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으로 이름 높은 강능
강릉은 문향으로 이름이 높다, 신사임당 허균의 고향이기도 하
다.‘鑑湖(감호)를 추억하면서(憶鑒湖:감호는 경포)장편시도 남겼
다. 허균은 ’명주를 추억하면서‘라는 칠언 율시도 남겼다.
(憶冥州用戱書韻)
緬憶東瀛是我邦, 俗淳況値歲連穰.
면억동영시아방, 속순황치세련양.
春風處處花爭發, 佳節家家酒正香.
춘풍처처화쟁발, 가절가가주정향.
少日子猷栽好竹, 幾時元亮返柴桑.
소일자유재호죽, 기시원량반시상.
銀蓴玉膾牽歸興, 羞對文君說故鄕.
은순옥회견귀흥, 수대문군설고향.
멀리 생각나누나 동쪽 나의 고향
풍속도 순박하고 해마다 풍년이었다.
봄바람에 곳곳마다 다투어 꽃이 피고
가절이라 집집마다 술 향기 좋고 말고.
젊은 날엔 왕휘지처럼 대나무 심었거늘
어느 때야 도연명이 시상리로 돌아가듯이 귀향할지
순채국과 농어회는 귀거래 흥취를 돋운다만
문군을 대하여 고향 예기 부끄러울 뿐.
초당 두부를 만든 허균의 아버지
동해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춘 초당 두부는 이제 전국적으
로 이름이 알려진 강릉의 특산물이다. 16세기 중엽 초당 허엽
(1517 - 1580)이 강릉 부사(정 3품, 오늘날 시장)로 있을 때였다.
당시 관청 앞마당에 샘물이 있었는데 물맛 좋기로 이름 나서 이
물로 두부를 만들고 바닷물로 간을 맞췄다. 이렇게 만든 두부였
기에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그러자 허엽은 자신의 호를 붙여 초당 두부라 이름 짓고 이 두부
를 팔아 큰 돈을 벌었다. 샘물이 있던 자리는 강릉시 초당동이며
그 곳에는 지금도 허엽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초당 허엽은 당대의 논객으로 경상도 관찰사(종2품, 오늘날의 도
지사)를 지냈다. 그러나 관운은 그리 좋지 않아 한 번은 횡령으
로, 또 한 번은 조광조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파
직되기도 했다.
이처럼 허엽은 이재에도 밝은 한편, 정2품 동부승지까지 역임하
면서도 평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허엽의 생애도 그의 자식들만큼 유명하지도, 파
란 만장하지도 않았다. 허엽은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3명의 아들
과 3명의 딸을 두었는데 강릉 부사 때 낳은 딸이 조선 시대 최고
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며 6년 뒤 경상도 관찰사 때 낳은 아들
이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경포의 봄
강능에 전해오는 효자마을 전설
강릉 김천의 효자비는,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왓을 때 어머니
와 아우를 잃어 삼년상을 치루고 살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몽
고에 잡혀가 노예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 시간 고생해 많은
돈을 마련해 어머니를 구하고, 이후 동생 역시 몽공에 잡혀있다
는 소식에 또 고생하여 돈을 마련하여 어머니와 동생을 다 구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천이 살던 마을을 효자리라고 한답니다.
그 외에 박수량이라고 중종시대의 사람이 있는데,높은 벼슬을
했고, 강릉 12현 중의 하나라합니다 박수량은 성종 때 태어나서
연산군, 중종 때를 산 사람인데,연산군 때 부모가 죽고나서 1년
상만을 명했는데, 박수량은 막 벼슬을 한 무렵에 부모의 상을 당
했는데, 벼슬에 연연하거나 국법에 연연해하지 않고 3년상을 다
치루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효자라서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허균 (許筠 1569∼1618(선조 2∼광해군 10))
조선 중기 문신·문학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학산(鶴山)·
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본관은 양천(陽川). 누이는 난설
헌(蘭雪軒)이다. 159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좌
참찬(左參贊)에 올랐으나 관직생활은 3번이나 파직당하는 등 파
란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이며, 출중한 재능을 지녔으나 서
얼차대(庶孼差待)의 벽에 걸려 불우한 일생을 보내던 스승 이달
(李達)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사대부
계통의 문인보다는 서얼출신 문인들과 어울렸다.
