)···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의미들 중 첫 두 가지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서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ㅡ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해ㅡ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1561년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 제8장 참조)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① 좁은 의미의 중생ㅡ위의 (1)의 의미ㅡ과
② 넓은 의미의 중생ㅡ위의 (2)에 해당ㅡ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해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다.
···(하략)···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는 글은 ‘중생을 돌이킴(회심)과 동일시했던 17세기 신학자들 중생론’과 다르게 ‘중생과 돌이킴(회심)을 구별하는 최근 개혁 신학 관점에서 중생론을 일차적으로 다루겠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제8권: 너희가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초판 132쪽에서 퍼옵니다. 숫자 ‘①, ②’는 제가 적습니다. 문장을 구분해 칸을 띄웁니다. 이 강설에서 김홍전 목사님 중생론 관점(중생 개념)은 후크마 목사님 글을 빌리자면 “최근” “개혁신학”의 관점입니다. 굵은 글씨와 배경색은 강조하려고 제가 굵게 쓰고 칠합니다.
① 무릇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 경영하신 대로, 선택하신 대로 성신님으로 역사해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생重生입니다.
②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신 사실이 그 사람 의식 가운데 나타나는 사역을 성신님께서 하시면, 이것을 가리켜서 변개(Conversion)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복 있는 사람’에서 펴낸 존 머레이 {구속}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① 부분을 [제8장 거듭남] 편에서 다루십니다. 그리고 변개, 즉 ② 부분을 <제9장 믿음과 회개> 편에서 다루십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 “믿음과 회개”······.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펴낸 {벌코프 조직신학} 증쇄판 용어로는
“회심”으로 번역된 ‘Conversion’입니다. 존 머레이 {구속} [제6장 적용의 순서] 편에 적힌 구절들을 옮깁니다. 131쪽~132쪽입니다. 물론, 굵은 글씨와 배경색은 제가 굵은 글씨로 쓰고 배경색을 칠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사이에 어렵지 않게 집어넣을 수 있는 또 다른 단계가 있다. 거듭남regeneration의 단계다. 거듭남은 믿음에 선행한다. 여기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여기서 그것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다.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하는 모든 증거를 여기서 다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중략)···
온 마음이 담긴 애정 어린 신뢰와 헌신의 행위가 믿음이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후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
···(중략)···
회개는 믿음과 짝을 이룬다. 회개가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회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를 통틀어 회심conversion이라는 말로 아우를 수 있다.
이번 토론에서 제 주된 관심사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께서 {영혼의 의사}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구원론을 두고 Text 비평을 제대로 하셨는가?’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알려면,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셋째판 [제4장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 [제7장 중생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와, 존 머레이 목사님 위 글이 핵심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 구원론} 28쪽에서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말을 두고 “심지어 ‘중생이 우선된다.’는 말도 시간상, 혹은 연대순의 순서를 가리킨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고 서술하십니다. 즉, “중생이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다른 국면들, 즉 믿음, 회개 성화 등등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순위(causal priority)를 갖고 있다.”고 서술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 “믿음, 소망, 사랑처럼 구별할 수는 있으되 분리될 수는 없는 구원의 축복들”(Bavink, Dogmatiek)로서 ㅡ영화를 뺀ㅡ 유효한 부르심, 중생, 돌이킴, 믿음, 칭의, 성화, 견인이라는 구원의 축복들은 “연속적인 단계로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사역”임으로, 이른바 “구원의 서정”을 “연속적인 단계”로 이해하면 안 된다.’[29쪽]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구원의 과정의 이러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31쪽]는 뜻입니다.
