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늙은 호랑이와 젊은 이리
훈춘에 도착했을 때 가도에는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많은 소들이 무리를
지어 노령 국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식육이 될 농우들이 러시아에
팔려가는 것이다.
어중간한 양복장이가 된 김환은 노령을 향해 수없이 지나가는 농우들의
무리를 넋나간 듯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얼빈에서도 변두리, 러시아인
양복점에서 사 입은 연갈색의 양복은 싸구리 제품이라 몸에 맞지 않았고
고물상을 더듬어 찾아낸 찌그러진 모자며 구두는 어중간한 신사로서
안성맞춤이긴 했으나, 길상은 웃음을 많이 참아 온 터이다. 깎은 머리가
서운한지 목덜미에 손이 자주 올라가는 김환은 어중간한 신사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어리숙한 시골 신사이기도 했었다.
"선생님, 가시지요."
하는 말에 느린 걸음을 옮긴다. 눈에 잡힌 김환의 옆모습이
종전까지와는 사뭇 달라져 있는 것을 길상은 느낀다. 잿빛으로 보일 만큼
건조하고 심줄이 나돋은 것같이 변해버린 얼굴에서 뭔지 충격적인 절망을
본다.
'왜 저럴까.'
갑자기 부산스런 몸짓이 되며 길상은
"그 집까지 갈려면 꽤 걸어야 하는데 마차 한 대 빌릴까요?"
"날씨도 좋고, 구경 삼아,"
짤막한 대답이다.
"하긴 날씨가 하 좋아서 걸어가고 싶긴 합니다만."
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던 김환이 별안간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김환의 기분을 길상은 느낄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나 처참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때는 한 발 내밀 적에 빠른 속도로 쑥쑥 떨어져내리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길상은 가라앉는 환의 기분을
건져올려야겠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초조하고 답답하다.
푸릇푸릇한 들판에 펼쳐진 봄은 화사했다. 들판 위에 떨어지는 새
그림자는 금방 겨울을 잊은 경망한 계집의 웃음 같기도 하고 벌써
낙엽인가 하는 착각에서 당황해지기도 하고, 햇빛은 먼 밖에서 얼쩡얼쩡
서성거린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추풍이라는 장사꾼의 집입니다."
겨우 짜낸 길상의 얘깃거리다.
"그 추서방이란 사람 좀 재미있어요. 주로 수피를 다루는 뜨내기
장사꾼인데 흑룡강 유변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내오지요. 그곳 방언에
능통하고 그곳 사정이라면 훤하지요. 때 안 묻은 그곳의 토민들을 늘
찬양하면서 중국 문화에 물든 여진족을 매도하는 그런 위인입니다."
한양여관에서 처음 만났었던 일부터 시작하여 물론 강포수 얘기로
나오게 되었다.
"사람이 워낙 야인 기질이라 장사꾼 같지가 않고 사냥꾼... 아마 그
자신도 흑룡강 유역을 드나드는 일을 장삿길이란 것을 접어 놓고 즐기는
것 같아요. 한번은 뒤를 보아줄 테니 곡물을 취급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
일이 있었지요 싫다더구요. 돈을 버는 일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본시는
무산에 집이 있었다는데, 훈춘으로 옮긴 지 삼 년쯤 되지요."
길상의 얘기를 듣는지 여전히 말없이 걷고 있던 김환은 슬그머니
땅바닥에 주질러앉는다.
"발이 아프셔서 그러십니까?"
대꾸 없이 구두를 벗은 환은 두 짝의 구두끈을 풀더니 모아서 다시
묶는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벗고 가시려구요?"
"음."
"그럼 신발 하나 사 신지요."
"괜찮아. 아주 가벼워서 좋군."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했으나 주질 않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길상아."
"네."
"말짱 헛거야, 말짱!"
소릴 내지른다.
"말짱, 말짱 헛거야!"
"무슨?"
"조물주 같은 나쁜 놈이 어디 있으며 조물주 같은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선생님."
"선생님? 내가 어째서 너 선생이냐! 어째서 너 선생이냐 말이다!
구역질나는 소리 집어치워!"
빙벽을 끊고 오는 바람 소리처럼 차고 드세다.
"나를 이십 년 동안 목숨도 아닌 목숨을 살게 해놓구서! 순 날도둑놈
같으니라구!"
"..."
"여자! 여자! 여자가 뭐야! 부모! 부모는 또 뭐야! 애국자는 뭐야!
독립지사? 개나 먹으라지! 부처님! 예수님! 하눌님? 네이놈들아! 인간이면
요만큼은 해도 좋느니라! 요만큼? 그게 뭐야! 손에 피묻히는 일이다.
꿈벅꿈벅한 눈, 슬픈 눈, 착하디착한 짐승의 눈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소의 피건 인간의 피건 피는 피야. 소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요 인간도
슬퍼할 줄 아는 동물이야! 그러나 하나님! 그런 정도라면은
눈감아주겠노라, 그만큼은, 뭐가 그만큼이야! 뭐가! 행위 말인가 마음
말인가! 똥 누다가 밑 안 씻은 것처럼 그따위로 어정쩡한 게 어디 있어!
살생하지 말아라! 그럴 순 없지. 모두 중 될 순 없으니까, 해서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며 허언하면 아니 되느니라. 흥,
하나님의 손은 말짱하고 입도 정갈하시니 그러실 테지."
김환은 풀무질하듯 숨이 차게 웃는다.
"팔려가는 소를 보고 운다, 울어! 성현들을 대신하여 죄인이 된 슬픈
백성을 위해 운다, 울어! 불쌍한 악마 백정아! 도수장 앞에서 마지막
가락을 뽑는 소야! 너희들 죽은 목숨, 산 목숨을 위해 운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느 누군가가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네, 소의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호랑이의 세상이 되고 늑대의 세상이
되고,"
"옳은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겠지. 허헛...그러니까 요만큼은 괜찮다,
그거 아니겠나? 단 살생계를 범하였으니 부처는 될 수 없다 그거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희생자는 천물이요 죄인이지. 어쩔 수 없게
몰아넣어놓고. 하나님은 착하시지. 허허, 허허허... 누군가 소를
죽여주어야 소고기를 먹을 테고, 누군가 호랑이를 죽여주어야 호환을 면할
테고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주어야 살인 강도, 역적이 없어질 테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은 아니 끊이는데, 죄인은 날로날로 늘어만 가는데,
성현은 무엇을 했느냐! 살생 아니 하고 간음 아니 하고 도둑질 아니 하고
허언 아니 하고 모함 아니 하고 그 아니 하는 성현을 먹고 마시고 입고
잠들게 한 것은 하나님 아닌 죄인들의 덕분이라, 소의 세상, 호랑이의
세상, 살인 강도의 세상에서 어찌 성인인들 연명하여 도를 닦았겠느냐?
살아 생전에는 죄인들 덕분에 덕을 높일 수 있었고 죽어서는 또 극락
꽃밭에서 소요하는 신세, 그래 대성은 무엇이냐! 대오각성한 자가
대성이라, 무엇을 대오각성하였느냐! 살생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굶어죽을 것이요, 먹혀죽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그러면은 수만
수천억의 생물들이 날로 번식하여 지렁이도 우글우글 독사도 우글우글
메뚜기도 우글우글 호랑이, 늑대, 갖은 동물들이 우글댈 것이며, 인간의
종자는 날로 줄어들어 종국엔 사멸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죄짓게 해놓고서 죄짓지 말아라, 요만큼은 해도 그 이상은 아니 된다.
