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과의 결혼설 출산설 출국금지설에 대한 장은영의 120분 진실 고백
KBS 전 아나운서 장은영(28)은 요즘 몹시 괴롭다. 작년 5월 미국유학에 앞서 무성했던 동아그룹 최원석 전회장과의 악성루머가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것이다. 부실 경영으로 물러난 최 전회장이 외화밀반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그녀의 이름도 본격적으로 언론에 거론되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소문이고 어디까지 진실일까?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년 5월 KBS에 휴직계를 내고 UCLA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KBS <열린음악회>의 인기 아나운서 장은영. 유학 후에도 전화로 꾸준히 본지와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인터뷰만은 끝내 사양했던 그녀였다. 유학전과 똑같은 내용을 확인시키기 위해 인터뷰하지 않겠다던 그녀가 최근들어 더욱 구체화되고 강도가 세어진 소문에 결국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압구정동 H아파트에 사는 언니 장혜영씨 집에서 만난 그녀와 2시간에 걸쳐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부모는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으며 장은영은 언니집에서 줄곧 함께 살았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그녀는 까칠하니 건강이 몹시 안 좋아보인다.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올 때 약간 살이 오르고 피부도 건강하게 그을렀다며 활기찬 목소리로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그러나 귀국 후 지독한 우울증,염세주의에 빠져 새벽 4시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나흘간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임파선과 편도선이 부어오르는 병 때문이다. 인터뷰중 그녀는 ‘최회장’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를 극도로 꺼려했으며, 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저 모회장이라고만 언급했다.
언제 귀국했으며 그동안 더욱 불거진 소문에 대해선 듣고 있었나.
6월 중순, KBS에 사표를 내기 위해 귀국했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전해주기 때문에 어떤 소문이 퍼졌는가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는 ‘검찰에 자진출두하기 위해 귀국했냐’란 말까지 전해들었다.
왜 반박을 하지 않고 매스컴을 피해왔나.
새로운 스캔들도 아니었고, 1년전부터 있던 루머의 연장일 뿐이었기에 반박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자꾸 매체에 오르내리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즉각즉각 해명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은둔’ ‘잠적’이라 표현하는 기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언론이 원하면 언제나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오만이다.
입장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동기는.
(루머에 대한) 단순한 확인인터뷰라면 결코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았고, 그로인해 출국금지를 당했다는둥, 나를 범법자로 몰고 가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모주간지 기자는 집앞에서 새벽까지 잠복하다가 기습해 사진을 찍어가고, 저잣거리에서나 할 수 있는 말들을 확인작업 없이 기사화했다. 현재 변호사를 선임해 그 매체를 상대로 형사고발을 준비하고 있다. 아파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집에 꼼짝없이 갇혀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출국금지를 당했다는 말은 사실인가.
그랬다면 내게 통보가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모회장으로부터 무얼 받은게 있다면 검찰에서 발표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도 파헤쳐지는 시대 아닌가. 곧 밝혀질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이렇게 법정싸움을 불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나는 새학기 준비를 위해 8월말에 출국할 예정이다.
굳이 사표를 낸 까닭은? 복직이나 휴직을 생각해보진 않았는지.
이 상황에서 복직은 불가능하다. 1년전과 똑같은 방송을 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다. 나로 인해 KBS가 자꾸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미안하고, 나역시 온갖 악성루머에도 귀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방송할 수는 없다. 지인들은 KBS 사직이 오히려 소문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지만, 지금까지 방송인으로서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왔는데 방송을 나의 결백, 건재를 보이기 위해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휴직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공부가 언제 끝날지 모르므로 사직을 결정했다. 도피성 유학이라면 굳이 LA를 택할 이유없다 이야기중 언니 장혜영씨가 다과를 내왔다. 어렸을 때부터 장은영의 동경의 대상이었을 만큼 헌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지만 목소리는 너무 똑같아 전화를 걸면 어머니조차도 헷갈려 한다고. 탤런트 이혜숙을 많이 닮았다고 하자, 장은영은 ‘저보다 훨씬 예쁘죠, 우리 언니? 컨디션이 좋을 때는 멕 라이언이라고 불러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껄끄러운 사안을 둔 인터뷰라 분위기가 다소 딱딱했는데 덕분에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최회장과의 소문을 잠재우려는 도피성 유학이었다는 소문이 있더라.
나도 들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기 위해 유학간다는 말도 있었다. 아이를 낳고, 모회장과 밀회하기 위한 도피성 유학이었다면 굳이 LA를 택하지 않고 좀더 지능적으로 물색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LA는 그렇게 폐쇄적인 도시가 아니다.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온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구설수에 휘말려야 하나(잠시 그녀의 눈이 붉어졌지만, 곧 단호한 어조로 자신을 추슬렀다). 설사 그런 유학이었다 할지라도 그걸 두고 볼 우리 부모님이 아니고, 그렇게 궁색한 집안도 아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무역업과 부동산업을 크게 하셨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하신 분이시다. 칠순이신 아버지는 늦둥이 막내딸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크시다. 나에게 자극이 될 만한 자료들을 모아 스크랩북해 주실 정도로. 여태껏 딸이라고 결혼을 강요한 적도 없으며, 나의 일에 대한 성취욕구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오렌지 카운티의 부모집에서 나와 UCLA 대학 근처로 독립했다고 들었다. 혼자 살았나.
