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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강화 101코스 제1부
곤릉정류소-길정마을회관-곤릉입구-예쁜마을-
석릉입구-인천가톨릭대학교-계명수련원갈림길-
조산마을-능내리당집-진강정-능내리석실분-가릉-
능내리능안마을-갈멜산수양관-정원성산교회-
정제두묘-김취려장군묘입구-하우고개삼거리
20241009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곳곳에 숨어있는 고려시대의 역사 문화를 찾으며 강화의 마을과 논밭을 거니는 코스
2)관광포인트
- 고려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묘 '강화 가릉'
- 불음도, 아차도, 주문도행 선박이 운행되는 '외포항'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156-5 곤능버스정류소 옆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지선 48번 버스 이용, 곤능 버스정류소 하차
- 종점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547-73 강화파출소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31, 37번 버스 이용, 외포리 하차 도보 100m
- 외포항에서는 해산물과 젓갈을 판매하고 있으며 젓갈 수산시장이 있음
- 길이 13.3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
- 주요경로 : 곤릉버스정류소 4.9Km 강화가릉 2.7Km 정제두묘 2.4Km 건평항 3.3Km 외포항
2.강화 고려왕릉과 조선양명학의 뿌리 강화학파
제1부 : 서해랑길 100코스를 끝내고 맞은편 양도면 길정리 농가 앞 느티나무 아래서 금풍양조 막걸리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서해랑길 100코스는 경기 김포에서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도로 넘어와 길상면 지역을 탐방하는 코스다. 막걸리 흥취에 탐방한 길상면 지역의 초지리, 장흥리, 선두리, 온수리, 길직리 지역의 곳곳이 환하게 떠오른다. 벌써 추억이 되어 그리움의 불꽃을 밝힌다. 길상면 길직리에서 양도면 길정리로 넘어와 '해나무' 버스정류소에서 만난 홰나무는 이 지역 역사의 흔적을 줄기와 가지에 모두 새기고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이 홰나무를 다시 만날 때 길손은 얼마나 추억을 쌓고 낡아 있을까? 아니면 다시는 이 홰나무를 만나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될까?
막걸리 축제를 마치고 곤릉 버스정류소 옆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 앞에서 101코스 탐방을 출발한다. 서해랑길 101코스는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도장리, 조산리, 능내리, 하일리, 삼흥리, 건평리 지역을 거쳐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강화파출소 옆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101코스 탐방 중심지는 강화군 양도면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려 때 진강현(鎭江縣), 조선시대 이후 상도면(上道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양도면(良道面)이 되었다. 양도면(良道面)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남쪽은 마니산이 솟은 화도면(華道面)과 접하고, 서쪽으로 해명산이 솟은 석모도(席毛島)와 마주한다. 중앙에 강화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해발 441m 진강산(鎭江山)이 솟아 있다. 진강현(鎭江縣)의 진산(鎭山)인 진강산에는, 명마 사육장인 진강목장이 있었으며, 효종이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북벌정책과 관련한 명마 '벌대총(伐大驄)' 전설이 깃들어 있다. 진강산 정상의 큰 바위에는 효종의 명마 '벌대총(伐大驄)'의 발굽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진강산을 바라보며 길정리 마을회관과 권능감리교회 앞을 지나면 강화 곤릉(江華坤陵) 표지판이 전신주에 달려 있는 곤릉 입구에 이른다. 고려 왕릉 '곤릉(坤陵)'에 가보고 싶지만 거리가 멀어 그냥 통과한다. 몽골의 침략을 받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도읍한 시기는 1232년(고종19년)~1270년(원종11년) 38년 동안이다. 강화도에는 이 시기에 조성된 곤릉, 석릉, 가릉, 홍릉과 왕릉급으로 추정하는 능내리 석실분 등 고려 왕릉 5곳이 있다. 고려산 중턱에 있는 고려 제23대 고종의 왕릉인 홍릉을 제외하고 4곳은 진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곤릉(坤陵)은 고종의 어머니이며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능, 석릉(碩陵)은 고려 21대 희종의 능, 능내리 석실분(陵内里石室墳)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무덤, 가릉(嘉陵)은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서해랑길 101코스에서는 곤릉과 석릉을 제외하고, 능내리 석실분과 가릉 바로 옆을 통과하기에 고려 왕릉을 살펴볼 수 있다.
