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나 가위를 잘 쓰다가 날이 무뎌지거나 이가 나가면 어떻게 할까? 버린다, 새로 산다? 날을 간다! 배다리에서 대를 이어 칼과 톱 등을 만들어 팔고, 망가진 데를 고쳐주고, 날을 갈아주는 사람이 있다. 한창 젊은 나이인 25살에 시작해 37년째 가게를 꾸려오고 있는 전형만씨(62). 그는 아버지(고 전항용씨)한테 기술을 그대로 물려받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기술로 갖가지 공구를 만들고, 날을 벼린다. 전형만씨가 운영하는 가게는 그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해 70년째다. 칼을 만들고 톱에 이를 박고 수선해온 세월이 예사롭지 않다. 배다리에 있는 ‘덕성톱칼상회’에서 그를 만났다.
대를 이어 70년째
“저희 아버님 때부터니까, 70년 됐습니다. 한국전쟁 전부터 한 거죠. 길 건너편에서 가게를 시작했어요. 저는 25살 때, 1976년부터 가게를 했습니다. 올해로 37년째 하는 거죠. 아버지한테 가게도 물려받고 기술도 물려받은 거죠.”
“그 당시에는 길 양옆으로 다 상가였어요. 길 건너편이 장사가 잘 됐죠. 이쪽이 덜 됐어요. 철공소도 있었고, 물레방아, 물지게를 만드는 데도 있었어요. 가내 공업하는 사람들은 다 이쪽으로 와 있었어요. 동인천 쪽으로는 야채시장, 과일과게들이 많았어요. 중앙시장은 아주 컸죠, 인천에서는. 강화, 김포에서 물건 팔러 새벽같이 나왔습니다. 이쪽 줄에는 시골이나 인천에서 뭐든 사러 오면 다 이쪽으로 왔어요. '서울의 청계천'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없는 게 없었죠. 건어물, 과일과게가 많았어요. 은행이란 은행도 이쪽에 다 있었어요. 건너편에 경기은행, 서울은행, 국민은행, 기업은행… 지금은 다 빠져나갔죠. 동인천백화점 짓기 전 여기에 웨딩홀 있던 자리에는 ‘배다리슈퍼’라고 해서 인천에서 가장 큰 슈퍼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왔죠. 길 건너편 헌책방 골목에도 책방이 3,40군데가 있었죠.”
양쪽 라인에서 한쪽 라인으로 줄어드니까
딴데로 빠져나가고 뿔뿔이 흩어져
“조금조금 바뀐 게 아니라, 86아시안게임 하면서 제물포서부터 헐어내려오기 시작했고, 여기가 철교 있는 데가 마지막으로 헐렸어요. 88올림픽 때도 많이 달라졌죠. 그때부터 가게들이 많이 없어지고, 길 건너편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건너온 거고, 자연적으로 양쪽 라인으로 가게가 주욱 있다가 한쪽 라인으로 줄어드니까, 장사가 안 되고 덜 되기 시작했죠. 다들 딴데로 빠져나가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간석동, 구월동, 서울, 공단으로 나간 사람도 있어요. 크게 하던 사람들은 공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는 우리 집처럼 칼 톱을 만들고, 수선하는 데가 세 군데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현대와 우리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철물점은 많았죠. 대장간이니, 철물점 이런 건 아주 많았어요.”
나무로 짠 물통을 지게에 지고
공동수도로 물 길러 다녀
“저쪽 길로 양쪽 건물이 한쪽으로 헐고, 없어졌죠. 크게 바뀐 건 몇 가지 어요. 대나무 가게가 7~8군데 됐는데 옮겨지면서 없어지고, 두세 군데 있다가, 그나마 지금은 한 군데만 있습니다. 또 가구점, 목공소가 많았어요. 나무를 짠 물통을 지게에 지고 물을 길러 다니는 사람이 많을 때라 물통이며 지게도 많이 찾았어요. 또 양철로 만들어 공동수도로 가서 줄서서 받아왔죠. 그때 쓰던 거 다 만들어 팔았어요. 난로도 그렇고. 만들어 팔 가게 자리가 없어지니까, 가게가 확 줄어들었어요. 그나마 자본 있는 사람들은 길 건너 올 수 있었고, 자본이 없는 사람은 그만두고 빠져나갔죠. 가짓수도 줄어들었죠.”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한 번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사람이 50~100명 됐어요. 요새는 대여섯 명도 안 되죠. 가장 복잡한 때는 한 번 건너면 이쪽 저쪽 합해서 보통 100명은 됐습니다. 물건 사러 나오면 무조건 여기로 왔으니까요. 다 사러 다니는 사람들이죠.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었어요.”
