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도행각 / 무불선원장 석우 스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고집스럽고 별난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늘 우두머리가 되었고, 친구들과 사귀되
의리와 의협심으로 사귀기를 좋아하였고 항상 정의로움을 내세웠다.
모험심을 좋아하여 전쟁놀이를 할 때에 단독으로 뛰어나가
긴 장대로 적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새총놀이를 하여도
목표를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여러 번 연습하여
꼭 적중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여 아이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친구들과 물을 막아놓은 개울에 미역을 갔다가
친구가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뚝까지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 물 속에서 잠수한 상태로
내 발은 땅을 딛고 친구 다리는 손으로 받쳐서 물 위로
여러 번 밀쳐서 뚝 까지 밀어내어 구해냈던 적이 있었다.
또 친구들과 함께 담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한 밤 중에
공동묘지에 갔다가 아이들은 다 무섭다고 곧 가버렸는데도
나는 한동안 무덤 옆에서 누웠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새총으로 전쟁놀이를 하는데 돌로 하면 다치니까
도토리로 총알을 하기로 하였다.
마침 멀리서 물에 빠졌던 친구가 보이기에 겨냥하여 쏘았는데
등허리에 적중하였다.
다음날 그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는데 등허리
총알 맞은 자리가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모친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다시는 새총을 잡지 않았다.
한편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인사를 잘하여
인사 잘하는 아이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런 몇 가지 일로 사람들은 내가 좀 지독하고
별난 아이라고 말들을 했다.
단거리 달리기에는 늘 1~2등을 하였지만 장거리는 잘 못 뛰는 편이었다.
공부는 간혹 1~2등을 하기도 하였으나 평균 중간 정도였다.
그러나 연구하여 몰두하는 데는 남보다 지구력도 강하고 재미있어했다.
성장하면서는 자존심이 강하였고 고집이 세었으면서도
합리적인 것에는 늘 따르는 편이었다.
그리고 성인의 말은 이유 불문하고 맞는 말로 받아들였다.
출가하여 20세경 해인사에서 경(經)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논(論)에 ‘스님은 인천의 스승이므로 그 누구보다 높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면 안 된다.‘는 글을 보고 곧 그런 줄 알았다.
한번은 나이 70여세 되시는 갓을 쓴 노인이
'여기 화장실이 어딘가?' 하고 물었는데 반말을 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저리로 가보게' 하고 반말을 하였더니
그 노인은 '고얀 놈 같으니라구' 하면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한번 어떤 의심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고
옆에서 누가 뭐라고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오직 그 문제에만 매달려 풀어놓고 난 다음에야 마음이 좀 여유가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우주와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였다.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부처님은 그 뜻을 알 것
같아 출가하였다.
이런 나에게 승가의 화두탐구는 결정적인 나의 삶의 과제가 되게 하였다.
이것을 알면 내가 궁금하던 모든 문제들이 풀리게 되므로
처음 화두를 들었을 때부터 흥미롭게 참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화두 드는 것에 빠져서 잠 안자고 하는 7일간 용맹정진을
수 차례 하였고, 그 외에 경을 공부하면서도 남모르게
잠도 안자고 알고자 최선을 다하였으나, 수년이 지나도
답이 나타나지 않았다. 차차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그러하듯이 일상사에서 화두를 들면서 생활해 나갔다.
일상사에서 화두를 든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드는 화두는 아니었다.
다만 좌선은 주기적으로 하루에 2시간이나 3시간 이상은 하려고 하였고,
일상사를 하면서도 정신은 화두로 가득했으므로
거의 하루도 화두를 잊은 적 없이 보내었다
나는 출가한 이후로 지금까지 30여 년을 단 하루도
화두를 놓치고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정도로 화두는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선방에서 기본적으로 몇 철을 나고 나이 들어
동국대학교 선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등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선원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배운 신학문을 대중에 전달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수년을 몰두해도 답을 찾지 못했던
과거의 선원 생활을 떠올리고 불교 포교에 뛰어들기로 하였다.
참선은 나의 일과이므로 어디서나 가능한 일이니
대중포교에 나서보자는 것이었다.
포교당을 개원하여 도시 한 복판에서 기거하니
주로 아침저녁을 활용하여 좌선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포교당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책을 보거나
하루 종일 좌선하는 일이 많아졌다.
30세경 김일훈씨를 만나보고 단전에 뜸을 뜨면 우주의 기운을 얻으므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단전에 뜸을 뜨기 시작하였다.