이로써 인간주의적·자유주의적 사상을 키우면서 당시 사회제도
의 모순을 과감히 비판하였고, 불교의 중생제도(衆生濟度) 사상,
서학(西學)과 양명좌파(陽明左派) 사상 등을 받아들여 급진적 개
혁사상을 갖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하인준(河仁俊)·김개·김우성(金宇成) 등과 반
란을 계획한 것이 탄로나 처형되었다.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
동전(洪吉童傳)》은 봉건체제의 모순과 부당성을 폭로한 그의 개
혁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국문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한문학에서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으며, 또한 시·비평에도
안목이 높아 《국조시산(國朝詩刪)》 등 시선집을 편찬하고,
《성수시화》 등 비 평작품을 썼다.
그 밖의 작품으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성소복부고》
《교산시화 》 《학산초록》 등이 있다.
오죽헌
고향을 그리는 申師任堂(신사임당)
千里家山萬疊峯, 歸心長在夢魂中.
천리가산만첩봉,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한송정반고윤월,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사상백구항취산, 해문어정임서동.
何時重踏臨瀛路, 更着班衣膝下縫.
하시중답임영로, 경착반의슬하봉.
산 첩첩 고향은 천리 가고픈 마음 꿈속에 있고
한송정의 외로운 달 경포대 한줄기 바람
백구는 백사장에 모였다 헤어지는데
고깃배는 남서로 오락가락
언제나 강릉 길 다시 걸어 색동 옷 입 고 엄마 앞에서 바느질할고.
이 시는 여섯 살 난 栗谷을 데리고 大關嶺을 넘을 때 지은 시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1551 (연산군 10∼명종 6))
조선시대 문인·서화가.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思任
堂)은 당호(堂號)이며, 임사재(妊師齋)라고도 하였다.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의 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
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혔으며, 문장·침공
(針工)·자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
庭)》 《사친(思親)》 등의 한시(漢詩)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
이며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는데, 그의 영향
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섬세함을 더하여 후세의 시인·학자들의
절찬을 받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으
로 사실화였으며, 채색화·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수 있었던 동기로는 남성 우위의 유
교사회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지녔기 때문인데, 즉 출가 뒤에도 친정에서 생활함
으로써,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
圖)》 등과 6폭 초서병풍이 있다
죽서루
竹西樓(죽서루)
嶺東은 삼국유사에 신라 때 江陵太守로 부임하는 순정공의 부인
수로부인을 위해 어떤 노인이 ‘獻花歌(헌화가)’를 불렀고 수로부
인이 바다용에게 끌려가자 그 노인이 또‘주솔가’를 불렀다고한
다. 영동의 명승으로 관동팔경을 꼽는다. 鄭澈(정철:1536-1593)
은 ‘關東別曲(관동별곡)’을 남겼고 영동 산수에 감흥을 얻고 삼
척에서 竹西樓(죽서루) 지었다.
竹樓珠翠映江天, 上界仙音下界傳.
죽루주취영강천, 상계선음하계전.
江上數峰人不見, 海雲飛盡月娟娟.
강상수봉인불견, 해운비진월연연.
죽서루 단청 빛이 강 하늘과 어울린 곳
천상의 노래가 인간 세계에 들려라.
강가에는 봉우리 서넛 사람은 하나 없고
바다구름 날아간 뒤 달빛 참 아름답구나.
한송정(寒松亭曲) 張延祐(장연우)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월백한송야 파안경포추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애명내우거 유신일사구
송정 밤엔 달빛이 희고
경포의 가을 물결은 잔잔하구나.
슬피 울면서 왔다가 가는
정다운 갈매기 한 마리
장연우(張延祐) ?∼1015(현종 6). 고려의 관인. 본관은 흥덕(興
德). 객성(客省)을 지낸 유(儒)의 아들이다.
