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요즘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 이제민 신부(사진/한상봉 기자) |
정식 학생이 아니기에 다른 동료 신학생들보다 먼저 군대에 가야 했는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다른 동료보다 2년 더 빨리 제대하였고 유학도 가게 되었다. 석사 논문으로 나는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다루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칼 라너의 추천을 받아 그의 제자 엘마 클링어 문하에서 학위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무신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인생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때 내가 무신론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다면, 다른 학생들처럼 아무런 고민 없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문교부에 등록되는 정식 학생이 되었다면, 학부를 마치고 군에 가게 되었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서 보니 지나간 모든 것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일들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은총이었다.
귀국하여 몇 년간 본당 신부로 있다가 광주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 기간은 내가 교회를 가까이서 느끼며 나의 신학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정양모 신부님, 서공석 신부님과 함께 교단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멍청해서 신학교를 떠날 때까지도 나의 신학교 떠남이 바티칸의 경고와 관련이 있는 줄을 몰랐다. 나중에야 그걸 알고 당시 교구장인 박정일 주교님께 서운함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그분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사라졌다. 그분의 신앙과 교회관이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될 뿐이었다.
신학교를 나온 나는 마산의 구암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하였는데, 이것이 신학교에서의 강의보다 더 직접적인 깨달음을 내게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학교에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2학년 학생에게 기초신학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것은 뒤에 알았다. 기초신학은 신학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다. 어느 정도 신학과 철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과목이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생을 갓 벗어난 그들을 마치 대학과정을 마치기나 한 학생들처럼 대했으니 그들이 내 수업을 소화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에게 나의 강의가 난해했으리라는 것은 말 안 해도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잘 따라 주었다.
본당에서 나는 예비신자와 일반신자 모두를 상대로 교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했다는 것은 그때까지 내가 복음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계속해서 신학교에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매일 반복하면서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건성으로 대했을 수도 있다. 나를 본당으로 불러준 그 사건을 은총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때 형님들이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겠습니까?”(창세 45장 참조)
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나의 강론의 주제는 늘 복음이었다. 성경을 대할 때 한 구절 한 구절을 복음에 근거하여 알아들으려고 애쓰며 읽었다. 나에게 성경은 한 권의 커다란 복음서가 되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가르침과 이야기와 사건의 근본에는 복음이 멍석처럼 깔려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가르침과 모든 이야기는 복음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풀이하는 예들이기도 하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 복음화되지 못했다. 내 몸을 복음을 느끼는 몸으로 만들지 못하고, 남을 하느님의 복음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교리를 하면서 끝없이 부끄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암 성당에서 교리한 내용을 나중에 두 권의 책(*<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으로 냈는데, 이 책은 복음을 소화하지 못한 나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성찰하며 쓴 책인 셈이다. 금년(2011년) 초에는 본당을 떠나 명례성지로 갔다. 이곳에서 나는 목요 복음화학교와 토요 복음화학교를 열었는데, 서로에게서 복음을 느끼고 서로에게 복음이 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나는 가끔씩 주변으로부터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는 나에 대한 올바른 평이 아니다. 내가 나를 평하자면 나는 골수 보수주의자이며 전통주의자다. 왜냐하면 나는 철저히 복음을 믿고, 철저히 신앙 언어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거기로부터 믿음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교회의 전통과 다르게 가르친다는 말도 가끔 듣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교회 전통은 무엇인가? 그들이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이 진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전통이라고 생각하는지, 지난 2천여 년 동안 교회가 고백해온 바가 그들이 전통의 이름으로 신앙하는 그 수준의 고백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도들도, 교회의 수많은 성인들도 그들이 생각하는 그 수준에서 천국이 있으며, 그런 식으로 하느님이 존재하시고,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고, 그런 식으로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믿었는지 묻고 싶다. 혹시나 어렸을 때 어쩌다 그들의 머리에 한번 입력된 지식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교회가 고백해온 전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변하였다. 베드로의 답은 옳았지만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와 달랐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질책까지 받았다.(마르 8,27-3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너의 말에 따라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천국은 없다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부활의 삶은 없다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동정녀 마리아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혹자에게는 나의 이 말이 천국과 하느님과 부활과 마리아의 동정을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을 외우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복음의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 맹신과 광신이 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우상처럼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그 원천에서부터 이해하도록 성찰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며, 우리를 참된 삶으로 안내한다. 믿음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믿음의 도리를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뜨겁게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광신자가 될 수 있고, 맹신자가 될 수 있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될 수 있고, 헛것을 믿는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걸림돌(사탄)이 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전통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2코린 11,1-11)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사도 18,4-6)
4. 복음-사고의 전환- 믿음
▲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 벨기에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1898-1967년)가 그린 파이프 그림은 유명하다.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화가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파이프 자체는 아니다. 사람들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파이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파이프가 그려진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 피카소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하루는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피카소를 알아보고는 “당신의 그림은 너무 난해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그에게 실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그 사람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이 실재 내 아내와 똑같은 모습” 이라고 설명한다. 피카소는 사진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는 말한다.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도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사진은 어디까지나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종이지 실제 부인이 아니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되 겉모양만이 아니라 마음을 읽고, 앞을 보면서 뒤도 표현하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모델>, 1932. |
- 피카소 그림 중에 ‘화가와 모델’이라는 그림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 그림은 피카소가 뜨개질을 하고 있는 모델을 그리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피카소와 모델 사이에 커다란 화판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림 속 화판에 그려진 그림은 복잡한 선들만 어지럽게 그려져 있을 뿐 전혀 모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피카소는 모델을 그리되 정지된 모습이 아니라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뜨개질을 하는 모델의 손과 실타래에서 풀려나는 실과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고정된 사고로 사물을 고정시켜놓고 바라볼 때가 많다. 피카소는 이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종이(교의)를 들고 다니면서 그것이 복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천국, 하느님, 예수님, 그리스도, 부활, 믿음, 교회 등에 대한 교의를 종이에 새겨놓고 종이를 절대 진리인 것처럼 받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복음을 깨닫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다.
