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목 : 사회생활(6) / “네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 본문 : 창 세 기 4장 1절 - 15절 (구약성경 p.4)
+ 서로 사랑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 창세기 4장 1절 - 15절(구약성경 p.4)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함께 봉독할 이 말씀속에서 성령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멘!
함께 봉독한 말씀은 “네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병든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아주 비상식적이며,
있어서는 안 될 행동과 병든 감정이 만들어 내는 이런저런 사건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그 일로 삶의 기쁨과 용기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 자신이 그 병든 감정의 행위의 주역임에도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병든 감정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병든 감정은,
나 자신을 파괴하며, 우리로 하여금 더 큰 고통과 저주의 삶에 처하도록 만듭니다.
아담의 두 아들 중, 형 가인은 농사꾼이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형 가인에게 병든 감정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가인의 모습을,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고 기록합니다. 분노로 안색이 변한 가인은 자신의 병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 “네가 분하여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뇨?” 라고,
질문하심으로 지금 우리의 감정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새삼 살펴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우리 마음의 병든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 인간의 병든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감에서 만들어집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데서 분노하게 되었고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시했다는,
소외감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안색을 변하게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그 재산을 모두 팔아 가지고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굶어 죽게 될 지경이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그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첫째 아들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동생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진 것을 보고, 그는 분노하며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멘!(눅 15:29,30).
큰아들이 분노하여 원망한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의 소외감은 분노와 원망의 병든 감정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결코 어느 아들도 소외시키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1,32).
사랑의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죄인까지도 자기 목숨과 바꾸실 만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삼으신,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많은 서신을 통해서, 여러 말씀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2).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아멘! (롬 5:11).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게 하고, 또 그렇게 느끼도록,
감정을 조성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화목하기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면 그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소외시켰다는 잘못된 생각이, 병든 감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병든 감정은 소외감에서 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데서,
병든 감정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병든 감정을 치유 받으십시오. 그래서 병든 감정을 극복하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둘째로, 이런저런 우리 마음의 병든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병든 감정은, 선을 행함에 실패한 데서부터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고 반문하며 책망하셨습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못함이 문제요. 하나님께서 가인을 소외시키신 것이 아니라 가인에게,
문제가 있으며, 네가 낯을 들지 못하는 이유는 선을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선” 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린 가인의 예배는 선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인의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받을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식의 예배일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가 되지 못할 때는,
선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의도와 방식이 아무리 좋고 선하다고 스스로 생각되어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나의 의(義)와,
행동이 멋진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시각에서 선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선이 되지 못할 때,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비방하며 분노하여,
얼굴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이루면, 그곳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선은 거짓이요. 거짓된 선은 결국 병든 감정이 만들어집니다.
거짓된 선이 있는 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공허함이 찾아오고, 그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병든 감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한다면,
거기에는 즐거움과 만족이 있고,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참된 즐거움에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찾으십시오. 왜 분노하며,
안색이 변해야 하고, 낯을 들지 못하고 감추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한 삶을 살 때, 병든 감정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병든 감정이 치유되는 그곳에,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행복자의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셋째로, 이런저런 우리 마음의 병든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병든 감정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죄의 소원에서 만들어집니다.
가인은 자신이 비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에게 소외당하게 된 원인은, 동생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생 아벨만 없었다면 자신이 하나님에게, 소외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죄의 소원이 나타난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요구가 가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소원은 죄를 짓게 하는,
죄가 지배하는 강한 충동을 만듭니다. 이 충동은 가인으로 살인자가 되게 했습니다.
죄의 강한 소원은 분노와 같은 병든 감정을 만들고, 우리의 안색을 변하게 합니다.
죄의 근거인 잘못의 원인이 분명히, 가인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있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 있습니다.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희랍의 어느 도시에 경기에서 늘 우승하던 육상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국내 경기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며 공을 세웠기에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그와 맞먹는 훌륭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수는 경기 때마다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실의에 빠진 채,
경쟁 선수의 동상을 바라보다가 생각합니다. “맞어. 저 친구 때문에 내게 승리가,
돌아오지 않는 거야. 저 친구만 없애 버리면….“ 이런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그날 밤부터,
매일 동상을 찾아가 조금씩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이 쓰러지는 날,
네놈도 끝장이다. 네가 없으면 내가 승리자가 될 거야.“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우승자의 동상에다 대고 분풀이하던 그가 마침내 동상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동상이 그의 몸을 덮쳤고,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육상 경기에서 우승하지 못한 원인이, 자신의 경쟁 선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부족한 연습,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있었음을 알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의 원인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 죄의 무서운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아네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하고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고 뱀에 책임을 돌리면서 변명하였습니다.
죄의 소원은 이렇게 변명과 원망, 그리고 불만과 분노의 병든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잘못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다른 데로 돌려서 그 대상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분노하며 안색이 변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 심각한 잘못의 원인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죄의 소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아벨을 살인한 가인의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병든 감정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증오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형제입니까? 친구입니까? 누구입니까? 그러기에 분노하고 얼굴색이 변해 있습니까?
지금의 나의 현실에 대하여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모든 병든 감정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그곳에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이 생겨납니다.
소외감에서 자유하지 못한 가인은, 자신의 병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살인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이르지 못한 가인은, 선을 이루지 못함으로 병든 감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강렬한 소망 아래서 병든 감정의 노예가 된 가인은 동생을,
살인하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또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변명과 함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죄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이르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1~13).
여러분! 우리 시대의 어려운 환경과 힘든 삶은, 우리를 병든 감정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감정이 다 치유 받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이 바울이 주신 말씀대로 영적 풍요의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살전 5:16~23).
♥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