요만큼도 실은 아니 되는 일이로되 죄인의 멍에를 지는 자는 있어야 할
것인즉 그렇지이, 대성의 자리가 맑고 그 자리가 피로 물들지 않는 것은
무수한 죄인들의, 무거운 죄인의 멍에 덕분이거늘 그 위대한 희생자는
도시 무엇이냐! 영원한 육도윤회의 죄인들이요 육도 중에서도 천상만은
아득한 노예들이다, 그 말이냐?"
미친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동안 김환의 사유는 말짱 헛거라고 외친
것에서 진전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의 소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고 갈팡질팡
실상 그 자신 자기 입술에서 튀어나가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불교에 정통하신 분이 그런 억지 말씀을 왜 하십니까."
길상은 뭔가 얘기를 해야만 했다.
"뭐?"
김환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러나 길상을 보는 눈은 아니다.
"나 그런 것 몰라. 중놈들 잠꼬댈 알아 뭘 해! 애비는 살인귀! 어미는
부정녀? 얼마나 좋으냐? 죄인의 멍에를 끌고 저 세상, 업화지옥으로 간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허어허헛... 하하핫... 나도 살인귀, 내 그
여인도 부정녀!"
"..."
"극락 천당 같은 것 일없다! 시름에 젖은 듯 죄인을 만들어내고 지우고
하는 그 따위 교활한 조물주의 총아가 되느니보다 지옥이야말로 내
고향이야! 영원한 업화가 꺼지지 않고 불 붙은 그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아암 고향이구말구."
"기탄없이 말한다면은 선생님의 말씀, 그것은 자기 변명입니다."
비로소 길상의 입에선 확실한 말이 나왔다.
"뭐?"
"과연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없다고
가상하더라도 말씀입니다. 죽음이란 처참해도 있는 채 그대로 놔두고 사는
것이니까요. 사람이 사람 아닐 수 없는 이상 죽음은 넘어갈 수도 없는
거니까요. 설령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짐승을 죽인다 하더라도
죽음은 죽음일 뿐이겠지요. 형벌만이 우리에겐 살아 있는 것일 겁니다."
"이놈아!"
돌연 김환은 달겨들어 들고 있던 구두로 길상의 얼굴을 내리친다.
"이놈아! 죽여줄 테니, 죽음은 죽음뿐이다. 형벌이든 보상이든 내가
받을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이놈아!"
신발짝이 마구 날아온다. 그러나 몇 번을 그렇게 얻어맞던 길상이 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내지른다. 욱 하며 환이 길바닥에 나가둥그러졌다.
길상은 부풀어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길켠에 쭈그리고 앉으며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환이도 나동그라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네놈은 절에 가서 중질이나 할 놈이다."
"네에, 나는 절에 가서 중질이라도 하겠소만 김환 아저씨는 미치광이
병원에나 가서 들앉으시오!"
"오냐 이놈아! 중놈보다는 미친 놈이 낫다!"
"사십 고개를 넘었으면 시시껄렁한 옛일쯤 잊을 일이지. 윤씨 피가
흘러서 그런가요? 조카딸 아제비가 꼭같구먼. 나 같으면 이십년을
꾸역꾸역하지 않았을 게요! 죄인은 거룩한 희생자라 스스로 말하면서 뭣
땜에 이십 년을 허송하였던가요? 희생자면 희생자지 하나님 부처님 욕할
것 한푼 없다구요!"
"이 중놈아! 누가 우관 밑에서 자랐다 하지 않을까 봐서 그러냐?"
"네에. 맞아요! 우관스님은 김개주 장수보다 그릇이 컸지요."
"중놈의 세계는 소천세계 중천세계 대천세계도 티끌이요, 시방 무진의
법계이니 그릇이 큰 거야 당연하지. 그놈의 엉터리!"
"잘 아시는군요."
환은 덤벼들어 칠 생각은 않는다.
"현감놈 대가리 하나 덮치지 못한 그까짓 큰 그릇 있으나마나,"
구름이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새 잎새들이 미풍 따라 곱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삼라만상의 질서, 법칙에 귀의하듯이.
"안 가시렵니까?"
환은 잠자코 일어섰으나 옆구리가 결리는 모양이었다. 길상의 얼굴을
치던 구두짝을 들고 걷는다. 얼굴이 더욱더 부풀어오른 길상이 잠자코
따라 걷는다. 걷다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거기 구두를 신은 자기 발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양말을 신은 김환의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해란강변에서의 미쳐 날뛰던 사흘 밤의 일이 생각난다. 사흘 밤이 끝난 후
김환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생각한다. 사흘 밤으로써 김환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깊이 박힌 뿌리가 사흘 밤으로 뽑혀질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이다. 죄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죽 끓듯
하는 환의 그 반역의 피조차 돌연 잠들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리
고요한가. 고요하게 고요하게 네 개의 발은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추서방 집에 당도했을 때 환은 완전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는 추서방이란 사내, 빙긋이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네."
하고 길상은 씁쓰레 웃는다. 방으로 들어갈 때 환은 신고 온 양말짝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술 있습니까?"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주막 주인을 대하듯 퉁명스럽게 내던졌다.
"있지요."
"그럼 듬뿍 주시오."
길상이 이곳에 오기론 두 번째다. 작년 가을 하얼빈을 내왕할 때
송장환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일이 있었다.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과 함께
추서방도 진을 치고 앉는다. 술 한 잔씩을 마신 후
"얼굴이 그래서 술이 해로울 텐데?"
하고 추서방이 말했다.
길상은 개의치 않았고 김환은 단정하게 앉아서 연달아 술을 부어
마신다.
"저보다 선생님, 허리가 결리실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김환은 노기 띤 눈으로 길상을 노려볼 뿐이다. 이런 두 사람의 미묘한
싸움을 눈치채었을 텐데 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추서방은 그의
평소 버릇대로 술이 들어가니 마구 지껄이기 시작한다.
"술만 안 마시면은 추서방 입은 촛병 마개만큼 미덥은데 술 들어갔다
싶으면 헤퍼진다, 그렇게 말들 하구 구박도 했는데 그 대신, 내 한 가지
남보다 월등한 것이 있긴 있어요. 지껄여서 안 될 경우엔 절대로 술은 안
마시거든. 마시고 안 마시는 것이 자유자재이고 보면 입 굳은 것보다
사실이야 그 편이 더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 그 말인데."
"그렇게 장담하다가 누구 잡아가서 거꾸로 매달어놓고 술을 들어부으면
어쩌시겠소."
길상이 타박을 준다.
"매달리는 것도 실수 있은 연후의 얘기라, 그럴 염려는 없지요. 술이란
지껄여가면서 독기를 풀어가면서 마셔야 하는 거구 그 독기를 풀지 못한달
것 같으면 저기, 저 양반 모양으로 길 가다가도 미치고, 하 이거 실례가
많소. 이곳 북방엔 양반이 드물어서요. 그는 그렇고오, 성씨 이름 함자도
피차 모르는 터이긴 하지만 저기 저어 앉아 계시는 분 참말로 만고풍상 다
겪은 얼굴이구먼. 내 말 틀림없을 것이오. 우리네 같은 사람 얼굴 자주 못
보는 사람일수록 실은 관상을 잘 보는 법이고, 그러니까 뭐냐, 좁은 조선
땅이 좀 갑갑했을까? 그렇지요? 내 말이 맞지요? 길서상회 주인 양반,"
"양반은 무슨 놈의 얼어죽을 양반이오. 길서상회 주인이면 주인이지.
