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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 마을 중심의 희게 보이는 건물이 보수공사 중인 양진당이다. 충효당은 그 앞에 있다. 양진당 왼쪽 잎이 무성한 나무가 삼진당의 느티나무다. 이곳이 하회마을의 중심으로 기 응집처가 된다. 산 오른쪽 끝부분 봉곳하게 솟은 산이 양진당의 안대(案對)인 ‘마늘봉’이다. 산 중앙의 세 봉우리는 그 형상이 정자관(程子冠)을 닮아 정승의 배출이 이어진다는 삼태봉이다.
부용대와 만송정. 만송정은 소나무로 조성된 비보숲이다. 벼랑으로 이루어진 부용대의 살기를 막고 북서쪽의 허(虛)한 곳을 메우기 위함이 목적이다. 천연기념물 제473호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 芙蓉을 피우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허씨가 터를 닦고 안씨가 살던 곳에 류씨가 잔치판을 벌리다. 하회(河回)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문구다. 허씨와 안씨가 먼저 거주했으나 영광을 보지 못하다 류씨 가문이 정착한 이후 번성했다는 뜻이다. 풍수적 차원에서 그 연유를 따져 올라가면 그 끝에 연꽃이 있다.
하회는 남, 서, 북쪽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중심부분이 봉곳하다. 이러한 지세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주위의 산들은 꽃잎이 되고 중앙의 솟은 부분이 꽃술이 된다. 지금의 하회마을이 연화부수의 중심이 되는 꽃술이 된다는 얘기다. 반면 허씨와 안씨의 거주지였던 곳은 하회마을 동쪽인 화산(花山) 기슭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 위력이 하회에 미치지 못했다고 본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하회는 배가 나아가는 형태다. 그래서 행주형(行舟形)이 되기도 한다. 행주형 지형에선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는다. 배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옛 하회사람들은 식수도 강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한 배가 무거워진다 하여 돌담도 가급적 피했다. 하회의 산과 물은 S자로 맞물려 돌아간다. 영락없이 태극(太極)을 닮았다. 이게 하회의 별칭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되는 근거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시상태요,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다. 류씨 가문의 터는 이 태극의 머리 부분에
하회의 고택들은 특별한 좌향이 없다. 집집마다 제각각이다. 그렇다고 이상할 것도 없다. 주택 배치의 기본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회는 중앙이 도톰한 삿갓의 형상이다. 그 중심점이 삼신당이다. 이곳이 하회에서 기가 가장 많이 응집된 곳이다. 이곳에서 각 지맥을 따라 기가 흘러간다. 하회마을의 기 공급처인 셈이다. 하회의 모든 집들은 이 삼신당에서 퍼져 나온 지맥을 따라 건립됐다. 높은 삼신당을 등으로 하여 둘러싸는 형태이기 때문에 낮은 강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배산임수와 전저후고를 만족시킨다. 이게 집집마다의 좌향이 다른 연유다. 예컨대 양진당은 남향이고 충효당은 서향, 북촌댁은 동향이다.
하회의 북쪽 벼랑이 부용대(芙蓉臺)다. 이 부용대에 오르면 물속에 핀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가 있다. 부용은 연꽃이다. 그러고 보면 부용대는 연꽃을 보는 언덕이 되는 셈이다. 주산은 화산이요, 부용대 아래의 낙동강은 화천(花川)이다. 그만큼 하회는 연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짓다가 허물어지고 또 지으면 또 허물어지고…. 지나가는 길손들에 짚신에 먹을 것에 재워주기를 삼년, 그런 연후에 얻었다고 전해지는 길지(吉地)가 하회다. 적선(積善)의 미학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하회마을=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풍산 류씨 집성촌. 영남 4대 길지의 한 곳으로 꼽히며,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다. 고려 말 입향조인 류종혜가 이주한 이후 류씨의 역사만 600년이 넘는다. 마을 중앙으로 난 큰길을 따라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북촌의 대표적 건물로 류씨 대종택인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이 있으며, 남촌엔 보물 제414호 충효당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유명하다. 1999년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2005년엔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방문해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풍수인테리어
부엌은 거실과 분리돼야
부엌은 오행(五行)의 기운이 두루 갖춰진 공간이다. 목(木)의 기운으로 나무로 된 주방기구가 있고, 토(土)의 기운으로 접시, 그릇 등 도자기류가 있다. 금(金)의 기운으로 대표적인 게 칼이다.
하지만 부엌의 대표적인 기운은 불(火)과 물(水)의 기운이라 하겠다. 가스레인지가 불의 기운을 대표한다. 물의 기운으로 싱크대와 수도가 있다. 따라서 물과 불이 대치되는 공간이 된다. 물과 불은 상극(相剋)이다. 상극은 분열을 조장한다. 예컨대 가스레인지를 싱크대 옆에 바짝 붙여 설치하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상생(相生)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그 사이에 나무로 된 주방기구가 놓아야 한다. 그러면 물은 나무를 생하고 나무는 불을 생하게 되어 흐름이 무난해진다. 가스레인지 주변에는 도자기류를 두면 좋다. 흙의 기운이 불의 기운을 흡수해 중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엌은 죽이는 기운이 강한 곳이다. 음식을 장만키 위해 모든 재료를 자르고 볶고 삶는다. 이 살기가 거실이나 안방 등으로 확산돼선 안 된다. 안방과 거실은 집안의 중심 공간이다. 항상 밝고 명랑한 기운이 넘쳐야 한다. 그래야 화목한 가정이 된다. 따라서 부엌은 안방이나 거실과 분리시켜야 한다. 다소 거추장스럽긴 하겠지만 파티션 등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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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국근의 風水기행] 여주 세종대왕릉
▲ 영릉 전경. 앞쪽 높은 산이 주산인 동시에 조산이 되는 북성산이다. 영릉은 이 북성산의 지맥이 한바퀴 돌아 결혈한 회룡고조혈이다.
▲ 홍살문과 참도(參道). 왕릉의 참도는 선왕(先王)이 다니던 신도(神道)와 살아있는 임금이 다니던 어도(御道) 등 2도(二道)로 이루어진다. 이곳 영릉의 참도는 3도(三道)로 이것은 황릉에 맞는 격식이 된다. 이는 1970년대 성역화사업 때 잘못 복원된 것이다.
