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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고 엄격한 스승-다형 김현승 시인
이은봉
인생에는 운명이 결정되는 어떤 지점이 있다.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어떤 계기 말이다. 그런 계기는 실패가 만들기도 하지만 성공이 만들기도 한다. 내 삶에서는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성공이었을까.
재수를 하고도 대학입시에 떨어져 후기대학에 다니게 된 것도 그런 뜻의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후기대학에 다니면서 내게는 나를 달래고 부추길 만한 어떤 무엇이 필요했는데, 그 어떤 무엇이 시였다. 시를 써야지, 시를 공부해야지, 다형 김현승 시인이 교수로 있잖아, 그분한테 시를 배워야지, 그때 나는 자주 이렇게 나 자신을 격려하고는 했다.
어느새 대학교 2학년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시를 잘 쓰고 싶었다. 박목월 시인이 만드는 『심상』도, 문덕수 시인이 만드는 『시문학』도, 전봉건 시인이 만드는 『현대시학』도 구입해 읽었다. 다방에서는 커피 한 잔이 50원쯤 했고, 서점에서는 문예지 한 권이 120원쯤 했다. 커피 세 잔 값이면 문예지 한 권을 살 수 있었다. 열심히 이들 문예지를 사서 읽어도 시는 잘 써지지 않았다. 내가 쓰는 시는 늘 감정덩어리였다.
다형 김현승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그래야 시를 잘 쓸 수 있는데……. 선생님의 강의는 3학년 1학기 때부터나 들을 수 있었다. 3학년 1학기에 학생들을 위해 개설된 선생님의 강좌는 ‘시론’이었다. 나는 시간표를 조정해 ‘시론’ 과목을 청강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2학년이 3학년 강의를 듣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선배들은 내게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선생님의 ‘시론’ 강의를 청강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늘 학생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강의했다. 학생들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공부했다.
언제나 혼자인 선생님……. 선생님은 점심 식사를 하러 교수 식당에 갈 때도 바바리코트를 흩날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자서 휘적휘적 걸었다. 연구실을 나와 화장실에 갈 때도 선생님의 고개는 늘 바닥을 향해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선생님의 시 「플라타너스」를 떠올리고는 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나도 선생님한테 내 ‘꿈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도무지 내게 곁을 주지 않았다. 교정을 산책할 때도 선생님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씩이나 선생님의 주변을 서성였지만 눈인사조차 나누기가 힘들었다.
선생님은 본래 서울캠퍼스 소속의 교수였다. 하지만 서울캠퍼스에는 국어국문과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대전캠퍼스의 국어문과에 와 이틀 정도 시에 대한 강의를 했다. 대전캠퍼스의 선생님 연구실은 행정동의 1층에 있었다.
2학 초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쓴 시 몇 편을 들고 용감하게 연구실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연구실에는 책이 별로 많지 않았다. 조그만 전기스토브만 붉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나는 서너 편의 시를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보여드린 시를 아주 느릿느릿 읽었다. 한 20분쯤 되었을까. 선생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가 덜 되었네.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어. 시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네.”
읽던 시를 내게 돌려 준 뒤 선생님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자세였다. 주눅이 든 채 연구실 밖으로 나오며 나는 내게 거듭 되물었다. 시가 덜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고? 시가 들어 있기는 하다는 말은 또또 무슨 뜻이고? 그날 이후 이들 말은 내게 일종의 화두가 되었다. 나는 늘 이들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선생님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너무도 까칠하고 데데했다. 왜 시가 덜 되었는지 가르쳐주면 안 되나?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면 안 되나? 시가 들어 있기는 하다는 말도 자세히 풀어주면 안 되나?
나는 절대로 선생님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다. 선생님은 내게 반면교사였다. 시를 잘 써 무엇 하자는 거지? 좀 친절하면 안 되나? 나는 모든 존재들에게 항상 정성을 다할 거야. 무언가에 너무 깊이 몰두해 있는 선생님……, 나는 그런 선생님이 별로 존경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나는 빨리 알고 싶었다.