5백원짜리 동전크기로 7~8분 정도 타는 뜸을 뜨라고 하였는데,
좀 더 크게 만들어져서 15분에서 20분간을 벌겋게 달은 불이
살을 태우는 것을 쳐다보면서 뜸 장을 9개씩 하루에 2시간씩
총 13일을 태우면서 고통을 견뎌냈으나, 2 달간 상처가 아물고
몇 달이 지나가도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31세 어느 날 법회준비를 하기 위하여 반야심경을 보다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色卽是空 空卽是色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라는
구절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 여러 날을 탐구하고 참선하다가
비로소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얻고 반야심경의 오의(奧義)를 크게 깨달았다.
이때 1 달간을 멍한 상태로 지냈고, 하루 종일 미친 사람처럼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전혀 낮선 이국의 풍경을 구경하듯 돌아다녔다.
그 후 1달을 더 마음이 고요해졌고 평상시 느끼던 고독의 감정이
이때 영원히 없어졌다. 말이 터져서 언변이 폭포수와 같고
유창하게 설법하였으므로 나 스스로도 놀랐다.
이것이 출가한지 15년 만에 내가 경험한 첫 번째 깨달음이었으며
그 느낌은 상당히 강하였다.
그후 수심결을 보고 자성에 대하여 이해되는 바가 있었으나
깊이 깨닫지는 못 하였다. 선서(禪書)가 조금씩 보이기는 했으나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더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포교당 장소를 옮기고 강북에서 처음으로 불교대학을 열어서
열성적으로 강의하였다. 서울 변두리였으나
매회 수강생이 평균 50명 전후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마음이 답답하였다.
시간이 가도 도(道)의 정수는 얻지 못하고 겉에서 맴도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또한 매사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동요하는 나 자신을 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나를 버리고 일도 버리고
신분도 버리고 크게 쉬지 않으면 절대 얻지 못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님이라는 것을 떼어버리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로 하였다.
일반인 친구를 사귀어 호형호제하면서 걸림이 없이 살았다.
42세 나라는 상을 버린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손님들이 가고
옥상에서 포행하면서 화두를 들다가 홀연히 화두의 뜻이 드러났다.
이때 화두는 무(無)자 화두였다.
곧 방으로 내려와서 정진에 들어갔다.
화두는 일여하게 선명하여 지고 무(無)만 남더니
곧 무도 없어지고 텅 빈 우주 속으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정신은 분명 선명하였으나 잡념도 없고 나도 없는
텅 빈 거대한 공간이 그대로 나의 몸처럼 여겨졌다.
우주가 곧 나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성성(醒醒)함에 빠져 있다가 나왔다. 시간을 보니 2시간 정도 흘렀다.
2시간동안 내 몸도 잊고 주변도 잊고 오직 알 수 없는 곳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선정을 체험한 후 비로소 무(無)자 화두의 뜻이
더욱 확고하여졌다. 입문한 지 24년째 되는 가을이었다.
나는 한 때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궁금한 것을 묻곤 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공부가 바로 안 것인가 그른 것인가는
조사들의 선서를 보고 검증하였다.
내가 안 것이 바른 것이라면 조사의 말을 이해할 것이요,
잘못되었다면 선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다.
무자 화두의 뜻이 드러난 후에도 역시 선서들을 보았다.
어떤 것은 그 뜻이 선명하게 이해되었고
선문답의 기연은 막힘없이 알게 되었으나
몇 가지 화두에 있어서는 아직 의심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화두를 바꾸어 다시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정진은 묘미가 더해졌고 앉으면 바로 화두 삼매에 빠지는
특이한 체험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다시 들은 화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였다.
이 화두를 들은 지 2년(44세)만에 뜻밖에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체험하게 되었다.
오매일여를 체험한지 며칠 후에 조사의 뜻이 드러났고,
다시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을 들었다.
얼마 후 이것마저 드러나자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마저 드러났고 더 이상 알 것이 없어졌다.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쉬어져버렸다.
더 이상 나를 유혹하는 경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공부는 그 후부터였다. 바로 일상사 공부가 남아있었다.
마음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일까?
이것이 새로운 화두로 자리잡고 있고,
아직 당해보지 않은 큰일에 대비하여 마음을 튼튼히 하고
고요하게 갖게 하기 위하여 나는 아직도 정진 중에 있다.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조사의 뜻을 아는데
꼭 이렇게 수십 년이 걸려야 알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 와서 내가 생각해보니까 단 하나 잘한 것은
수십 년 공부 중에 언제나 화두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고,
잘 못한 것은 스승을 찾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만약 스승을 찾았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단번에 알아 마칠 수도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2005년 3월 7일
출처 : 무불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