부모님이 12~13년 전에 사신 오렌지 카운티의 집은 큰오빠 내외와 남자 조카, 나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기엔 매우 비좁다. 게다가 같은 LA라 해도 오렌지 카운티와 UCLA대학은 서울과 대전만큼 멀다. 자가용으로 통학하기에도 매우 불편해서 학교 근처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소문에 휩싸일까 봐 부모님과 함께 이사했다. 장은영은 대꾸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 해명을 하지 않는 자신의 성격탓에 손해를 많이 본다고 했다. 학창시절에도 친구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풀지 못하고 ‘날 잃으면 네가 손해다’라고 치부해버렸다고. 뒤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이에 비해 큰 프로그램을 맡았다는 둥, 벤츠를 타고 다니는 이유가 있더라는 둥의 유치한 소문에 유화적으로 일일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 화를 자초한 것 같다며 어렴풋이 후회의 빛을 보였다. ‘내가 그 정도 사람밖에 안 되나’ ‘시간이 지나면 나의 진실을 알아줄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이 교만이었다며 자책마저 하는 듯 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 그런지 남들보다 화려하게 보이는 면도 있다.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죽어라 일했는데 빛이 안 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나는 필요이상으로 과대포장돼 비춰지는 것 같다. 아나운서란 특별히 뒤봐주는 사람이 필요한 직업이 절대 아니다. 난 그전과 다름이 없는데, 소문이 난 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특정인과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정말 부담스럽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갔을 때, 등뒤에서 ‘저 목걸이 과연 얼마일까’라며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듣곤 매우 씁쓸했던 적이 있다. 그때 갑자기 ‘반짝이는 것이 모두 황금이냐’란 냉소적인 말이 떠오르더라.
아나운서도 월급쟁이 아닌가? 방송할 때 기사 딸린 벤츠를 타고 다녔다던데.
사업하는 형부의 승용차이다(형부는 ‘인터크루’ 등 아동복 섬유업을 하는 젊은 사업가이다). <열린 음악회>는 지방촬영이 많은 프로이다. 새벽에 뉴스를 진행할 때도 있어서 밤늦게 녹화가 끝나면 한숨도 못 자고 방송국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때 형부가 위험하다며 자신의 차를 몇 번 내준 적이 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내가 왜 이렇게 구차한 해명을 해야 하나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든다. ‘사실 내 승용차는 마르샤이고 몇 개월 할부로 구입했고, 이 옷과 목걸이는 코디네이터가 00백화점에서 구해온 것이고…’란 말을 굳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습지 않은가?
돈으로 접근해오는 남자엔 결코 관심없다
은영, 혜영씨의 자매애가 남달라서인지 형부의 처제 사랑 또한 각별하다고 했다. 지금은 IMF 시대라 외제차를 팔았지만 처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벤츠까지 제공했을 뿐더러, 독립하려는 장은영을 시집갈 때까지 함께 살아야한다고 호통친 사람도 바로 형부이다. 장은영도 ‘형부 사랑이 웬만한 오빠보다도 한수 위’라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능력있는(?) 형부의 처제 사랑이 ‘재벌과의 염문설’을 더욱 부추긴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유학하고 있는 동안 최 전회장과 제3국에서 극비리에 결혼했고, 출산했다는 설과 함께 미국에 있는 아버지 계좌로 거액을 송금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나는 일에 대한 성취욕은 크지만 물질욕,소유욕은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다. 여태껏 성실히 방송일을 해왔고, 앞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도 방송인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밖에 없다.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지 나의 일과 명예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최소한 나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만일 내가 재물을 원했다면 능히 다른 누구를 택했을 것이다. 왜 굳이 그 사람을…. 우리 가족이 거액을 받았다는 것도 터무니없다. 검찰의 계좌추적으로 곧 밝혀질 텐데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나? 캐나다에 골프장을 사줬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앞으로 그런 식으로 접근해오는 남자가 있다고 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최회장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나.
(언니 혜영씨가 대신 답변을 했다) 큰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라 LA 한인사회에서도 꽤 유명하신 분이지만 최회장과는 전혀 안면이 없다. 당연히 돈관계도 깨끗하다.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우리가 0.1%라도 거짓말을 하겠는가.
부가 아닌 사랑 때문에 한 선택이라면 말이 되나.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지금까지 매스컴에서 ‘밀회설’ ‘동거설’ 등으로만 다뤘지 한 번도 그렇게 접근한 적은 없었는데…. 불행히도 지금껏 사랑에 빠진 기억이 없다. 아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대학(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때 미스코리아가 되었고 학생의 신분으로 공영방송의 진행자로 일했다. 어린 나이에 공인이 된 나는 애늙은이처럼 행동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너는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돼’하며 많은 제한을 걸었고 그래서 미팅 한번 못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줄곧 방송일에만 매달려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2월16일~30일, 올해 2월 2일~9일, 4월19일~5월 26일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세 번 귀국해서 무엇을 했으며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미국을 오고 간 까닭은.