진강산 자락길로 오르기 위해 길정리 '예쁜마을'을 지나간다. 주민들이 지은 '예쁜마을' 이름처럼 마을이 예쁘다. 집들이 옹기종기 다정하게 자리하고, 단아한 문패, 그림과 장식물, 길손을 위한 맞이인사 게시판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겨운 강화 사투리로 적혀 있는 게시판에 긴장감이 툭 끊어진다. '길만 걸으시겨', '오늘도 내일도 항상 건강을 챙기시겨' 강화 사투리가 추억을 불러낸다. 지난 시절 드라마에서 강화 사투리를 잘 사용했던 탤런트 사미자님이 떠올랐다. "잘 계시겨! 길손은 떠나가이다." 예쁜마을과 작별하고 산길로 들어갔다.
약수터 쉼터에 이르니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선생의 한시 '鎭江山歸雲(진강산 귀운)'이 적혀 있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이게 뭐지? 무식한 길손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선생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출신으로 1906년 강화도 전역을 탐방하고 칠언절구 256수를 기록한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을 남겼으며, 심도(沁島)는 강화도의 별칭이라고 한다. 이 기행시집은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에서 김형우·강신엽 공역으로 2008년 발행되었다. 발간사를 군데군데 가려 읽어본다. "책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 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 것으로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新 심도기행'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갑영"(발간사에서)
석릉(碩陵) 입구에서 석릉에 올라보려 하였으나 곧바로 포기하고 그대로 통과하여 양도면 도장리 어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고개에서 북쪽 진강산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강화도에 거주하는 함민복(1962~) 시인의 시 '산'의 구절 "산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을 적은 게시판이 고갯길에 세워져 있다. 그의 시 '산'에서, 산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는 곳임을 아름답게 읊었다. 그의 시 '산' 전문을 찾아 읽어 본다.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진강산 자락에는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자리하며 서해랑길은 인천가톨릭대학교 울타리를 따라간다. 신학생들을 위해 조용히 통과해 달라는 안내판과 강화나들길을 허락해 준 인천광역시 양도면 도장리 마을 주민에게 감사하는 감사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울타리 안에는 신학생을 위한 묵상 조각상들이 울타리를 따라 세워져 있다. 진강산 자락길에서 진강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몇 곳에 있고, 아래쪽 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몇 곳에 있는데, 서해랑길은 계속 진강산 자락길을 따라간다. 산길에는 가을꽃의 대명사 구절초 하얀꽃들이 피어 눈부시며, 또 산부추 홍자색 꽃들이 길손의 마음을 물들여서 주저앉았다. 꼭 막힌 진강산 자락길에서 풍경이 활짝 열리며 강화도 제1봉 해발 472m 마니산이 눈 앞에서 길손을 맞이한다. 오, 너에게 꼭 한 번 안겼을 뿐인데, 강화에 오니 너는 계속 나에게 눈길을 준다. 다시 네게 가마. 마니산이 열리는 자락길 아래의 지역은 양도면 조산리 마을이다.
양도면 능내리 당집을 지나 진강산 정상 오르는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진강정(鎭江亭)이 있다. 진강정 안 기둥에는, 황범주가 '진강귀운(鎭江歸雲)' 내용의 해설을 번역한 글인 듯한 게시판과 황범주가 지은 한시 '벌대총(伐大驄)' 게시판 등 몇 개의 게시판이 정자 기둥에 붙어 있다. 효종의 명마 '벌대총(伐大驄)'을 읊은 황범주의 칠언절구 '벌대총(伐大驄)'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총마(驄馬)를 읊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칠언율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驄馬行)'를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효종은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론을 펴지만 재위 10년만에 요절하여 북벌은 실패하였다. "高鳥回飛水影空(고조회비수영공) 새는 높이 날아 맴돌지만은 물에는 그림자 비치지 않고/ 歸依無定自天風(귀의무정자천풍) 돌아와 기댈 곳 없는 바람은 저절로 불어오는데/ 北望遼薊長噓氣(북망요계소장허기) 북쪽 요동과 북경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고 있는/ 下有如龍伐大驄(하유여용벌대총) 용과 같은 벌대총이 아래에 있네."(황범주의 '벌대총(伐大驄)') 북쪽 요동과 북경을 바라보며 용과 같은 벌대총이 달려갈 기세는 효종의 마음을 이입한 것이리라.