▨ 세종대왕릉=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으로 능호(陵號)는 영릉(英陵).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으며 같은 산줄기에 있는 제17대 임금 효종의 영릉(寧陵)과 함께 사적 제195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아버지 태종이 묻힌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있었으나 왕실에 닥친 잇단 흉사로 예종 때 이장, 조선 왕릉 중 첫 천장릉이 되었다. 인근에 영릉의 원찰(願刹) 기능을 담당했던 신륵사가 있으며, 신륵사는 여강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세워진 비보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 세대를 넘어 이만큼 친숙한 이름도 드물다. 한글 창제에 국토 확장, 거기에다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이룩했기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에 걸맞게 잠든 유택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영릉은 다양한 형국을 가진다. 이는 그만큼 큰 자리란 얘기도 된다. 우선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다. 주위의 산들이 영릉을 구심점으로 꽃봉오리를 에워싼 듯해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지형이 그러하다. 주위의 봉긋하면서도 나지막한 산줄기들이 모두 영릉을 감싸듯 보듬고 있다. 다음으로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다. 봉황이 날개를 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란 뜻이다. 이때 두 날개는 청룡과 백호가 되고, 알은 곧 혈(穴)이 된다. 영릉이 봉황의 알이다. 능침에 올라보면 확연하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고 정겹다. 또한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도 된다. 신하가 되는 주위의 산세가 임금이 되는 혈을 배알하는 모습이란 게다. 또 하나 능 뒤쪽에서 보면 당판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듯 도톰하다. 이름하여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다.
영릉의 주산은 앞쪽에 위치한 북성산(北城山)이다. 북성산이 한바퀴 돌아 영릉 자리를 만들었단 얘기다. 따라서 북성산은 영릉의 주산(主山)이 되기도 하고 조산(朝山)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다. 그만큼 힘이 넘치는 용맥이다. 이게 영릉을 조선시대 왕릉 중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원래의 헌릉 서쪽자리는 흉지(凶地)였다 한다. 생전에 이를 알았지만 부모님 곁에 눕고 싶었던 효심으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고집했다 한다. 하지만 그 뒤 왕실에 흉사가 겹쳐 일어나자 세조 때 처음 천장 얘기가 나왔으나 무산되고, 뒤이은 예종 때 천장(遷葬)을 하게 된다. 명당에 터를 잡을 땐 항상 뒷얘기가 있듯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예종의 천장 후보지 물색 명령을 받은 대신들과 지관들이 북성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던 중 정기가 서려있는 이곳 산기슭을 발견했다. 그들이 산을 내려와 찾았지만 울창한 숲으로 인해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개울 건너 돌다리가 있어 길을 찾게 됐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
우로 또 한번 시련을 맞게 됐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비각이 있어 그곳에서 비를 피했는데, 비가 그친 후 그곳 지세를 본 대신들과 지관들은 그곳이 대명당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다른 사람이 묻혀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들은 예종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종은 그 묘의 후손을 불러 양보를 받게 됐다고 한다. 대신들과 지관들의 눈에 뜨인 지금의 영릉 자리는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광주 이씨 이인손(李仁孫)의 묘택이라는 설과 한산 이씨로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의 묘택이란 설이 엇갈린다.
어찌 됐건 영릉이 이곳으로 이장하여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도 함께 있으니 이를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한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
인촌家의 풍수사랑
▲ 인촌의 9대조 김창하 묘 전경.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시원스레 뻗은 청룡과 백호지만 묘를 향해선 다소곳하다. 사진 가운데 둥근 봉우리가 봉황의 알에 해당한다.▲ 호남 8대 명당 중 하나인 영일 정씨 묘. 왼쪽에 보이는 바위가 병바위이고, 그 왼쪽 넓적한 바위가 소반바위다. 멀리 안장바위가 아련하다. 묘는 담장 안에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양택은 그 터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작게는 개인주택서 크게는 한나라의 수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안식처는 다르다. 시신이 지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 한두 평이면 가능하단 얘기다. 사실 음택의 혈처(穴處)는 대부분 산줄기 끝부분의 중앙에 뭉쳐진 작은 산봉우리나 동산에 위치한다. 그러기에 온전한 지기를 받기 위해선 합장(合葬)보다 단장(單葬)이 유리하다. 특히 쌍분(雙墳)의 경우 한쪽은 혈과는 상관없는 곳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
호남의 명문가로 꼽히는 인촌 김성수(金性洙) 집안은 하나의 명당에 한기의 묘만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일명당일묘(一明堂一墓)다. 이 묘들은 가깝게는 수십리, 멀게는 수백리 떨어져 있기도 하다. 예컨대 증조부 김명환(金明煥)의 묘는 전북 부안군 변산해수욕장 뒷산에 있으나, 증조모 전의 이씨의 묘는 순창군 상치면 보평리에 있다. 또한 조부 김요협(金堯莢)의 묘는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뒤편에 있고, 조모 영일 정씨 묘는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있다. 모두가 단장이다. 그것도 모두 대명당들로서 다양한 형국을 가진다. 증조부 묘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고 증조모는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조부 묘는 복치형(伏雉形), 그리고 조모 묘는 선인취와형(仙人醉臥形)이다. 다만 삼천년향화지지(三千年香火之地)로 알려진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화개산에 있는 9대조 김창하(金昌夏)의 묘는 합장묘다. 이 묘의 형국을 따지자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 곧 자봉포란형(雌鳳抱卵形)이다. 시원스레 뻗어 내린 청룡과 백호가 묘를 감싸는 것 하며, 그 가운데 봉황의 알을 뜻하는 봉긋한 봉우리 등은 굳이 풍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한폭의 동양화 그 자체다. 가슴이 확 트이는 이곳에 서면 풍수를 모르는 이라도 감탄사가 절로 난다. 이 묘들은 풍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필수 답사지이기도 하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묘가 반암리 호암마을에 있는 조모 영일 정씨 묘다. 이른바 호남 8대 명당 중 한 곳이다. 선인취와형이란 잔칫날 술 취한 신선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지세를 말한다. 묘 앞쪽 안산엔 술에 취한 신선이 집어던져 거꾸로 세워져 있는 병바위(壺巖)가 있고, 그 옆엔 음식을 나르는 소반처럼 생긴 소반바위가 있다. 멀리 조산 쪽으로는 손님들이 타고 온 말의 안장처럼 생긴 안장바위가 있고 백호자락엔 구경꾼 격인 선바위와 신선을 뜻하는 선인봉이 아름답게 솟았다. 일자(一字)로 누운 주산 차일봉(遮日峰)은 잔칫날 햇볕을 가리는 천막역할을 한다. 백호 자락엔 재물을 뜻하는 창고와 노적가리 모양의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다. 또한 탕건바위나 관바위는 벼슬을 나타내는 귀한 바위들이다.