1011년(현종 2) 거란이 침략하여 태묘(太廟)와 궁궐을 불태우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이 붙잡혔다는 풍문을 듣고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
應仁) 등과 더불어 호종한 공으로 중추사(中樞使)를 거친 뒤 판어
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년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와 더불어 거란침입 이후
군액(軍額)의 증가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지므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상장군 최질(崔質)과 김훈(金訓) 등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
으키자 사적(仕籍)에서 제명되었다. 1015년 병부상서로 죽은 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되었다
경포의 야경
경포호수에 얽힌 설화
아주 옛날 먼 옛날에 경포 호에는 큰 마을이 있었는데 , 하루는
노승이 이 마을에 와서 집집마다 시주를 청하여도 인심이 나사
워서 누구 한 집도 시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최부자 집을
찾아 "나는 저 산 너머 있는 절에서 온 중이 올시다. 부처님께 시
주를 좀 하시오" 하니까 최부자가 마침 정랑 칸에 있다가
"우리 집에 줄 게 뭐 있소 안주자니 섭섭할 테니 이거라도 가져
가려면 가져가시오" 라고 중을 비웃으며 오물 한바가지 퍼다 중
이 짊어진 바리때에 쏟아 넣었다.
그렇지만 중은 아무 내색도 않고 고맙다고 절을 하면서 돌아가
는데, 그때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최부자의 딸이 중한테 달
려가서 아버지 몰래 쌀을 퍼서 시주를 하면서 "스님 제가 대신
시주를 드릴 테니 무지몽매한 저의 아버지 죄를 용서하여 주십
시오." 라고 간곡히 빌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하였다.
노승은 최부자의 딸의 마음씨가 어여쁜지라 "집 생각이나 부모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고 즉시 따라 오너라 절대 뒤를 돌아다보
지 말고 오너라." 그래서 최부자 딸은 스님을 따라 가는데 갑자
기 하늘이 캄캄하게 먹구름이 끼더니 천둥번개를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부자의 딸은 그제야 스님의 말씀이 예사
말씀이 아니구나. 무슨 큰 변고가 일어나겠구나 하고, 집과 재물
은 뒷전이고 부모님이 걱정되어서 뒤를 돌아다보니 이미 동내
는 물바다가 되어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노승이 뒤를 돌아다보지 말랬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
다 본 최부자의 딸은 몸이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그 마을은 호수가 되었고, 최부자의 곳간에 쌓여있던 곡식은 모
두 조개로 변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적곡조개(積穀蛤)"라고 불렀다.
즉 '쌓아놓았던 곡식이 조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조개가 찌갯거리로 애용되는 '때복이'라는 민물조개로 풍년
에는 조금 잡히고 흉년에는 많이 잡힌다고 한다. 지금도 경포 호
에는 조개가 많다고 한다.
鏡浦(경포) 8景에 홍장야우(紅粧夜雨)에는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
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
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
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
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
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
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
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동해 일출(강능)
'경포鏡浦 8景'
1.녹두일출(綠荳日出)
녹두정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옛 한송정으
로서 현 강릉 비행장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경포대의 正東을 가
리킨다. 새벽에 대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면, 용광로처럼 붉게 타
오르는 웅장한 태양이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
르는 순간은 신비스러울 만큼 황홀하고 아름답다.
이 장엄하고 경이로운 일출을 첫째로 꼽았다.
2.죽도명월(竹島明月)
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산죽이 무성하여 죽
도라고 불렸는데 현 현대호텔 자리이다.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죽도의 대나
무 사이를 뚫어 그 빛이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 같은 장
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멀리는 하늘의 달과 가까이는 바다와 호수의 달이 잇닿아 월주
를 이루고 은파위의 월굴이 백해 중으로부터 호심을 꿰뚫어 대
앞에까지 수십 리를 뻗친 장엄하고도 기묘한 전망을 찬미한 것
이다.
3.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곳으로서 호수와 바
다를 상통 교류케 하므로 강문이라고 했다.
밤에 경포대에서 강문쪽 바다를 건너다보면, 오징어 잡는 고기
배의 불빛이 마치 항구의 불빛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이는데, 그
빛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4.초당취연(草堂炊煙)
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가 호수와 바다보다
낮은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보면 깊은 두메산골 같은 맛을 나게 하며, 마
을둘레는 낙락장송이 울창하고 대지는 비습하여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다.
해가 서산마루 시루 봉에 기울러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데 이때 가가호호 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
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5.홍장야우(紅粧夜雨)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
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
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
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
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
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
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
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6.중봉낙조(甑峰落照)
시루봉은 경포대 북서쪽에 있으며, 그 생긴 봉우리 모양이 시루
와 비슷하다하여 시루봉이라고 한다.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채운이 시루봉 북쪽 봉우리
에서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7.환선취적(喚仙吹笛)
시루봉의 상선봉에 신라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바둑을 놓고
놀던 곳이 있었는데 고요한 날 밝은 밤이면 어디서부터인가 구
슬픈 피리 소리가 바람결에 은은히 들려왔다 한다.
