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의 겨울나비 / 서정범
내가 어렸을 적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버지 친구들이 개울가에서 천렵을 하는 나를 보더니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아녜요, 우리 어머니가 낳았어요’ 하자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 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달려와 그대로 여쭈었더니 ‘아냐, 너는 내가 낳았어. 너를 놀리느라고 그러는 거야’하며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 말을 들으시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웃으시는 것을 보고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가 아닌가 하고 며칠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 다리 밑에서 나왔지 머리 꼭대기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무덤 뒤의 양 날개인 이른바 좌청룡, 우백호는 모체의 양 샅을 상징한다. 모체의 다리 밑으로 돌아간다는 모태회귀 사상의 표출이라 하겠다. 그래서 산소의 명당은 자궁형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거북과 토끼의 간 이야기에서 용궁은 물 속이 된다. 진오귀 굿을 할 때 죽는 자의 넋을 좋은 곳으로 보내려고 배를 태워 보낸다.
신라의 문무왕이 바닷속에 묻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해중릉은 유명하다.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상두꾼의 선소리에서는 저승을 황천(黃泉)으로 부르고 있다. 용궁, 그것은 물 속으로서 태내에 있는 양수(羊水)가 된다고 하겠다.
나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바이칼호 주변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바이칼호는 우리의 옛 조상들의 출생지며 용궁이며 양수가 된다.
지난 95년도에 시베리아를 다녀와서 ‘노랑나비’라는 표제의 수필을 썼었다. 이를 방송 제작진이 보고 그 내용을 줄거리로 하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시베리아에 가서 제사 지내는 것을 동행 취재하고 싶다는 제의가 있었다.
나는 여름이면 모르겠지만 나이도 있고 추운 시베리아에 간다는 게 무리라고 했다. 더구나 가족이 반대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제작진은 이번 기획은 내가 간다는 전제하에서 결정된 것이지 내가 안 안가면 제작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실은 지난봄에 조카의 주선으로 북에 있는 동생한테서 어머니의 사진과 편지를 받았었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이 돌아 가셨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동생의 편지로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이번 기회에 부모님의 제사를 북두칠성 아래에 가서 지내는 것도 자식으로서 뜻이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에 계신 부모님도 추울 것인데 춥다고 못 간다면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닐 것이다. 가족들은 차차 설득하기로 하고 반승낙을 했다.
내 나이 70세가 되는 해였다. 북에 계신 부모님의 연세로 봐서 살아 계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죽기 전에 자식으로서 상복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복을 입을 바에야 북두칠성 아래에서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칠성이 생명을 주었다고 믿고 자식 잘되라고 칠성에게 비셨다. 어머니 신앙대로라면 칠성에서 태어났으니 칠성으로 돌아가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시베리아에서 터키어 계통인 야쿠트어와 몽골어 계통인 부리아트어, 퉁구스어 계통인 나나이어, 에벤키어,에벤어, 울츠어, 우데헤어 등을 직접 접하려고 시베리아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 때는 북위 62도에 있는 야쿠트에서 상복을 입었었다. 그곳에서는 북두칠성이 약간 남쪽으로 보였다.
두 번째는 97년 여름 아무르강 하구의 니브흐족을 만나러 니꼬라이에프스크에 머물렀었는데 그 때 자정에 촛불을 밝혔었다.
세 번째는 바이칼호 위에서 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더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제사 때 쓸 정화수는 어머니의 생가인 괴산에 가서 떠왔다. 북에서 온 어머니 사진을 외조부님, 외숙부님의 산소에 가서 보여드렸다.
산소에서 내려오다 비탈진 억새밭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 내려와 산소를 올려다볼 때 돌개바람이 일었다. 엉덩방아를 찧을 때 꺾여진 억새 이삭이 날아 마치 휜 나비가 나는 듯 했다. 그 흰나비를 보는 순간 이번 제사 때는 부모의 수의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월남할 때 어머니께서 내가 결혼하면 쓰려고 마련해 두었던 명주 두 필과 며느리 옷감과 반지를 장롱에서 꺼내 주시며 남하하면서 용처를 쓰라고 하셨던 생각이 나서 명주와 옷감과 옥반지를 수의로 드리려고 마련했다. 흔히 수의는 신부와 신랑의 옷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1월 20일 아시아나 편으로 하바로스크, 이르크츠크를 거쳐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바이칼호 남쪽인 우란우데에 도착했다.
우란우데에서 제수를 마련하려고 시장에 들러 바이칼호에서 유명한 오무리라는 생선과 사과 7개를 샀다. 서울서는 술과 포를 마련했었다.
우란우데에서 바이칼호까지는 200km나 되는 거리다. 시속 60km의 승용차로 3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데 눈길과 강풍 때문에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도중에 우리 나라 서낭당과 같은 곳이 있어 차를 멈추고 술을 뿌리며 나들이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차창에는 두꺼운 성애가 끼었다. 차창에 어머님이라고 손가락으로 녹여서 썼다. 어머님이란 글자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백양 숲이 정겨웠다.
해질 무렵에야 바이칼호에 도착했다. 바깥 온도는 영하 43도라고 하는데 강풍이어서 체감 온도는 엄청나다.
제수 꾸러미를 들고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세차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다.
바이칼호를 바라보니 눈 덮인 평원이 하늘과 닿아 있다. 얼음이 수평으로 얼지 않고 파도가 그대로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여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다. 바람이 세고 추워서 높은 파도가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다.