개강을 한 뒤부터 줄곧 청강을 했는데도 선생님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듯했다. 출석도 부르지 않아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칠 일도 없었다. 호불호가 분명한 분, 시인들에 대한 평가도 확실한 분……. 첫 시간에 선생님은 강좌의 제목이 ‘시학’이 아니라 ‘시론’인 까닭부터 설명했다. 서정시가 본래 주관적인 언어 예술 양식이므로 그에 대한 학술적 접근도 ‘시학’이 아니라 ‘시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선생님은 서정주 시인에 대해 매우 혹독하게 평가했다. 6·25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정주 시인이 거짓으로 미친 체했다고 생각했다. 공산군의 진군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그가 아주 못마땅한 듯했다.
선생님은 항상 학생들의 책상을 돌려놓고 의자에 앉아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점차 흥취를 보태며 목소리를 키워갔다. 급기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한바탕 광풍을 토해냈다. 한껏 고조된 강의는 차츰 평정을 되찾으며 낮고 작은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다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바닥에 내려뜨린 채 한동안 쉬었다.
박인환 시인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아주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박인환은 한갓 통속 시인이었다. 특히 그의 시 「목마와 숙녀」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혹독했다. “「목마와 숙녀」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이라는 구절 말이에요. 말 그대로 통속적인 구절이지요. 이 시에는 읽을 만한 구절이 딱 한 곳밖에 없어요. 나머지 구절은 다 통속적이지요. 딱 한 구절이 뭐냐?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바로 이 부분이에요. 이 부분의 비유는 에로틱하면서도 새롭고 신선하지요.”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문단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높이 평가하는 시인은 김기림, 정지용, 김수영, 신동엽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 불온한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25명 정도가 수강을 하는 ‘시론’ 시간 내내 나는 덩치가 큰 3학년 선배들 뒤에 숨어 지냈다. 고개를 숙이고 강의를 듣는 나를 선생님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5월도 중순이 넘어가자 여름 기운으로 교실 안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 교실이 텅 비어 있었다. 재수강을 하는 선배들만 두엇 교실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3학년 선배들 다 어디에 갔어요? 동춘당에 탁본 실습을 하러 갔는데, 좀 늦는 모양이야. 학교에서 멀리 않은 동춘당은 조선시대 거유(巨儒)인 송준길 선생의 고가(古家)였다. 아마도 박요순 교수님의 ‘고전시가론’ 시간인 듯싶었다. 박요순 교수님은 항상 현장학습을 소중히 여겼다.
선생님이 3학년 선배들보다 먼저 교실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하지만 시간이 되자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선생님은 교실의 문을 열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급기야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학생들 다 어디로 갔지? 재수강을 하는 한 선배가 대답했다. 동춘당에 탁본실습을 하러 갔는데 좀 늦는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누구지? 아, 네. 저는 재수강하는 학생입니다. 자네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놈, 너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자네는 뭐하는 놈이야? 뜻밖의 질문에 다급해져 겨우 한 마디 뱉었다. 2학년 학생인데, 선생님 강의가 듣고 싶어……. 뭐야! 2학년? 2학년 놈이 왜 3학년 수업시간에 들으러 와? 건방진 놈! 나가! 빨리 안 나가.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내가 버걱거리자 선생님은 슬리퍼를 벗어 던지며 고함을 쳤다.
슬리퍼, 자동차 타이어를 썰어 만든 낡은 슬리퍼……. 일단은 교실 밖으로 도망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겁에 실린 나는 책이며 노트를 챙겨 들고 얼른 뒷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선생님은 나머지 슬리퍼 한 짝을 치켜 든 채 앞문을 통해 복도까지 나를 쫓아 나왔다. 나머지 슬리퍼 한 짝까지 힘껏 내던지며 선생님은 내게 고함을 쳤다. “이런 건방진 놈!” 선생님의 말들이 뒤통수를 때리고는 와르르 귓가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선생님은 더욱 아득한 존재로 보였다. 지나치게 엄격하신 분……. 그래도 나는 다음 시간에 다시 또 선생님의 수업을 청강했다. 여전히 선생님은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고 강의를 했다.
대학 2학년의 봄 학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가을 학기에도 나는 선생님의 수업을 청강했다. 이번에는 선배들한테 억지로 떠밀려 청강을 해야 했다. 4학년을 위한 ‘시창작연습’ 과목이었는데, 수강 학생들이 모두 칠팔 명쯤 되었다. 수업은 학생들이 제출한 시를 중심으로 선생님의 촌평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촌평의 대상이 되는 시를 써 온 학생은 선생님 바로 앞에 나가 앉아 있어야 했다. 4학년 선배들 중에는 시를 써 오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 시가 자주 촌평의 대상이 되었다.