지금도 달 밝은 밤이면 산자수명한 제일강산에 구름 밖으로부터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경포대의 환선취적은 신선경인 듯 하면서도, 속세를 떠난
속세인 듯 하면서도 신선경으로 생각되는 곳에 옛 신선들이 바
둑 놓고 피리 불며 즐기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을 말한다.
8.한송모종(寒松暮鍾)
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에 있다.
녹두정이라 불렸던 이 정자는 화랑도들의 수양의 도장으로 지었
던 것으로 지금은 석조. 석지. 석정만이 남아 있다.
신라 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
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강능 방해정
-박신(朴信)에 대한 홍장(紅粧)의 사랑의 노래-
이조 사회에서의 기생은 직업이 기녀여서 그렇지 우리가 생각하
는 기생과는 엄청나게 거리감이 있는 여인도 있었다. 본래 기녀
들은 동기(童妓)로 기적에 입적이 되면서부터 교방에서 가무와
음률, 시서를 비롯하여 모든 예절을 배운 여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풍류를 알며 멋을 알고, 사회적인 어려운 역경 속에
서도 사람들을 알아볼 줄 알고, 사랑을 알아, 마음 주고픈 사람
에게는 사랑의 정염으로 온 몸을 불태워도 보며, 사랑하는 사람
을 위해서는 돈도 명예도 버리고 기꺼이 수절할 줄 아는 슬기로
움을 지닌 여인들도 많았다.
때로는 권세 앞에 육체를 유린당하면서도 정신적인 지조를 끝내
지키면서 끊임없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산 여인들도 많았다. 때
로는 분별없는 바람둥이 사내들을 골탕 먹이고, 그들의 버릇을
따끔하게 고쳐 주기도 하는 슬기로운 여인들이다. 진랑(眞娘)(황
진이)이 그랬고, 금춘(今春)이 그랬으며, 한우(寒雨)가 그랬고, 매
창(梅窓)이 그랬다.
여기 기생이라 부르기 민망한 여인이 있으니, 그 이름 홍장(紅粧)
이다. 강릉 고을의 기적에 올라있는 기새은 무려 200여 명에 가까
웠으나, 그 중 홍장이 출중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녀에 대한
행장이 없는 일이다. [해동가요],[가곡원류],[여창유취] 등에 '강
릉명기'라고만 기록되어 전한다. 왕손(王孫) 박신과의 애절한 사
연을 남긴 여인이다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경포대의 물결 잔 제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 하건 만은
어떠타 우리의 왕손은 가고 아니 오느니
때는 초가을. 기망(旣望)의 둥근 달이 정자 위에 둥실 떴다.
한송정 정자 위엔 주연이 무르익어 갔다. 강원감사 박신이 만기
가 되어 서울로 떠나는 것을 축하하러 모인 송별연이다.
강릉부사 조운흘은 술잔을 들어 박신에게 권한다.
술잔을 받아든 감사는 물끄러미 술잔을 들여다본다. 얼굴이 밝
지 못하다. 강릉 부사 조운흘은 그런 감사의 심정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너희들은 떠나는 감사님을 위해 권주가나 한곡 부르라."
조부사의 말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농월(弄月)이 가야금을 뜯는
다. 청아한 소리가 정자를 공중에 둥실 띄운다. 멀리 여울지며
동해로 퍼진다.
"한 잔 먹사이다. 또 한 잔 먹사이다. 꽃 꺾어 수를 세며 무진무진
먹사이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묶어 매
어 가나, 아름답게 꾸민 상여에 실려 수많은 사람이 울면서 뒤따
르거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백양나무 숲 우거진 곳에 가기
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발 내리는 속에, 슬픔을
자아내는 쓸쓸한 바람 불 제 누가 한 잔 먹자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가 쓸쓸할 때에 뉘우친들 어찌
하겠는가."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여흥을 돋운다.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술잔을 높이 든다. 그러나
박신은 여전히 말이 없이 술잔만 들여다본다.
빈산엔 나뭇잎 지고 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옛 사람의 풍류가 이제는 적막쿠나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운 것을
아! 옛 노래의 곡조가 오늘 새삼 새롭구나.