“구원의 과정의 이러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이 대大 전제 아래 {개혁주의 구원론} 182쪽, 183쪽에서 다음과 같은 서술을 하십니다. [제7장 중생] 편에 적힌 글입니다. 각주는 생략합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게 씁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 외적 표출은 말씀을ㅡ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ㅡ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즉각 부여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중생에 관한한 설교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은 필수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중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청중들에게 “복음을 믿고 죄로부터 회개하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大 전제에서 {양무리 마을} 이른바 “제2의 중생”인 ‘새로운 출생, 신생新生’을 {양무리 마을} 이른바 “제1의 중생인 초기 중생, 수태”와 함께 “즉각적, 동시적 사건”으로 표현하셨던 후크마 목사님······. 그리고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이 문장이 뜻하는 것은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신 뒤, 이차적으로 김홍전 목사님 “포괄적인 의미”에서 중생을 다루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으로 일어난다.”는 후크마 목사님 이 문장을 순간(즉각)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를 규정하는 문장’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ㅡ‘적’짜를 배경색을 칠해 강조한 까닭은 ‘시간’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 ‘순간’과 ‘동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ㅡ ‘이 이해 아래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을 순간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를 규정하는 말로 이해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순간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 사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후크마 목사님처럼 존 머레이 목사님 역시 {구속} [제9장 믿음과 회개]에서 복음 전파의 중요성[161쪽~164쪽]을 서술하신 뒤, “믿음은 본질적으로 지식knowledge과 설복conviction과 신뢰trust로 이뤄진다.”고 언급하면서[165쪽] “믿음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지식이다.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누구를 믿어야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신분이나 성품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서술하십니다.[165쪽] ‘이 점에서 이렇게 이해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순간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 이 말을 가지고 우리 인생에서 유비를 들자면, 엄마 뱃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알고, 이 이후에 일어나는 머릿속 세포 분열과 함께 경험을 통해서 엄마를 “더더욱” 더 많이 안 뒤, 의식적으로 엄마를 신뢰하며 “엄마”라는 신비한 말을 내뱉기까지 순서(과정)입니다.
* 다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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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
-2-
나그네 ( 2011.12.29. 21:19 )
그런데 진리(교리)를 놓고 유비를 할 때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즉, “갓난아기가 태어나 본능적으로 엄마를 알다가, 시간과 함께한 경험의 축적에 따라 엄마를 알아 의식적으로 엄마를 자기 엄마임을 믿으며 ‘엄마’라는 신비한 말을 처음 내뱉는 그 순간은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의 순간이자 하나님 자녀 됨을 뜻하는 칭의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야말로 갓난 아기가 참된 사람이 되는 순간, 진정으로 하나님의 참된(완전한) 자녀가 되는 순간이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언제나 항상 참된(완전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항상 엄마의 참된 자녀,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수태 때부터······.
아이가 “엄마”라고 신비한 말을 처음 내뱉는 순간은 아이가 의식적으로 엄마를 “엄마”로 부르는 순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아이 엄마에게 태어난 것을 못 본 사람’이 그 아이가 그 아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엄마가 그 아이의 엄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영혼의 의사} 48쪽, 49쪽에 나오는 글입니다. 즉, [제4장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에 나오는 글입니다. 숫자 ‘①, ②, ③’은 제가 넣습니다. 또한 읽기 쉽게 문단이나 문장을 제가 나눠 칸 띄우기도 합니다. 참고한 서적에 대한 각주가 아닌, 본문에 대한 설명으로서 각주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숫자 ③을 붙인 문장’ 속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배경색도 강조하려고 제가 칠합니다. ③번 다음 문단에 적힌 “중생”도 한가지입니다.
회심은 하나의 과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 구원에서 최초 동인이 되셔서 그 사람이 복음을 듣거나 생각하는 중에 그 사람을 중생케 해, 그 사람 죽은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며 역사적인 여러 신앙고백서들은 이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중생regeneration’은 성경과 신자들 일상 용어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생이나 새로운 출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① 첫째, 중생은 죄인의 회심에서 ‘결정적인 순간critical moment’을 의미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시며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깊은 영향을 미치시고 회심에 뒤따르게 되는 모든 일들을 가능케 하십니다. 이런 의미의 중생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시고 새 생명의 조성자이심을 강조합니다.