10월 초까지는 별 탈 없이 선생님의 촌평을 들을 수 있었다. 10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4학년 선배들이 교생 실습을 나가 수업에 참석한 학생이 서너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업에 참석한 학생이 워낙 적자 선생님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언뜻 나를 알아보자 선생님은 벌컥 화부터 냈다. 건방지게 2학년 놈이 4학년 수업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4학년이 되면 수업이 시시할 것 아니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선생님의 고함을 들으며 나는 다시 또 교실에서 추방되었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슬리퍼를 벗어 던지며 복도까지 나를 쫓아 나왔다.
10월 말이 되자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학내에는 선생님이 회갑을 맞아 시전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학과 사무실에서 선생님의 시전집을 팔아 나도 성큼 한 권을 구입했다. 지난 봄 학기에는 강의 노트를 정리해 『세계문예사조사』(고려출판사)를 출간했는데, 조교인 김기출 선배와 함께 나도 원고 정리를 도운 적이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갱지에 쓰여 있는 글을 원고지에 옮기는 작업이었다.
11월 초였다. 국어국문과의 학과장인 박요순 교수님이 선생님의 회갑연을 마련했다. 대전 시내에 있는 가톨릭문화회관 소강당이 회갑연의 장소였다. 회갑연은 국어국문과 학회지인 『숭전어문학』에 선생님의 시 세계를 조명하는 특집을 싣고 그것을 선생님께 봉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밖의 선물도 준비했는데, 학생들을 대표해 내가 그것을 선생님께 드렸다.
공식적인 의식이 끝나자 여흥 시간이 되었다. 제법 밤이 깊었는데, 박요순 교수님이 느닷없이 내게 축가를 부르라고 했다. 뜻밖의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배호의 노래 「마지막 잎새」를 불러 젖혔다. 가을밤의 분위기에도 잘 맞고, 선생님의 분위기에도 잘 맞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의 기도」 등 가을의 시를 많이 쓴 것이 선생님이 아닌가. 노래를 마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쳐대며 앙코르를 청했다. 이번에도 나는 배호의 노래인 「누가 울어」를 불러 젖혔다. 노래를 하면서 슬쩍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내 내 마음도 좀 누그러졌다.
학보사에서는 1973년부터 ‘다형문학상’의 원고를 모집했다. 선생님의 뒤를 이을 시인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서 특별히 만든 상이었다. 학보는 2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었는데, 다형문학상은 학보에 실린 시들을 대상으로 했다. 수상자는 연말에 결정되었고, 상금은 5만이었다.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7만 원 정도 했으니 다형문학상의 상금은 제법 큰 편이었다. 당시에는 신춘문예 상금도 그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내가 쓴 시도 학보에 실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1973년 연말을 나도 약간은 설렘으로 보냈다. 하지만 제1회 다형문학상은 학보사의 편집장으로 있던 영문과의 박만춘 선배가 받았다. 박만춘 선배의 수상작은 차고 시린 이미지가 돋보이는 정지용 풍의 서정시였다.
자취생인 주제에도 나는 꼬박꼬박 동아일보를 구독해 읽었다. 1974년 1월 초였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막 고조되던 참이었다.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김지하 시인이 동아일보 1면에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며 박정희의 유신독재의 온갖 만행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들 기사를 읽자 하루하루가 너무 무서웠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 ‘공포에 대한 단장’이라는 제목의 연작시 몇 편을 썼다. 그 중의 한 편이 학보에 실렸는데, 제목이 「귀 기울이고 들어봐」였다. 김지하의 시집 『황토』의 영향을 십분 받고 있는 시였다.
어느덧 1974년 연말이 왔다. 학보에 발표된 이 시가 제2회 다형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을 맨 처음 내게 들려준 사람은 연문희 교수였다. 처음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상금도 컸지만 다형문학상 심사는 학교 전체의 관심사였다. 금세 나는 재학생 전체가 650명쯤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대학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시상식은 다음 해 4․19 무렵 채플 시간에 강당에서 열린다고 했다.