그래도 박신의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감사는 무얼 그리 물끄러미 보시는 게요?" "아, 아니오.
술잔에 뜬 달을 보는 중이오." 박신은 엉겁결에 둘러댄다.
옆에 있던 선옥이 토를 단다. "감사님, 이 한송정에서는 동시에
달을 다섯 개를 볼 수 있답니다." "아니, 달이 하나지 어찌 다섯
씩이나 되느냐?" "모르사와요?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그래라.
어서 가르쳐 다오." "그러나 그냥은 안 됩니다. 가르쳐 드린 값
을 내셔야 합니다." "허허, 무엇으로 값을 낼꼬? 내가 너의 머리
를 얹어 주랴?" "저는 그런 자격은 없구요. 가르쳐 드리면 그 값
으로 노래하나 부르세요." "그래라, 네가 내 노래 듣는 게 소원인
게로구나!" "한송정에 오르면 달이 여섯인데요. 하나는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 또 하나는 경포대에 비친 달, 다른 하나는 지금
감사님께서 보고 계신 술잔에 뜬 달, 다른 하나는 앞에 앉아 있
는 제 눈에 비친 달, 그리고 마지막 달은 뭔지 맞춰 보세요."
"허허, 넌 참 유식한 애로구나. 나는 짐작도 못하겠다." "마지막
달은요, 감사님 마음에 떠 있는 달이에요." "하하하..." 좌중이 박
장대소한다. "아, 그러니까 감사님의 기분이 우울한 것은 그 '마
음의 달'이 보이지 않아 그러시는 게로구려." 조부사가 술잔을
들어 권한다. "아니, 조부산 무슨 말을 하는 게요?"
박신은 마음속을 보인 것 같아 황급히 손을 저었다. 술이 몇 순
배 더 돌았다. 취기가 점점 흥을 돋우었다. 구름 속에 가렸던 달
이 얼굴을 내밀었다. 경포호의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예부
터 '경포영월(鏡浦迎月)'은 관동팔경 중에 으뜸으로 꼽는다.
멀리 둘러선 울창한 장송들이 환히 보일 만큼 달은 밝았다.
그때 그림배 하나가 소리 없이 호수에 떴다.
정자 위의 시선들이 모두 배에 쏠린다. 배 위에는 한 미인이 거
문고를 뜯고 있지 않은가! 박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자 위에서 뛰어 내려간다. 배를 타고 그림배를 따른다. 그림배
를 따라 잡았다.
놀란 것은 박신. 배 위에서 거문고를 타는 여인은 홍장이 아닌
가! 조부사가 죽었다던 홍장이었다. 죽은 홍장이 다시 살아났다
니. 취기가 가셨다.
박신은 홍장을 끌어안았다. 볼을 비벼본다. 분명히 산 사람. 그
것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홍장 바로 그녀였다. 이때 다른 배를
타고 따르던 조부사 일행의 웃음소리가 호수의 수면에 번졌다.
서거정의 [동인시화]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려 우왕 때 강원 감사 박신이 강릉 기생 홍장을 사랑하였는데,
박신이 만기가 되어 떠나려 할 때, 강릉 부사 조운걸이 짐짓 홍
장이 죽었다고 하였더니 박신이 몹시 슬퍼하였다. 하루는 조부
사가 박감사를 초청하여 경포대로 뱃놀이를 나갔다. 문득 그림
배 한 척이 앞에 나타났는데, 그 속에선 미인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지라, 박감사는 '이는 진정 신선이로다.'하고 감
탄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홍장이라. 배에 탔던 사람들이 손
뼉을 치며 웃었다.
이와 같은 박신과 홍장과의 관계를 정송강은 [관동별곡]에서 이
렇게 읊었다.
석양 무렵에 현산의 철쭉꽃을 밟으면서 경포호로 내려가니,
십 리까지 뻗은 잔잔한 수면을 당기고 다시 끌어 당겨서,
낙락장송이 울창한 속에 마음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구나.
호수 속의 모래를 헤아리겠구나.
외로운 배를 매어 놓고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어
그 옆이 동해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호의 수면이여,
멀리 넓게 펼쳐진 동해 바다여!
여기보다 경치가 더 잘 갖춰진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옛날 박신과 홍장의 고사가 야단스럽기도 하구나!