분명 하인은 아닐 터이니까."
"허어어, 준수하게만 생각했더니 뜻밖에 꼬부랑한 갈고리도 갖고
계시누마요. 저기 저분은 갈고리가 몇 개나 되는지 거 독기 좀 풀어가면서
술 드는 것이 좋을 성도 싶은데,"
주정 비슷하게 빗댄다.
"추서방도 나같이 얼굴 부풀어도 괜찮으려면 얘기 계속하시오."
"허어어 그렇게 됐소?"
그러자 김환은 뒤로 물러나 앉으며 발로 상다리를 확 밀어낸다. 상은
덜덜거리며 추서방 배 가까운 곳에서 멎었다. 그러더니 벌렁 나자빠진다.
나자빠지자 다시 벽을 향해 돌아누워버린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잠이 든 모양인데 잠든 모습은 조용했다. 가엾을
만큼 조용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잠이 든
김환은 권필응 일행이 도착하기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방에 들어선
권필응은
"깨우지 말게."
하고 길상에게 말했다. 저녁을 먹은 뒤 장인걸은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길상은 놀랄밖에 없다.
"이상합니다. 그자가 어떻게 수냥을 알았을까요."
"알어요."
"네?"
"그 사정은 설명할 필요 없고,"
"그러면 수냥을 그곳에 남겨놓고, 그래도 되는 건지요."
"당분간은 이동 안 하는 게 좋고, 아무튼 연추로 함께 가는 거지요?"
장인걸이 간단하게 생략해가며, 그리고 물었다.
"네."
"그럼 차차, 차차 의논하기로 하지요."
방은 넓은 편이었으나 벽을 향해 누운 환이 옆에 권필응이 눕고 다음
장인걸이, 벽 쪽에 길상이 눕고 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환이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잠이 덜 깬 눈을 하고서 두 남자와
대면하였다.
"나는 연추에 사는 권필응이란 사람입니다."
말에
"나는 조선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오."
하고 김환은 대꾸했다.
"지리산에서 숯을 구우십니까?"
"네, 숯도 굽고, 목기도 만들고 짐승도 잡지요."
"하아, 등 따습고 배가 부를 일입니다."
환이 눈을 들어 권필응을 쳐다본다.
"으음...괜찮소."
"괜찮습니까? 하하핫..."
권필응이 웃는다.
"들쥐는 아니고, 조선의 늑대하고 만주 땅 늑대가 만나게 되어
반갑수다. 나는 오래간만에 세수 좀 하고 와야겠소."
김환이 휭하니 방에서 나가버린다. 권필응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고 조반이 끝나기 무섭게 네 사람이 된
일행은 연추를 향해 떠났다.
연추에서 숙소를 정한 길상은 김환과 함께 이동진을 찾아가는 것이다.
밤이었다. 이동진과 김환의 대면을 길상은 염려하지는 않았다. 이동진
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이동진의 거처방은 넓었고 구석진 곳이었다. 창문 밖 뒤뜰에는 백양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부기는 빠졌으나 시퍼런 멍이 남은 얼굴을 하고서
길상이 앞서 들어가자 책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이동진이
"오래간만이군. 이곳엔 무슨 일로 왔,"
하다 말고 뒤따라 들어오는 낯선 남자에게 눈길을 옮긴다.
"...?"
알아보지 못한다.
"어서 앉게."
길상은 오른편, 김환은 왼편, 그러니까 이동진과는 삼각을 이루는
자리에 각각 앉는다. 이동진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김환을 응시한다.
경악으로 번쩍 빛나던 눈이 다음 순간 흔들린다. 얼굴이 핼쑥해진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시었습니까."
"너는 누구냐."
눈이 벌어지면서 쏘아본다.
"김환이올시다. 이부사댁 나으리께서 아시다시피 구천이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지요."
"..."
"이곳에 온 김에 찾아뵙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닌 듯 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지 이동진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자네도 어지간히 낯가죽이 두꺼워졌군 그래."
김환은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 예가 아닌 것 같아서 찾아왔느냐?"
"..."
"진작부터 그놈의 예라는 것을 차릴 것을 그랬군."
"..."
"예라는 말이란 편리한 것이어서 곧잘 그것을 앞장세워 용무를 보게
되는 오늘날의 인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도 염치의 정도
나름이지. 뻔뻔스럽게 내가 누구기에 찾아왔나."
"..."
"자네가 이십 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건 내
알 바 아니나 설령 의병장을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과거의 파렴치가
상쇄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의병장 아니라 왜놈의 산귀신(일본 천황을
이름)을 찔러죽였다 하더라도 말짱 헛거야."
담뱃재를 떨어내는 이동진의 손이 덜덜 떤다.
"그렇다면 김두수 같은 처지가 되어 나타났다면 뻔뻔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충격을 받으며 이동진은 환을 노려본다.
"그런 말씀이 두려웠으면 찾아왔겠습니까? 고매하신 도덕군자가
무서웠다면 말입니다."
"뭣이라구? 이놈!"
"살인, 간음, 도둑의 집안이어서도 아니 되겠으나 허울만 좋고 편협한
도덕군자의 집안이어서도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수신제가의 그
어정쩡한 자리는 당분간 아녀자에게나 맡기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이놈아!"
기막힌 수모다. 길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아래를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못한다.
"네. 머슴놈 구천이놈아! 하시렵니까? 의암선생."
이동진의 앞으로 기울어지려던 자세가 그냥 고정되어버린다. 길상은
굳게 자세를 지키고 앉아 있다. 김환이 의암선생이라 함은 일종의 야유다.
왕시 상민 출신의 의병장 김백선이 같은 의병장 안승우가 원병을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한 것을 분히 여기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의병대장 유인석이 추상같은 군기를 고집하여 죽기 전 노모를 보게
해달라는 마지막 애원마저 뿌리치고 사형에 처한 그 일을 두고 야유한
것이다. 상민 출신의 선봉장인 김백선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후일
유인석이 충주 등지에서 패배한 요인이 김백선을 잃은 데 있었던 것이다.
"으음... 시절이 다르구먼. 허허헛... 기우는 햇빛이 뜨거우면 얼마나
뜨겁겠는가."
이동진은 자탄하듯 쓰거운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은 신음이었다.
"지난날의 양반이란 이젠 죄인이지. 자학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이유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아니 되고, 허허헛, 허허헛... 그러나
너!"
하고 이동진은 김환에게 손가락질했다.
"너를 보는 내 마음엔 마패 찬 어사또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는군.
목을 댕강 짤라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높이 걸어올리는 광경도.
허허헛헛... 오백 년 사직이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자나깨나 독립이라는
공염불을 위해 무엇이든 수용되고 허용이 되는 이 벌판에선. 그렇지, 그런
뜻에선 자넬 환영해야겠나?"
복받쳐오르는 것을 참는 이동진.
"환영해주십시오!"
애원하듯 길상은 얼굴을 숙인 채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게. 다음날 또 만나세."