서쪽 하늘엔 차디찬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지려고 파란 하늘이 차차 연한 옥색으로 변했다. 옥색은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색깔이다. 어머님이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언뜻 그 때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에 마련한 반지를 옥 반지로 한 것도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제물을 차릴 방향을 잡으려고 나침반을 꺼내 남쪽으로 향을 잡았다. 남한에서는 북쪽을 향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여기서는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으니 부모님이 묻혀 있는 남쪽으로 향을 잡은 것이다.
상복으로 갈아입는데 바닥이 미끄럽고 바람이 세차서 몇 차례 비틀했다. 눈 위에 검은 보자기를 깔고 북에서 동생이 보낸 어머니 사진과 제물을 차렸다. 촛불을 켜려고 성냥을 세 차례나 그어 댔는데 초가 녹지 않아 불이 붙지 않을 정도로 강추위다. 정화수를 사발에 따르고 술을 잔에 따라 절을 하고 무릎을 끊었다.
이번엔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다짐을 했는데 울음이 먼저 터졌다.
‘‘어머니’ 저는 아직 철부진가 봐요.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와요. 이게 어머님의 한 맺힌 눈물이 자식들에게 옮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눈에서 나오는 눈물은 제 눈물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한 맺힌 사랑의 눈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불효의 죄가 더 무거워져요. 하지만 어머니의 입김을 가까이 느끼니 고향에 온 것 같고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이 포근해요. 분단의 비극이 없었다면 어머니는 손자손녀들의 큰절과 증손자들의 재롱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어머니, 너무 추워요. 어머니 계신 곳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절 받으세요.’
나는 오열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안경에 떨어져 어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제를 끝내고 정화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동안 정화수가 얼어서 얼음을 깨야 마실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마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놓은 모닥불에 수의를 하나하나 태우며 , ‘어머니 추워요, 어머니 계신 곳은 따뜻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제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밤길은 가슴이 좀 후련했다.
우란우데에서 우리 일행의 편의를 도와준 재미교포 브란돈오라는 분이 바이칼호에 가면 꼭 온천을 하고 오라는 말도 있고 해서 저녁을 마치고 온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이 얼어붙은 밤길이라 뽀드득 발자국 소리가 밤길에 깔린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니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 일곱 개의 별을 차례차례 바라보고 있는데 세 번째 별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영상이 스친다.
일행이 앞서가다 내가 뒤따르지 않자 걱정이 되어 되돌아 왔다. 이윽고 온천에 이르렀다.
소나무로 짜여진 통나무 방안에 흰 욕조가 두 개씩 있는데 이미 물은 욕조에 채워져 있었다. 더운물을 더 넣어 알맞은 온도로 맞추었다.
추위와 긴장이 한꺼번에 녹아나는 기분이고 평안하고 포근했다.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도 이처럼 평안하고 따뜻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태아 속의 쪼그린 모습으로 있어 보기도 했다.
오늘은 바이칼호 위에서 제사와 온천욕을 통해 두 번이나 태아 때의 모정을 느낀 셈이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다. 이중으로 된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지 않는가.
95년도 야쿠트에서 제사 지낼 때에는 여름이었다. 제사 지낸 다음날 아침에 이슬비가 촉촉히 내렸다.
이번엔 겨울이라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한 맺힌 눈물의 눈인가. 반가운 어머니의 눈물일까.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어머니와 마지막 헤어질 그때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새벽이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함박눈은 아니지만 고운 눈꽃이다. 눈꽃을 손에 받아보기도 하고 입을 벌려 받아먹기도 했다.
그 눈꽃 사이로 어머니의 영상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나의 태몽이 나비라서 그런지 눈꽃은 휜 나비가 되어, 수천 수만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뒤덮으며 날고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자식의 가슴에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 지금 어머니의 사랑이 휜 나비, 겨울나비가 되어 날고 있지 않은가.
■ 작가소개: 서정범(徐廷範. 1926~)
서정범 교수는 192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박사를 거쳐 1960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현재는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어원학회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한국어문연구회 연구이사, 국어국문학회 이사 및 경희알타이어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제18회 한국문학상(1981), 제9회 펜문학상(1993)을 수상한 바 있다.
서정범 교수는 평생동안 우리말 연구에 매진해 왔는데, 언어학 부문의 주요 저서와 작품으로는 《한국 특수어 연구》(1959), 《현실음의 국어사적 연구》(1974), 《음운의 국어사적 연구》(1982), 《우리말의 뿌리》(1982), 《국어어원사전》(2000)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1974), 《겨울 무지개》(1977),《그 생명의 고향》(1981), 《사랑과 죽음의 마술사》(1982), 《영계의 사랑과 그 빛》(1985), 《품봐 품봐》(1985), 《무녀별곡 1-7》(1992∼98), 《물사발에 앉은 나비》(2000) 등을 출간하였다. 또 저자 특유의 재치와 입담이 돋보이는 우리말의 다양함과 특수함을 모아놓은 "별곡" 시리즈가 있는데,《학원별곡》(1985), 《어원별곡》(1986), 《수수께끼별곡》(1987), 《가라사대별곡》(1989), 《너스레별곡》(1991), 《억억별곡》(1992), 《거덜별곡》(1998) 등이 그 대표작이다.
한편 저자의 저서들은 일본 학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출간되었는데, 일본어로 출간된 저서로는《한국의 샤머니즘(韓國のシャ-マニズム)》(同朋舍, 1980), 《일본어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다(日本語の原流をさかのぼる)》(德間書店, 1989), 《한국어로 읽고 푸는 고사기(韓國語で讀み解く古事記)》(大和書房, 1992), 《일본어의 원류와 한국어(日本語の原流と韓國語)》(三一書房, 1996) 와 최근에 낸 《國語語源辭典》 《한국문학과 문화의 고향을 찾아서》 등이 있다.
[출처: 한국수필창작문예원/에세이코리아 http://essaykore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