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브롱스에 사는 흑인 소년과 백인 작가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23세에 이미 최고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지만 그 이후 작품을 쓰지 않고 오래된 아파트에 칩거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망원경으로 주위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고 소년도 그 관찰 대상이 된다. 그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길거리 농구장에 흑인 소년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부분적으로 감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흑인 소년이 백인 소녀와 둘만이 같이 있을 때, 소녀의 아버지가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아주 당연하다. 그는 학교의 이사장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인이 주인인 사회에서 백인이 감시자의 역할까지 다 떠맡고 있다면 그곳은 정말 숨막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형인 흑인이 주차장 관리인을 맡는 등 조금은 숨통이 열려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형에게 부분적으로 감시자의 역할이 맡겨졌다고 볼 수도 있다. 주인공인 자말의 아버지는 이혼한 뒤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형이 나중에 동생의 방에 들어와서 방 좀 청소하고 지내라 라는 말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그는 동네의 괴짜 아저씨가 사는 집에 몰래 들어간다. 그 아저씨가 던지는 시선을 소년들은 의식한다. 동성애의 시선일 수도 있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시선에 아이들은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들은 자말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 집에 들어가 무엇인가 들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눈에 띄는 칼을 가방에 넣어둔다. 주인의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나머지 그는 그만 가방을 그 집에 놓고 나온다. 가방 속에는 그의 습작노트가 들어있었다. 방의 주인인 윌리암 포레스트는 그 노트를 읽어본 뒤 수정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가방을 소년에게 돌려준다. 그러면서 자말은 윌리암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윌리암과의 우정을 통해 훌륭한 작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상징의 통속적인 활용에 주목해보자. 그럴 경우 가방은 여성의 상징이 되고 칼은 남성의 상징이 된다. 가방을 메고 들어온 자말은 여자의 자리에 있는 셈이다. 마치 윌리암에게 일용품을 사다주며 일상생활의 잔일을 처리해주는 남자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 가방이 윌리암의 집인 아파트라면 칼은 그 집에 들어온 불청객인 자말이다. 그리고 자말이 메고 온 가방은 윌리암의 집과 연결된다.
윌리암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가방 속에는 칼과 습작노트가 들어있다. 가방 속의 습작노트와 칼은 앞으로 전개될 윌리암과 자말의 공생관계를 암시한다. 서로 상대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자말이 가방을 되돌려 받고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만들어진 다음에도 이런 도식적인 설명은 가능하다. 윌리암의 집이 가방인 셈이다. 집주인인 윌리암은 이제 수동적인 역할을 맡게된다. 그리고 능동적인 역할이 주어진 인물은 오히려 자말이다. 자말이 윌리암을 현실로 돌아오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말이 현실에서 좌절한다.
이때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윌리암은 그를 능동적으로 도와준다. 윌리암과 자말은 이와 같은 탄력적이며 유동적인 역할교환을 통해 비로소 흑인과 백인, 성인과 소년, 작가와 독자의 폐쇄적 회로의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자말이 현실에서 좌절하는 것은 학교의 문학 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자말의 진로와 운명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쥔 것처럼 되어있다. 재미있는 점은 농구선수의 자격으로 학교의 장학금을 받고 있는 자말이 좌절하는 이유가 이런 권위적/남성적인 존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대화/상호작용적 관계의 발전에 주목하는 윌리암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거리의 농구장으로 돌아온 자말이 옛날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면서 끝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제 관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들을 지켜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관객들조차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처음에 보아서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이 나오자, 관심이 풀린 상태에서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만다.)영화가 시작하면서 윌리암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그리고 윌리암과 자말 사이에 벌어졌던 발전의 관계처럼 영화관을 떠난 관객은 마침내 윌리암의 자리에 들어갈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제 그는 윌리암이 차지하고 있었던 빈자리에 들어가 농구장의 그 흑인소년들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은 이제 영화의 이야기를 다 알게되었다. 제한적이지만 그는 전지적인 작가처럼 전지적인 시각을 확보한 셈이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대작을 발표하고 침묵한 작가가 말년에 가서 비로소 겪게 되었던 역할교환의 유동적인 움직임에 관객 또한 이제 몸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영화의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 발전한 그는 영화에서 벌어진 사건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영화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윌리암처럼 자전거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화에 감동하며 영화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집착할 때 관객은 젊은 윌리암에게 다가왔던 간호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윌리암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던 형이 갑작스레 사고로 죽게된다. 그런데 병원의 간호사는 그 죽은 사람한테는 아주 무관심한 상태에서 유명한 작가인 윌리암과 그의 소설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이 사실에 환멸을 느낀 윌리암은 그 이후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소위 감동적인 영화나 문학작품에 대해 관객 또는 독자가 갖기 쉬운 수동적인 모방의 태도는 영화에서 언급된 간호사의 실수를 계속 반복하도록 만들 것이다.
파인딩 포레스터은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2000년 12월 22일-136분국가미국의 기 미국-영어《파인딩 포레스터》(영어: Finding Forrester)는 2000년 공개된 미국의 영화이다. 거스 밴 샌트 감독, 마이크 리치 각본 작품이다.파인딩 포레스터 줄거리 및 결말-자말 월러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길거리 농구를 좋아하는 고등학생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같은 동네는 살고 있는 이상한 남자에게 흥미를 갖게 되는데요. 어느 날 밤 자말은 그 남자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의 아파트에 몰래 침입하게 되고, 실수로 가방을 그의 아파트에 놓고 나오게 됩니다.