"네."
김환과 길상이 나간 뒤 이동진은 오열한다.
'이 사람아, 석운(최치수의 호). 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참말로
모르겠네. 이십 년을 방황하였건만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생각은
호박 오가리처럼 쭈글어들었네. 저네들은 싱싱한 호박 넝쿨처럼 사방에다
줄기를 뻗고서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일세. 어떻게 그리 변신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일세. 철사 같은 그 신경의 줄이 나를 휘감더군. 옴짝할 수 없게끔
나를 휘감더군.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한갓 감상이요,
그네들이 추하다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었네. 내 노여운 음성은 허울만
남은 호랑이 울음이었고, 그네들의 맞서는 음성은 발톱으로 먹이를
찢어발기는 이리떼의 울음이었네. 이 사람, 석운, 늙은 탓이 아닐세 늙은
탓이 아니야. 내 나이 이제 오십을 넘겼을 뿐인데 세월이 달라진 게야.
그리고 우린 이조 오백 년의 무거운 세월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하기야 살아남으려면 의관이 무슨 소용이겠나. 맨발로 뛰어야
할 때는 맨발로 뛰고,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면 물구나물 서야 하고. 한데
그게 안 되거든. 자넨 선견지명이 있었지. 그래, 오백 년은 너무 길었어.
오백 년 동안에 된 또랑은 너무 깊었거든. 하기야 설피 한 켤레에 몸을
담고 설원을 질러가는 지독한 이곳 젊은이들의 그 지독한 욕설이야
당연하긴 하지. 서울서는 문벌 좋고 유복한 집 자제들이 주색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것으로서 절개가 되는, 아아 그러니 의암을 희롱하고 이
나를 희롱한들 내 무슨 말로 대꾸할꼬.'
흐느껴 우는데 밖에서
"선생님."
"..."
"선생님, 이선생님."
"들어오시오."
이동진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풀며 말했다. 장인걸이 들어왔다.
"장동지요?"
"네."
장인걸은 몹시 당황한다. 도대체 이동진이 울다니, 그도 눈이
시뻘개지도록, 우울한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뜻밖이다.
"오늘 왔소?"
"네."
"그래 일은 어떻게 됐소?"
손수건으로 또다시 코를 풀며 말했다.
"권선생께서 말씀이 계시겠지요. 그보다 그곳 박군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놓는다. 이동진은 그것을 집어
피봉을 찢고 내용을 읽는다.
"음,"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편지를 도로 피봉 속에 넣고서
"글쎄,"
애매한 대답이었으나 이동진의 표정은 한결 밝다.
"만 원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얘긴데, 본인이 직접 보낸
편지가 아니니까."
"그래도 맥은 충분히 있는 것 아닙니까."
장인걸도 희색을 띤다.
"아무리 있어도 남아돌아가는 법은 없으니까 부딪쳐볼 만한 곳은 다
부딪쳐보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아야겠지."
"그럼요. 샅샅이 훑어야지요. 심정으로야 강탈도 불사, 장차는 조선
국내에도 그물을 펴야겠지요."
자못 흥분한 듯, 장인걸은 이동진의 침잠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으나 군자금의 모금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항시 명심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어가는 마당에서 사실 이동진의
좌절은 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
"..."
"우린 밑거름인 것을, 어차피 우린 그렇습니다."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지만 장인걸은 이동진의 눈물 앞에 관례적인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다.
"새삼스럽게 무슨 얘기야? 내가 고향 처자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생각하는 겐가?"
이동진은 껄껄 웃는다.
다음날 김환과 길상은 권필응의 초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 장인걸은
보이지 않았고 낯선 길상이 또래의 장연이 두 명 참석했다.
"김형."
권필응이 넌지시 김환을 불렀다.
"네."
"이동진 선생께선 일이 바쁘셔서 주연엔 참석 못하겠다 하셨고 그분
말씀이 주연이 끝나면은 김형께서 숙소로 오시라구, 하룻밤 함께 주무시고
싶다는군요."
그런 뒤 권필응은
"김형께서는 이곳에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보고 느끼신 점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소. 그리고 또 아시고 싶은 일이 있으면 사양마시고
물어보시구요."
격식을 차리는 어투다.
"그렇게 하지요."
김환도 손님된 예를 차리며 대꾸하였다.
"자네들 인사하게. 이분은 조선서 오신 김환 선생, 저기 김군은
자네들도 얘기는 들어 알 터이고."
하면서 권필응은 소개를 했다. 평범하게 생긴 두 장년, 몸집이 작은 편은
유씨라 했고 몸집이 큰 편은 석씨라 했다. 그들은 소박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으나 상당한 핵심 분자인 듯 별 동요가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초는 조용하게 술잔이 오고갔을 뿐이었다. 권필응은 김환을 상대로
술잔을 나누었으며 두 장년은 주로 길상을 상대하여 정중하게 술을 권하곤
한다. 쌍방이 뭔지 무르익어가는 시기를 기다리는 듯, 이윽고 김환이 먼저
입을 떼었다.
"지금 아라사에서 황제가 물러나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은 어째 조용한 것 같습니다."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네.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지요. 그리고 이곳이라고 조용한 것만은
아닙니다. 총동원령이 포고되고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귀화한
사람들의 자제들도 전선에 나갔구요. 전쟁은 계속하여 러셔쪽이
불리했습니다. 그 영향이 이곳이라고 미치지 않을 수 없지요. 엄연한
노령이니까,"
"그야 그렇겠지요. 그러나 전쟁보다 내란의 영향이 보다 심각하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그러나 좋은 방향이냐 나쁜 방향이냐 예측하긴 어렵소.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지요. 우리는 언제나 떠 있다는 상태, 그 상태
속에서 형체를 이루어나가야 하니까요."
"지금 내란의 상태를 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소."
"정확하고 상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세계대전이 나기
전부터 러셔 제정이 붕괴될 불씨는 심어져 있었던 게고, 전쟁이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그 명맥은 다소 연장됐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뜻대론 되지 않았으니, 게다가 몰락을 재촉한 것이
정부의 강압 수단이었습니다. 의회를 정지하고 극도에 달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군대를 풀어놓고,"
"그러면은 수립된 임시정부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권필응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싱긋이 웃는다. 지리산 산골에서 온
사람이 제법 알고 있구먼, 하듯이.
"허약하기가 짝이 없지요. 어려운 사태로 말한다면야 전일의 유가
아니구요. 한데도 그 우둔한 사람들이 세계대전에서 발을 못 빼고 있으니
말입니다. 밀려난 보수 세력도 아직은 막강하고 진보적인 세력도 실은
복잡하기가 몇 갈래인지 군은 군대로 몇 조각이 날 게구요."
"임시정부를 이끄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소?"
"역량 말인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변호사의 경력을 가진 케렌스키라는 사람이 의회의 대의사에서 이번
임시정부에 진보 세력을 대표하여, 말하자면 보수파인 르보프와의
연립내각이지만 우선은 케렌스키를 중심 인물로 보아야겠지요. 한데 진보
세력을 업고 나온 그 사람이 과연 국민들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도 정부 형태도 모두 불완전하다 그 얘기군요."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하지요. 모두가요. 우리로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신을 가져볼 수 없는 상태지요.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고 생산 공장은 파업에다 폭동의 연발이요, 전쟁의 전망은 어두워오고,
제정은 무너졌다 하지만 만회할 힘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고, 어쩌면
군사 독재 정부가 성립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혁명당 속에서도
맨셰비키니 볼셰비키니 하여 아까 말한 바대로 가닥이 많은 모양이고,
얼마 전에는 케렌스키의 정적인 레닌이라는 사람이 망명에서 돌아왔다
하고, 결국 추측컨대 내란은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되지 않을까요?"