인생에는 운명이 갈리는 어떤 지점이 있다.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어떤 계기 말이다. 다형문학상을 수상하지 않고서도 내가 계속해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긍정적인 체험이, 칭찬의 체험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당선작이 재수록된 학보에 선생님은 내게 시인이 다 되었다고 나대지 말고 착실히 실력부터 다지라고 썼다. 연구실로 찾아가자 그 자리에서도 좋은 시를 쓰려면 겸손해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그동안 온갖 구박을 다 받다가 이제 겨우 선생님의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선생님은 커피를 좋아했다. 자호(自號)해 다형(茶兄)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영화도 좋아했는데, 특히 이소룡이 출연하는 작품에 열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와 김기출 선배를 앞세워 시내로 향했다. 선생님의 가방을 들고 나는 주춤주춤 앞장을 섰다. 선생님은 홍명 상가에 있는 작은 호텔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사주었다. 그런 이후 두 분은 이소룡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 영화관에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다.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용기를 내어 서울 수색의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물론 내 손에는 몇 편의 시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수색의 국민 주택에 살았는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방이 서재였다. 코일이 붉게 빛나는 전기 곤로 위에 물을 끓여 선생님은 거피 한 잔을 타 주었다. 우유도 설탕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였다.
그해 겨울은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가 터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나는 아카데미 친구들과 함께 동아일보를 팔아 만든 돈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냈다. 1975년 3월 개학을 했지만 민주언론사건,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학교와 사회가 온통 뒤숭숭했다. 오랜 고민 끝에 휴학을 하기로 했다. 되도록 빨리 군역을 마칠 셈이었다. 자원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5월에 방위병으로 소집되는 판정을 받았다.
4월 11일 오후였다. 다형 선생님이 갑자기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 캠퍼스의 채플에서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덜컥, 가슴이 막혔다.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작년에 억지로 청강을 하지 않았다면 영영 선생님의 강의를 못 들었을 것 아닌가.
다음 날 나는 서둘러 서울 수색의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댁은 조문을 온 문인들로 초만원이었다. 한국 문단의 거물들이 다 모이는 듯싶었다. 서정주 선생이며 김동리 선생, 조연현 선생도 조문을 다녀갔다. 흰색 바지에 흰색 점퍼를 입은 키가 큰 이동주 시인이 흰색 고무신을 신고 성큼성큼 집 안을 오가며 장례를 챙겼다. 박봉우, 강태열, 조재훈, 이성부, 조태일, 김준태 시인 등도 그 자리에서 뵐 수 있었다.
밤이 되자 화톳불이 피워지고 집 안의 여기저기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좀 취한 박봉우 시인과 강태열 시인이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는 자꾸 말을 걸었다. 네가 다형 선생의 제자라는 말이지? 마음이 아프것지. 걱정 말그라 잉! 아, 여그 선배들이 있잖냐? 등단? 아, 우덜을 믿어! 우덜이 다 책임을 질팅게. 두 분 시인의 말은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했다. 책으로만 읽던 수많은 문인들을 이 자리에서 직접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장지는 모란 공원이었다. 많은 문인들과 함께 나도 버스를 타고 모란 공원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이문구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순태 선생이 자리를 바꾸자고 해 김준태 시인의 곁에 앉아 장지로 향했다. 「참깨를 털면서」의 시인 김준태! 나는 김준태 시인에게 무언가 자꾸 말을 걸었고, 김준태 시인은 겨우 몇 마디씩 대꾸를 했다. 그러는 동안 버스는 모란공원에 도착했다.
지금은 산역을 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멀리서 묘 자리를 바라보고 서 있던 이성부 시인의 모습, 성큼성큼 장지의 주변을 오가던 조태일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4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전교생이 다 모인 채플에서 이한빈 총장님이 내게 직접 다형문학상을 시상했다. 다형 선생님이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나는 제법 짓이 나 낭랑한 목소리로 당선시를 낭송했다.
선생님이 없이 혼자 시를 공부하자니 막막하기만 했다. 시간은 가는데, 아무리 쫓아가도 시는 자꾸 도망을 쳤다.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군부대로 출근을 하면서도 시에 대한 갈증은 끊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시인의 길은 요원했다. 선생님이 없으니 누구한테 시를 배운다는 말인가. 하는 수없이 나는 선생님이 주신 화두에 또다시 매달리기 시작했다. 시가 덜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고? 시가 들어 있기는 하다는 말은 또또 무슨 뜻이고?
수많은 시간을 나는 이들 화두에 매달려 보냈다. 시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내일의 ‘창’을 잃어버린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더러는 선생님의 시 「창」을 외우며 이들 화두를 되묻기도 했다. ((『현대시학』, 2014년 4월호 )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