영일 정씨 묘는 마을의 중심에 있다. 명당국세의 혈처란 얘기다. 특이하게도 담장을 두르고 대문까지 단 이 묘를 중심으로 일반 가정집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것뿐 아니다. 마을 이곳저곳엔 오래된 묘들이 즐비하다. 음택과 양택의 공존인 셈이다. 무덤과 주택, 상반된 이 두 요소가 어울리지 않을듯하지만 이곳에선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좁은 터엔 묘, 그보다 넓은 터엔 주택들이 따스한 햇볕아래 정겹다. 한번쯤 이곳에 들러 명당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 김성수=교육가, 언론인, 정치가로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인촌(仁村)이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부안면 봉암리에 있는 그의 생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북향집 명가로 알려져 있다. 일본강점기 때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학교를 인수하고,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또한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한국민주당 당수,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51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듬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사임했다. 조선 중기 대유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가 그의 13대조다.
화성 융릉
▲ 융릉 전경. 뒤 불룩하게 솟은 부분이 지기(地氣)를 응축했다 혈로 공급해주는 입수처(入首處)다. 이를 잉(孕)이라고도 한다. 어느 왕릉이나 이 잉이 발달해 있다.▲ 정자각. 제각(祭閣)이다. 중앙의 계단 중 왼쪽은 선왕(先王)의 혼령이 다니던 계단이고, 오른쪽 평범한 계단은 왕이 다니던 계단이다.
▨ 융릉=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의 아버지 추존 장조(莊祖·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합장릉.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에 있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수은묘(垂恩墓)로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에 있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면서 묘도 원(園)으로 격상되어 영우원(永祐園)으로 되었다. 그 뒤 다시 지금의 곳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왕릉에 준하는 규모를 갖췄다. 고종 때 장조(莊祖)로 다시 추존되면서 능호(陵號)도 융릉(隆陵)으로 되었다. 인근에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 영조(英祖)에 의해 영조의 서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됐던 정조가 즉위 후 처음으로 내린 교지다.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연민을 정조는 이 한마디에 담았다. 임금이었던 할아버지 영조 뿐 아니라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어머니, 여러 고모들까지 모두 합세하여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런 와중에 열한 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웠으니 그 긴 세월동안 그들에 대한 감정은 오죽했을까.
조선의 왕들은 모두가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가 왕실의 번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빈번했던 천장은 당파 간 권력투쟁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 왕실의 안녕과 직결이 된다. 세종의 영릉 천장도 흉지(凶地)가 겉으로 드러난 첫 이유다.
정조의 풍수실력은 웬만한 풍수를 능가할 정도로 박식했다 한다. 왕이 못되었기에 초라할 수밖에 없었을 아버지의 묘, 자신의 손으로 이장할 결심을 했을 수도 있다. 당파간의 이해와 맞물린 천장이 아니라 참된 명당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풍수이론을 습득했을 수도 있다. 어쨌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좌향(坐向)과 안대(案對) 등 자신이 직접 지휘해 수원의 명당으로 옮긴다. 이렇게 보면 풍수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아들인 정조 임금을 이어준 매개체 역할을 한 셈이다.
지금의 융릉자리는 이전 효종(孝宗)의 능지로 윤선도가 추천한 곳이었다. 그때 윤선도는‘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지세)의 대길지’라 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힘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고 만다. 효종의 능은 결국 동구릉(東九陵)에 자리했다가 뒤에 세종의 영릉 곁으로 천장된다.
왕릉도 왕릉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답답한 마음이 먼저 드는 곳도 있고, 힘이 먼저 느껴지는 곳도 있다. 예산에 있는 남연군묘는 평안함보다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융릉은 평안한 자리다. 견준다면 세종의 영릉(英陵)에 섰을 때의 그 느낌이다.
우선 융릉은 전체 보국(保局)의 짜임새가 일품이다. 좌우의 용호(龍虎)는 첩첩으로 에워싸고, 물도 이상적으로 능 앞을 감고 흐른다. 안산과 조산도 적절히 능을 보듬어 생기를 북돋워 준다. 혈 자리는 능침이 된다. 이도 주산인 화산(花山)서 기세 좋게 내려온 산줄기의 끝에 맺혔다. 이른바 중출맥(中出脈)에 산진처(山盡處)다. 이렇게 안정된 지세(地勢)도 보기가 쉽지 않다. 하늘이 아들의 효심에 감동해 이런 큰 자리를 보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융릉은 왕릉 중에서 세종이 잠든 영릉과 쌍벽을 이루는 대명당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원릉(元陵)이 영조왕릉이다. 하지만 신후지지(身後之地)는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이었다. 영조가 홍릉이 아닌 동구릉으로 간 것엔 사연이 있다. 정조의 개입이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원인이 된다.
원릉 자리는 원래 천장하기 전 효종의 능이 있던 자리다. 즉 파묘(破墓) 자리에 할아버지를 밀어 넣은 것이다. 따라서 원릉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낳은 산물이 된다. 지금의 홍릉은 짝을 잃어버린 영조의 원비(元妃) 정성왕후 능만이 홀로 외롭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①전남 해남 녹우당
비자나무 심어 해로운 기운 물리치다산과 물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풍수, 선조들이 실증한 건강한 땅을 찾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지금은 웰빙시대, 건강한 삶을 찾는 방편으로 우리의 이 전통 터 잡이 문화를 취해봄은 어떨까.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가다. 500년 내력을 가진 고택. 고산 윤선도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16세기 초 강진에서 이사를 오면서 터를 잡은 곳이라 전한다. 녹우당은 이 고택의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이다. 이 사랑채는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효종이 하사한 것이라 한다. 수원에 있던 것을 고산이 낙향할 때 일부를 옮겨와 다시 지었다. 원래는 사랑채의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종가 전체를 아우른다. 고산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땅끝 마을로 가는 길목인 해남읍 연동마을에 있다.