조용 조용, 조심스럽게 대화는 진전되어간다.
@ff
15장 화살같이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용정 거리에 불어오는 바람, 길모퉁이를 스쳐가고 시장 거리를
휩쓸어가고, 비 떨어지는 하늘을 보다가 급히 장독 뚜껑을 닫으면서
아낙들이 얘기를 나누는 여염집 안마당에 머물다 가고, 풍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한때 두메가 하숙하고 있었던 집에서도 풍문에 대한 의견은
구구하였다.
"참말입지 이상하잲읍매? 옥황상제 따님 같은 가물댁에다가 토란같은
아들 형제를 두고서리, 생각으 해보랑이? 환장으 해도 그렇기는
못한다이?"
"그 여자가 그러니까 불나기 전엔 용정에 있었다잖아요? 재봉소에
있었다던가?"
"응. 재봉소에 있었지비. 그 안깐도 얼굴으 쓸 만했답매."
"첫정이라 그랬을까? 남자 쪽에서 말이오."
"첫정 앙이라 뱃속서부터 정이래도 그럴 수는 없는 기야. 말으 들으니
그 가물댁 다 죽게 생깄다잲읍매?"
"그건 빈말이오. 눈 하나 깜짝할 여자든가?"
"말으 들으니 남자보다 담대하다 합두마네두 그런 일으 그러잲이오.
여자 맘으 매일반이라 말이. 어찌 벵이 나잴고?"
"어제도 내가 봤는걸요? 멀정해서 인력거 타고 절에 가더란 말이오."
"무시기, 뉘기 머래도 남으 그 마음 모른답매."
주점에선 또 약게 생긴 사내가 공연히 삐뚜름한 어조로
"길서상회 그 사람들 조선으로 간다며?"
하고 물었다.
"그런가 부지."
술을 들이켜고 난 뒤 권서방의 대꾸였고
"부동산 같은 것은 거의반 처분했다던가?"
"사는 집하고 곳간 뒤 있는 빈터만 남았을걸?"
"그럼 장터 점포도 다 넘어갔다, 그 얘기야?"
"그럼 셈이지."
"그 판에 권서방은 재미 좀 못 봤어?"
"손톱도 안 들어가더라."
"왜."
"그놈의 늙은이가 꽉 틀어쥐고서 내주어야지. 하기는 뭐, 살 사람이
없어 못 팔던 것은 아니니까.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간 같은 것 거칠
필요도 없었지."
"그놈의 늙은이, 그럼 혼자서 해먹었단 말이야?"
"모르는 소리 말라고. 공노인이 그래, 구전 먹고서 그 집 일 보아주는
줄 아나?"
"세 없이 방 하나 얻어들었다고 역성 되게 드네. 사내자식이."
"뭐이라고? 사람 치사하게 만들지 말어. 그 사람들 관계란 옛적부터
그거 대단한 거라구. 아 조카딸 죽었을 때도 길서상회서 상여 만든 것
몰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는데 그 많은 재산을 처분하면서
한푼 이득 없이, 누가 그 말을 믿어. 부모 자식간에도 셈은 무서운 게야."
"믿거나 말거나, 남의 일인데,"
"하긴 그래. 배아파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그러나 기왕 말이 났으니,
그 집 남정네가 여자 얻어 달아나는 바람에 이곳을 뜨는 겐가?"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아무튼 그 사람이 용정에 없는 것만은 사실 아냐?"
"그것은 사실이지."
"흥, 귀신 곡할 노릇일세. 미인 마누라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형제는
그만두더라도 그 많은 재산을 두고서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팔자지. 옛말에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잖어."
여름이 한더위에 접어들자 길상이 옥이네를 따라 도망을 쳤다는 소문도
차츰 가라앉았다.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절을 향해 간다. 그새 서희는 몹시 여위었다.
눈만 커다랗고 깨끗했던 피부엔 잡티가 섞인 듯 거뭇거뭇한 기미가
쓸었다. 아이 둘이 매달리고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일이 태산같은 나날
혼자서 생각하고 싶을 때 서희는 훌쩍 집을 나서 절로 향하는 버릇이
어느덧 몸에 배고 말았다. 인력거에 앉으면, 생각은 늘 일정한 것이다.
지난 봄 하얼빈으로 해서 연해주를 거쳐 길상은 김환과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김환은 서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조선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환을 보내놓고 길상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환국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윤국이도 아비 팔에 매달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길상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하였다.
"이제는 당신께서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서희는 서방님이라는 호칭 대신 당신이라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길상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김환이라던 그 사람 옛날의 구천임이 분명하지요?"
다시 다그치듯.
"그렇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얘기는 차차 하지요. 내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소."
하고는 사랑으로 내려가 온종일을 들어박혀 있던 길상이 해질 무렵 해서
올라왔다.
"우리 강가 횟집에 회 먹으러 갑시다."
"술집에 어떻게, 아니 됩니다."
서희는 할 얘기 땜에 그런가 보다 짐작은 했었다.
"술은 곁들여 나오는 것, 그 집은 본시가 횟집이오."
"하지만,"
"남편하고 함께 가는데 누가 뭐라겠소."
우겼다.
"마침 봄도 끝나가려 하는데 달밤에 강물도 볼 겸, 지금 떠나서 거까지
가면 어두워질 게요."
서희는 연보라의 자미사 치마저고리를 입고 길상을 따라나섰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선 담배만 태울 뿐 길상은 말이 없었고 횟집의 젤 좋은
방에 안내되어 마주앉았지만 역시 침묵은 계속되었다. 방에는 램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물고 서희를 바라본다. 강한 눈길이었다.
서희는 이같이 강한 길상의 눈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강한 사나이의
그러한 눈길을 본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게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눈 같기도 했었다. 그 강한 눈을 서희는 강하게
받는다. 미동하지 않고 받는다. 그러자 길상의 눈에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왔고,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비로소 서희는 그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희는 싸움이라 생각했었지만 그쪽은 그것이
아니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버리고 길상은 날라온 회접시를 서희
쪽으로 밀어주며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별미요. 들어보시오."
서희는 형식적으로 조금 먹어보았다. 회맛을 즐길 그런 심정이 아니다.
길상은 술을 조금씩 들었다. 집에서도 겸상해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서희는 술을 마시는 길상의 모습이 다소는 신기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길상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다져두지 않을 수 없었다. 질기고 억센 삼베같은 마음, 부드러우나 역시
질긴 명주 같은 마음, 지나간 세월이 억세고 부드러운 반복으로써 서희를
놓았다 붙잡았다 하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묘향산이나
구천이를.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세월이고 또 술을 들고 있는 눈앞의 사나이는 누구냐, 이 사나이는 처자를
버리고 떠날 사나이냐, 이쪽과 저쪽 사이의 깊은 또랑은 결국 메워질 수
없단 말인가. 아집이 고개를 치켜들고 아우성을 친다.
