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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태안군 근흥면에 있는 석남 송석하 부부의 묘. 석남의 묘는 당초 미아리에 조성되었다가 부인이 죽은 후 태안으로 이장되어 부부가 함께 묻혔지만 명성에 비해 무덤이 초라하다. | ||
간송은 일제강점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으로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귀중한 우리문화재를 사들였다. 이중 1930년대 말 그가 40여만 원을 주고 일본에서 사들인 고려청자는 당시 서울의 기와집 400여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석남은 당시까지만 해도 버려져 있었던 우리 민속을 최초로 학문으로 정립했던 한국 민속의 선구자였다. 실제로 석남과 간송은 가까운 사이로 석남이 타계한 후 그의 서책 중 일부가 간송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그가 평생 모았던 탈도 간송이 보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학교로 가져가 전시를 했다고 한다.
간송이 귀중한 우리문화재를 돈으로 지키려고 한데 반해 석남은 독일산 라이카 카메라 하나를 들고 전국을 누비면서 우리의 사라져 가는 민속을 보존, 전승시키려고 노력했다.
석남의 삶과 업적은 2004년 11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된 ‘석남 탄신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특히 석남은 1997년 정부가 제정한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된 후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오고 있다.
석남은 1904년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에서 대한제국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을 지낸 만석군 대지주 송태관(宋台觀)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남은 양등에서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닌 일 년 뒤 반구동으로 이사해 울산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이 때 부친이 그를 위해 반구동 서원마을에 지은 집터가 당시 울산의 거부 김홍조 집터의 5~6배가 되어 이 때 이미 그의 집이 얼마나 부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그의 집터에는 현재 한신아트빌라가 들어서 있고 당시 건물은 언양 자수정 동굴로 그대로 옮겨져 지금은 도자기 체험장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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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명륜동 집에 모인 석남의 가족들. 1990년도에 찍은 사진이다. 맨 왼편에 석남의 부인 김경옥이 있고 다음이 딸 조영이다. 조영 뒤 젊은이들이 석남의 외손자와 외손녀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석남의 먼 인척인 김홍명 전 울산대교수다. |
울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그가 서울로 가지 않고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간 것은 당시 부친이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친은 부산시 좌천동에 살았는데 김홍조와 함께 구포은행을 설립하고 경남은행장을 지내는 등 부산을 대표하는 경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태관은 이 때 부산의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거금 2만5000원을 내어놓기도 했다.
석남이 고교를 졸업하고 현 히토츠바시(一橋) 대학의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으로 진학한 것이 1920년이다. 도쿄상과대학은 관립으로 경쟁율이 높아 한국 학생들이 입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중퇴했다.
중퇴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서 일어났는데 이 때 일본인들이 사회불안을 악용해 우리나라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을 많이 죽였다. 이 때 석남도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직접 이 사건을 목격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유학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돌아 왔다는 얘기가 있다.
석남은 1925년 22세 때 전북 정읍 출신인 김경옥(金京玉)과 결혼했다. 신부 집안 역시 당시 만경평야에 많은 논을 가졌던 대지주였다.
결혼 후 그는 서울 안국동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가 민속학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이 이 때 부터다.
그는 26세가 되는 1929년 ‘조선의 인형극’에 관한 글을 일본의 <민속예술지>에 발표했다. 1932년에는 정인섭, 손진태와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했다. 다음해 그는 한국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을 창간해 본격적인 민속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1934년에는 이병도, 조윤제, 이상백, 김두헌, 이병기, 고유섭과 함께 ‘진단학회’를 만들어 이 해 말 <진단학보> 제1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이 무렵 인형극, 가면극, 민속무용, 연극 등 민속연구를 넓혔고 나중에는 우리 민속의 독특한 분야였던 가면극에도 관심을 보여 북의 북청사자와 남의 오광대에 대한 채집과 연구도 했다.
그는 또 민요 채록에도 주력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문헌과 자료가 빈약함을 탄식했다. 이런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많은 자료를 남겼다. 자료 중 사진은 나중에 다시 정리할 계획으로 찍은 날짜와 장소는 물론이고 일련번호와 고유번호까지 남겨 놓았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해방 후에도 이어져 1945년 11월 국립민족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에도 그는 대규모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전국을 돌면서 민속학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는 1948년 8월 숨을 거두었다. 그는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민속 연구를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사를 보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생전에 아들과 딸 각 한명씩 두었는데 외아들 대영이 그 보다 앞서 1946년 타계했고 딸 조영은 지적장애인이 되어 이에 따른 고통이 컸다.
이 자리에서 항간에 떠돌고 있는 그의 친일 행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말 그가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을 때 울산의 문화인들 중심으로 그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박물관을 울산에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그의 친일 행적이었다.
이번에 필자가 취재를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많이 들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상북면 양등마을과 또 그의 할아버지 무덤이 있는 삼남면 가천마을에 취재를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친일 자식을 취재해 어디에 사용하려고 하느냐”면서 필자를 나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가 직접 친일을 한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물론 그의 부친이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을 지낸 친일 인사였고 또 그가 민속 연구를 할 때 일본의 도움을 받았고 그가 연구한 민속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하는 자료로 이용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침소봉대해 그를 친일인사로 매도하기에는 우리 민속에 대한 그의 열정이 너무 뜨거웠고 그가 남긴 업적이 너무 크다.
석남의 무덤은 현재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 있다. 그는 죽은 후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겼다가 부인이 1995년 89세로 타계하면서 이곳 태안으로 이장해 부인과 함께 묻혔다.
석남의 무덤이 이곳에 조성될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석남의 사위였던 은철이 무덤을 잘 조성하려고 했으나 태안군이 호화묘라면서 묘의 넓이와 석물의 수를 줄여 줄 것을 요청하는 바람에 그의 업적을 새긴 비석까지도 제한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명성에 비해 무덤이 초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안에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없다. 군청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문화원 직원들조차도 석남이 누군지 모른다.
무덤에서 보면 부친이 조성한 넓은 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돌보는 이 없어 잡초가 무성한 무덤을 돌아보면서 석남이 죽은 후 고향 울산에 묻혔더라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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