큰칼을 갈고 있는 전형만씨. 칼날에 말라붙어 있던 청양고추액이 날리면서 연거푸 재채기와 기침을 하게 된다.
노점상들이 없어지니
시장도 조금씩 시들어
“지금은 길 건너편에 한복집이 많잖아요. 예전에는 그냥 다 옷가게였어요. 불이 한 번 났어요, 크게. 그 다음에 소방도로 키우면서 잡화점 다 없애버렸죠. 불이 나면 길이 복잡해 소방차가 못 다닌다고 해서요. 그러면서 노점상들이 없어지다보니, 시장도 조금씩 시들어가게 된 거죠. 일반 옷가게들이 많아야 손님들이 더 많이 올 텐데요. 여기도, 가구점이 들어오면서 거리가 죽기 시작한 거죠. 가구점이 있기 전에는 참으로 다양하게 가게들이 있었어요. 체육사, 만물사라고 해서 절 무당들이 쓰는 물건 파는 곳, 유리가게, 안경상, 평화사, 태양당… 등이 있었어요.”
“일반 직장에 취직해봤다가 너무 적성에도 안 맞고,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그렇고, 차라리 남의 간섭 안 받는 일이니까 시작하게 됐습니다. 25살 때 이 일을 시작했지만, 원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어려서부터 관심있게 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틈틈이 만졌죠. 처음 시작할 때는 다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맨 처음에 톱 만드는 걸 배웠어요. 톱 만드는 기계에 무쇠판을 똑바로 잘라서, 이빨을 찍어요. 옛날에는 목수들이 많이 왔어요. 벽 바르는 흙손, 흙칼 등등을 직접 만들어 팔았어요. 타일 붙이는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여기에 있는 물건 다 만든 겁니다. 여기서 수리, 제작 다 하는 거죠. 지금은 자동화가 돼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나오지만, 옛날에는 수동으로 다 만들었죠.”
톱을 만들기 위해 무쇠판에 금을 그어 자른다.
자른 무쇠판에 톱니를 박고 있다.
톱니가 일정하게 박혀 있는 모습.
숭례문 복구 때 톱 만들어
톱니 간격 조절 다양하게 할 수 있어
“그 당시에 했던 사람들이 다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시거나 일손을 놓았죠. 젊은 사람들은 일반 마트나 철물점에서 사서 쓰잖아요. 한 번씩 쓰다가 망가지면 고칠 생각도 안 하고, 칼을 갈 생각도 안 하고 그냥 1회용으로 쓰고 버리잖아요. 시골에서 큰 나무 자르는 톱은 나오는 데가 없으니까, 지금도 일부러 주문하거나 만들어갑니다. 요번에 남대문 화재사건 때 복구했잖아요. 거기서 쓰는 톱을 내가 직접 만들었어요. 박물관에 있던 톱을 가져오더니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알았는지 수소문해서 찾아왔데요. 만드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렸어요.”
“여기서는 쇠를 녹이지는 않아요. ‘철판’ 자체가 만들어져 나와요. 그걸 절단해서 가공하는 거죠. 톱을 만들 때 이빨 간격은 조절할 수 있어요. 이렇게 채칼 같은 것도 다 직접 만들어요. 이빨을 다 만들어서 박으면, 칼로 썬 것처럼 나오죠. 가정에서 쓰는 것, 식당에서 쓰는 것, 쓰임새에 따라 만드는 게 다 다르죠.”