작년 12월 귀국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 왔고, 그때 KBS에 가서 인사도 드렸다. 2월엔 핸드백을 몽땅 도둑맞았기에 분실한 여권을 새로 발급받기 위해서 귀국했다. 수첩도 없어 연락처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에게만 연락을 했다. 4월 귀국은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서류를 떼기 위해서이다. 그땐 서울의 언니도 미국에 가 있던 터라 내가 직접 와야 했다. 어머니와 동행했으며 그 누구에게도 연락없이 지내다 출국했다. 그리고 제3국을 경유한 것을 의심하는 건 정말 무식한(?) 발상이다. 꼭 직행 비행기를 타라는 법이 어디 있나?
과연 100% 근거없이 소문이 생겨날 수 있을까? 최 전회장과의 만남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고백해 달라.
몇 번 공석에서 만났다고 이미 밝혔고 그게 전부다. 아나운서들은 누구 생일이다, 출판기념회다 해서 여러자리에 초대받는 경우가 많다. 아나운서로서 내겐 두 가지 철칙이 있는데, 사례를 받는 자리와 사적인 자리에는 절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회장과는 모케이블 방송사의 행사 때 만났고 그때 따님도 동석한 바 있다. 그 회장님과 마찬가지로 따님도 방송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고 나는 나중에 방송국으로 놀러오면 많은 얘기를 해주겠노라고 말했다. 찾아오면 음료수라도 사주며 얘기하는 것이 마음편할 것 같았서였다.
최 전회장이 일방적으로 호의를 표한 적은 없었는지.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느낌은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았기에 나 역시 그분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 처음엔 내가 그와 관련된 구설수에 오른다는 사실에 짜증도 났지만, 본인이 소문낸 것도 아니니 최회장도 일종의 피해자일 거란 생각마저 든다(순간 그녀는 괜한 말을 해서 오해를 일으키는 것 아니냐며 매우 불안해했다).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를 넘겼는데, 그간 결혼의사가 전혀 없었나?
아마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아나운서란 직업은 보통 사람들과 사이클이 매우 다르다. 밤낮없이 일하다보면 개인생활을 챙길 에너지가 남질 않는다. 이제와 결혼하고 싶다 한들 이렇게 불미스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당장은 꿈도 못 꾼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결혼하라고 등떠미는 분들이 아니시고 중매보다는 자연스런 연애결혼을 권장하신다. 그래서인지 오빠,언니 모두 늦었지만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LA에서 맞선을 본 적은 없나? 사귐의 폭은 오히려 여기보다 자유로울 텐데.
그런 거 싫어한다. 생각보다 그곳에서의 만남의 폭도 매우 좁았다. 내가 주로 만난 사람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클래스메이트 정도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떤 배우자감을 원하나?
숙제가 있어야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라 스스로 어떤 것에 묶어두길 좋아한다. 그런 맥락에서 남자도 내게 굉장히 많은 것을 요구했으면 좋겠다. 남편으로 인해 나를 긴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뭐 먹을래’ 묻는 것보단 ‘이거 먹자’ ‘이거 해라’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자연스럽게 결혼하지 않을까?
미국에서의 계획은?
사실 지난 1년간의 저널리즘 공부는 익스텐션(extension) 개념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는데 하다보니 학위에도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번 4월에 UCLA 대학원 저널리즘 과정의 시험을 치렀고, 합격한 상태이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1년 수료했던 경력이 참작된다면 공부기간이 조금 단축될 것 같다.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MBA(경영학 석사)과정으로 진로를 바꿀 생각도 있다. 아버지는 내가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는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셨지만 그러나 그건 내 능력밖인 것 같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 거두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고맙다. 앞으로는 꼭 좋은 일로 만났으면 좋겠다.
현관까지 배웅나온 장은영은 지난 1년간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자기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는 가족이라고 덧붙였다. 얼굴을 붉히게 하는 소문과 기사들, 새벽 1~2시까지 전화를 걸어오는 기자들의 횡포를 말없이 감수하는 가족들이 한없이 고맙지만, 차라리 ‘너 때문에 우리가 이게 뭐냐?’라고 불평이라도 한다면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다고.
그녀는 추운 겨울 새벽에 출근할 때 보았던 빼빼 마른 나무들을 떠올리며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다고 했다.
“지금 너무 추우니까 현실감은 나지 않지만, 몇 달 지나면 앙상했던 겨울나무에 새순이 돋아나듯 내게도 언젠가는 따뜻한 봄이 올 것이다. 앞으로 공부를 해서 무엇이 되겠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만은 나를 아시겠지’란 생각으로 그저 힘든 하루를 견딜 뿐이다.”