'당신은 나를 따라가야 해! 두 아이 쪽으로 와야 해요! 우릴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이오!'
숨이 껄떡 넘어가기까지 울부짖었던 어린 계집아이는 아직 서희
마음속에 그 편린을 남겨놓고 있었다.
'묘향산? 구천이놈! 내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어린 내게서 어미를
빼앗아간 놈! 남편을 배신하고 딸을 버린 부정녀!'
하는가 하면
'난 돌아가야 한다! 조준구, 홍가 계집을 잊는다면 나는, 이 최서희는
죽은 목숨이다!'
혼란과 혼란이 부딪고, 그 와중에서 서희는 필사의 헤엄질을 한다.
"여보, 거 회 좀 들어보아요."
"아, 아니,"
하다가 서희는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십시오."
"..."
"말씀하시려고 이곳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하지요."
길상은 그렇게만 해놓고 술만 마신다. 램프 불은 쉴새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길상은 일어섰다.
"그럼 강가 달 보러 나갑시다."
서희는 먼저 횟집을 나왔다. 셈을 하고 뒤쫓아 나온 길상이더러
"마차는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며 서희가 말했다.
"돌아가라 했소. 우리 걸어서 갑시다. 밤바람이 시원해서 좋지 않소?"
길상은 다가서며 서희의 손을 잡는다. 서희는 당황하여 손을 뽑으려
했으나 누르는 힘은 컸다. 부부간이지만 집 밖에서, 아니 내실 밖에서
살갗이 닿았던 일은 처음이다.
"망칙스럽게, 이 손 놓으시오."
"오늘밤엔 최참판댁 손녀 최서희가 아니오. 내 아내야. 기생하고 나
이럴 수 있다, 그런 양반님네 법도는 잊어버리시오."
모래밭을 사북사북 밟는 발소리, 강물은 일렁이고 있었다. 강물 가까이
가서 길상은 서희의 팔을 잡아끌듯하며 자기 옆에 앉힌다.
"춥소?"
"아닙니다."
"당신 섬진강 생각이 나오? 아마 당신은 섬진강을 자세히 본 일이 없을
게요."
"왜 못 보았겠습니까. 이제는 하실 말씀 들려주십시오."
"김환이 그 양반 말이지요."
"어째서 그자가 양반입니까."
"양반, 이거 실수였구먼. 그러나 근본이 없는 김길상하곤 좀 달라서
그분의 피엔 당신이 말씀하는 양반의 피가 반은 흐르고 있소."
"양반의 서자라 그 말씀이시오?"
길상은 어금니를 지그시 누르듯하다가
"그 반의 피는 당신 쪽의 피, 그러니까 당신 할머님의 아들이오. 당신의
작은아버지."
"뭐라구요? 뭐라 말씀하시는 거요!"
"그분의 어머님은 윤씨부인이오."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 무슨 간교한 계략이지요?"
"그러면 내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겠소. 옛날 청상이던 당신의 할머님은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절에 가신 일이 있었소. 그곳에서 당신도 알고
있는 우관스님, 그 우관스님의 동생이신 김개주, 그렇지요. 김개주 장수에
대해서도 당신은 들어서 잘 알 거요. 그 동생이 정양차 절에 와 있다가
청상을 사모하여 겁탈을 했던 것이오. 청상의 죽을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은 문의원과 무당 월선아지매의 어머니 공이었소. 병을 빙자하여
남모르는 깊은 암자 속에서 몸울 풀었다는 게요. 그리고 그 아이는 아비
손으로 넘어가고, 후일 최참판댁 머슴으로 변성명하여 들어온 환이란
그분은 효수당한 아버님의 불행한 생을 가문의 노예가 된 생모 탓으로
돌리고 한을 품을 게지요. 당신의 할머님에게 고통을 주려고."
길상은 말을 끊었다. 서희는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모래밭을 핥고는 물러가고 핥고는 물러가는 물결 소리만, 목마른 사람같이
핥고는 물러설밖에 없는 안타까운 갈증에 몸부림치듯 강물은 달빛 아래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 한층 더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고뇌가 깊이 새겨진 얼굴은.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타고 있었으며 입매는 보다 빈번하게 뱅뱅 돌았다. 독경은 서희에게
일종의 치유 방법이다. 흐트러진 신경을 모아서 제자리에 놓아보는 수단인
것이다.
늦더위가 가고 수풀 속이 엉성해지기가 무섭게 길서상회댁이 이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그것은 풍문 아닌 사실이었다. 이삿짐과
이삿짐을 취급할 머슴 두 명을 데리고 공노인은 조선을 향해 떠난 것이다.
"야! 정말로 뜨누마. 용정의 재물 싹 쓸어서 떠나누마."
사람들은 모두 그런 말을 한마디씩 했다.
"하기느 친일파니끼 조선 가서도 부재 살잲겠슴둥?"
"왜 아니라? 없는 사람이야 친일하고 싶어도 못하지. 친일하는 데도
밑천이 들지. 돈이 있어야 헌금도 하구 또 재물 지니고 살자면 친일 안 할
수도 없을 게야."
"여자가 워낙이 독해 그렇지. 젊은 여자가 아들 둘 데리고 간다는 것도,
아, 글쎄 한발 두발 길인가? 아무리 돈이 있다 해도 남편 생각하면 이가
갈릴 게야."
"그렁이 부재 산다고 다 제 뜻대로 되는 거느 앙이랑이. 주는 복대로 살
기야. 남으 부러바할 것도 없지비."
"흥,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좋으니 부자 한번 살고 싶군.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앙이 삼수가 앞산입매? 하하핫... 서울 태생이라 할 수 없답매. 여기가
어디멘지 알고서리 하는 말입매까?"
두 사내는 소리내어 웃어젖힌다. 산수갑산엔 갈 것도 없이 이미 그곳을
넘어서 오지 않았던가.
일진을 거느리고 조선에 갔었던 공노인이 돌아왔다. 처분할 것은 모조리
처분하였고 옮겨야 할 것은 모조리 조선으로 실어내갔고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살풍경한 뜰에는 환국이가 윤국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서희는
서류 같은 것이 든 봉투 한 장을 꺼내놨다.
"공노인."
"예."
"이게 집문서 곳간 뒤에 있는 땅문서요."
"..."
"거두어두시오."
공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려줄 자손도 없는 저에게 집문서 땅문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 연해주에 계시는 분을 위해 보관하겠습니다."
서희는 공노인을 빤히 쳐다본다.
"그것은 공노인이 알아 하실 일, 내 뜻은 아니오."
"예. 하오나 이 집은 일하는 분들 숙소로 삼겠습니다. 땅도 역시 그분들
소용에 따라서 쓰여질 것이고요. 그것만은 저로서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 본의를 알아주시란 얘기는 아니겠습니다마는, 이 늙은것도
태어난 강산을 잊지 못하니까요."
그 말은 서희에 대한 마지막의 일침이었고 가족을 버리고 떠난 길상을
위한 변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희는 꿀 먹은 벙어리, 말이 없다.
공노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희의 말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젠 떠나는 일만 남았소."
"예."
"내일 모레 떠나지요."
"내일, 모레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러면은 내일 염서방을 보내어 배를 얻어놓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요."
"그러니까 일행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안자하고 유모가 따라가기로 작정하였소."