진강정을 내려와서 고려 왕릉으로 추정하는 능내리 석실분(江華陵内里石室墳)을 살피고 내려오면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1222~1237)의 가릉(嘉陵), 그런데 봉분 위에 상투 모양이 얹혀 있는게 이상하다. 고려 왕릉이 저런 모양일까? 아니면 복원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기괴한 봉분인 가릉(嘉陵)을 살피고 내려오면, 바로 아래에는 양도면 능내리 능안마을과 숙동마을, 맞은편에는 화도면의 마니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 101코스 탐방길이 얼마나 남았는가? 진강산 자락길은 끝날 줄을 모른다. 가릉을 내려와서 양도면 능내리 능안마을을 통과하여 서해랑길은 다시 진강산 자락길로 올라간다. 능안마을에서 진강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뒤돌아보면 양도면 능내리와 하일리 지역과 해안, 화도면(華道面) 문산리(文山里)와 마니산, 서북쪽으로 석모도의 해발 320m의 해명산이 모두 조망된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진강산 자락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능내리 상수도 취수원이 있으며, 갓바위 가는 길 표지판이 있는 진강산 자락길로 진입한다. 갓바위는 진강산 서쪽 능선에 있으며, '갓바위와 아기장수'의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하동 정씨 선산을 내려가면 다시 양도면과 화도면 지역 풍경이 열리고, 마니산 능선이 길게 이어진다. 이 열린 풍경을 살피고 내려가면 산 속에 건물들과 운동 시설이 있다. 무엇일까? 알아보니 갈멜산 수양관이며, 수양관에서 내려가면 넓은 출입로가 있고 출입로 양쪽 문주에 정원성산교회와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이라고 적혀 있다. 이곳이 양도면 하일리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인 것 같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길손은 이런 종교 시설이 자리한 곳에서는 늘 두려움이 앞선다. 어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 진강산 자락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강화남로가 남북으로 이어지고 그 위쪽에 정제두(鄭齊斗) 묘가 있으며, 그 아래쪽에 정제두 아버지 정상징(鄭尙徵)과 그의 어머니 한산(韓山) 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정제두 묘에는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상석, 혼유석, 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이 조성되어 있다. 설명안내판 첫머리에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는 조선 영조 대의 학자로 18세기 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라고 적혀 있다. 강화학파는 곧 양명학파가 되는구나.
그러면 양명학이 무엇일까?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이 아니라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두산백과) 라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성리주자학이 종교 신앙처럼 받들어졌는데, 성리학과 대립된 성격의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근본 이념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제두는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조선에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성리학이 관념적인 성격이 강한데, 양명학은 실천적인 면을 중시하는 것 같다. 이 양명학을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꽃피웠으며, 그래서 강화 주민들이 대단히 현실적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은 것처럼 보인다.
정제두 묘에 이르러 진강산 자락길에서 해방된다. 길고 긴 진강산 자락길에서 내려와 강화남로를 따라 하우고개로 올라간다. 하우고개는 양도면 하일리의 정제두 묘와 삼흥리 존강(存江)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하일고개라고도 하는데, 하곡(霞谷) 정제두의 묘가 있어 이 고개를 하곡현(霞谷峴)이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하우고개 왼쪽에 김취려 장군 묘 입구가 있다. 김취려(金就礪, ?~1234)는 거란군을 격퇴한 고려 장군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본관은 언양(彦陽),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최우 무신정권이 1232년(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화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1234년(고종 21년) 63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를 참배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냥 통과한다.
양도면 하일리(霞逸里)에서 하우고개를 넘는다. 노을 霞, 숨을 逸, 하일리(霞逸里)는 서해에 접해 있고 경관이 좋아 속세를 멀리 떠나 숨어사는 은사의 마을이라 하일리, 또는 비가 일시에 많이 내리면 농사에 막대한 지장을 주어, 안개비가 내리듯이 조용히 내려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하일리라 부른다고 한다. 하우고개를 넘으면, 양도면 삼흥리(三興里) 지역이다. 산문(山門), 흥천(興天), 존강(存江) 부락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어 삼흥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흥천(興天)마을은 삼흥리에서 제일 큰 마을로 예전에 흥천사가 있어서 흥천이 되었고, 존강(存江)마을은 존개이 또는 종개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들어왔다고 하여 존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삼흥리 뒤쪽에 산봉들이 이어진다. 저 산봉들이 고려산과 혈구산의 산줄기가 맞을까? 산문(山門)으로 들어오는 길이 멀어 보인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1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3분(휴식시간 포함)
인천광역시 양도면(良道面) 길정리(吉亭里) 곤릉(坤陵) 버스정류소 옆에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를 가까이서 살핀다. 101코스는 거리 13.4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어려움이다.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101코스 탐방 출발을 기념한다. 중앙 뒤에 진강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고려왕릉로의 곤능버스정류소에서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강화 곤릉 출입로 앞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 기둥 위에 101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중앙 뒤에 진강산이 솟아 있고, 서해랑길은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맨 오른쪽 길정리마을회관 앞을 거쳐 진강산 자락을 돌아간다.