그가 강원 감사로 있던 기간은 비록 짧은 것이었으나, 그 동안에
사귄 홍장과의 관계는 실로 깊은 애정 그것이었다. 하루라도 만
나지 못하면 그리워지고 오지 않으면 기다려지는 사랑이었다.
서울로 떠나려 할 즈음, 조부사가 일부러 홍장이 죽었다고 말했
을 때의 그 충격은 실로 컸다. 자신에게 향한 홍장의 사랑이 눈
물겨웠다. 한 여인을 죽게 한 자신의 행동이 가슴 아팠다. 자기
와 헤어지는 슬픔을 차라리 죽음으로 택한 그 애정이, 그 곧은
정절이 고마웠다.
조부사의 송별연에서도 침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홍장의 웃음 띤 모습만이 술잔에 어른거렸다.
떠나려던 박신이 홍장과 더불어 경포대에서 며칠을 더 머물면서
정염을 불태웠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다. 서로가 떨어지기 어려웠던 사이였다. 그러나 박신은
기어이 떠났다.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홍장이었다.
울며불며 잡은 소맷자락을 무정하게 떨치고 가지 마시오.
풀빛 푸른 긴 둑에는 해도 이미 저물었다오.
객창에서 꺼져 가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밤을 새워 보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아시리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질 마소
초원 장제에 해 다 져 저물었네.
객창에 잔등을 돋우고 새워보면 알리라.
이렇게 보낸 박신이었다. 그를 보낸 홍장은 하루 이틀 박신으로
부터 음신(音信)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소식이 없어 가자 홍장은 초조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기녀란 자신의 위치가 새삼 뼈아프게 아팠다. 한
여인으로서의 사랑을 용납 못하는 사회의 제도적인 모순이 역겨
웠다. 홍장은 고려 때의 명기 '동인홍(動人紅)'이 기생의 신세를
한탄한 시를 뇌어 본다.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러워졌다.
娼女與良家 其心問幾何
창녀여양가 기심문기하
可憐栢舟絶 自誓矢靡他
가연백주절 자서시미타
기생과 양갓집 규수 사이에
묻노니 그 마음 다를 게 있오.
슬프다 송백같이 굳은 절개로
두 마음 안 먹고자 맹세한다오.
얼마나 고매한 정신 자세인가. 실상 자기 스스로도 이런 자세로
살아 왔고, 또 살아가려는 결심이 섰던 홍장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홍장은 이런 자신을 조소한다. 차라리 한 남자에
게 깊은 정을 주지 말 것을, 기녀의 생활에 충실하며 세속적인
행복이나 추구했던들 하는 회한이 머리를 들곤 했다.
박신에게로 향하는 그리움은 걷잡을 길 없었다. 그런 그리움을
잘 나타낸 매창(梅窓)의 시가 있다.
相思都在不言裏 一夜心懷髮半絲
상사도재불언리 일야심회발반사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圍
욕지시첩상사고 수시금환감구위
그리워 말 못하는 애타는 심정
하룻밤 괴로움에 머리가 센다오.
얼마나 그리웠나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오.
잠 오지 않는 불면의 밤. 전전반측 잠 못 드는 밤을 눈물로 고독
을 달래는 날이 많아졌다. 달 밝은 밤, 두견이 피를 토하며 울어
대는 장장추야, 잠 못 들어 뜰을 거닐 때 복받쳐 오르는 하소연
은 탄식이 되고 시가 된다. 이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단장의 하소연이다.
한송정 정자 위에 달 밝은 밤에 경포호의 물결은 잔잔도 한데,
신의가 있는 갈매기는 왔다 갔다 하건마는
어찌하여 우리의 왕손(박신)은 한 번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가!
끝내 박신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잊으려 한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의식적으로는 미워해
보아도 미워지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러나 홍장은
그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큰 그리
움을, 그 못 견딜 고독을 참자고 마음 다진다. 그러나 참자고 마
음을 다질수록 그리움은 더한다.
山中相送能 日暮掩柴扉
산중상송능 일모엄시비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춘초년년록 왕손귀불귀
산중에서 서로 보고 헤어진 당신
해는 져 사립 밖이 어둑하구려.
봄풀은 해마다 또다시 푸르건만,
떠나간 당신은 다시 오지 않는구려.
애절한 그리움.