(1998.8 여성동아)
과열 취재경쟁·과장보도로 집밖도 못나가는 불편한 심경토로
장은영
삶이 축축 늘어지는데 머리까지 늘어뜨려야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엷게 미소짓는 장은영. 한달 만에 만난 그녀는 길렀던 머리를 싹뚝 단발로 자르고, 조금은 냉소적인 듯 차분한 모습으로 필자를 맞았다. 집요한 소문과 언론에 시달려 마음고생이 컸지만 기나긴 괴로움의 터널을 지나 이제 조금씩 평정을 찾고 있노라 덧붙였다. 언론 플레이에 능숙치 못하기에 친분있는 기자들의 부탁을 모질게 거절하지 못하고 응했던 지난달 인터뷰가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며 그녀는 후회의 빛을 보였다.
“선임 변호사와 미국에 계신 아버지께 많이 혼났어요. 소문이 사실이 아닌데 왜 굳이 인터뷰를 했느냐고요.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추측기사가 나올 것이 뻔할 것 같아 몇몇 매체와 인터뷰를 가진 건데… 막상 기사화된 것을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현재로서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뇌리에서 빨리 잊혀지는 것이 최상일 것 같습니다.”
자신도 언론에 몸담았던 터라 누구보다도 기자들의 입장과 고충을 헤아렸고, 그래서 고심끝에 인터뷰에 응했었다. 그러나 발표된 기사들은 그녀의 배려와 믿음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고. 특히 ‘최회장에게 좋은 감정 가지고 있다. 앞으로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라 실린 모잡지의 기사는 전혀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한 기자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5~6번 집에 찾아왔던 그 기자가 ‘최회장을 미워하느냐’라고 묻더라고요. 저는 ‘아니다. 고의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도 나와 같은 피해자이기에 나쁜 감정없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공적인 자리에서 몇번 만나뵈었지만 무척 젠틀한 분이셨어요. 바보가 아니라면 제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해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아무튼 묘하게 질문공세를 퍼부어 제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사화했더군요.”
비교적 정확하게 기사를 게재해준 여성동아에 고마움을 전한다는 장은영은 앞으로는 더 이상 같은 이유 때문에 인터뷰하지는 않겠노라 단호히 말했다. 지난 1년간 지켜본 그녀는 불쾌한 일 앞에서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거나 안색을 붉히지 않는 품위있는 여성이었다.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질문을 꺼내도 부드러움과 인내를 잃지 않던 그녀일지라도 이번 언론들의 지나친 취재열기를 통해 크고 작은 상처를 얻은 듯했다.
문밖 출입이 거의 없는 요즘 생활에 대해
8월호 대부분의 여성지가 ‘장은영을 둘러싼 소문들’에 대해 톱기사로 다룬 터라 부쩍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그녀. 미용실 출입조차도 여의치 않아 단골 미용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아침 일찍 손질하고 와야 했단다. 자신의 기사를 읽고 있는 손님들과 나란히 앉아 있을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더라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하다. 가끔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 만나지만 요즘 유일한 소일거리는 독서와 번역이라고 했다.
“전에 모출판사에서 제 에세이를 출간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오랜 시간 성의있게 연락을 주셨지만 아직 연륜이 부족한 것 같아 정중히 거절을 했었지요. 그랬더니 올봄에는 번역작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며 또다른 제안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학책이나 전공서적을 번역하라는 말에 솔깃했지만 그때는 몹시 힘들 때라 성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니 거절했던 것이 은근히 후회가 되네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번역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전공과 영어를 둘다 공부하기 위해 대학졸업논문에 참고했던 책을 번역하는 중인데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미국에 가 있는 조카 유정이가 보고 싶어 가끔 우는 것 빼고는 그런대로 지낼 만하네요.”
언니 장혜영씨, 형부, 조카와 함께 압구정동 H아파트에 살고 있는 장은영. 새벽에도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에 노이로제에 걸린 언니는 두손들고 부모님이 계신 미국 LA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녀도 언니와 함께 미국에 가서 대학원 새학기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검찰에서 출국금지를 풀어주기 전에는 시간을 죽여야 하는 처지이다. 차라리 빨리 소환돼서 결백을 증명받고 싶지만 속수무책. 시민의 자유를 권위로 옭아매는 검찰이 그저 야속할 따름이다.
운명에 순응하는 법 배워
장은영이 출국금지를 당한 것은 ‘외화 밀반출 혐의가 포착된 최회장이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송금했는가’란 의혹에서 비롯되었다. 커다란 국익에 관련된 리비아 대수로 사업의 재계약을 앞두고, 동아그룹 전회장 최원석씨에 대한 수사가 전면 보류가 되면서 자연히 장은영에 대한 검찰소환도 늦어진다는 후문이다. 만일 그녀가 최회장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면 그녀의 출국금지조치는 국익앞에 개인의 인권이 유린당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장은영과 그녀가 선임한 변호사 나정욱씨는 8월말까지 기다리다가 검찰에 ‘출국금지 해제’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BS는 9월초에 첫 방영할 시사프로그램 <소문과 진상>에서 최회장과 장은영을 둘러싼 소문들을 밀도있게 다룰 계획이다.
“예전엔 인생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지만, 요즘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운명이 있음을 절감합니다. 그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인간을 이끄는 절대적인 힘 같아요. 사실 최근 몇 년간 제게는 저 자신이 전혀 뜻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젠 운명에 맞서려 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려 합니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한결 편해지더군요.”