녹우당(綠雨堂), '푸른 비가 내리는 집' 참으로 시적인 분위기다. 이 집을 거쳐 간 고산이나 그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문학적·예술적 혼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유를 살펴보면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중턱엔 500년이나 된 비자나무숲이 있다. 목책을 둘러친 산길을 따라 걸으면 제법 운치가 날 법도 하지만 여유를 부리며 걷기엔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이 숲 속엔 험상궂은 바위들이 살기품은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다. 이 살기를 차단하는 역할, 즉 염승(厭勝)의 역할을 하도록 조성된 게 이 숲이다. 녹우당은 비자나무 잎들이 바람에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빗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우당 앞 들판은 넓다. 그래서 장원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그것도 '녹색의 장원'이다. 녹색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닌가. 사신사내의 국세는 웬만한 면소재지 하나는 들어가고도 남을 만하다. 그만큼 넓다. 녹우당이 위치한 곳은 기가 응집되어 약간 도톰한 부분이다. 따라서 넓은 명당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기에 다소 불리한 측면이 있다. 이게 초입에 소나무 동산을 조성한 이유가 된다. 모자람을 채우는 것, 즉 비보(裨補)다. 100% 완벽한 땅은 없다. 때론 모자람을 채우고 때론 넘침을 덜어내야 한다.
녹우당은 서향이다. 지세를 따르자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서향은 햇볕이나 바람에 취약하다. 그래서 앞을 담으로 막았다. 겨울 찬 서풍을 막고, 숙살지기인 저녁햇살을 막았다. 대신 건물의 왼쪽인 남쪽을 텄다. 서향에 남쪽 대문은 생기가 넘치는 집이다. 자연스레 자연과 건물이 일치가 된다.
녹우당을 굽어보고 있는 주산은 완벽하진 않지만 일자문성 형태다. 산 정상이 일자(一字)인 산을 풍수에선 극히 귀하게 본다. 내려오는 맥도 산의 중심에서 나온 귀한 중출맥이다. 청룡과 백호도 바람막이 역할에 충실하다. 안산도 노적가리 형태다. 노적가리는 곧 재물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만한 풍수적 길지도 드물다.
터를 고름에 있어서 인간은 객체가 돼야 한다. 그게 집터든 묘지든 같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시각, 자연에 신세진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탈이 없다. 그래야 땅도 우리에게 감응을 한다. 땅은 거짓이 없다.
대구제일중 돌거북
▲ 돌거북에서 바라본 대구 앞산.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올라보면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화산이다. 돌거북은 이 앞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돌거북. 머리는 남쪽, 꼬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꼬리 부분에 명당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 진산(鎭山)=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양기풍수(陽基風水)에서 주산(主山) 대신 쓰이는 용어로 음택풍수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마을이나 도시 뒤에 위치하여 그 마을이나 도시를 보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마을이나 이 진산을 갖는다. 산신사상과 풍수사상이 결합된 것으로 보기도 하나 확실한 어원을 불분명하다. 대부분 그 터에 가까운 뒷산을 진산으로 삼으며, 주산 뒤 더 큰 봉우리를 뜻하기도 한다. 요즘은 주산과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는 추세다.
바위로 덮여 있는 형태의 산을 풍수에선 화산(火山)이라 한다.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화기(火氣)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본다. 대구 주위의 산이 이런 형태다. 대구에 직접 기운을 전달하고 있는 앞산이 그러하고, 앞산에 힘을 실어주는 비슬산이 그러하다. 나아가 북쪽에서 대구를 감싸안고 있는 팔공산 각 봉우리들도 뾰족뾰족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은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천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호강이 있다. 하지만 거대한 암군(岩群)으로 이루어진 비슬지맥(琵瑟支脈)과 팔공지맥(八公支脈) 사이의 대구분지에선 역부족이다.
이럴 경우 넘치는 화기를 누르는 것, 즉 진압풍수의 도입이 필요하다. 물을 대신할 수 있는 상징물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물속에 사는 대표적인 동물은 거북이다. 더욱이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신령스럽기도 하다. 대구 봉산동에 있는 대구제일중학교(옛 제일여중) 교정엔 오래된 돌거북 한 마리가 있다. 이 돌거북이 넘치는 대구의 화기를 제압하는 진압풍수의 용도로 세워진 것이다. 특히 비슬지맥의 강한 화기를 누르기 위해 머리도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앞산 속의 절집이나 인근 주택가에 언뜻언뜻 보이는 해태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광화문 앞의 해태가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과 같은 이유로 세워진 것이란 얘기다.
한 마을이나 도시의 진산은 힘이 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산이 품고 있는 지역에다 충분한 기운을 전달할 수 있다. 예전 대구의 진산은 연구산(連龜山)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아파트보다도 낮은 구릉이지만 한때는 대구를 대표하는 성스러운 산이었다.
비슬산에서 시작하는 대구의 주맥(主脈)은 앞산을 거쳐 대구고와 경북여고 뒤쪽 산을 거쳐 제일중, 관덕정 부근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그 흐름은 앞산에서 급전직하로 떨어져, 넓은 들판으로 기어가기 때문에 힘이 다소 약해지는 상태가 된다. 양기든 양택이든 음택이든 혈장(穴場)은 주맥의 힘을 받는다. 따라서 주맥은 무조건 튼실해야 하며, 조금 부족하다 싶은 주맥은 반드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비보풍수의 도입이다.
이 돌거북의 꼬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대구시가지 방향이다. 앞산의 기운을 입으로 받아 꼬리 방향이 되는 대구로 그 기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예전 속담에도 거북의 꼬리 부분에 위치하는 마을은 자손과 가업이 번창한다고 했다.
‘연구산은 대구의 진산이다. 돌거북을 만들어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를 북쪽으로 하여 지맥을 통하게 했다.' 조선 초기 서거정(徐居正) 등이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돌거북의 용도가 풍수 비보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 돌거북은 2003년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 의해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하국근기자의 퓽수기행(2) 양동마을
양동은 아름답다. 아니 정겹다. 옛날과 현대의 어울림이 그러하고, 언덕배기 기와집과 그 아래 초가집과의 조화가 그러하다. 그 언덕에 한번 서 보라. 오뚝하니 선 앞산, 즉 안산(案山)인 성주산(聖主山)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단아한 문필(文筆)의 모습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한결같다. 관가정의 누마루, 향단의 대문에서 보이는 형태는 ‘자연의 붓’ 그 자체다. 무첨당 지붕에 걸린 그 붓은 금방이라도 먹물을 찍어 거침없이 휘갈겨 써내려갈 것만 같다. 서백당 마당에 가득 차는 성주산은 아예 한폭의 그림이 된다. 건물 자체를 대성헌(對聖軒)이라 이름 지은 고택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이는 ‘성주산을 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성주산은 끝이 뾰족한 문필봉이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이나 웬만한 묘소치고 이 문필봉이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소중히 취급하는 산의 형태다. 문필은 글을 의미한다. 글은 곧 명예요, 때론 권력이 되기도 했다. 그 기운을 받고자함인지 양동의 고택들은 한결같이 이 성주산을 향해 담장을 허물고 있다.