복음에 근거할 때만 다음의 질문에 옳게(복음적으로) 답변할 수 있다. 나에게 하느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이며 인간은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이며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천국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며,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동정잉태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셨다. 이 질문을 깨우치려고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앵무새처럼 그분이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말만을 되뇌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깨우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믿어라” 하신다면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인가?
세상의 복음화는 “그분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말만 되뇌는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복음화는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을 알고 깨닫는데서 비롯한다. 우리 교회가 성직자 중심적이고 근본주의 경향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목적이지 않다면, 교회가 복음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5. 복음에 대한 성찰
나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복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복음은 우리가 이미 들은 적이 있어 다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화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복음화와 관련하여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면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지 드러난다. 복음화를 외치는 우리에게 복음화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복음화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바라셨을까? 그분에게 복음화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분에게 복음화된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복음화는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면 도대체 무엇을 선포하신 것인가? 나는 그 해답을 마르코 복음에서 얻는다. 마르코는 자기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마르 1,1) 예수님의 복음이란 두 가지 의미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복음이시라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예수님이 복음이심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무엇이며 마르코에게 어째서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 되셨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복음(1,14)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셨는데 하느님의 복음 또한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 전하신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복음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전하신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하느님이 복음이심을 전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복음은 무엇인가? 하느님이 전하신 복음은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 라는 말로서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는 예수님이 그리고 온 인류와 온 세상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에게 복음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암기하여 마음속에 저장했다가 고백의 이름으로 출력시킬 수 있는 내용물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을 걸고 깨달아야 할 진리다.
이를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왜 많고 많은 말(개념)들 중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로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천국이라는 단어와 함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술어에서 분명해진다. 세상은 천국을 이 세상을 떠나야 갈 수 있는 먼 나라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가까워 이 세상을 떠나서는 체험할 수 없는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행복과 기쁨과 영생은 힘든 세상을 외면하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으로 파고들어 갈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5-1. 사람(세상)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복음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바라보고 듣고 행하신 분이다. 그분은 당신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 자체로 복음임을 일깨워 주신다. 그분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존재(사람)에게 복음을 일깨워주시는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갈릴래아로 가셨다면, 이방인이 모여 사는 저 갈릴래아에도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든 사람, 수많은 병자, 유다인이 기피하는 이방인, 창녀, 세리 등 소외받은 자들에게로 다가가신다면 그들 안에도 하느님나라의 씨앗이 뿌려져 자라고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다. 이들을 복음으로 대하며 이들을 통해 복음을 깨우쳐주기 위해서다. 갈릴래아와 이들 소외받은 가난한 자들을 지나쳐서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하느님)에게는 우리가 그 자체로 복음이다.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한다. 이 믿음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인간은 진흙으로 빚어진 비천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되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존재가 되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한다. 그분의 복음에 따라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복음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한다.