② 둘째, 중생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새 생명이 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회심의 전 과정whole process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③ 우리는 이 책에서 중생을 생명이 영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회심을 중생 이후에 발생하는 과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새로운 출생의 비유를 사고 모델로 삼는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입니다. 자연적 출생은 회심 과정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입니다. 실제로 생명이란 수태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생명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의 발전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중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한 시점에 맞춰 각 부분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회개와 믿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야 영적 생명을 의식하며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위 “자연적 출생은 회심의 과정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입니다.”라는 문장에서 “아주 정확하게”라는 말을 두고 꼬투리 삼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③번 관점은 제 글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 -1-] 에서 언급한 후크마 목사님 관점과 같은 관점입니다. 즉, ‘중생을 돌이킴(회심)과 동일시했던 17세기 신학자들 중생론’과 다르게 ‘중생과 돌이킴(회심)을 구별하는 최근 개혁신학 관점에서 중생론을 다루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께서 ‘{영혼의 의사}에서 다루겠다.’ 하신 ‘중생’은 이른바 “초기 중생”입니다. 이른바 “수태”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위 인용글에서 강조한 “중생”이라는 단어는 “회심의 과정”이라는 단어이어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중생도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문장은 “중생 이후 회심이 발생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는 문장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 이 생각이 맞다.’면, {양무리 마을} “순간적인 중생론인가, 연속적인 중생론인가?”, 또는 “중생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라는 물음은 ‘중생 이후 회심(의식으로 나타나는 외적 발현)으로 이르는 과정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라는 말로 바꿔야 합니다. 다시 적자면, “순간적인 중생론인가, 연속적인 중생론인가?”라는 물음 아래 논의를 펼치고 있는 {양무리 마을} 애씀을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위 ③번 문장에 비춰 보면, 그 애씀은 헛된 수고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영혼의 의사} 68쪽에 “수태는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영혼의 의사} [제7장] 제목 “중생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라는 말은 더더욱 헛발질입니다. 개념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존 머레이 목사님 얼굴에 발차기하신, 헛발질······. 이 점에서, 저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께서 존 머레이 목사님을 두고 함부로 쓰신 “미혹”,(의) “원조元祖”, “변종”이라는 단어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에게 되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혹”의 “원조元祖” 피터 마스터스······. 개혁 신학 중생론을 “변종”해 어린 영혼들을 “미혹”하는, “미혹”의 “원조元祖” 피터 마스터스······.
물론,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미혹”, “원조元祖”, “변종”이라는 단어는 경박하지는 않았다.’는 여지는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변종”이라는 말이 적힌 {영혼의 의사} 127쪽에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께서는 존 머레이 {구속}과 {Banner of Truth}를 언급하시는데,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쓰신 책 가운데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구속}, 이 한 권뿐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특히, ‘노동자로서 피곤과 돋보기를 쓴 노안에서 오는 제 큰 약점, 책을 펼쳐 들면 졸음이 쏟아지는 데서 오는 제 독해력 부족 때문에 저는 {구속}에서 {제2부 구속 적용}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명예를 무척 소중히 여기는 {양무리 마을}은 존 머레이 {구속} 뿐만이 아니라 {Banner of Truth}를 꼼꼼히 살피는 철저한 Text 비평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명예를 지켰으면, 합니다.
현재 {양무리 마을}에서 벌이고 있는 그 모든 논의에 앞서 이 철저한 텍스트 비평이 선행돼야만 합니다. {양무리 마을}이 진정으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면······. ‘강릉예명 목사님을 두고 쓰신 홀리조이 님 “미혹의 영”이라는 단어가 사탄의 참소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양무리 마을}이 안다면······. 홀리조이 님이 아신다면······.
* 다음에 *
댓글
강릉예명 11.12.30. 13:05
누군가의 말처럼 진정으로 예단을 갖고 중생을 말하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벌코프나 김홍전 목사나 후크마 등이 중생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마스터스가 얼마나 교리사나 교회사적인, 통전적 의미에서의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를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논의의 가치가 없는 얘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스터스의 목회상의 얕은 교리적용이 많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 강릉예명 11.12.30. 13:12
그냥 성경에 말씀하는대로 복음전도에 더욱 열심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자들을 더욱 말씀과 기도로 돌아보자 하면 될 것을······. 무슨 교회가 중생 교리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 그런 것처럼 엉뚱하게 처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세속화된 교회가 문제가 있다. 그러니 교회와 사역자들이 복음적인 전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말씀과 올바른 예배(교제)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핵심 아닌가요?
나그네 11.12.30. 21:37
윌리암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149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양무리 마을} 중생론 관점에서는 “미혹”의 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 글에서 “복음”이란 말을 ‘복음전도’라는 말로 바꿔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라는 말이 가로 속에 있는 까닭은, 윌리암슨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뒀기 때문입니다.