인생에 대해 남다른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장은영의 스물여덟해 삶은 탄탄대로였다. 부유한 가정환경과 타고난 미모를 지닌데다가 우등생이었던 그녀에게 삶이 커다란 무게로 느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용산여중을 졸업하고 중경고 2학년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LA로 이민갔던 첫해, 몸무게가 10kg이 늘 정도로 죽어라 영어공부했던 기억을 빼고는. 그러나 보통 2~3년 랭귀지 코스를 밟고 대학에 가지만 그녀는 1년후 명문 UCLA 대학 생물학과에 합격했고,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편입에도 성공했다.
한가지 일에 빠지면 완벽하게 이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장은영은 아나운서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고백한다. 사생활이나 결혼을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일에 미쳐살았던 지난날이었기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방송에서 물러나 자신만을 위해 투자해야 할 시간이 많아진 지금, 이제야 그녀는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한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해서 안정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히 듭니다. 나를 리드해나가고 나를 긴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방송에 대한 미련도 접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방송인으로 남는 것이 저의 소망이었으니까요. 앞으로 대학원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꿀 계획도 가지고 있어요. 경제를 알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진다고들 하잖아요. 훌륭한 방송인이 되기 위해서도 MBA(경영학석사)를 꼭 마치고 싶습니다.”
결혼소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겠다며 오랜만에 화사한 웃음을 터뜨린다. 한시간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난달보다 한결 성숙해진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적 성장이 어떠한 동기에 의해 계단식으로 훌쩍 이루어짐을 체험했다는 그녀(예전에는 성숙은 완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굳게 믿었단다).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 장은영이 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어조는 나직하지만 매우 강했다.
(1998.9)
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아내, 장은영 요즘 사는 이야기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 보내고 있어”
미스코리아 출신 전 아나운서 장은영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수년 전에 다니던 모 대학 언론홍보대학원에 재입학해 봄 학기를 시작한 것. 학교로 찾아가 장은영을 만났다. 그녀는 남편인 전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공산학원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학교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녀의 근황을 들어봤다.
2007년도 동아방송예술대학 입학식에 참석한 최원석 장은영 부부
중단했던 학업 다시 시작한 장은영
이제 공인이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장은영. 그녀는 결혼 이후 일체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패션쇼장이나 지인들과 만남을 가질 때 간혹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개인적인 용무일 뿐 공적인 노출은 꺼렸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미스코리아 출신 K BS 공채 아나운서로 지성과 미모를 갖춰 시대를 풍미했던 장은영이 아닌가. 나이를 초월한 최원석씨와의 결혼으로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 그녀가 요즘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알려졌다. 수년 전에 다니던 모 대학 언론홍보대학원에 재입학하고 봄 학기부터 출석하고 있다는 것. 학교에서 장은영을 만났다.
수업 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을까? 잰걸음으로 강의실을 향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유의 우아한 분위기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주차 자리가 없어서 헤매다 좀 늦었어요.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죠? 이왕 오셨으니 커피 한 잔 해요. 비록 자판기 커피지만요.”
사양하는 본지 기자에게 ‘사실 내가 먹고 싶었다’고 웃으며 손을 이끈다. 그녀는 ‘요즘 어디 가서 1백50원짜리 커피를 사먹을 수 있겠냐’며 대학이 참 좋다고 말했다. 그녀가 대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중단했던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함이다.
“이번이 3학기째예요.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나오고 있어요. 10년에 걸쳐 대학원 다니는 것이 자랑도 아니구요. 뒤늦게 공부하려니 힘들어요. 머리가 굳었나봐요(웃음).”
그녀는 학교 다니는 것이 대단한 게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다. 공부는 진작 시작해야 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게으름을 피운 것이라며 쑥스러워한다. 학업에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분들과 똑같이 그냥 삼시 세끼 밥 먹고 살아요. 특별한 거 없어요.”
마음은 더없이 편안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유일한 대외 활동은 동아방송예술대학의 이사직이다. 남편인 최원석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공산학원에 속해 있는 대학이다. 대전동아공업고등학교와 동아방송예술대학을 소유한 공산학원은 최원석 이사장의 아버지이자 동아그룹의 창립자인 고(故) 최문준 회장에 의해 77년 설립된 재단이다.
학교에 애정을 쏟고 있는 최원석·장은영 부부
학교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장은영은 공식 행사는 꼭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학교 측 설명이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학교에 가서 화장실이 청결하게 돼 있나 들여다보고 오는 것뿐이에요. 특별하게 하는 일도 없는 걸요.”
동아방송예술대학은 모든 시설이 최첨단인 것으로 유명하다. 방송 관련 학과가 많기 때문에 모든 교구를 디지털로 설치했다. 시설이 좋아 방송국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녀가 특별히 ‘화장실’을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방송 장비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편의 시설도 완벽하단다. 기본 냉난방 시설에서 가장 터부시할 수 있는 화장실까지 말이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학교 모든 공간에 비데를 설치했다.
“이사장님의 뜻입니다. 학교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세요. 학생들의 끼를 발산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라는 거죠.”