우아한 느티나무 아래서 금풍양조 막걸리를 마신 뒤 오른쪽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 앞에서 출발하였다.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길정리마을회관 앞을 지나간다.
길정리(吉亭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이다. 지역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 작은 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 길정 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은 곤릉, 문고개, 정하동 마을이 있다. 곤릉 마을은 문고개에 있는 마을이며, 문고개 마을은 고려 제 23대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후 진강산에 목장을 설치하였을 때 문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정하동 마을은 정자가 있었다 해서 명명되었다. - 두산백과
고려왕릉로199번길에서 진강산(鎭江山)을 바라본다. 서해랑길은 진강산 자락을 남서쪽으로 돌아간다.
진강산(鎭江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양도면 능내리·도장리·삼흥리·하일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441m). 강화 6대 산의 하나로 전한다. 조선 시대 진강현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도지』와 『대동여지도』에 진강산(鎭江山)이 표기되어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가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진강산 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도 산 이름이 나오며, 『강화부지』에는 "강화부 성남쪽 삼십 리에 있는데 산등성이가 낙타 등과 같다. 그 아래로 촌락이 번성하여 옛 진강현이 있었다. 또한, 산에는 목마장(牧馬場)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 "진강산 봉수는 동쪽으로 대모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망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지명이 확인된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권능감리교회 앞을 통과한다.
고려왕릉로199번길에서 오른쪽으로 강화 곤릉(坤陵) 출입로가 있다. 들르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묘지 앞에 설치되어 있는 설명안내판과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선생의 칠언절구 '坤陵(곤릉)'을 조사해 읽어 본다.
사적 제371호 강화 곤릉(江華坤陵)은 고종의 어머니이며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미상~1239)의 능이다. 강화 곤릉은 지하에 구멍을 파고 돌을 이용하여 방을 만든 후 입구를 만든 돌방무덤이다. 강화 곤릉 주변의 석조물이 없어지고 봉분 또한 무너져 내린 것을 1974년에 보수하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강화 곤릉은 순경태후의 강화 가릉과 함께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단 2기의 고려 시대 왕비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2011년 '곤릉에서 '강화곤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설명안내판
德庄南麓白雲深(덕장남록백운심) 덕장산 남쪽 기슭 흰구름이 덮였는데,
指是坤陵屹到今(지시곤릉흘도금) 이 곤릉이 지금껏 우뚝하게 서 있네.
短草萋萋松未老(단초처처송미로) 풀들은 우거지고 소나무도 안 늙어서,
猶含舊國可憐心(유함구국가련심) 고려 왕조 가련한 마음을 아직도 머금고 있도다.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선생의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1906)에서 '坤陵(곤릉)'
고려왕릉로의 곤능 버스정류소 앞에서 출발하여 걸어온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뒤돌아본다.
서해랑길은 삼거리에서 왼쪽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간다. 직진하면 해발 320m 덕정산으로 이어진다.
삼거리에 예쁜 목장승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개천 건너편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예쁜마을로 이어간다.
강화 곤릉 출입구를 거쳐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고려왕릉로199번길 삼거리로 올라왔다.
삼거리에서 예쁜 목장승이 세워져 있는 개천의 다리를 건너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예쁜마을로 들어왔다.
개천 옆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예쁜마을로 들어와서 뒤돌아본다. 덕정산 산줄기에 사격훈련장이 설치되어 있다.
개천 옆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오다가 꼬부라진 길을 돌아 마을 안쪽으로 들어왔다. 꼬부라지는 길목에 '길만 걸으시겨'라는 강화 사투리를 적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중앙 뒤쪽에 권능감리교회 건물이 보인다.
고려왕릉로199번길을 따라 예쁜마을 '미숙·건도'네 집 앞을 지나간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 표지판의 마음이 곱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고려왕릉로199번길의 예쁜마을을 지나간다.
예쁜마을 농가 입구의 설치물에 장식된 문구 '오늘도 내일도 항상 건강을 챙기시겨' 강화 사투리가 친근하게 들린다.
예쁜마을 농가의 작은 창고를 장식한 벽화와 바람개비, 돌에 그린 그림과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생길거야. 좋은 일이 너를 기다릴거야.' 서해랑길은 앞쪽 전신주 앞에서 고려왕릉로199번길과 헤어져 왼쪽 숲길 진출입로로 올라간다.
고려왕릉로199번길과 작별하고 도랑의 나무다리를 건너 나무계단을 올라가 숲길로 진입한다.
나무계단을 올라와 지나온 길정리 예쁜마을을 내려본다.
호젓한 숲길을 따라 진강산 자락으로 올라간다.
