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점’을 옮겨보는 기회
Because of living in a small country, are you so narrow-minded? 아마도 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 욕한다고 한 소리였을 거다. 발화자의 수준이 드러나는 말이라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으나 또 한편으론 하루면 차로 끝에서 끝으로 이동이 가능한 나라에 사는 사람과 차로 삼박 사일을 꼬박 달려도 닿지 못할 지경(地境)의 나라에서 살던 사람의 공간에 대한 경계, 나아가 생각의 경계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그의 욕이 나름 이해(!)되기도 했다. 더 가까운 예로 대전 출신인 나는 1시간 통학거리, 통근거리라면 꽤나 안타까워하며 힘들겠단 소리를 주고받았다. 수도권에 살며 놀라웠던 건 1시간 이동거리쯤은 “후훗. 별 거 아니군.“하는 사람들의 생각, 감각이었다. “기준점” 내가 한계치로 삼는 그 어떤 것. 나에게 한 시간은 통근, 출근시간의 마지노선이었다. 학교를 가든, 직장을 가든 매일 다녀야 하는 길에 그 이상의 시간과 수고를 쏟는 것은 내 기준밖이었다.
성, 인종, 직업, 소득, 사는 곳, 자라온 지역, 가정환경이 다른 만큼 사람마다 기준점이 제각각이다. 그 기준점이 이동되는 경험을 하는 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것이 ‘책읽기’ 아닐까. 이 책은 나를 상상치도 못한 지점에 훌쩍 데려다 놓았다. 흑인. 노예. 여성이라는 자리에. 게다가 1819년-1976년의 엄청난 시대를 막무가내로 옮겨가며 내 기준점과 비교하게 했다.
‘사람을 때리면 안 돼.’ ‘흑인을 검둥이라 부르면 안 돼.’ ‘사람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야.’ ‘여자를 강간하는 건 범죄야.’ 따위의 도덕률(기준)이 현재와 완벽히 다른 세계를 노예해방 이후의 세대인 주인공 다나의 심경으로, 상대적으로 인종문제에 심각성이 덜하고 노예제에 대한 감각도 무뎌진 대한민국에서 글을 읽는 내게. 현실에 적응해가며 ‘책 읽는 검둥이, 하얀 검둥이’로 불리는 다나가 이건 옛날 이야기일뿐이야 라며 위로 삼는 현실 독자인 나에게.
밑동에 납을 집어넣은 길고 검은 채찍(353)이 언제든 본인을 향해 휘둘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할 말은, 해야 할 말은 기어코 하고 마는 다나. 나라면 저 채찍으로 맞느니, 내 조상이 없어지든 말든, 내가 죽든 채찍을 휘두르는 대상을 죽이든 요절을 내리라 이를 갈다가도 막상 닥치면 지레 무서워 기절해 버릴거라, 바로 납작 엎드려 비굴한 짓을 할 거란 생각을 하는 나.
그것에 멈추지 않는다. 흑인 여성 노예라고 그 안에 촘촘하게 세워진 위계가 없겠느냐며. 자유민 흑인(다나), 백인의 사랑을 받는 흑인(앨리스), 백인의 노리개가 된 흑인(테스), 노예인 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그 삶 이상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흑인(세라)를 등장시켜 씨줄 날줄 엮어가며 ‘이건 어때? 이런 삶도 있었어.’ 를 보여낸다. 아. 우린 같이 ‘여성’이라는 특질을 공유하는구나. 이런 공포감 알지. 아. 그래도 나는 또 모르겠구나, 알 수 없겠구나. 소설 속 인물들과 훌쩍 떼어놓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절대 알 수 거라 여겼던 그들이, 그들의 삶이 또 어렴풋이나마, 이해되기도 한다며 말을 얹게 되고.
집에 앉아 구글 앱을 통해 우주를 바라보고, 세계 어느 나라라도 인터넷을 통해 화상통화가 가능한 높은 수준의 기술과 연결성의 시대를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소통하기도 쉽지 않은 ‘불통의 시대’ 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이다. 이게 무슨 모순인가. 더 쉽게 연결될 수 있어, 더 많이 단절되다니. 나름 반성했다. 200여년의 시간차를 훌쩍 넘는 책을 읽고도 공감하는데, 우리 엄마를, 저 어르신을 이해 못할 건 뭐람. 아. 그래도 저 남자는 아직도 이해 못 하겠다. 아. 하기 싫다. 작가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듯이 각자 자신의 삶을 조곤조곤 보여내면 이해가 더 쉬울까. 왜 나만 이해해야 되나. 이씨. 혼자 감상에 빠져 고상한 척하다가 결국 결론은 산으로 갔다. (내 글도 산으로…)역시 기준점을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다. 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