양동은 풍수 형국론으로 보면 물(勿)자 형국이 된다. 마을이 입지하고 있는 형태가 한자의 물자(勿字)를 닮았다는 얘기다. 성주산에서 내려다보면 참으로 흡사하다. 마을 입구서 바로 보이는 관가정이 첫 획이 되고, 주산인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주능선과 글자의 어깨 쪽 서백당을 품고 있는 산 능선이 두번째 획이 된다. 향단, 무첨당이 자리 잡은 산줄기가 다음 획순이다.
거창한 것 같지만 물자 형국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산과 물이 그만큼 마을을 잘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향단서 보면 관가정이 우백호가 되고, 무첨당이 좌청룡이 된다. 서백당은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둘러싼 최적의 입지가 된다. 하지만 관가정에서 보면 청룡은 여러 겹이 되지만 백호는 없다. 안강들의 거센 바람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비보풍수다. 관가정 오르는 길의 노거수들이 모자람을 채우는 비보의 역할을 한다.
이번엔 지도를 보자. 철길이 이 마을을 우회해서 지나간다. 일제 강점기 때 개설된 동해남부선 철길은 원래 이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개울을 따라 부설하도록 계획됐다 한다. 이럴 경우 철길이 또 한 획이 된다. 물자가 변해서 혈(血)자가 된다. 주민들 반대가 이어져 지금의 형태로 노선 변경이 불가피했다 한다.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이런 명당엔 어김없이 개입되는 일제의 풍수침략 망령이다.
이 마을 가옥들의 맏형격인 서백당은 예부터 삼현지지(三賢之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온다. 세분의 현인이 나는 땅이란 뜻이다. 실제 우재 손중돈 선생과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났으므로 두 분은 이미 태어난 셈이다. 안채 깊숙한 곳에 있는 산실에선 아직 한 분의 현인이 잉태되길 기다리고 있다. 마당 가득히 문필의 기운을 품고서….
하국근기자 hkk@mmsnet.co.kr
▨ 양동마을=15~16세기 이후 월성 손씨, 여강 이씨 두 가문이 대대로 살아 온 조선시대의 대표적 양반마을로 500년 동족집단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150여 호의 크고 작은 옛집과 20여점의 지정문화재가 있으며,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돼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추진되고 있으며, 영남 4대 길지(吉地) 중의 한곳으로 꼽힌다. 행정구역으론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은 15∼16세기 이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등 두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시대 양반마을이다. 1984년 12월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으며 국가 지정 문화재 18점을 포함해 경북도 지정 문화재 5점, 향토문화재 9점을 보유하고 있다.
수백년 된 고색 창연한 54채의 옛 기와집과 이를 에워싼 110여채의 초가가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 양반들의 집은 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의 하인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는 형태로 돼 있다. 마을의 규모, 보존 상태, 문화재 수, 아름다운 자연환경 등으로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는 양동초등학교가 있고 마을 안에는 초등학교의 전신이면서 서당 역할을 한 심수정(1560년 건립)과 안락정(1780년 건립)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인 이언적 선생 등 많은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했다.
③아산 맹씨행단
땅은 살아있다. 넉넉하게 모든 것을 품는다. 그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만 주어지는 쓰임새는 다르다. 주택지로, 정자 터로, 어떤 곳은 동물들의 쉼터가 된다.주택지로 주어진 곳에 지은 집은 오래 간다. 그 땅의 정기가 그 집에 온전히 흡수되기 때문이다. 풍수를 강조하고자함이 아니라 500, 600년의 내력을 지닌 고택에서 실증된다. 그밖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랴.
집의 좌향은 지세(地勢)가 제1요건이 된다. 곧 자연에 대한 순응이다. 지세에 따른 집은 자연히 배산임수(背山臨水)가 된다. 뒤론 산을 등지고 앞엔 물을 마주한다. 풍수이론에 접목시키자면 뒤의 산은 생기(生氣)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앞의 물은 그 생기가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보면 북향집도 무리가 없다. 당연히 명당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필수조건이 있다. 뒤가 낮아야 한다는 것이다. 햇볕과 바람을 고려함이다. 북향에 뒤마저 높게 되면 1년 내내 햇볕보기 힘들다. 생기품은 바람맞이도 기대난이다. 응달엔 명당이 형성되지 않는다. 음과 양의 조화가 깨진 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서 북향집 명가로 두 곳을 꼽는다. 하나는 이곳 맹씨행단이요, 다른 한 곳은 전북 부안에 있는 인촌 김성수 생가다. 두 곳 모두 뒤가 낮다. 그리고 공(工)자형의 건물 형태를 취한다. 햇볕과 바람을 맞이하기에 유리한 건물구조다.
명당의 골격은 천연적으로 이뤄진다. 나머지 약간의 모자람이나 넘침은 비보풍수의 몫이다. 이 맹씨행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보라. 도톰하니 둔덕을 이루고 있다. 둔덕너머엔 들판이다. 들판은 야생이다.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이 둔덕은 이 곳을 주택지로 만드는 천연의 담장이 된다. 이 둔덕이 없었다면 이곳은 산토끼가 뛰노는 평범한 산자락에 그쳤을 게다.
고택 뒤 언덕에 구괴정이 자리한다. 그 옛날 고불과 황희, 권진 등 세분의 정승이 함께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국사(國事)를 논했다는 유서 깊은 정자다. 이곳은 오른쪽의 산 능선과 왼쪽의 고택능선 사이에 자리한다. 앞은 확 트인 들판이다. 바람길이다. 살림집 입지론 최악이다. 정자 터로 자리매김했기에 수백 년을 저렇듯 당당하게 버티고 있을 수 있었을 게다.