샘터 옆에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칠언절구 '鎭江山歸雲(진강산 귀운)'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강화 불은면 두운리 출신으로 1906년 강화도 전역을 탐방하고 칠언절구 256수를 기록한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을 남겼다. 심도(沁島)는 강화도의 별칭이라고 한다.
鎮江山色碧如屏(진강산색벽여병) 진강산 산색은 푸른 병풍을 친 듯하고,
片片歸雲錦繡形(편편귀운금수형) 흐르는 조각구름 비단에 수놓은 듯하다.
首智遺墟何處是(수지유허하처시) 수지현 옛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造翁筆下影丹靑(조옹필하영단청) 조물주의 붓끝 아래 단청이 그려졌네.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1906)에서 '鎭江山歸雲(진강산 귀운)'
강화 석릉(江華碩陵)에 오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설명안내판과 화남(華南) 선생의 시 '碩陵(석릉)'을 조사해 읽어 본다.
사적 제369호 강화 석릉(江華碩陵)은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7년(1211)에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고려 고종 24년(1237)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2002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돌로 만든 사람 조각인 석인상 등이 발견되었고, 청자상감국화문잔탁 등 12~13세기 상감 청자 전성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강화 석릉은 남한 역사에 남은 5기의 고려 대 왕릉과 왕비 능 중의 하나로 고려 대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 *최충헌(崔忠獻) : 무신이 정권을 잡은 시기(1170~1270)에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인물로 4대에 걸쳐 60여 년 동안 최씨 정권을 형성함 - 설명안내판
碩陵知在鎮江巒(석릉지재진강만) 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獨閉空林月影寒(독폐공림월영한) 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猗我聖朝封築謹(기아성조봉축근) 아, 우리니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年年奉審地方官(연년봉심지방관) 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선생의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1906)에서 '碩陵(석릉)'
왼쪽은 길정리 방향, 직진은 양도면 도장리 어두마을 방향, 서해랑길은 오른쪽 진강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강산 방향 길목에 강화나들길 이정목과 함민복의 시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산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해발 443m 진강산은, 472m 마니산과 466m 혈구산에 이어 강화도 제3봉에 속한다. 서해랑길은 진강산 자락길을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진강산 자락 인천가톨릭대학교 울타리를 따라간다. 신학생들을 위해 조용히 통과해 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화나들길을 허락해 준 인천광역시 양도면 도장리 마을 주민에게 감사하는 감사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안에는 신학생을 위한 묵상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제4처 예수님, 성모님과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울타리를 지나간다. 가톨릭대학교 사유지가 어디까지인지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위쪽은 진강산 정상 방향, 아래쪽은 큰나무캠프힐 방향, 서해랑길은 왼쪽 게명수련원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강산 자락길 언덕에도 벼를 농사하는 논이 있다. 서해랑길은 위쪽 언덕을 넘어간다.
산길에 가을꽃의 대명사 구절초 흰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왼쪽은 양도면 조산리 계명수련원 방향,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산길에 산부추 홍자색 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앞쪽은 양도면 조산리 마을이며, 뒤쪽 화도면 문산리 지역에 강화도 제1봉 해발 472m 마니산이 솟아 있다. 맨 왼쪽은 초피산.
조산리(造山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서쪽에는 진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은 가오래기, 국정, 조구부창 마을이 있다. 가오래기 마을은 앞 개에 가오래기(모시조개)가 많았다 해서 가오래기 마을이라 불리며, 국정 마을은 근퇴뫼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구부창 마을은 나루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산백과
양도면 능내리 당집을 바라보며 진강산 자락길을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강화나들길 3코스와 동행한다. 언덕의 쉼터를 넘어 내려간다.
오른쪽은 진강산 정상 방향, 서해랑길은 가릉 방향으로 내려간다.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종점은 1.2km 남아 있다.
진강산 정상 오르는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오면 진강정(鎭江亭)이 있다. 진강정에 올라가 게시판을 살펴 보았다.
게시판의 내용이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다. 황범주가 '진강귀운(鎭江歸雲)' 내용을 번역하였다는 것인지, 황범주가 '진강귀운(鎭江歸雲)'을 직접 창작하였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황범주 作'이라면 황범주가 지었다는 것인데, "續修增補 江都誌에서 江都十景中에서 拔萃한 鎭江歸雲 內容 解說 속수증보 강도지에서 강도십경 중에서 발췌한 진강귀운 내용 해설"을 번역한 듯.