장은영은 서울 근교에 자리한 학교를 일주일에 서너 번 방문할 만큼 애착을 갖고 관심을 쏟고 있다. 그녀도 역시 학교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방송 전문대학이라 시설이 좋아야 해요. 장비는 방송국 수준 이상이에요. HD카메라 같은 경우는 방송국에서 장비를 빌려달라는 의뢰가 올 정도였거든요.”
학교에 대한 최원석 이사장의 애정도 각별하다. 개인적인 취미에서도 학교 사랑이 묻어난다. 자신의 동영상 카메라 장비로 예쁜 교정을 촬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최근에 대학 홍보 광고 촬영이 있었다. 최 이사장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촬영 내내 현장을 지키며 제작 과정을 살펴봤다고 한다.
“그런 열의를 보면 참 건강하신 분이에요. 요즘 등산을 다니시며 운동을 하세요. 건강은 저보다 더 좋으세요.”
장은영의 웃는 얼굴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학업에 정진할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방송인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분야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재능을 살려 강단에 설 계획을 물었다.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저 옛날에 벌려놨던 공부를 마무리하고 졸업하려는 의미밖에 없어요. 저는 지금 방송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걸요.”
방송예술학교의 특성상, 방송에 관련된 꿈을 지닌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장은영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그녀가 캠퍼스를 거닐다 만난 학생들은 이내 ‘너무 멋있으세요. 강의 좀 해주세요’라고 소리치기 일쑤다. 그러나 절대 계획이 없다고 단정짓는 그녀. 자신보다 더 좋은 조언을 해줄 사람이 많다며 겸손해한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으신데요. 그 대신에 학교에 특강을 나오는 교수님들과 꼭 인사를 나눠요.”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가 대학을 방문해 특강을 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녀는 여전히 아나운서 선후배들과 친밀한 교류를 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장님과 함께하는 여가 활동은 특별히 없어요. 요즘은 무척 잔잔하고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나중에 좋은 뉴스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그녀의 평소 생활은 대학원과 학교 행사 참여, 지인들을 만나는 정도인 것이다.
최원석 이사장은 학교 홍보 광고를 찍는 현장에 나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며 제작 과정을 밤새 지켜봤다.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두 사람
동아방송예술대학 관계자를 통해 부부의 최근 근황을 좀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에는 각자 학교를 들르는 편이라고 했다. 공식 행사의 경우 부부내외가 함께 방문한다. 특히 장은영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동아방송예술대학은 매년 5~6명씩 해외에서 학사교류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장은영은 그때 오가는 학생들과 만나 종종 그들과 의견을 나눈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에도 참가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난다.
“학부모님들을 만나 소중한 자녀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드려요. 훌륭한 인재를 만들겠다고 약속드리구요.”
최원석 이사장이 늘 주장하는 모토는 ‘오고 싶은 학교 만들기’다. 쉬워보여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고 싶은 학교로 만드는 일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학교 구석구석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 대한 배려를 늘 강조하세요. 불편한 곳이 있다고 하면 꼭 몸소 방문하시죠. 직원들 입장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그만큼 학생들을 위해 신경을 늦추지 말라는 의도시겠지요.”
그는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체육대회를 하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인조 잔디 구장을 만들었다. 사업가 출신의 강한 추진력이 발휘되는 일면이다. 최근 대학들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학생은 고객’이라는 마인드가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 풍토다. 사업가 출신인 최원석 이사장은 학교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물임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는 5월은 대학의 10주년 개교기념일이다. 더욱 학교를 위해 힘쓰고 있는 두 사람이다. 기념행사 당일 내외가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두 사람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는 한 관계자는 부부의 평소 모습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최원석)이사장님은 결정이 빠르시고 추진력이 굉장하세요. 잘못된 일이 있으면 무지하게 혼내시는데 시간이 지나면 독려해주시는 카리스마가 있으시죠.”
장은영은 차분하고 주위 사람들을 다정다감하게 챙겨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잘못된 부분은 곧바로 지적하는 냉철한 면을 갖고 있다.
“판단력이나 분별력 면에서는 서로 비슷하세요. 두 분 모두 좋은 아이디어 뱅크시구요.”
금슬 좋은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면이 더 많다. 나날이 발전하는 학교를 보면 부부가 만들어내는 가정의 행복지수도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2007.4 레이디경향)
개교기념식이 끝나고 학교 임직원들이 준비해 온 생일케이크를 함께 자르는 최원석·장은영 부부.
개교 10주년 맞은 동아방송예술대 이사장 &이사로 함께 일하는 최원석·장은영 부부
지난 99년 스물일곱 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해 화제를 모은 전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장은영 부부. 현재 동아방송예술대 이사장과 이사직을 맡아 함께 대외활동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8년간의 결혼생활과 시련을 겪은 뒤 깨달은 인생의 참 행복,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초록이 한창 싱그러움을 뽐내는 초여름 오전, 경기도 안성에 자리한 동아방송예술대학에서 지난 99년 스물일곱 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원석(64)·장은영(37) 전 동아그룹 회장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을 만난 날은 5월28일, 개교 10주년 기념식이 있는 날이었다. 현재 두 사람은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과 이사로 함께 일하고 있으며 이날 행사에는 학생들과 교수·임직원은 물론 동아방송예술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버클리음대, 중국 촨메이대학의 총장과 학장, 교수 등이 다수 참석했다. KBS 아나운서 출신인 장은영이사는 단정한 살구색 정장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사회를 담당했다.