┗ 나그네 11.12.30. 21:37
《 이 중생은 (대개의 경우) 복음전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러나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 》
┗ 나그네 12.01.02. 15:28
저는 이 글을 존 머레이 {구속:}에서 {제2부 구속 적용} 논지 하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의사}에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존 머레이 순간적 중생론을 믿게 되면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논지를 펴십니다. 저는 이 논지를 ‘예정론을 믿게 되면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알미니안 주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 나그네 11.12.30. 21:37
{영혼의 의사}를 [제7장 중생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까지 읽었습니다만, 그 다음 부분은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심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만, ㅡ제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작품 속에 숨은 작가 심리까지도 파악하려고 애쓰기는 했습니다만,ㅡ 개념 정리를 못한 까닭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혼란스런 마스터스 목사님 정신(심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나그네 11.12.30. 21:40
그래서 ‘“미혹의 영”이라는 말까지 쓰는 희롱의 말로 형제ㅡ{양무리 마을}은 목사님을 형제로 여기지 않습니다만ㅡ를 비난할 만큼 {영혼의 의사}라는 책이 가치가 있는 책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속적 중생관 논의에 대한 정리된 입장>이라는 목사님 글에 선뜻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선뜻 동의한 가장 큰 까닭은 <연속적 중생관 논의에 대한 정리된 입장> 행간의 의미 하나를 ‘교회의 덕을 세우자.’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저 역시 이번 논의를 중단함으로써 ‘나는 {양무리 마을} 적敵이 아니다.’는 것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 나그네 11.12.30. 21:40
그러나 <연속적 중생관 논의에 대한 정리된 입장>에서 제가 이해한 행간의 의미 하나는 그날 밤 {양무리 마을}에서 왜곡돼 있었습니다. 희롱의 말로써······.
그래서 칼집(?)에 넣었던 칼(?)ㅡ{영혼의 의사}에 대한 비평ㅡ을 다시 빼 들게 됐습니다. 물론 ‘내 비평문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SDG 개혁신앙연구회}에서 앞으로 있을 논의를 미리 지원하는 차원에서도 {영혼의 의사}에 대한 비평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나그네 11.12.30. 21:40
사실, 저는 이 문제로 {SDG 개혁신앙연구회}에서 논의가 이뤄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의사}가 형제를 나눌만큼, 희롱의 말들로써 ‘교회의 덕’을 무너뜨릴만큼 큰 가치가 있는 책도 아니거니와, {양무리 마을}이 ‘토론(논의)을 토론으로 끝내는 장성한 수준’에 있는 ‘정상적인’ 카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SDG 개혁신앙연구회}에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상적이지 못한 {양무리마을}이 {SDG 개혁신앙연구회}를 적敵으로 삼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양무리마을} 적敵, 원수는 목사님과 저 둘만으로 충분합니다.
┗ 나그네 11.12.30. 21:42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텍스트 비평’에 충실했는가? -2->까지 썼습니다만, 오늘 일을 하면서 ‘계속 이 제목으로 비평문을 써야만 하는가?’, ‘뒤죽박죽 논리를 전개하는 책을 두고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쪽에서는 저 개념, 저쪽에서는 이 개념으로 글을 전개함으로써 뒤죽박죽 논리를 전개하는 {영혼의 의사}를 {양무리 마을}이 대단한 책, 존 머레이 {구속}이나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을 뛰어넘는 책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기이하기만 합니다. 이른바 “종족 우상”에서 어서 빨리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강릉예명 11.12.30. 21:32
저는 {양무리 마을}의 몇몇 분들이 제게 무어라고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그네 님도 저와 같이 {양무리 마을} 몇몇 형제들에게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양자론적 세계관이 이럴 때는 편한 것같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 (댓글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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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 “다음에”의 첫째 의미는 ‘이어서 {영혼의 의사} 비평문 제3, 4편······을 계속 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후로 {강릉예명} 카페에 ‘{영혼의 의사} 비평문’을 쓰지 않은 까닭 하나는 혼란스런 제 정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혼란은 ‘뒤죽박죽 논리를 전개하는 {영혼의 의사} 문제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논리력 문제나 독해력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의사}에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영은 진짜 미혹의 영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따른, ‘{영혼의 의사}에 숨어 있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정신의 혼란스러움’에 영향을 받은 혼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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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126
{영혼의 의사} 중에서
- 새삶 님은 {영혼의 의사}를 잘못 읽으셨습니다.-
로빈슨크로소 | 조회 138 | 2012.07.13. 11:12
준회원 게시판의 새삶 님께서 {영혼의 의사}를 읽으셨으나
그 개념 파악을 완전히 잘못 오해하셨더군요.
아래의 회심의 요소를 새삶 님께서
1. 수태(좁은 의미의 중생) 혹 초기중생만을 다룬 것으로
완전히 개념을 잘못 잡아 읽으셨던 것입니다.