仍舊, 每朝暮에 有雲이 自西海而起하야, 옛날부터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서해로부터 일어나오는 구름이 있었지만, 或巾裏峯頂하고, 혹 봉우리에 두건을 씌운 것 같고, 或帶束山腰하니, 혹은 산허리에 띠를 두른 듯한 것이, 獨鎭江山雲이 然也니라, 독특하게 진강산의 구름만 그러하다.
진강산의 유래 설명이 없다. 진강산에는 진강목장과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데, 왜 진강산 지명이 되었을까?
진강산 기슭에는 고려 희종의 능인 석릉을 비롯하여 가릉·곤릉 등이 있어 옛 도읍지의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 유명한 진강목장이 있던 곳으로 조선조 효종임금이 타시던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황범주가 지은 한시 '벌대총(伐大驄)' 칠언절구 게시판이 정자 기둥에 붙어 있다. 벌대총은 고선지 장군의 총마(驄馬)를 닮은 듯.
高鳥回飛水影空(고조회비수영공) 새는 높이 날아 맴돌지만은 물에는 그림자 비치지 않고
歸依無定自天風(귀의무정자천풍) 돌아와 기댈 곳 없는 바람은 저절로 불어오는데
北望遼薊長噓氣(북망요계소장허기) 북쪽 요동과 북경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고 있는
下有如龍伐大驄(하유여용벌대총) 용과 같은 벌대총이 아래에 있네.
진강정(鎭江亭)에서 내려오면 강화 능내리 석실분(江華陵内里石室填)이 있다.
이 석실분은 강화 진강산 남쪽에 있는 고려 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1259~1274 재위)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지하에 만든 석실 위로 흙을 쌓아 올린 봉분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난간석과 석수(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가 배치된 형태이다. 무덤 뒤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나지막한 담이 둘러쌓여 있다. 석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강화가 도읍이었던 시기(1232~1270)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설명안내판
석실분 위쪽으로 올라가서 내려보았어야 하는데 무덤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을 내려가며 석실분 입구의 설명안내판 있는 곳을 내려본다. 오른쪽으로 가면 가릉이 있다.
능내리 석실분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아오면 강화 가릉(江華 嘉陵)이 있다.
가릉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냥 통과하여 아쉽다. 봉분 위에 상투 모양이 얹혀 있는게 이상하다. 고려 왕릉이 저런 모양일까?
강화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1222~1237)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아들인 충렬왕과 딸을 연이어 낳고 1237년에 1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경태후는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외손녀로 외증조부는 최충현이다. 순경태후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받던 문신이었다. 가릉은 돌방무덤으로 지하에 구멍을 파고 돌로 돌방과 입구를 만든 무덤이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졌으나 1974년에 보수·정비하였다. 이후 2004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재정비하였다. 강화 가릉은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과 함께 남한 지역에 단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시대 왕비의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지정 당시의 '가릉'이라는 명칭은 2011년 '강화 가릉'으로 변경되었다. - 설명안내판
강화 가릉(江華 嘉陵) 입구에 화남(華南) 선생의 칠언절구 '가릉(嘉陵)' 시를 적은 게시판이 있다.
一片鎮江幾層(일편진강벽기층) 진강산 한쪽 편에 겹겹의 푸른 기운 감돌고,
白雲多處是嘉陵(백운다처시가릉) 흰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年年杜宇東風淚(연년두우동풍루) 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 짓고,
每向開花百感增(매양개화백감증) 개경을 향할 때마다 만감이 더한다네.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 선생의 기행시집 <심도기행(沁島紀行)>(1906)에서 '嘉陵(가릉)'
가릉 입구에서 오른쪽 앞의 오솔길 펜션 왼쪽으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능안 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오솔길 펜션 앞에서 오른쪽 강화남로634번길을 따라가도 되는데, 서해랑길은 왼쪽 강화남로634번길로 이어간다.
강화남로634번길로 내려오면, 앞쪽에 양도면 능내리 능안마을, 왼쪽 뒤에 화도면 문산리 마니산 산줄기가 이어진다.
능내리(陵內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이다. 서쪽으로 바로 서해와 접해 있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는 하일 저수지가 있으며, 서쪽에는 영일 방조제가 있다. 자연마을은 공숙, 능내 마을이 있다. 공숙 마을은 능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능내 마을은 고려 제 24대 원종 비의 가능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산백과
강화남로634번길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면 진강산이 솟아 있다. 진강산은 양도면 능내리, 도장리, 삼흥리, 하일리에 걸쳐 있다.
강화남로634번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능안마을 위쪽으로 올라간다.
강화남로634번길을 따라 능내리 능안마을 위쪽으로 올라간다. 언덕의 집 앞에 큰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우아하다.