요즘 사람들 ‘갈아 쓰는 것’을 몰라
칼, 가위 한 번도 갈지 않은 사람 수두룩
칼날이나 칼등이나 똑같아
“IMF 전까지만 해도 손님이 밀려 있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 고쳐 쓰고, 알뜰하게 칼날도 갈아서 썼어요.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은 칼 같은 것도 마트에서 사서 한 번 갈아 쓰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칼은 처음 살 때 날이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새 거니까 잘 드는 줄 알죠. 새 칼은 날이 거의 없어요. 모르니까, 모르고 쓰는 거죠. 새 거니까 잘 드는 거구나 생각하고 씁니다. 그렇게 보름 정도 쓰면 전혀 안 드는데도 그걸 그냥 쓰고, 안 들면 잘못 샀다고 생각해서 다시 새로 사서 쓰고. 물건에 대해 제대로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여길 알아서 가져오게 되죠. 칼 보면, 한 번도 안 갈았더라구요. 갈아 주면, 칼이 이렇게 잘 드는구나 하고 놀라죠. 그 다음부터 제대로 잘 드는 걸 아니까 날이 무뎌지거나 망가지면 끝까지 찾아오는 거죠. 뭣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알아야 면장을 하는 거죠. ‘가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칼 가위 갑니다’ 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들 많이 봤죠?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전거 끌고 다니면서 칼 가위 갈아줬잖아요. 이제 그 분들은 나이 먹어 돌아가시거나 일을 못하게 됐어요. IMF 때 칼 가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진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어떻게 가냐고 물어봤어요. 사실 그 사람들이 엉망으로 갈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신이 숫돌에 간 거나 마찬가지니까 갈지 않게 된 거죠.”
칼을 갈러 온 손님이 기다리는 동안 물건을 살펴보고 있다.
“예전에는 칼 갈러 오는 사람도 많고 고치러 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요샌 가위로 다 잘라 먹잖아요. 시세가 그러니까 뭐라고 하겠어요. 김치니 파, 음식을 다 가위로 자르데요. 손에 묻히기 싫어서도 그렇겠지만, 일단은 칼을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칼질은 자꾸 해야 느는데, 안 하니까 늘지 않죠. 게다가 칼도 안 드니까 잘 안 쓰게 되는 거죠. 칼 갈러 오는 거 보면요, 이거 언제 갈았나 싶어요. 언제 샀냐고 물어보면 3년 됐다, 5년 됐다 그래요. 칼등이나 칼날이나 똑같아요, 참. 예전 사람들은 항아리뚜껑에다가도 갈았어요. 집집마다 항아리가 있으니까 급하면 거기가 갈았지만, 지금은 항아리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연세 있는 분들이 있으면 아파트라도 항아리가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있던 항아리도 죄 갖다 버리잖아요.”
칼 자루도 붙여주고
이빨 빠진 것도 고쳐주고
“몇 십 년 동안 몸에 밴 거니까 힘든 건 없어요. 해오던 일이니까 힘든 건 없어요. 단지 옛날보다 장사가 안 되니까, 그게 힘든 거죠. 딴 건 없어요. 사람들이 쓰던 칼을 버리지 않고 고쳐 썼으면 좋겠어요. 요샌 식당 같은 데서 많이 와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분식 전부 그 사람들은 칼을 쓰니까, 칼을 수선도 하고 자루도 고치러 오죠. 자루도 다 붙여주고 이빨 빠진 것도 고쳐주죠. 오래 쓰다 보면 꺼떡거리거나, 삭거나, 부서지잖아요. 다 수리가 됩니다. 주로 칼이 많이 오는 편이죠. 미장이, 타일공, 벽돌 바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오고, 정육점 같은 데서도 많이 와요. 정육점에서 뼈 자르는 골절기, 톱날 이런 거 사러 오죠.”
“한식 칼날, 중식 칼날, 양식 칼날, 일식 칼날이 다 달라요. 칼 폭, 크기, 길이, 넓이 이런 게 다 다르죠. 용도에 따라 주문이 오면 만들어 줍니다. 가위 같은 것도 한복집, 양장점, 양복점, 천막사 이런 데서 쓰는 게 다 달라요. 재단가위가 다 다르죠. 병원에서 쓰는 수술가위도 고쳐달라고 많이 와요. '대장간집에 칼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아요.(웃음) 한 번 갈면 오래 쓰니까, 집에서 쓰는 게 잘 들죠. 안 들면 한 번 나왔다가 하나씩 갖다 써요, 그냥.(웃음)”
김장하기 직전에 칼 갈러 와
이사 간 분들은 1년에 한 번 몰아서 가져오기도
“몰라서 못 오는 사람도 많죠. 지금 5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아는데, 그 밑에 사람은 잘 몰라요. 이 동네가 전같지 않고 낙후돼서. 예전에는 나올 데가 동인천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갈 데가 많잖아요. 동인천백화점이 잘 될 때는 사람이 많았죠. 지금은 지역 지역으로 분산되다보니, 올 기회가 아예 없는 거죠. 일단 유명한 데가 있어야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많이 다녀야, 보고서 저기 뭐가 있구나 하잖아요. 칼 가는 데가 있구나, 가위 가는 데가 있구나, 만드는 데가 있구나 하죠. 70,80살 된 분들이 지금도 찾아와요. 서울로 이사 가도 1년에 한 번씩 한꺼번에 많이 가져 와요. 수원으로 이사 간 분도 찾아오죠. 왜냐면 가정에서 7,8자루 쓰니까 한 번 와서 갈아 가면 1년은 쓰거든요. 김장하기 직전에 한 번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노인분들은 정정하신 분들은 직접 오시고, 활동 못하는 분들은 자녀분들한테 거기 가면 있다고 하면서 시키기도 하죠.”