고택 청룡어깨자락엔 채석장이 흉물스런 몰골로 마을을 넘겨다보고 있다. 행단 뒤쪽 밭에서 쑥을 캐던 마을 아주머니의 한숨 섞인 하소연이 귀에 맴돈다. ‘저 채석장이 생긴 이후로 교통사고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마을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많이 일어났지요.’ 산사태만 나도 이금치사(以金致死)라 했는데, 하나의 산 능선이 저렇게 뭉개졌으니…. 마음을 짓누른다. 인간의 욕심이-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맹씨행단=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조선 초 명정승 고불 맹사성의 옛집. 원래 고려 말 최영이 살던 집이었으나 위화도회군으로 비어있던 중, 고불의 부친인 맹희도가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은거하였다 한다. 고불은 최영의 손자사위이기도 하다. 집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공(工)자형 맞배지붕이다. 건평은 90.72㎡(27.5평).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주택이라 전해진다. 뜰엔 고불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의 은행나무 2그루가 마주 서 있으며, 이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하였다 하여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 불린다. 이 고택과 집 뒤에 위치한 구괴정(九槐亭),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묶어 ‘아산맹씨행단’이라 한다. 사적 제109호다.
<35>경주 여근곡
陰陽 부조화로 眞穴 못 맺는 ‘虛花’女根谷=신라 선덕여왕의 지기3사(知機三事) 설화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경주터널 근방으로 부산방면 경우 오른쪽이다. 산의 형태가 여성의 신체 일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봉산(五峰山) 등산로의 일부로 산 정상 부근에 김유신 장군과 연관되는 마당바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주사암(朱砂庵) 등이 있다.
꽃의 본질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허화(虛花)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꽃은 꽃이되 참된 꽃이 아니란 얘기다. 풍수에서의 허화는 진혈(眞穴)의 반대어가 된다. 비혈(非穴), 가혈(假穴)과 같은 말이다. 이 허화도 언뜻 보면 명당의 요건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주위의 지형이 그럴듯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곳은 음양의 부조화 등으로 혈이 결지되지 못한다.
여근곡은 음기(陰氣)가 센 땅이다. 지형이 뿜어내는 기운이 음습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 일부를 닮았다는 선입감을 떠나 지세를 봐도 그러하다. 여근곡은 뒤쪽의 오봉산이 서쪽을 가로막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다. 햇빛의 부족이다. 햇빛은 대표적 양기(陽氣)다.
신라 선덕여왕의 백제군 섬멸은 이곳이 음기가 충천한 곳임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추운 겨울 도성(都城) 인근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때 아닌 개구리 떼가 사나흘 밤낮을 울어대니 사람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 여겨 여왕에게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여왕은 장수 두 명을 보내 서쪽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군사를 기습하게 했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하자 여왕은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형상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 된다. 여자는 음이고 흰색이며, 흰색은 서쪽을 말함이라. 따라서 서쪽 여근곡에 적군이 있음을 알았으며,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적군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혈은 모름지기 산세가 완만하고 토질이 기름진 곳에 맺힌다. 여근곡은 급경사에다 척박한 땅이다. 이런 땅에선 결혈(結穴)은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음택지로든 양택지로든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
음습한 이런 지세엔 음기를 눌러 주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천연적인 것이면 더욱 좋다. 여근곡을 다른 말로 암산이라고도 한다. 여성산이란 말이다. 이럴 경우 숫산, 즉 남성산이 있어야 한다. 동네 주민들은 여근곡 맞은 편, 강 건너에 오계산(오개산?)이 있었다 한다. 이 산이 여근곡에 대응했던 산이라 했다. 물론 설화로 구성된 얘기일 터이지만 음양 이치에 부합되는 얘기인 것은 분명하다. 천연적인 것이 없다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염승풍수(厭勝風水)의 도입이다. 절 주변에 언뜻언뜻 보이는 남근석(男根石)이 그것들이다.
여근곡의 중심이 되는 곳에선 예전 사시사철 물이 흘렀다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멘트로 만든 작은 공간에 삐죽 나온 호스만이 덩그렇다. 이곳의 물을 아래 마을과 절집의 상수도수원으로 이용했던 결과다. 아직까지도 절집으로 연결된 호스는 멀쩡하다. 친절하게도 절에서 이곳의 물을 맛 볼 수 있다는 안내판까지 붙어 있다. 자연은 자연일 때가 자연스럽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근곡의 물은 여근곡 본래의 자리서 흘러야 한다.
그것도 등산로 한가운데에 있어 하루가 멀게 훼손돼 간다. 여근곡은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한번 훼손된 유적지는 완전복구가 어렵다.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⑤봉화 닭실마을
암탉이 알을 품듯 아늑하고 포근한 땅닭실마을은 아늑하다. 먹이를 노리는 솔개가 하늘을 맴돌 때 어미닭이 새끼를 보듬어 보호하듯, 쏟아지는 소나기에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주듯 그렇게 포근하고 평화롭다. 풍수를 떠나 분위기 자체가 정겹다. 주위의 산세가 풍기는 기운이 그러하단 얘기다.
닭실의 지형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고 한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다. 일반적으로 이 형국은 산세가 험하지 않다. 올망졸망한 산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있다. 닭실도 그러하다. 전혀 험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다. 비단결 같은 산과 물이다.
풍수에서 명당은 크게 장풍국(藏風局)과 득수국(得水局)으로 나뉜다. 전자는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인 곳에 형성된 혈(穴)과 주변 형국을 말함이요, 후자는 혈의 3면이 큰물로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 대구와 개성을 장풍국, 서울과 평양을 득수국 명당으로 꼽는다. 닭실은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장풍국의 지세다. 그 산들은 높지도 낮지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와 거리를 두고 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부드럽고, 아름답다.
장풍국의 형국은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살피면 알아보기 쉽다. 닭실의 금계포란형국은 수구(水口)에서 보면 확연하다. 물의 출구인 닭실의 수구는 마을의 앞, 오른쪽에 있다. 이곳에서 보면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 아래 부채 모양의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구릉과 산이 닭의 날개가 되고 몸통이 된다. 집들은 닭이 품고 있는 알이다. 그래서 금계포란형이다.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그지없이 평화로운 기운이 넘치는 지형이다.
닭실에서 물은 최상의 조건이 된다. 물의 흐름이 그러하고 수구의 조임이 그러하다. 물은 환포하는 것을 최상으로 친다. 둥글게 마을을 감싸 안는 물이다. 닭실의 물이 이러하다. 수구가 벌어지면 기(氣)가 모이지 못한다. 생기가 빠진 땅은 사람이 거주할 곳이 못 된다.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 했으니 재물도 공염불이 된다. 닭실의 수구는 가히 교과서적이다. 안산과 백호가 팔짱낀 양손처럼 관쇄되어 틈새가 전혀 없다. 마을에선 전혀 그 위치를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수구다.