강화군 큰나무로 2019년 지정된 능내리 느티나무는, 추정 수령 200년, 수고 18m, 나무들레 3.0m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자라며 1,000년 이상을 생존하는 느티나무라는 이름은 '늘 티내는 나무'라는 뜻에서 '늘티나무'로 부르다가 느티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오래된 느티나무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마을 경계목과 정자목으로 많이 심고, 마을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여겨 왔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 어귀나 집 주변, 고갯마루 언덕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목나무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고 한낮의 휴식을 취하면서 농사일을 의논하고 마을의 안녕과 화합,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나랏일을 걱정하여 왔다. 그러므로 마을을 지켜주며 우리 조성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이 느티나무는 우리 민족의 보호수이고,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소중한 자연유산으로 문화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큰 나무이다. 설명안내판
강화남로634번길에서 더 올라오면 강화남로638번길로 이어진다. 오른쪽 위에 진강산이 솟아 있다. 진강산(鎭江山)은 진강현(鎭江縣)의 진산(鎭山)으로, 조선 효종 때 '벌대총(伐大驄)'이라는 명마를 길러낸 진강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강화남로638번길에서 뒤돌아보면 왼쪽 아래는 양도면 능내리, 오른쪽 아래는 하일리, 왼쪽 뒤에 화도면 마니산이 보인다.
양도면(良道面)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중서부에 위치하는 면이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삼산면과 마주 보고 있다. 면사무소는 하일리에 있다. 면의 중앙에 군에서 마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진강산(441m)이 소재한다. 고구려 수지현(首知縣), 신라 수진현(守鎭縣), 고려 진강현(鎭江縣)이었고, 조선 시대 이후 상도면(上道面)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위량면의 '량'과 상도면의 '도'를 합쳐 양도면이라는 지명이 처음 출현하였다. 길정리 · 도장리 등 8개의 법정리를 관할한다. 도장리는 조선 시대 진강장(鎭江場)이라는 목장의 입구에 있던 마을이라고 전한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강화남로638번길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석모도 남단에 솟은 해발 320m의 해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진강산이 바로 앞에 우뚝하다. 서해랑길은 강화남로638번길을 따라 앞쪽의 폐축사 앞을 거쳐 진강산 자락 숲길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갓바위 가는 길로 이어가며, 그 뒤에 상수도 취수원이 있다. 갓바위는 진강산 서쪽 능선에 있다고 한다.
옛날 능내리 공숙마을 어느 평범한 집안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부모가 외출하고 돌아오니 아기가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여러 날 이곳저곳을 울고불고 찾아보았지만 역시 아기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기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모는 아기의 몸을 살펴보았다. 아기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또 아기가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예사롭지 않은 아기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하여 진강산 정상까지 올라갔을 때 진강산 큰 바위 밑에서 아기가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당황하였다. 부모는 못 본 체 집으로 돌아와 아기가 돌아오면 죽여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죽일 방법이 없었다. 아기를 죽이는 것은 당시 하민층에 장사가 태어나면 삼족을 멸한다는 통념에 따른 것으로 남들이 알면 큰 벌을 받을까 조바심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스님이 '아기가 돌아오면 돌절구를 덮어씌우고 그 위에 팥 한 가마니를 올려놓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알려주어 스님의 말씀대로 아기를 죽였다. 아기가 죽자 진강산 그 큰 바위는 사라지고 버섯같이 생긴 갓 바위가 솟아올라 아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슬피 울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지금도 진강산 갓바위는 공숙마을을 슬픈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 '갓바위와 아기장수' 설명안내판
갓바위 가는 길 이정목 뒤에 양도면 능내리 능안마을 간이 상수도 취수원 건물이 있다.
간이 상수도 취수원 건물을 지나 숲길을 올라오면 하동 정씨 선산 표지판이 앞에 있다. 왼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하동 정씨 선산 입구에서 왼쪽으로 내려와 숲길을 따라오면 강화나들길4코스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진강산 자락길에서 남쪽으로 풍경이 활짝 열리고 강화군 화도면(華道面) 문산리(文山里)에 마니산이 솟아 있다.
강화나들길 4코스 해넘이길은 종점까지 7.9km가 남아 있다. 서해랑길 101코스는 강화나들길 3코스 및 4코스와 동행한다.
진강산 자락길을 따라 내려가면 양도면 하일리 갈멜산 수양관이 있다.
갈멜산 수양관에서 맨 오른쪽 숲길로 내려오면 정원성산교회와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 정문이 있다.
양도면 하일리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 정문 입구에서 내려가면 강화남로, 서해랑길은 오른쪽 숲길로 이어간다.
