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정 조리명장
경희대학교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지배인 과정을 수료한 이 부장은 이어 초당대학교 조리과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청운대학교 외식산업학과 4학기 과정을 남겨놓고 있다.
재미있게도 재학 중인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이 부장은 2년 째 청운대학교 호텔, 식당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8년 동안 한림정보산업대학 전통조리과 겸임 교수로도 활동해왔다.
현재 이 부장은 한국총주방장(Les Toques Blanches) 모임과 미식가협회의 회원이며 한국조리사중앙회 감사는 물론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한국 특 1급 호텔 조리부장 모임(KCC) 부회장 및 레스토랑 심사위원(서울 관광협회 위촉)을 역임하고 있다.
중학교 졸업 후 상경, 서울 충무로 삼호그릴에서 조리사와 인연 맺어
충청북도 보은이 고향인 이 부장은 지난 68년,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당시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삼호그릴에서 양식 조리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명동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호텔로 자리를 옮긴 이 부장은 해병대에 지원해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 이후인 73년까지 이 곳에서 근무하며 양식 조리에 대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 늘 몸이 약해서 걱정이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마라톤 선수를 할 만큼 날쌔고 체력도 좋았는데 막상 군 입대를 앞두고 나니 몸이 너무 허약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합기도와 태권도, 화랑도를 하며 체력을 단련했고 해병대도 무사히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허약한 체질에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조리사가 고되고 힘들었던탓에 코스모폴리탄 호텔에 오기까지 자리를 옮겨 다니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이 부장은 타고난 인내와 끈기로 결국 스스로 체력을 단련해 해병대까지 제대할수 있었다.
이후 1976년, 프라자호텔 콜 키친에 입사한 이 부장은 본격적으로 호텔 조리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프라자호텔에서 1년 가량의 양식 조리사 경력을 쌓은 이 부장은 곧 이어 그랜드 하얏트호텔의 오픈 멤버로 입사했으며 입사한 지 2년 만에 블란서 레스토랑 Hugo의 조리 책임자가 되는 등 눈에 띠는 출세가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10년가량 근무하며 비로소 호텔 조리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이 부장은 이후 1년 동안 뉴월드 호텔 블란서 레스토랑 책임자를 맡아 근무했으며 87년 스위스그랜드호텔의 오픈 멤버이자 조리부장을 역임하고 94년엔 리츠칼튼 호텔의 오픈 멤버이자 조리부장을 맡게 되었다.
잘하고 싶다면 온 몸으로 부딪혀라
곱상한 외모에서 풍기는 이례적인 느낌, 뭐랄까? 험악하고 어려운 초창기 조리사의 길에서 조차 이 부장은 열외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기박히게도 운이 좋거나 대단한 천재가 아닌 이상 노력없인 어떠한 성과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자기 앞에 닥친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막 상경한 이부장은 바쁜 조리사 생활을 쪼개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94년 경희대학교 호텔 조리학과를 졸업한데 이어 이듬해엔 경희대학교 지배인 과정을 수료하고 98년엔 초당대학교 조리과학과를 졸업했다.
또 이 부장은 현재 2년 째 겸임교수(호텔, 조리식당 경영학과)로 활동하고 있는 청운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외식산업학과 3학기 과정까지 마쳤다.
1994년 스위스그랜드호텔 오픈 멤버로 입사하며 호텔 조리사로서 정상 궤도에 오른 이 부장은 그 동안 미뤄왔던, 또는 적정할 때라고 판단하고 계획했던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달린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장이 그동안 단 한번의 낙오도 없이 인터네셔널 호텔의 오픈멤버이자 책임자로 선임되었던 데는 이 시기 이전부터 실천적인 자기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 인터네셔널 호텔이라면 어디에 가든 1순위 필수조건으로 영어회화를 꼽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어에 대해 서툴러 영어회화를 구사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나 자유로운 영어회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는 인터네셔널 호텔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는걸 깨달았죠. 이러한 이유로 한 달 동안 영어회화 학원을 다닌 후 곧장 이태원 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예 거주지를 이태원으로 옮겨 3년 간 생활한 이 부장은 퇴근하는 대로 외국인들과 만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영어회화 능력을 키워나갔고 출,퇴근길에도 카세트를 통해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는 등 영어로 생활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해 왔다.
처음으로 입사한 인터네셔널 호텔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이처럼 이태원행을 결심한 이부장은 이때 얻은 경험과 습관, 영어회화 능력을 지금까지도 간직해 카세트와 영어회화 테이프를 늘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교수로 활동, 내노라하는 제자 양성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 개발 노력을 통해 실력을 쌓아온 이 부장은 현재 재학 중인 청운대학교에서 호텔, 조리식당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2년째 강의를 맡고 있으며 지난 8년간은 한림정보산업대학 전통조리과 겸임교수로 활동해 왔다.