새출생인 회심이 되는 요소들을 다루는 데서
회심의 원인이 되는 좁은~중생을 1단계로 하지 않으면 죄 각성이 1단계가 되는데,
이것은 되려 이상하지요.
회심과 그 과정의 원인이 좁은~중생이기에
1단계가 당연히 좁은~중생을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의사} 회심의 5 단계에 대한 글’을 찍은 사진 생략 )···
새삶 님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카메라로 찍어 올립니다.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길······.
댓글 32
갈릭 12.07.13. 11:37
‘홀리죠이 님과 로빈슨크로소 님의 생각이 바로 이 글에서 나왔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런데 분명 문제가 있는 주장이군요. 이것을 토대로 두 분께서 지금까지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셨다면, 좀 허망하고 안타깝군요. 이제 저는 주일까지는 더 시간을 쏟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일 이후로 평가를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의 의사}에서 구원의 서정 중 ‘회심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좀 논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영적 수태: 초기 중생
2.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 동시사건
3. 회개와 믿음 : 동시사건
4. 칭의와 의식적인 새출생 : 동시사건
5. 구원의 확신
┗ 로빈슨크로소 12.07.13. 12:23
위의 단계들에 대한 해설에 대한 페이지를 전체적으로 찍어서 올렸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홀리조이 님과 유익이 되는 토론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holyjoy 12.07.13. 12:02
갈릭 님이 정리하시려면서
1. 영적 수태: 초기중생(하나님의 절대주권 개입: 인간개입 불가)와
4. 칭의와 의식적인 새출생(하나님의 절대주권 개입:인간개입 불가-동시사건)이라고 정리하시는 것이 더욱 분명할 것 같습니다.
1과 4에서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하지만, 2와 3에서는 인간의 애씀이 필요한데, 이 애씀은 그 기원이 물론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래야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을 갖는 데에 이르게 되고, 그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3)이 주어지는 순간에 4는 이뤄집니다. 회심의 때가 이때라고 할 수 있지요.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갈 2:20),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갈 5:24)이 바로 이 3과 4에서 (동시적) 이뤄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 번 제대로 이해되면, 결코 어려운 것이 없고 또한 복잡한 학자들의 토론이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하며 성경의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어긋난다면 저는 이 연속적 중생론을 언제라도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갈릭 님 자신이 언제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중생’하였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빛이 비춰지기를······.^^
lamad 12.07.13. 18:38
《 회심은 회개의 첫 시작이고 회개는 회심한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하는 지속적인 죄와의 투쟁에 따른 승리와 실패 사이에서 계속되는 반응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단회적이나 회개는 지속적이다. 이 회심을 헤페는 성령의 사역과 깊숙하게 연결시킨다. 회심은 그리하여 순순하게 성령의 사역이다.
죄로 죽은 인간은 다만 수동적으로만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향하여 연관되며, 그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한에서 성령의 행동에 항거할 수 있다. 따라서 은총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의지를 깨뜨리고 회심하게 한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이 첫 행동은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의 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인간의 천연덕스럽게 반항하는 의지를 깨트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의 일인 것이다.
회심의 이런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신인협력적인 것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회심이 인간의 결단적 차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헤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회심에서 인간의 의지의 상태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선행 은총과 관련하여, 인간의 의지가 아직 중생을 시작하지 않은 한에서 의지는 순수하게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회심이 실제로 발생하는 시간과 관련될 때, 그 의지는 통마누와 같지 않다. 성령을 통해 이유될 때, 인간의 의지는 능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즉, 회심에서 의지는 게으르거나 행동하지 않거나 감각이 없지 않다. 인간의 의지를 이끄시는 성령을 따른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발생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진행하기에 신인협력적인 것은 아니다. 》 →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
┗ 로빈슨크로소 12.07.13. 19:11
유태화라는 분은 “회심은 회개의 첫 시작이다.”고 하는 것을 보니, 회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군요. 그것이 아니라면 ‘회심 후에 성화로서 회개가 첫 시작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역시 회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같은 것으로 취하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하고 좀 차이가 크네요. 존 머레이와 같이 순간적 중생론 입장에서 하는 소리 같아 보입니다.
레이몬드 {최신 조직신학} 한번 보시면 구원의 서정을 도표식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참고하셔서 위의 유태화의 글을 읽어보시면 차이점이 보일 것입니다.
유태화는 백석대학교 유태화 교수 아닌가요? 백석대가 개혁주의였나???