그분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당신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내세우는 말씀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복음이심을 알리는 말씀이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당신처럼 세상에 복음이 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분처럼 복음이 되는 날, 우리도 그분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으로 여기며,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뜨겁게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세상에 복음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5-2. 복음과 사고의 전환
예수님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천국관을 180도 뒤집으셨다. 때문에 우리의 사고를 180도 전환하지 않고서는 그분의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천국(하느님 나라)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셨다면 습관적인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반성 없는 우리의 태도를 전환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복음과 믿음
믿음의 근본은 복음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난 저 먼 곳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믿는 것이다. 너무도 가까이 와 있기에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체험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험한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주시는 분이거나, 우리에게서 고통을 제거해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구유에도, 십자가에도,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을 이 세상 바깥 어딘가에서 찾는다. 하느님을 현실 바깥으로 밀어낸다. 복음에 근거하여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신앙하는가에 따라 맹신할 수도 광신할 수도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고 미신할 수도 있다. 천국과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헛된 망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마리아가 동정녀로 예수님을 잉태하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를 신화의 존재로 만들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마술사로 만들 수도 있다. 복음에 기인하지 않는 믿음은 다 맹신이요 광신이다. 우상숭배는 맹신과 광신에서 나온다.
많은 현대인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교회가 복음에 근거한 신앙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천국과 하느님, 동정 잉태 등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부정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이는 전적으로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는 그들의 비판을 예언적 표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한다고 냉담자다, 이단이다, 무신론자다, 비판하기 전에 자기의 신앙이 복음에 근거한 것인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에 근거하여 신론, 그리스도론, 인간론, 우주론 등을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교회는 자기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맹신하고 광신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듯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 아니라 복음에 근거하여 이 개념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현대인들이 부활과 동정잉태 등 신학의 주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어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개념들에 대한 재해석이 아니라 올바른 해석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재해석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능력이 없다. 이는 결국 믿음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찰의 바탕을 마련해 주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성찰 없이 믿음을 고백할 때 그것은 자칫 종이(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한 믿음 고백, 교리에 대한 믿음 고백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고백은 교의를 죽은 물건으로 만들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를 전설의 인간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신화의 존재로 만들 수 있다. 교의는 우리를 참 믿음으로 안내해야 하는데 성찰과 깨달음이 없는 신앙인에 의하여 죽은 교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믿음의 근본은 이 복음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믿어라.”고 하신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이 복음에 따르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바깥이 아닌, 말구유와 같고, 십자가와 같고,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여러 신들 중에 하나 하느님을 선택하여 믿거나, 내 행동이나 기도 여하에 따라 내게 복을 내리거나 벌을 주시는 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면서 병이 나왔다.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나수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일까?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에 기초하여서만 옳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복음’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그분이 복음이시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부활의 삶을 지금 살지 못할 수 있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면서 자기의 육신이 하느님의 거룩한 창조물이라는 것을 지나칠 수 있다.
동정 잉태를 믿는다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잉태를 믿는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믿는 것이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다.
이 믿음에 의하면 마리아만이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세상에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안의 하느님을 세상에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져 자라고 있다. 우리는 이 씨앗을 세상에 탄생시켜야 한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갈릴래아로 간다.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그곳에서 그분처럼 병자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잡고 일으켜 세운다. 그들을 복음으로 만나고 자기의 존재로 그들에게 복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통하여 자신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다.
믿음의 이동(기적에 대한 이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며 믿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고백 이면에는 예수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믿음만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따위의 기도도 그렇다. 그런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리라’ 하면서 열광적으로 믿음을 발한다.
예수님을 자기가 믿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에 대한 오해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이런 잘못된 믿음을 치유해주고자 하셨다. 병에서 낫고, 고통에서 해방되고,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로써 병에서 치유되는 기적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복음은 온 존재를 기쁘게 한다.
예수님 이전 우리는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도 어떤 대상으로 여기며 하늘 위에 상주하시는 분으로 믿었으나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계심(현존)을 믿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우리의 일상에, 우리가 앓는 병과 고통 중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믿게 되었고 죽음의 상황에도 생명의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앓는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며 고통 중에는 하느님이 현존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지만, 그분을 복음으로 만난 후에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행도 불행, 고통도 괴로움도 말구유도 십자가도 모두가 그분의 선물임을 믿게 되었다.
회개란 종전의 믿음에서 예수님의 믿음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예. 믿습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인류에게 이 믿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분은 이제 길을 나선다. 이방인에게로, 병자에게로..
맹신과 광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왜 회개하라고 하셨는지, 왜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는지 그 애타는 마음을 읽도록 해야 한다. 복음을 모르는 믿음은 맹신이 될 수 있고 광신이 될 수 있고 미신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큰소리로 고백하면서도 우상 숭배자가 될 수 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고 저절로 맹신과 광신, 미신과 우상숭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맹신과 광신과 미신과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교 안에 성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며,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하느님이 아니고,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주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8) 하고 잘못된 믿음을 나무라신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맹신을 탓하신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맹신과 광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아직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의 복음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를 맹신과 광신의 늪에서 구하기 위해서다. 회개 없는 믿음, 깨달음이 없는 믿음은 맹신과 광신으로 흐르기 쉽다.