학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장씨는 학교 업무와 관련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고 한다. 동아방송예술대의 영문 약자 DIMA(Donga Institute of Media · Arts)도 그가 만든 것이라고. 또한 교수나 교직원들이 학장과 이사장에게 직접 말하기 어려운 내용을 들어서 매끄럽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열리는 교직원 워크숍에도 빠지지 않고 남편인 최 이사장과 함께 참석해 직원들을 격려한다고.
“남편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먼저 집어내는 능력을 가졌어요”
두 사람의 인터뷰는 장은영 이사실에서 시작됐는데, 옆방 최원석 이사장실로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개교 10주년 행사를 마치고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최 이사장은 아내 장은영씨와 함께 취재진에게 와인 한 잔을 권하며 편안한 얼굴로 부부의 근황을 들려줬다. 마침 전날이 최 이사장의 생일이어서 인터뷰하던 중 학교 임직원들이 3단 케이크와 샴페인을 준비해 이사장실을 방문했는데 장은영씨는 남편과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케이크를 자른 뒤 “생일 축하 노래는 없는 건가요?” 하고 묻고는 바로 “Happy birthday to you”를 선창했다. 장씨에게 “선물을 따로 준비했냐”고 묻자 그는 “사실 이번에는 특별히 준비한 게 없다”며 웃었다. 하지만 남편의 입술에 묻은 와인을 닦아주고 와이셔츠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주는 모습에서 남편을 위하는 아내로서의 살뜰함이 느껴졌다.
10년 전 처음 신입생을 맞아 이듬해 교육인적자원부 방송특성화대학으로 선정된 동아방송예술대학은 지난 77년 최원석 회장의 아버지이자 동아그룹 창립자인 고 최준문 회장이 설립한 공산학원 재단 소속으로 실습 중심의 전문 방송인 교육기관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 방송사에 버금가는 종합스튜디오와 주조정실, HD카메라를 비롯한 각종 방송장비와 송출장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최신 디지털 장비는 방송사에서도 빌려갈 정도라고 한다.
최 이사장 부부에게 “학교가 아름답다”고 말을 건네자 장씨는 “남편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조경”이라고 들려줬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와 깊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가 극과 극인 사람이 바로 남편인 것 같아요. 말을 할 때 표현력이 부족해 오해를 사는 경우도 더러 있죠. 하지만 남편은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걸 보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에요. 저희 학교는 캠퍼스 규모는 5만 평이지만 학교 부지가 80만 평이 넘는데, 어느 날은 남편이 학교 뒷산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상수리나무(도토리나무)를 다 베라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직원들이나 저는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했죠. 전 남편한테 ‘도토리묵을 쒀먹어야 하는데 그걸 다 자르면 어떡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어요(웃음). 하지만 지금은 모두 다 잘한 일이라고 얘기해요. 상수리나무로 인해 고사 위기에 처했던 소나무들이 몇 년 뒤 위풍당당한 적송의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금전적 가치만 따져도 상당한 액수라고 들었어요. 남편의 선견지명이 학교의 자산을 불린 셈이죠.”
“재벌 회장이었을 때 누리지 못했던 보통사람의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그동안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채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를수록 둘 사이에 의리와 우정이 더욱 두터워지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장은영씨는 남편이 동아그룹 부도와 관련해 2004년 분식회계 등 혐의로 법정구속돼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지난해 남편이 미국에 있는 둘째 아들의 신장을 이식받았을 때도 남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수술 후 열흘 동안 무균실에 누워 있을 때 아내가 저를 위해 밤을 새우더군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저승사자가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리며 생사의 길목에서 사투를 벌였는데, 아내가 없었다면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입니다. 여전히 술을 즐기는 게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아버지에게 신장을 떼어준 둘째 아들은 현재 미국 시카고에서 한인 방송 앵커로 활동 중이다. 장씨는 둘째 아들에 대해 “현지에서 꽃미남 앵커로 통한다. 신장 기증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이 효자를 뒀다”며 아들 자랑을 했다. 그는 지난 2002년 딸 유정씨를 시집보내며 한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유정씨와 그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그가 KBS 아나운서로 재직 중이던 96년 동아건설 주최 국제행사를 진행하면서 당시 아나운서 지망생이던 유정씨를 만나 남편과 결혼하기 이전부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모두 제 몫을 다 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물론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식들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제가 섣불리 얘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죠. 저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100% 자연스럽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나이 차를 따져봐도 제가 자식들에게 큰누나뻘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런 데서 오는 어색함은 당연히 있죠.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보통 인연이 아니다 보니 어느 정도 인정해줄 건 인정해주자고 했어요. 처음부터 너무 호들갑스럽게 대하지 말고 남처럼 소홀히 대하지도 말고, 그저 좋은 시선으로 지켜봐주자고 그랬죠. 다행히 아이들 모두 참 쿨해요. 생각이 열려 있죠.”