┗ lamad 12.07.14. 01:12
로빈슨크로소 님은 인신공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개혁주의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는 학교가 어디 있나요?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님은 개혁주의 사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백석대학을 모독하시네요. 그 가운데도 진실한 학생과 교수가 있는데요.^^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어림잡아 비평하고 계신데 지금 말하는 방식은 권위 남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요? 제발 반대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하지 마시기 부탁드립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14. 01:30
회심과 회개를 구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리고 회심이 단회적이고, 회개가 지속적이란 정의 역시 옳습니다. 그 점은 정말 칭찬할 만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회심은 회개의 첫 시작이라고 하는데, 라마드 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은 출생입니다. 즉 넓은 의미의 중생인 회심을 말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넓은 의미의 중생인 회심이 일어나고 나서 그때부터 회개가 처음 시작됩니까? 라마드 님? 개혁주의를 완전히 반영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회개해야 구원 받는다.’는 성경의 명제는 상실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구원을 먼저 받고 회개합니까? 회개해야 구원 받습니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성경은 회심과 회개의 관계와 시간적 개념까지 알려줍니다.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그 관계성을 이야기합니다. ‘회개를 통해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회심(출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을 이루기 위한 요소 중 하나가 회개다.’는 것입니다.
라마드 님, 성경대로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 배열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윤 교수가 말한 “회심 후 회개가 첫 시작된다.”는 이 원리는 구원의 서정들을 윤 교수 나름대로 적용한 ‘원리’일 뿐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수정되고 바뀔 수 있습니다. 윤 교수의 이러한 원리가 성경해석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면 수정해야지요.
···(댓글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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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홀리조이 님이 삭제하신 글입니다.
로빈슨 크로소 님께 드립니다.
새삶(사계) 2012-07-15. 22:43
로빈슨 크로소 님께서 {자유 게시판} <본 토론에 대해: 양무리 마을 회원들께>에서, 제가 {강릉예명} {토론 게시판}에 쓴, <존 머레이 중생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텍스트 비평에 충실했는가? -1-, -2->를 놓고, {영혼의 의사} “그 책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은 새삶 님이신데, 새삶 님의 경우 {영혼의 의사}를 잘못 읽으셨더군요. ‘회심 과정을 다룬다.’는 내용을 ‘좁은 의미의 중생을 다룬다’는 의미로 읽으셨던 것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다음은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2010년 3쇄판) 48쪽 <회심은 하나의 과정이다>라는 소제목에 있는 글입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배경색도 제가 칠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중생을 생명이 영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회심을 중생 이후에 발생하는 과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홀리조이 님께서는 《“(논리상)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는 개혁신학자들 주장은 잘못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하나 드립니다.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위 글에서 믿음은 어디 부분에 속합니까? 중생 이전 부분에 속합니까? 중생 이후로서 회심 부분에 속합니까?
질문 하나는 마칩니다. 그리고 부탁 하나를 드리기 위해 글을 씁니다.
로빈슨 크로소 님께서는 {자유 게시판} <존 머레이의 오류>라는 글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글 한 쪽’만 사진으로 올리셨습니다. 그런데 ‘텍스트 비평이란 글 한 쪽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는 사실을 로빈슨 크로소 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텍스트 비평이란 ‘글 전체’를 두고 하거나 적어도 ‘앞뒤 부분’까지 살펴서 해야 합니다. 바꿔 말씀 드리자면, ‘한 문장(여러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여러 문장)의 앞뒤 문장들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문장 해석학의 기본원칙입니다. 물론, 오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 시편 73편을 적어서 그 예를 듭니다.
4: (악인)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몸이 건강하며,
5: 다른 사람과 같은 환난도 없고, 다른 사람과 같은 재앙도 없으므로,
6: 교만이 그들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 입는 옷이며,
7: 그들 눈꺼풀은 살쪄서 부풀었고, 마음의 욕망은 끝이 없다.
8: 그들은 비웃고 악하게 말하며, 거만하게 압제하는 말을 하고,
9: 그들 입은 하늘을 대항하며, 그들 혀는 땅에 두루 다닌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여기로 돌아와서 많은 물을 마시고,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지식이 있겠느냐?” 하는구나.
12: 봐라. 이들은 악한 자들이나, 항상 평안하며 재산이 늘어난다.
13: 참으로 헛되이 내가 내 마음을 깨끗이 했고, 내 손을 무죄하도록 헛되이 씻었구나.