가게 안에는 갖가지 기계와 공구들이 가득 차 있다.
“예전에는 주로 목수 분들이 많이 오셨죠. 벽돌 쌓는 분들도 많이 오셨죠. 그 당시는 하루 종일 톱만 잔뜩 밀려서 정신없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밥 먹을 시간도 빠듯했죠. 계속 만드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톱을 참 잘 만드셨어요. 나는 칼을 만들어요. 자루는 다른 데서 가져와요. 겉목이라고 해서 모양을 먼저 떼어냈다가, 2단계에서는 절단해서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3단계에서는 갈면서 모양을 만듭니다. 우리 가게에는 타일공구, 미장공구, 목공구, 조각도, 일반공구 등이 있죠. 칼 종류는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칼이 다 있습니다. 전문입니다.”
“버스 노선이 많이 없어졌어요. 옛날에는 다 여기로 통해서 다녔는데, 지금은 연수동에서 나오게 되면 직접 오는 게 없으니까 불편해요. 몇 번 갈아타게 되니까 안 나오는 거죠. 유명한 데가 많이 있으면 좀 나오겠죠. 이 길로 쭈욱 가면 양철로 하는 닥트, 대장간이 아직도 세 군데 있죠. 그런 델 다 연결시키면 사람들이 좀 나올지도 모르죠.”
인터뷰를 하는데,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칼을 갈러 왔다. 아저씨는 기계를 켜고 날을 갈기 시작한다. 빨간 불꽃이 튀면서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잠시 후, 가게 안이 매워진다. 기침과 재채기가 터져나온다. 칼 갈던 주인장이 손님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청양고추 자르셨죠!(웃음)” “청양고추 총총 다졌어요.(웃음)” 주인장이 또 말한다. “돼지고기도 자르셨죠!” “돼지뼈 잘랐어요.(웃음)” 잠시후, 칼과 가위를 갈아달라고 맡겼던 사람이 찾으러 왔다. 주인장은 손님에게 설명한다. “가위는 날 빼고 위쪽으로 녹이 많이 슬었으니까 사포로 닦으세요. 그리고 민물로 닦아내고, 마른수건으로 닦으세요. 쓸 때마다 그러면 깨끗하게 쓸 수 있습니다.”
청양고추액이 말라붙어 있다가
칼날이 갈리면서 취류가루처럼 날려
“청양고추를 썰고서 깨끗하게 닦지 않으신 겁니다. 청양고추액이 칼에 말라 있다가 갈리면서 가루가 취류가루처럼 날리는 거죠. 마늘, 양파도 비슷합니다. 청양고추가 가장 맵죠. 저 손님은 순댓국집을 하시니까 돼지머리와 뼈를 많이 자릅니다. 가정집에서 쓰는 칼과 가위를 보면 위생적으로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관리를 안 하면 녹이 나거든요. 녹이 나면 사포질 하고, 물기 닦고 기름칠 하면 되거든요. 아주 간단한데 관리할 줄 몰라서 그럽니다. 재봉기름이 없으면 식용유라고 바르면 되거든요. 무쇠는 원래 간 자리에 녹이 가거든요. 언제나 쓰면 민물로 닦고, 물기 닦고, 기름칠을 하면 돼요. 옛날에 무쇠칼을 많이 쓰시던 분들은 관리를 참 잘했습니다.”
‘덕성톱칼상회’에서 ‘무쇠창칼’을 5천원 주고 하나 샀다. 크기가 작아서 이모저모 다양하게 쓰인다고 한다. 특히 나물 캐러 다닐 때, 배추나 채소 엇빗길 때, 밤 깎을 때 등 꽤 쓸모가 있단다. 다음에는 집에 있는 칼, 가위를 싸가지고 와 말끔하게 고치고 갈아야겠다. 신문지로 돌돌 싼 작은 무쇠칼을 들고나오면서 마음 한켠이 차분하고 편안하고,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