마을 주변의 산들도 어느 한 곳도 등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 마을 왼쪽에서 뻗어내린 청룡은 앞산까지 이어진다. 안산까지 겸한다. 청룡이 안산을 겸하면 청룡작국이 된다. 청룡이 강한 곳이다. 부(富)보다는 귀(貴), 즉 인물이 위주가 된다.
종택의 오른쪽에 청암정(靑巖亭)이 있다. 거북을 닮은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다. 이 정자엔 재미난 얘기가 전해진다. 원래 이 정자는 온돌방으로 지어졌다 한다. 그런데 불을 지피니 바위가 울더란다. 마침 지나가던 노승이 이를 보고 '거북 등에 불을 때니 거북이 울 수밖에 더 있겠느냐'며 마루방으로 개조하라 하였다 한다. 그래서 마루방 형태다. 주변의 연못은 물속의 거북을 위한 것이라 한다. 이 청암정은 자연과 인공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댐, 도로 그리고 집, 공장…. 그 아름답던 산은 깨지고, 그 많던 물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간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 중용(中庸)의 도(道)가 무엇보다 아쉬운 때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국근 편집위원
※ 닭실마을=충재 권벌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500년을 이어온 마을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꼽은 삼남(三南) 4대 길지(四大吉地) 중의 한곳. 전통한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으며, 종택과 석천정사 등 충재 관련 유적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돼 있다. 작년에 옮겨 지은 충재기념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충재일기' 등 40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행정구역명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다.
<36> 대구 우록마을
사슴을 벗 삼아…우록김씨 400년 터전, 산으로 둘러싸인 保身·隱居의 땅우록마을 전경. 높은 산들이 주위를 에워싼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외부세계와의 교류가 활발치 못해 예로부터 은자(隱者)들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김충선 묘소. 세 개의 산봉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사진 속 오목한 부분이다.
김충선=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출전했다 귀화한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사가야(沙可也)이다. 귀화이후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조선 조정으로부터 김해김씨 본관(本貫)과 함께 ‘김충선(金忠善)‘이란 성명을 하사 받았다. 김해김씨는 원래의 김해김씨와 구별을 위해 우록김씨(友鹿金氏)라고도 한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 이괄(李适)의 난(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청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후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우록에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서원 뒤 삼정산(三頂山)에 묘소가 있다.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 등이 피해가는 땅을 승지(勝地)라 한다. 일반인들이 명당(明堂)과 혼동하는 땅으로, 이중 국내에서 유명한 곳 10곳이 십승지(十勝地)로 묶여 잘 알려져 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이고 출구라곤 오직 한 방향뿐이며, 그것도 바깥에서 보면 쉽게 알아볼 수도 없다. 외부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은거하기에도 적합한 땅, 일반적인 양택풍수 이론엔 부합치 않으나 사람들에겐 명당보다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우록마을이 그러하다. 동쪽만이 약간 트였을 뿐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였다. 그것도 500~800m의 높은 산들이다. 그렇다고 험악하지도 않다. 사람을 품어주는 푸근한 느낌이 감도는 그런 후덕한 산들이다. 지금은 전원주택과 각종 음식점으로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지만 400년 전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사슴을 벗 삼는 마을’이란 말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 까닭인지 모를 일이지만 우록엔 우리나라를 스쳐간 그 많은 병화(兵禍)가 한 번도 침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록동 더 깊은 산중에 백록마을이 자리한다. 백록(白鹿)은 고려말 두문동현인(杜門洞賢人)이었던 우현보(禹玄寶)의 후손들인 단양우씨(丹陽禹氏)들이 1550년대에 처음으로 은거한 곳이라 한다. 그 뒤 김충선이 은둔을 위해 찾아와 함께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하니, 이 우록동 골짜기는 지세(地勢)에 따라 적절히 활용된 곳이라 하겠다.
김충선의 묘소는 녹동서원 뒤 삼정산에 있다. 서원 맞은편에서 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다. 오목한 와혈(窩穴)의 형태다. 안산(案山)은 산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뉜 현군사(懸裙砂) 형태를 띤다. 이는 따르는 여자가 많은 사격(砂格)이 되나, 다른 한편으론 자손 번창의 길조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이국땅에 뿌리내려야 하는 입장서 보면 이런 땅을 유택(幽宅)으로 가진다는 것도 하늘이 준 복이라 할 수 있겠다.
참전 당시 김충선은 20대 초반의 약관이었다. 그것뿐 일본 내 고향도, 형제도 지금까지 분명치 않다. 한·일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막연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젊었을 적에 떠나온 고향이기에 향수나 형제들에게 향하는 그리움은 더하였을 게다. 그러기에 그가 남긴 ‘남풍유감(南風有感)’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 오는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
이 내 생전에 골육지친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⑥구례 운조루
나무 쌀독에 담은 나눔의 積善정신금구몰니(金龜沒泥), 금환낙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비기(秘記)에 전하는 전남 구례의 오미리에 있다는 3개의 명당이다. 이중 금구몰니형 명당은 운조루(雲鳥樓) 터로 알려져 있다. 류씨 집안이 이 터를 잡을 때 거북형상의 큰 돌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은 두 개의 터를 찾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땐 전국에서 이주자가 몰려들었다 한다. 부귀영달의 희망을 품고, 아니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풍수에 의지해 벗어나 보자는 바람을 안고 말이다.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저서 '조선의 풍수'에서 '1929년 방문 했을 때 이주해온 집들이 100여 호에 달하고 신축 중인 집도 십여 호였다'고 밝히고 있다.
부귀영화의 꿈을 안고 있는 재산 털어 찾아왔던 명당, 하지만 큰 명당은 하늘이 낸다했다. 몇 년을 기다리다 더 버틸 여력이 없어 유랑민이 되어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이들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운조루는 지리산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섬진강 큰물을 임수(臨水)로 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세를 띤다. 뒤는 병풍을 둘러친 듯 산자락이 감싸고 있다. 형제봉이 뒤를 받치고, 그 뒤엔 노고단이 버티고 섰다. 동쪽의 청룡은 왕시루봉 능선이다.