제가 적은 이 하나님 말씀만 놓고 시편 73편 주제를 파악한다면, 시편 73편 주제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시편 73편 주제를 알려면, ‘앞뒤, 또는 시편 73편 전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 글 한 쪽만이 아니라 ‘글 전체’나 ‘글 앞뒤 쪽’을 사진으로 올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댓글
로빈슨크로소 12.07.15. 22:58
“우리는 이 책에서 중생을 생명이 영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 여기서 중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말합니다.
“회심을 중생 이후에 발생하는 과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 여기서 회심은 넓은 의미의 중생을 말합니다.
홀리조이의 말 “(논리상)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는 개혁신학자들 주장을 놓고 잘못됐다.” → 이 말에서 중생은 분명히 두 가지 면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두 가지 면”이라는 말을 아마 미처 보지 못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생의 두 면이란 ‘좁은~중생’과 ‘넓은~중생’을 말합니다. 홀리조이가 위에서 말하는 중생은 회심을 말합니다. 회심이 일어난 후 믿음이 일어나진 않으니까요.
┗ 로빈슨크로소 12.07.15. 23:14
홀리조이는 다른 덧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좁은 의미의 중생은 사람이 언제 일어나는지 모르기에 사람이 인식하는 중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사람이 인식하는 중생은 넓은 의미의 중생이기에 넓은 의미의 중생, 즉 회심을 주로 중생으로” 언급합니다. 이 점을 참고해서 홀리조이 님의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아, 회심’으로 생각하시면 오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홀리조이 님께 질문할 것인데, 왜 저에게 하시는지?
로빈슨크로소 12.07.15. 22:55
네. 앞뒤 쪽도 찍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질문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
새삶(사계) 12.07.15. 23:16
홀리조이 님 주장은 일단 생각하지 마시고, ‘노란색으로 칠한 질문’에만 답을 해 주십시오.
┗ 로빈슨크로소 12.07.15. 23:20
책에서 무엇이라 말하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지요? “회심의 과정 중의 믿음이다.”고 책에 나와 있네요. 벌콥이나 후크마나 레이몬드, 모두 다 마찬가지로 회심의 요소(믿음과 회개)를 말합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15. 23:28
아마 존 머레이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압니다. 존 머레이 전집에 있더군요. 중생 부분에······.
그런데 재미있게도 존 머레이도 “중생의 시작”이라고 말하는군요.
새삶(사계) 12.07.15. 23:48
“회심 과정 중의 믿음이다.”고 하셨습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 같은 개혁신학자들 조직신학은 ‘논리상’ 구원의 서정을 나눌 때 ‘믿음과 회개’를 ‘회심’이라는 용어로 씁니다.
그러면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위 정의에 비춰, (“중생=생명이 영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정의에 비춰) ‘중생’은 어디에 놓여야 합니까? 즉, ‘회심’ 앞에 놓여야 합니까, ‘회심’ 뒤에 놓여야 합니까?
┗ 로빈슨크로소 12.07.15. 23:57
존 머레이는 회개와 믿음이 회심이라고 하던가요?
제가 갖고 있는 존 머레이 전집에서 [부르심]에서 <창시자> 부분을 보면 “믿음과 회개와 회심과 같이 우리 편에서의 행위로부터 그 정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런데 위의 질문이 무엇을 질문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존 머레이가 말하는 회심을 피터 마스터스의 정의에 비춰보면 중생은 존 머레이가 말하는 회심의 앞 뒤 중 어디에 놓아야 하느냐?’는 뜻인가요? 회심 앞에 놓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 머레이는 중생 다음에 칭의로 곧바로 들어가네요. 회심 앞이고 뒤고 없습니다. 존 머레이에게 중생은······. 갈릭 님이 왜 그런지 잘 설명한 것으로 압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15. 23:58
머레이는 중생 자체를 새출생으로 보고 있군요. 회심을 따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으로만 보지 출생으로 표현하지 않는군요. 이 부분은 또 다른 학자들과 다르게 사용하는군요. 여기까지만 답하겠습니다.
새삶(사계) 12.07.16. 00:00
예. 그렇습니다. ‘피터 마스터스 위 정의’에 비춰서 ‘중생’을 ‘회심=믿음과 회개’ 앞에 놓으면 됩니다. 즉, ‘믿음’ 앞에 ‘중생’을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 앞에 ‘중생’을 놓으면 어떤 말이 성립합니까?