5-3. 세상의 복음화 (그리스도교의 오만과 무지)
세상의 복음화란 세상이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복음화가 전개되는 것을 본다. 복음을 인류에게 깨치려고 하기보다 신자 수 불리기로 복음화를 오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나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채워진다고 복음화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승을 떠나 천국 갈 것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채워진 세상을 복음화한 세상이라 할 수 없다. 천국을 세상을 떠나야 갈 수 있는 나라로 믿는 한, 세상의 복음화는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 지금 우리 교회는 이런 모순에 빠져 있다.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외치면서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믿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천국, 부활 등 그리스도교의 교리들이 또한 오해를 받고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우리의 마음은 복음에 근거해서만 진실일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의 내용을 모른다면 아무리 큰 소리로 사도신경을 외워도 우리의 고백은 진실에서 거리가 멀 수 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그분께서 부활하시고 우리의 육신이 장차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맹신하고 광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급선무는 이런 고백을 하는 신자의 수를 늘이려는 노력에 앞서 복음을 깨우쳐 신자들을 맹신과 광신과 우상숭배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그들이 신앙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복음을 깨달아 복음화되어야 한다. 예수님 스스로 복음을 외치며 복음을 깨우치는 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셨고, 이를 통해 인류를 우상숭배로부터 구하고자 하셨으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복음으로 다가가게 하셨음을 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5-4. 교회 - 신앙의 공동체, 신앙인들의 공동체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다. 복음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며 복음을 따라 살게 해주는 공동체다. 교회는 동시에 신앙인들의 공동체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신앙하는 공동체다.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 신앙인들의 공동체로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여 세상이 자신을 복음으로 깨닫게 해주는 복음의 성사다. 교회인(종교인)이 먼저 복음을 깨닫고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불행하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니는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의 교회가 아닐 때가 많다. 교회는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7)
누구나 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주님” 부르며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불법을 일삼는 속이 엉큼한 사람도 그렇게 신앙을 고백할 줄 안다. 그러나 그 고백이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느님의 뜻은 복음에 근거하여 읽을 때 분명해진다. 하느님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모든 사람들 안에 스며들어 계신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하느님의 이 뜻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이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온 존재를 바치셨다. 예수님은 이를 당신의 온 삶과 십자가와 죽음으로 증거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애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복음화된 존재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이 나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교회는 복음화를 외치면서도 예수님의 복음과는 상관없이 펼쳐질 때가 많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어째서 복음인지, 예수님이 어째서 복음이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어째서 복음의 완성인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런 상항에서 신앙의 고백은 암기사항을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된다.
교회가 깨달음의 사명을 소홀히 할 때 교회는 맹신자와 광신자를 길러내는 요람이 되고 우상숭배자들의 집단이 될 것이다. 맹신의 집단에서는 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 달라, 건강하게 해 달라는 식의 이기적인 기도소리만 높아진다. 남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교회가 자기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종교가 이런 맹신과 광신의 집단이 된다면 누가 우리 사회에 믿음을 심어주겠는가.
마무리하는 말
다음은 지난 6월 초 광주교구 사제를 상대로 한 피정에서 한 말이다.
누구나 교회의 쇄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의 쇄신은 자기의 쇄신에서 비롯한다. 이런 면에서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에게만 쇄신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쇄신은 쇄신을 부르짖는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의 솔선수범에서 비롯하였고, 이를 나중에 성직자들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는 성직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평신도에게 쇄신을 요구하면서 그들 자신은 잘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쇄신은 평신도의 무지를 일깨우는 데서가 아니라 성직자의 부패와 관련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성직자가 부패했을 때 그들을 쇄신하게 한 것은 평신도였다. 교회의 쇄신은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이러한 신앙 감각을 수용할 때 그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
교회 쇄신을 바란다면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어야 한다. 평신도들이 어수룩하게 보이더라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를 기울이며 자기의 똑똑함을 반성해야 한다. 교회의 쇄신은 교회의 제도를 바꾸거나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겠다고 할 때 교회는 제도만을 강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고, 사목은 관리와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귀를 기울이며 인간의 느낌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들어오셨듯이 성직자들은 일반 신자들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느낌을 가지고 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 하나가 될 때 교회의 쇄신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애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이 썩어 없어지는 변화, 사라지는 변화를 일으키며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그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미사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을 성체로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할 때가 많다.
복음화를 위한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나의 신앙고백, 다의 발견, 우리신학연구소 참조.
* 명례 복음화학교 강의, www.rijemin.com 참조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구암천구교회와 반송천주교회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지금은 마산교구 명례성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교회-순결한 창녀', '하느님의 얼굴', '우리 아버지', '녹지 않는 소금',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사랑이 보일 때까지',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제3의인생-수동의 영성', '말은 시들지 않는다', '만남 속으로'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