"저하고 복산이놈하고 염서방, 어른이 여섯이구먼요."
"그렇소."
"여기 마차엔,"
"애들하고 우리가 타는 게요. 그러니 마차 한 대는 세내야겠지요."
"가져가실 짐은 별로 없는 거로 아는데요."
"당장에 쓰일 것이 있을 뿐이오."
"예."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소. 공노인의 수고는 잊지 못할 것이오."
서희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공노인도 만감이 치미는지 얼굴을
수그린다.
"어머니?"
"오냐."
환국이, 동생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공노인은 아이들에게 웃는 낯을
보내며
"도착하기까지 도련님들 고생하겠소."
그러나 환국은 알은 체하지 않고
"어머니?"
"왜 그러느냐?"
"우리 이사가는 거지요?"
"그렇단다."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웬일인지 아버지 말은 통 하지 않았던 환국이가 풀쑥 물었다. 서희가
미처 대답을 못하자
"할아버지? 아버진 왜 안 오셔요? 공할아버지도 모르세요?"
하며 얼굴을 공노인 편으로 돌린다.
"왜 모릅니까. 아버님께선 볼일 보시고 오시지요."
"함께 조선으로 가시는 거지요?"
"그거는, 일을 다 보시면은 그러시겠지만,"
"환국아?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서희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거들었는데 환국이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다.
"참 오래됐는데 말예요. 아버진 윤국이도 보고 싶으지 않으실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보고 싶으지 않으시겠습니까. 볼일만 보시고 나면 늦더라도 곧
뒤쫓아가실 겁니다. 하하핫..."
공노인은 헛웃음을 웃고 서희는 돌처럼 굳어서 앉아 있었다. 윤국이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호아이, 코게이, 멍멍,
야웅 하며 귀엽게 혼자 놀고 있었다.
"그럼 지, 지는 가보겠습니다."
허둥지둥 도망치듯 공노인이 나가는데
"환국아? 이 봉투 할아버지 갖다드려."
"네."
환국이 집문서가 든 봉투를 들고 마루로 쫓아나간다. 신발을 신는
공노인에게
"할아버지 이거,"
"아, 저어,"
하다가 또 공연히 헛웃음을 웃으며 받아든다. 밖으로 나온 공노인은
"참말로 세상만사가 뜻대로는 안 되는구나.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할란고."
객줏집에는 추서방이 마루끝에 걸터앉아 공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해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깡마른 몸매 그대로, 후주레한 차림새다.
"추서방 왔소?"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공노인 음성이었고 추서방은 애매하게 웃는다.
"바쁜 모양인데?"
"바빠요."
"늙은네가 근력도 좋소."
"늙을수록 일복이 많아야 하는 게요. 안 그러면 앉은뱅이 되기
십상이제."
"노익장하니 좋긴 좋소만,"
"하여간 방에 들어갑시다."
추서방을 떼밀다시피 방에다 밀어놓고
"순아!"
"예!"
"할머니 어디 갔냐?"
"장에 가셨어요."
"알았다. 그는 그렇고 추서방은 무슨 일로 왔소."
마주앉으며 공노인이 묻는다.
"볼일 보고 오는 길에 들렀지요. 무슨 소식이라도,"
"조선에 다녀왔고,"
"그건 들었소."
"어디서?"
"훈춘이 그리 먼 곳이오?"
"그곳엔 모두 별고 없겠지요?"
"별일이야 있겠습니까마는 가만히 앉아서 노는 사람들 아니니, 하기야
그러기 때문에 식구들도 더러 잊기야 하겠지요."
"길서상회 그 댁은 모레 떠납니다."
"모레요?"
"예."
공노인은 쓰거운 듯 입맛을 다신다.
"그 큰아들이 어찌나 영특하든지... 어머니 간장이 녹겠구만."
그 말은 들은 체 않고 추서방은
"모레라,"
중얼거린다.
"내 조선까지 갔다오면은 훈춘으로 가겠소. 자세한 얘기는 그때, 본인을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그건 그렇게 하시오만,"
"그러면은 김두수놈 동태에 관해 얘기하지요. 그놈이 지금 심씨 동생을
찾아서 미친 듯 헤매고 있다는 게요. 심노인이 죽은 것은 이미 안 것
같고,"
"그러면 심씨 동생이 연추로 온 것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거요?"
"알면은 청진이다 원산이다 하고 헤매다니겠소? 그러니 포염에 있는
양가놈을 조심해야겠지요."
"심씨 동생은 변성명하고 그곳에서도 심씨와 형제라는 것을 모르지요."
"어쨌든 그놈보다 선수를 친 것은 잘한 일이고, 그 안은 누가 냈는고?"
"그건 모르지요."
"하여간에 좀 심한 얘긴지는 모르나 양가놈이 김두수 수족인 것만은
확실하니..."
하고 말끝을 흐리다가 공노인은 피식 웃는다.
"추서방."
"예."
"우리 늙은것들이 이러고들 있으니 독립투사 같구먼."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허 참,"
"마, 이렇게 되니 오래 사는 것도 과히 욕은 아니구만."
"칠십이나 되거든 그 말 하시오."
"아 참, 그리고 길서상회 그 사람한테 전하시오. 조선에는 유모와
안자라는 아이가 동행하게 됐다고, 염서방은 갔다가 날아 돌아오겠으나
복산이놈은 아마 그곳에 주질러앉을 게요."
"그렇게 얘기하지요."
사무적으로 얘기를 끝낸 공노인은 곰방대에 담배를 넣어 붙여 물면서
추서방에게도 담배쌈지를 밀어주며 권한다. 얼마 후 방씨가 장에서
돌아왔고, 술상을 차려 들여보냈다.
"추서방."
"예."
"우리 다 늙어가지마는,"
"허어어 참, 공노인이 늙었지 내가 늙었소? 공연히 동무하려고 그러네.
아직이야 몇 놈 메치는 것쯤."
"그거는 호기고오, 하여간에 늙더라도 일복은 있어야 하는 게요,
소리치고 더 살아봐야 앞으로 십 년, 우리 같은 사람이 쓰이는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쓰이지 않았던 김훈장, 추서방도
김훈장을 알지요?"
"얘기는 좀 들었지요. 돌아가신 분이라며요?"
"돌아가셨지요. 꼬장꼬장한 선비요. 내가 그 양반 유서랑 유고를 고향에
있는 자손한테 전했지요. 아무튼 좋은 시절이면은 그런 양반도 더러는
쓰였을 테지만, 안 그렇소? 추서방, 이런 시절에는 우리가 쓰이는 거요.
옛말에도 배리데기 소자 노릇 한다 안 했소? 일곱째 배리데기는 내다버린
딸이지마는 서천서역국의 약물 길어다가 부모를 살렸다 하듯이 예사 공 안
든 자식이 효행하는 법이고, 우리같이 괄시받던 서민들도 제가 태어난
곳이니 어쩌겠소."
"그런 말 하니 눈물 납네다."
"정말로 울랑가? 이 사람이,"
떠나는 날의 하늘은 쾌청하였다. 두 대의 마차는 이른 아침부터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대강의 짐도 실었고 사람만 타면 되게 돼 있었다.