┗ 로빈슨크로소 12.07.16. 00:04
‘부르심 → 중생 → 회개와 믿음’이란 말이 성립되지요?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피터 마스터스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적인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은 모두 ‘부르심 → 중생 → 회개와 믿음 → 칭의 ······.’,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요? 그런데 머레이는 ‘부르심 → 중생 → 칭의’로 나가잖아요.
그럼 저는 여기까지만~ 굿나잇!
┗ 새삶(사계) 12.07.16. 00:25
예. 편히 쉬십시오. 편히 쉬신 뒤에, 제가 {강릉예명}에 올려둔 존 머레이 {구속론} <목차>를 살펴 보십시오.
새삶(사계) 12.07.16. 03:16
‘중생’을 ‘믿음’ 앞에 놓으면, “중생이 믿음 앞에 있다.”는 말이 성립합니다. 즉,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는 말이 성립합니다.
새삶(사계) 12.07.17. 20:37
<{뉴스앤조이}에서 제가 안티기독교인과 싸운 글을 짜깁기한 글입니다.>는 제 글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글을 쓸 때 미리 쓸 글을 머릿속에 준비해 두고, 하나하나 차곡차곡 써 나갑니다.
{뉴스앤조이} {이재철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논쟁} 때도, 백주년 기념교회 교인들에게 인격 모독을 당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발견하고, 그 목사님 구하기에도 나섰습니다. ‘그 인격 모독을 당하고 계셨던 목사님이 어느 분을 말하는 것인가?’는 아실만한 분은 아실 것입니다.
┗ 새삶(사계) 12.07.17. 20:29
‘감정’이 아닌 ‘논리’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싸워 나갑니다.
┗ 새삶(사계) 12.07.17. 20:39
방금 보니, 로빈슨 크로소 님께서 {준회원 게시판}에 올리신 글에서 “유태화 목사님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이다.”시며 {뉴스앤조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논쟁} 때 제가 구하기에 나섰던 목사님, 백주년 기념교회 교인들에게 ‘인격 모독’을 당하고 계셨던 목사님을 말씀하셨군요.
┗ 새삶(사계) 12.07.17. 20:35
이때도 감정이 아닌 논리로 한 걸음 한 걸음 차곡차곡 싸워서 백주년 기념교회 교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백주년 기념교회 교인들은 ‘논리에서 자기네들이 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더군요.
┗ 새삶(사계) 12.07.17. 20:43
왜 인식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답은 {양무리 마을} 카페지기님께서 강릉예명 목사님을 두고 이미 쓰신 “종족 우상”과 “미혹의 영”이라는 말에 답이 있습니다.
┗ 새삶(사계) 12.07.17. 20:44
{양무리 마을} 카페지기님, 카페지기님께 “종족 우상”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 새삶(사계) 12.07.17. 20:46
로빈슨 크로소 님과 제 토론에서 제가 로빈슨 크로소 님으로 하여금 ‘{영혼의 의사} 오류’를 밝히도록 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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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백주년 기념교회 교인들에게 인격 모독을 당하고 계셨던 목사님, 노승수(바보새) 목사님을 이 댓글란에서 언급한 까닭은, 즉 그 댓글에 숨은 ‘행간의 의미’는 “{페북}에서 노승수 목사님과 바로미 목사님이 {연중론 비평 토론}에 대해 이야기하신다.”는 정보를 듣고서, 노승수 목사님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즉 ‘바로미 목사님은 바보새 목사님을 홀리조이 님 희롱의 말 때문에 진흙탕 싸움과도 같은 {연중론 비평 토론}으로 데려오지 마십시오.’라는 의미였습니다.
강릉예명 목사님께서는 제 비평문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를 두고 “끝까지 읽지 못했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여름 {연중론 비평} 초기 때 ‘새삶’이라는 별명으로, ‘새삶’이 저라는 사실을 라마드 목사님께도 밝히지 않은 채, 라마드 목사님 뒤를 따랐던 제가 ‘사계’로 밝혀진 뒤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사계 님 글은 종종 심오해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뒤에 {연중론 비평}을 하면서 제 위 비평문을 {양무리 마을}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母 교회 후배인 목사님께 “제가 연속적인 중생론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목사인 저도 형님 비평문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는 말씀을 들은 까닭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크로소 님께서 제 비평문을 부분인용, 그것도 {영혼의 의사} 오류를 지적해 둔 부분, 제 비평문에서 핵심이 되는 곳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첫댓글 예..저녁에 차분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참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