그 사이 그의 제자였던 조리사들은 국내 특급호텔 조리사가 되었거나 또는 교수가 되기도 했다. 나영선, 채영철, 오석태 교수등이 바로 그의 제자이다.
"어려웠던 시절의 상투적인 조언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주경야독을 몸에 배이도록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실력을 인정 받고 앞선 조리사가 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라는 충고였죠"
또한 이 부장은 전국 대학긔 조리관련 학과에서 특강을 요청하면 과거의 조리사와 현재의 조리사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요구가 어떻게 다른지 심도있게 강의하곤 했다.
" 사회적인 인식이나 조리사 스스로 역시 기능인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것이 과거 조리사의 위상이었다면 현재의 조리사는 자기가 속한 조리분야에 있어 완벽한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조리사의 집약된 조건은 바로 자기개발을 통해 전문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죠. "
지난 35년 동안 세계화 흐름의 가장 발빠른 중심부 역할을 했던 인터네셔널 호텔들에서 쌓은 현장 경험을 통해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조리사의 위상과 자질을 스스로 터득한 것.
특히 이 부장은 이를 위해 가능한 해외연수를 많이 다녀오라고 권유한다. 인터네셔널 호텔의 강점으로 그 역시 해외연수의 기회가 많았고 직접 다녀온 이후에 크게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위스그랜드호텔에 근무할 당시, 이병우, 홍갑진, 최수근, 김성현 씨 등 총 8명이 15일간 유럽 여행에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를 모두 돌아보기 위해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추억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요리연구회의 창립멤버들이 의기투합해 다녀온 유럽여행에서 이 부장 일행은 현지의 음식을 시식하기 위해 최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지만, 정작 나머지 식사는 커피숍에 들러 눈치를 살피며 뜨거운 물을 얻어와 라면등으로 해결하는 등 잊지못할 에피소드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92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요리경연대회 국가대표팀장으로 출전, 3개 메달 휩쓸어
스스로를 단련하고 개발하기 위해 자신에게 철저했던 이 부장은 국내외에서 열린 각종 요리경연대회의 우승을 휩쓸기도 했다.
1991년 제 1회 서울인터살롱 요리경연대회에서 금상과 은상을 수상한 이 부장은 이듬 해 4월에 개최된 제 8회 FHA 국제살롱 요리경연대회에서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같은 해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세계요리경연대회에 국가대표팀 팀장으로 출전해 은 2, 동 1등 모두 3개의 메달을 따냈다.
이 중 '92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요리경연대회에서 올린 이 부장의 쾌거는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 겨우 2번 째 출전한 신참국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그 해 조리계의 큰 경사이자 사회적인 빅 뉴스로 떠올랐다.
더구나 캐나다, 미국, 싱가포르 등 요리 선진국들을 포함해 31개국 700여명의 국가 대표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당시 세계요리 경연대회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휴가까지 반납하며 4개월간 대회를 준비했으며 국가적으로도 지지와 환영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출전해 이 부장의 수상은 더욱 눈물겨운 성과물로 기억되었다.
'메달을 거의 싹쓸이한 캐나다팀은 지원요원을 포함, 200여명이 후원사가 내준 전세기를 타고 왔지만 우리는 재료비는 물론 항공료까지 각자 부담해야 했다. 개최국인 독일과 캐나다, 일본 등은 TV로 위성 중계까지 했지만 우리팀 주위에는 특파원들은 물론 동포들의 얼굴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노 메달에 그친 북한보다도 오히려 초라했다. 20명이 참가한 북한은 3개월 전부터 프랑스 등지를 돌며 전지훈련까지 했다는데.... '
1992년 10월, 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요리경연대회를 보도한 스포츠조선은 "한국인 손맛 세계에 떨쳤어요"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같이 보도하고 "요리사들이 국내에서 그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요리분야 역시 과도기라고 봅니다. 얼마 안가 외국처럼 요리사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추앙 받는 시대가 오겠지요."라고 이 부장의 멘트를 인용해 소개했다.
JW 메리어트호텔 이상정 부장이 '92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요리경연대회 국가대표 팀장으로 출전해 매우 이례적인 쾌거를 올린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대회를 치르고 돌아온 이 부장의 심정은 서로 다른 두가지로 묘하게 얽혀 있지 않았을까? 대회에 출전하는 당일까지도 모른척 하다가 막상 그냥 넘어가기 힘든 상을 3개 씩이나 받아오니 뒤늦게 나마 어스레를 떠는 자 국민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서 우승해 실력을 인정받은 데 대한 자부심.
섭섭함과 흐뭇함, 어느 쪽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이 부장이 당시 인터뷰를 통해 점쳤던 것처럼 우리나라 조리사들의 위상이 비약적으로 승격되었고 이를 위해 그가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