아파트의 주인 포레스터는 자말의 가방속에서 범상치 않은 수많은 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자말은 가방을 찾기 위해 포레스터의 아파트를 찾아가지만 포레스터의 차가운 반응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말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 챈 포레스터는 자말을 문학세계로 이끌어주기 위해 자말을 자신의 세계로 이끌게 됩니다. 교내 테스트를 통해 자말의 문학적 재능이 드러나면서 자말은 명문대 예비학교에 농구 특기 장학생으로 스카우트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자말은 아파트의 이상한 남자가 위대한 작가 포레스터임을 알지 못합니다.
자말은 자신의 모든 것이 있는 고향 브롱크스를 나와 새로운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비록 지금 그의 곁에 친구와 가족은 없지만 낯설고 엄격한 지식 공동체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포레스터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친구 클레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묻은 고전서적들과 정적만이 가득했던 포레스터의 은둔지는 두 작가의 논쟁과 웃음, 학문에의 열정으로 채워집니다. 포레스터는 이 어린 제자를 따라 지난 40여년간 닫고 살아온 창 밖의 세상에 조금씩 닿아갑니다.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흑인 고등학생 자말 월러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네 아파트에 거주하는 포레스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한참 호기심이 많은 나이의 자말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하지만 실수로 가방을 놓고 나오고 그 베일의 주인공 포레스터는 가방 속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자말의 수많은 글들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날 자말은 가방을 찾기 위해 아파트를 찾아가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반응뿐이였다.
한편 그동안 가족과 친구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숨겨왔던 자말의 문학적 재능이 교내 테스트에서 드러나면서 자말은 맨하튼의 명문대 예비학교에 농구 특기 장학생으로 스카웃된다. 자말은 자신의 가족과 삶을 나눈 고향 브롱스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을 항해하기 시작하고, 이제 그에게는 낯설고도 엄격한 지식 공동체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스승 포레스터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친구 클레어가 있었다. 인간은 글을 쓰면서 살아가며 글을 통해 모든 것을 기억한다.
잉크가 종이에 쓰며들면서 또는 머리 속에서 기호로 그리고 가슴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남긴다. 이것들은 눈으로 들어가 눈물로, 입으로 나와 웃음으로, 그리고 가슴 속에 남아서 잔잔한 물결을 자아낸다.
『파인딩 포레스터』는 바로 이러한 「글쓰기」에 관한 작품이기 때무니다...한 노인이 퓰리처상의 영예 후, 가족들과의 추억이 남아 있는 흑인 거주 지역인 브롱스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오직 방안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 정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가 천재 작가 포레스터이다. 그리고 한 소년이 있다. 가정불화 후, 철학책과 문학 책에 빠져 살고 매일 노트에 시를 지으며 시간을 보내고,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농구 선수를 꿈꾸고 있다.
그가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재능을 가진 자말 월러스 이다. 이들은 글쓰기를 통하여,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글을 써야하며 또한 인생이 무엇인지 부드럽게 귓가에 속삭여주고 있다. 난 포레스터를 찾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소중한 세 가지 선물을 발견하게 되었다.먼저, 참된 우정은 우리 모두를 구원시킬 수 있음을 자말과 포레스터는 말해주고 있다. 인생에서 경사는 좋은 스승은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글로써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 역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부터 출발한다.
포레스터의 존재를 자말이 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그들의 수업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이들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향유하면서 자신들 속에 꼭꼭 감추어 두었던 일들을 때로는 마음으로, 때로는 대화를 통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포레스터는 자말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들을 그의 가슴속에서 펜 끝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밖으로 표출하도록 도와준다.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유명작가인 윌리엄 포레스터와 중학생인 자말이 나온다.
원래 윌리엄은 위대한 작가지만 전후 가족을 잃은 상처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윌리엄이 자말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떠나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자말 역시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글쓰기 실력이 발전해간다.자말과의 우정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윌리엄과, 그런 스승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자말은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관계다.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윌리엄은 자말의 강점을 키워줬고, 자말은 윌리엄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없애주었다. 두 주인공의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이야기가 담긴 단순한 이야기였다. 평소의 나라면 단순히 두 주인공의 우정, 인종차별 같은 드라마적인 것만 느끼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글쟁이와 그의 제자이자 친구의 이야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가슴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었다. 영화도 역시 보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말과 포레스터. 둘은 문학적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무척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할렘에서 태어나 농구를 즐기면서 동시에 작문에 재능을 지닌 자말과 한 편의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사라져버린 천재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 포레스터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두고 나온 자말의 가방이 며칠 후 다시 자말의 손에 들어온다. 가방에 있던 자말의 습작노트에 낙서 같은 충고를 한 포레스터의 글을 읽고 자말은 다시 포레스터의 집을 찾는다. 그들의 우정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나는 이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는 20년간 신문사 칼럼의 글쓰기를 비교해보았다. 놀랍기도 하고 반성도 되고 부러운 부분도 있었다.
포레스터가 글쓰기를 지도하는 과정이 인상적은 글쓰기를 시작하기 어려워하는 자말에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써라. 처음에는 마음으로 쓰고, 나중에 글을 고칠 때 머리로 생각을 해라” “글이 잘 안되면 일단 잘 된 남의 글을 타이핑을 해라. 그러다가 나만의 선명한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의 흐름을 따라 무조건 써보라.” 고 조언한다. 이렇게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