遠路東西欲聞誰 寒來無處奇寒衣
원로동서욕문수 한래무처기한의
去時初種庭前樹 樹已勝巢人未歸
거시초종정전수 수이승소인미귀
임 가신 먼 곳을 뉘에게 물어 보랴.
겨울이 와도 겨울옷을 보낼 곳 없네.
떠나실 때 뜰에 심은 어린 나무가
새가 집을 짓게 자랐어도 임은 안 오네.
위의 시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왕유의 '송별(送別)'이란 시
지만, 홍장의 그리움엔 미치지 못하고 있다.
月白寒松亭 波安鏡浦秋
월백한송정 파안경포추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춘초년년록 왕손귀불귀
한송정 정자 위에 달 밝은 밤에
경포호의 가을 물은 잔잔도 하네.
슬피 울며 왔다가 날아가는 건
모랫벌의 유신한 갈매기뿐이네.
이 시는 고려 초 광종 연간에 장정우가 중국 강남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이 물에서 건졌노라 하며 거문고 바닥에 새긴 글을 보
이며 묻기로 보니, 우리 글자라 한시로 번역하여 주었더니, 그
사람들이 애달파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시이나, 한역되어 그 그
리움이 반감되었다.
끝내 소식이 없어도 홍장은 굳게 절개를 지키면서 박신을 기다
렸다. 치근대는 취한이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덤벼드는 한량들
에게 홍장은 당나라 시인 장적의 '절귀음(絶歸吟)'으로 위험한 고
비를 넘기면서 마음의 흔들림을 지켰다.
君知妾有夫 贈妾隻明珠
군지첩유부 증첩척명주
感君纏錦意 繫在紀羅濡
감군전금의 계재기라유
그대는 이 몸이 남편 있는 줄 알면서
어쩌라고 저에게 쌍구슬을 주시나요.
알뜰한 그 사랑 고맙고 그윽하여서
속치마 허리춤에 고이고이 차 두오.
妾家高樓連御苑 良人執戟明光殿
첩가고누연어원 양인집극명광전
知君用心如日月 事夫誓人同生死
지군용심여일월 사부서인동생사
還君明珠隻淚垂 何不相逢未嫁前
환군명주척누수 하불상봉미가전
저의 집은 누각 저편 어원(御苑) 저 뒤쪽
제 남편은 명광전(明光殿)의 집극랑이오.
그대만은 아시리 일월 같은 내 맘을
생사로서 남편을 섬기자고 맹세했다오.
구슬을 돌리자니 두 줄기 눈물
시집가기 이전에 왜 못 만났소.
이런 그리움의 1년이 지난여름, 박신이 순찰사가 되어 강릉에 들
르게 되었다. 홍장의 굳은 절개를 알고 온 박신이었다. 홍장을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부실을 삼았다. 홍장의 염원은 이뤄
졌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박신과 조운흘은 동문수학하던 사이였고, 벼슬길에 오른 뒤에
도 친교가 두터웠다. 박신은 경포대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던
가. 노경에 이루러 그때 일을 회상하는 시를 조운흘에게 보낸 것
이 남아 있으니 곧 [증조석간운흘박혜숙신(贈趙石磵云屹朴惠肅
信)]이 그것이다
少年時節接關東 鏡浦淸遊入夢中
소년시절접관동 경포청유입몽중
臺下蘭舟思又貶 却嫌紅紛笑衰翁
대하란주사우폄 각혐홍분소쇠옹
내 일찍 젊어서 관동에 갔던 그 추억
경포호의 놀던 모습 꿈속에도 완연타오.
그곳에 배를 띄워 또 한 번 놀고 싶소만
아가씨들이 늙은 나를 웃을까봐 두렵소.
박신 (朴信 1362∼1444 (고려 공민왕 11∼조선 세종 2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설봉(雪峰).
본관은 운봉(雲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규정(司憲糾正) 등을
거쳐 1392년(조선 태조 1)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봉상시소경(奉常
寺少卿)이 되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승추부좌부승지(承樞府左副承旨)에
기용되었고 1404년 참지의정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대사헌 재직 중 전후가 맞지 않는 계문(啓聞)을 올렸다는
이유로 탄핵, 귀양 갔다가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기용된 뒤
공조판서에 올랐다.
1418년(세종 1) 봉숭도감(封崇都監)제조, 이어 선공감제조가 되었
으나 선공감 관리부정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시호는 혜숙(惠肅).
강능 객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