폭풍우가 지나간 뒤 고요함이 찾아오듯 두 사람은 요즘 들어 누구보다도 평화로운 일상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흔들어놓던 많은 문제에서 해방돼 비로소 인생의 참 행복을 맛보고 있다고. 특히 최 이사장은 “무심(無心), 마음을 비우니 모든 세상사가 즐겁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즘 중절모를 쓰고 다니니까 대부분 저를 알아보지 못해요. 덕분에 백화점에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죠. 예전에는 양말 한 켤레도 남의 손을 빌려 사 신었는데, 요즘은 제 마음에 드는 옷을 직접 골라 입어요. 그룹 회장이었을 때는 누리지 못했던 소소한 재미를 느낀다고나 할까요. 이런 게 바로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어요.”
동아방송예술대학 홈페이지의 홍보 동영상을 보면 CF 마지막 화면에 장은영 이사가 출연해 눈길을 끄는데, 동영상 초반에 등장하는 ‘감독 최원석 이사장’이란 문구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최 이사장이 영화감독을 꿈꾸면서 학교 CF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많던 그는 시나리오를 많이 읽다 보니 감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평소 지인들에게 “내가 장남이라 기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 일을 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착이 큰 그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영화감독으로 나설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나운서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99년 결혼해 어느덧 8년차 주부가 된 장은영씨. 그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동안에는 옆도 뒤도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나이듦의 즐거움을 깨닫고 있다고. 그는 “20대보다 30대 후반인 지금이 훨씬 좋다”며 “다소 용기가 줄어들고 성격이 소심해지긴 했지만 그동안의 고통을 이겨내며 깨달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앞으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또한 요즘 그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지난 2003년 동아방송예술대 상임이사로 취임한 장은영씨는 교내 업무는 물론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외국 학교와의 교류에도 앞장서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말수 적은 남편과 가끔씩 DVD로 영화 함께 보며 이런저런 대화 나눠요”
“지난 어버이날에도 미국 LA에 계신 부모님에게 꽃다발 보내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어요.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죄송해요. 그동안 제 상황이 힘들다 보니 제대로 딸 노릇을 하지 못했거든요. 부모님도 아마 제가 결혼문제로 그렇게 속을 썩일 줄 모르셨을 거예요. 특히 엄마와의 얘기는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정도예요. 어머니는 기도가 생활화된 분이신데, 인품이 워낙 좋으셔서 제가 엄마의 반만 닮아도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면서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내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사람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미소지었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신앙의 깊이로 따지면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지만, 언제나 힘들 때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신 어머니가 있기에 그간의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1남2녀 중 늦둥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부모에 대한 애잔함이 더욱 큰 듯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그렇겠지만 엄마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려요. 그만큼 그동안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얘기일 거예요. 여자에게 결혼은 아내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얻는 것일 뿐, 다른 인간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닌데도 저는 그동안 너무 한 남자의 아내로만 지내왔어요. 이제는 부모님을 비롯해 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좀 더 살피려고 해요.”
결혼 전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을 휴학했던 그는 올해 다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10년 만의 복학이라 재입학을 했다는 그는 “학교에 다시 나가는 건 시작했던 일을 마무리짓고 싶은 것일 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부 모두 인생의 참 맛을 더 알아가면서 부부관계도 한결 편안해졌다고 한다. 서로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마음의 줄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놓아 느슨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 그는 “요즘에는 부부싸움도 거의 안 한다”면서 “남편이 집에 돌아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데 가장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라 저와 대화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집에서도 서재에 혼자 있을 때가 많고요. 가끔 DVD로 영화를 함께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요. 사실 영화를 보는 취향도 좀 다른데 남편은 휴머니즘에 관심이 많고, 저는 얼마 전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연애시대’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를 좋아해요.”
장은영씨에게 2세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남편 쪽 자녀가 셋이나 되고…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간혹 입양에 관한 기사를 관심있게 읽긴 하지만 아직 자신은 공개적으로 입양을 할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못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학교에 나란히 자리한 이사장실과 이사실에서 근무하면서 서로를 ‘옆방 사람’이라 부르며 동료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최원석·장은영 부부. 인간관계에 있어 넓이보다 깊이를 중시한다고 입을 모으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정의할 때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우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2007.7 여성동아)
장은영 KBS 전 아나운서가 10년 만에 KBS 1TV '열린음악회' 700회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17일 오후 8시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진행된 '열린음악회' 700회 특집방송 녹화에서 현 MC인 황수경 아나운서, 역대 MC 가운데 한 사람인 유인촌과 공동으로 진행을 맡은 장은영 전 아나운서는 지난 1997년 마지막 무대가 무색할 정도로 매끄러운 진행솜씨를 발휘했다.
장 아나운서는 이날 녹화장에서 황수경 아나운서, 유인촌과 환상의 호흡을 맞추며 기품있는 모습으로 성공적인 진행을 마쳤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그는 녹화에 앞서 취재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설레고 반갑다"며 700회 무대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KBS 1TV '열린음악회' 700회 특집에 진행자로 나선 장은영 전 아나운서
첫댓글 너무 길~다 .. 누가 해석 해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