양도면 하일리 진강산 자락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정제두 묘가 나온다.
왼쪽에 정제두 아버지 정상징(鄭尙徵)과 그의 어머니 한산 이씨의 합장묘가 있고, 위쪽에 정제두 묘가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정제두 묘(鄭齊斗 墓)에는 상석 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는 조선 영조 대의 학자로 18세기 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현종 9년(1668)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하며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문집으로는 『하곡문집(霞谷文集』 등이 있다. 묘비는 순조 3년(1803)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신대우가 짓고 서영보가 썼으며, 묘 앞에는 정제두의 아버지인 정상징과 그의 어머니인 한산 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 설명안내판
묘 앞에 상석과 혼유석, 그 오른쪽에 묘비가 있다. 신대우(申大羽)가 글을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쓴 비문이 묘비 뒷면에 적혀 있고, 묘비 앞면에는 朝鮮議政府右贊成兼(조선의정부 우찬성 겸) 世子貳師成均館祭酒(세자이사 성균관제주) 諡文康公鄭先生齊斗之墓(시 문강공 정선생 제두지묘)라고 적혀 있다.
부모가 아들 아래에 묻혀 있다. 그래서 묘비를 옆으로 세운 것일까?
묘비(墓碑) 앞면에 "贈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成均進士 鄭尙徵墓(성균진사 정상징 묘) 贈貞敬夫人 韓山李氏 祔左(증 정경부인 한산 이씨 부좌)"라고 적혀 있다.
정제두 묘와 그의 부모님 합장묘를 살피고 내려와 정제두 묘역을 올려보았다.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정제두 묘 앞으로 내려와서 정제두를 살폈다.
정제두 묘 아래의 강화남로에서 양도면 하일리 마을을 내려본다. 맨 뒤 왼쪽에 초피산, 맨 오른쪽에 마니산이 보인다.
하일리(霞逸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리(里)이다. 서쪽으로 바로 서해와 접해 있는 어촌 마을이다. 남쪽에는 하일 저수지가 있으며, 동쪽으로 작은 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안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옹일뿌리, 하곡, 하일 마을이 있다. 옹일뿌리 마을은 하일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하곡 마을은 하우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하일 마을은 큰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해서 하일 마을이라 불린다. - 두산백과
강화남로를 따라 양도면 하일리 하우고개로 올라간다. 하우고개는 하일리 정제두 묘와 삼흥리 존강을 잇는 고개로 하일고개라고도 한다. 하곡(霞谷) 정제두의 분묘가 있어 하곡현이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강화남로 하우고개 오르는 길에 '양도면木 산딸나무 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산딸나무는 5~6월에 꽃이 피는데, 옛말에 "그 빛이 사방을 비추어 몸에 걸치면 길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밤에도 환하고 아름답다. 꽃잎이 4개의 십자가 모양인 듯 하지만 사실 꽃잎으로 보이는 것은 포엽(苞葉)이라고 하고, 그 한가운데에 둥근 형태의 녹색꽃이 모여 핀다. 한편, 강화에서는 박달나무라고도 부르는 이 나무는 가을에 빨간 산딸기 모양의 열매가 맺힌다 해서 산딸나무라고 부른다. - 설명안내판
위쪽 하우고개에 김취려 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김취려 묘 입구에 김취려 장군 묘소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장군의 묘를 들르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김취려(金就礪)의 본관은 언양(彦陽), 시호는 위열(威烈,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이며 음서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1216년(고종 3년) 거란이 압록강 일대를 침입하였을 때 크게 물리치고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다음해 충청도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시켰으며 1218년(고종 5년) 다시 침입한 거란을 평정하였다. 최우 무신정권이 1232년(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화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1234년(고종 21년) 63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묘지명을 통해 '7월 12일에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설명안내판
하일리에서 하우고개를 넘으면 삼흥리 지역이다. 강화남로 하우고개 삼거리에서 왼쪽 건평로155번길로 이어간다. 삼흥리는
산문(山門), 흥천(興天), 존강(存江) 부락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어 삼흥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흥리(三興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리(里)이다. 산기슭에 위치한 농촌 마을로, 남쪽으로 산이 감싸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달우물, 산문이, 존개이 마을이 있다. 달우물 마을은 큰 우물이 있다 해서 달우물 마을이라 불리며, 산문이 마을은 흥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존개이 마을은 개울이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 두산백과
중앙 앞에 퇴미산, 그 뒤에 혈구산이 맞을까? 서해랑길은 하우고개 삼거리에서 왼쪽 건평로155번길로 이어간다.
양도면 삼흥리 하우고개 삼거리에서 건평로155번길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