방씨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과 석별의 정을 나누려고
마당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이다. 아침부터 환국이의
태도가 수상쩍긴 했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것
같았고, 또 그의 표정은 몹시 사나웠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막상
떠나려 하자 보이질 않는다. 안자랑 유모가 서희 몰래 찾다가 할 수 없이
"큰도련님이 안 계시오."
"뭐?"
옷을 갈아입으려던 서희가 방에서 나왔다.
"환국이가 어찌 됐단 말이냐?"
"글쎄 마님. 옷 갈아입히려고 아무리 찾아도 안 계세요."
안자의 얼굴빛은 파아랗고 서희의 낯빛도 달라졌다.
"모두들 나가서 뒷숲을 찾아보아요."
서희는 침착하게 말했다. 식구들이 뒷숲으로 다 몰려간 뒤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윤국이, 어미한테 매달리며 운다.
"오냐, 오냐, 괜찮아,"
서희는 아이를 안고 집안을 두루 살폈으나 아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뒷
솦속을 부르며 헤매는 사람들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안 계셔요, 마님."
안자는 운다.
"그러면 집안을 다시 찾아보자. 곳간 속, 항아리도 다 뒤져보아라."
마당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어찌된 일이냐면서 바깥길 쪽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아이를 찾으러 나간다. 서희 얼굴이 파들파들 떤다.
그러나 역시 환국은 없었고
"이상한 일이구나, 집안에 있으면 나올 텐데, 이애가 어딜 갔지?"
서희는 하마 소리를 지르며 울 기세다.
"저기, 혹 안방 다락 속에나,"
하며 공노인이 말했다. 우우 하니 안방으로 몰려간다.
"마님! 마님! 도련님 여기 기세요!"
"안 나오시겠다 합니다! 마님."
"오냐. 알았다. 내 가마."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윤국일 유모에게 넘겨주고
"환국아?"
다락 안을 들여다본다. 두 무릎을 세우고 아이는 웅크리고 있었다.
"환국아."
적의에 가득 찬 눈이 서희를 쏘아본다. 여태껏 환국이는 그런 눈으로
어미를 본 적이 없다.
"이리 나와요."
"안 나가겠어요."
"어째서?"
"모두 조선으로 가세요! 나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가겠어요."
"뭐라구?"
"전 여기 있을 테에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간단 말입니다."
"아버진 볼일 보시고 뒤따라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인 것 저는 알아요, 아버지만 내버려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서희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다.
'오냐! 나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저 어린 것 가슴을 멍들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결코!'
"환국아."
"안 간단 말입니다! 안 가요!"
무섭게 눈을 치켜뜬다.
"그러면 넌 아버지하고 살겠냐? 어머니랑 윤국인 내버려두고서?"
"아닙니다. 아버지랑 함께 갈 테예요."
아무리 달래어도 환국이는 꼼짝하질 않는다. 결국 서희도 목놓아 울고
말았다. 그러나 환국이는 울지 않는다. 울면은 지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당에선 모두 숨을 죽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와 아이를 함께
달랠 생각도 못한다.
"마차를 타고서, 또 강을 넘을 땐 배를 타고,"
서희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 다음 또 기차도 타고 그러는 동안 윤국인 어떡허니? 그럴 땐 형님이
손을 꼭 잡아주어야지. 안 그러느냐?"
윤국이 말이 나오면서 환국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안 계실수록 넌 아버지 대신 윤국일 돌보고, 형님이 그러면
어떡하니? 안 그러냐, 윤국이가 형님을 찾아서 자꾸 울면은 어떡허지? 아,
안 그러냐?"
입을 비쭉거리는 환국이는 별안간 엉엉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울어젖힌다.
"아, 아버지는 뒤따라 꼭, 오실 거야."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서희는 눈물을 쏟는다.
'결코 용서 안 할 게요!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게요!'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공노인이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내일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아니오. 곧 출발해야 해요."
서희의 음성은 단호했다.
"환국인 또 내일 그 소동을 벌일 테니까요. 도중에서 묵더라도 떠나요."
서희는 서둘렀으나 침착했다. 유모가 환국일 안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다음은 서희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마차에 올라
안아올려주는 윤국이를 받아안았고 사람들은 마차를 둘러싸고 모여왔다.
마지막에 장만한 음식이 든 찬합이며 당장에 갈아입어야 할 아이들 옷이
든 가방이며 옷보따리를 마차에 밀어넣고 안자가 올랐다. 방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서희는 마차 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안녕히들 계십시오!"
말굽 소리 그리고 두 대의 마차는 출발하였다. 마차 속에서 환국이는
내내 울었다. 서희도 울었다. 마차가 역두를 지나가려 했을 때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일본 여자들, 그리고 최기남의 마누라가 마부에게
손짓하여 마차를 머물게 한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최서기 마누라
음성이 맨 처음 들려왔다. 서희는 윤국이를 안자에게 넘겨주고 마차에서
일단 내린다. 영사 부인을 위시하여 소위 용정촌의 유지라는 일본 여자들,
그러니까 친목회 회원이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나와주었던 것이다. 맨 먼저
영사부인이 서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하지만 결국 가족들한테 돌아오실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그리고 저희들도 조선에 가면 부인을
찾아뵙겠어요. 편지나 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부인 같은 분을 만나 친히
지냈다는 건 영광이었어요."
다른 여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말을 하였고 장교부인인 코가
길었던 여자도 전과는 달리 정중하게
"고향으로 가시니 얼마나 기쁘세요. 또 만나뵐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인상이 남을 거예요. 당신은 참 멋진
여성이에요."
했다. 서희도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는데 아이의
선물이라면서 여러 개의 꾸러미가 마차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두 대의 마차는 빤하게 난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여자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그리고 속력을 낸 마차는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같이
가는 것이었다. (3부 1권으로 이어집니다.)
@ff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오시랖(15:26): (방언) 오지랖.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
얼피덩(28:30): (방언) 얼른.
척골(38:10): 훼척골립의 준말. 슬픔으로 살이 바짝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남.
포치(45:24): 현관.
숙로(51:30): 경험이 많고 사리에 밝은 노인.
마우재(55:28): '러시아 사람'을 얕잡던 말.
눅다(77:14): 값이 싸다.
바람(79:18): 실이나 새끼 따위의 한 발쯤 되는 길이의 단위.
난부자 든거지(89:15): 겉으로는 부자 같으나 실제 살림은 거지와
다름없는 형편.
가매(90:10): 대가를 받고 딸을 시집보내는 일.
모갯돈(112:14): 목돈.
떠리미(115:13): (방언) 떨이. 팔다 남아 다 떨어서 싸게 파는 물건.
삿자리(115:16): 갈대로 엮은 자리.
달비(115:26): (방언) 다리. 여자 머리털의 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드리는 딴머리.
긴피(122:30): (방언) 기색.
소쇄(152:5): 산뜻하고 깨끗함.
조달(180:2): 조숙. 남보다 올됨.
기명(202:23):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
오사(204:17): 비명에 죽음.
단대목(205:13): 명절이나 큰일이 바싹 다가온 때.
찍자(215:19): (방언) 남에게 무턱대고 억지로 떼를 쓰는 것.
가물댁(217:12): (방언) 마누라.
일질에(298:25): (방언) 일하는 길에.
비단가리(299:14): (방언) 하찮은 살림살이.
식지가 움직이는(349:30): 구미가 당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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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2부/3권/5편)14장 늙은 호랑이와 젊은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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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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