안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봉긋하게 솟았다. 오봉산이다. 그 뒤의 조산들은 오행의 형상을 띤다. 화산(火山)인 계족산(鷄足山)을 비롯, 그 앞으로 토, 금, 수, 목성형의 산들이 나란하다. 오행의 아름다운 상생이다. 이런 형태의 안·조산을 보기도 흔치않은 일이다. 계족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집 앞엔 연당(蓮塘)을 조성했다. 안산 앞의 섬진강은 오미리를 U자형으로 안고 흐른다.
금구몰니형의 거북이 나온 곳은 지금의 부엌이라 한다. 혈심이 부엌이란 얘기다. 이럴 땐 안방이 그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안방엔 물이 없다. 불을 때면 화기만 충천할 뿐이다. 그래서 그 자리엔 부엌을 위치시켰다. 거북이 물속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한 배치다.
풍수에서 우선시하는 게 적선(積善)이다. 선을 쌓아야 좋은 땅을 얻고, 부귀를 이어간다고 본다. 운조루의 사랑채서 안채로 가는 공간에 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다. 쌀독 아랫부분엔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고, 그 마개 위엔 타인능해(他人能解)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의미다. 배고픈 이들이 와서 먹을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한 것이다. 직접 쌀을 주면 자존심이 상할까 배려한 것이라 한다.
운조루엔 굴뚝도 땅위를 긴다. 높이가 1m 이쪽저쪽이다. 이것도 없는 이들을 배려한 흔적이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한 게 이유란다. 가진 자의 도리, 류씨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현장이다.
금구몰니형의 터에서 나온 돌거북, 류씨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그 거북은 안타깝게도 1980년대에 도둑이 들어 도난당했다고 한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선 어색하고 재앙이 생긴다. 그 돌거북이 제3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하루속히 운조루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운조루=1776년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 원래 99간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60여 간이 남아있다. 운조루의 택호(宅號)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왔다고 한다. 행정구역명으론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이며,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인근에 한국풍수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의 이치를 가르침 받았다는 사도리(沙圖里)가 있다.
<37> 부산 정문도 묘
보릿짚으로 도깨비 속이고 안장…야자형·연화도수형으로 알려져정문도 묘 전경. 겹겹으로 환포한 백호자락들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집들로 채워진 안산 쪽은 옛 사진 속에선 작은 구릉들로 이루어져 있다.
묘 앞서 본 정묘.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멋스럽다. 뿌리가 길게 뻗지 않는 배롱나무는 묘역 조성나무로 제격이다.
◆정문도 묘=경북 예천에 있는 정사(鄭賜)의 묘와 함께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며,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있다. 속칭 조선 8대 명당 중 한곳이다. 음택 주요 답산(踏山) 코스로, 국내 출판 풍수관련 서적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묘(名墓)다. 묘역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으며, 묘 앞 양쪽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수령 800여년의 배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시대 호장(戶長)이었던 정문도(鄭文道)는 동래 정씨 2세조이며, 동래 정씨는 조선시대에만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등을 배출한 명문이다.
조선시대 명문거족 東萊 鄭氏 基地
명당엔 으레 뒤따르는 얘기가 있다. 금기시되던 땅을 천신만고 끝에 길지(吉地)로 바꾸고, ‘명당엔 임자가 따로 있다’는 풍수 격언이 동원되며, 이인(異人)이나 도승이 기이하게 도움을 주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것 등이 그것이다. 부산에 있는 정문도의 묘(鄭墓)에 전해지는 설화도 예외가 아니다.
정문도는 고려시대 부산지역의 관리였다. 그런데 공무(公務)가 끝난 정문도의 상관이 자주 들르는 곳이 있었다. 집무처에서 멀지 않은 화지산 자락, 그곳에서 그는 한참씩 앉아 한숨을 쉬곤 했다. 동행했던 정문도는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중엔 그곳이 명당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 뒤 상관이 개경으로 돌아가자 정문도는 아들에게 그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되고, 아들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안장 후 기이한 일이 생긴다. 밤사이 봉분이 파헤쳐지고 관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 봉분을 다시 쌓고 이튿날 보니 또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에 아들이 이상히 여겨 감시를 한다. 그런데 한밤중에 묘 주위로 도깨비들이 나타나 ‘이 자리는 목관(木棺)을 묻을 자리가 아니고, 금관(金棺)을 써야할 자리다’라며 봉분을 파헤치고 가버렸다. 금관을 마련할 길이 막막하던 아들 앞에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방책을 일러준다. 보릿짚으로 관을 둘러싸고 안장을 하란 얘기였다.
그렇게 안장을 한 그날 밤, 도깨비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똑같이 봉분을 파헤치자 이번엔 금빛이 새어 나왔다. 보릿짚이 달빛에 반사돼 황금빛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를 본 도깨비들이 ‘금관이로구먼. 이젠 됐다’라며 봉분을 다시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 이듬해에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뇌성벽력이 떨어져 이웃 산에 있던 험상궂은 바위를 깨트려버렸던 것이다. 그 상관이 명당의 흠을 아쉬워하며 한숨을 쉬던 원인이 사라진 것이다. 동남쪽 황령산의 괴시암이 그 바위라는 얘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정문도의 묘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태어나게 된다.
정묘를 흔히들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 물위에 핀 연꽃이 고개를 숙인 모양)이나 야자형(也字形) 명당으로 분류한다. 야자형이란 한자(漢字)의 야자를 닮았단 얘기다. 이런 지세에선 가운데 획의 끝머리에 혈(穴)이 맺힌다. 첫 획이 좌청룡이 되고, 마지막 획이 백호가 된다. 굳이 야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좌우의 산들이 혈을 감싸는 지세, 즉 풍수이론 그 자체인 것이다.
겹겹으로 환포한 정묘의 백호는 청룡을 감싼다. 게다가 좌우의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은 부(富)와 귀(貴)를 상징하는 귀한 사격(砂格)들이 즐비하다. 백호가 길게 뻗어 형성한 안산(案山)은 예전엔 금산형(金山形)의 봉우리였다는데 지금은 가득 찬 집들로 높낮이만 확인할 수 있다. 멀리 영도 봉래산이 조산(朝山)이 되는데, 정상은 3명의 걸출한 인물이 난다고 전해지는 삼태봉(三台峰)형태를 띤다. 이렇듯 힘 있게 내려오는 내맥(來脈)과 짜임새 있는 보국, 주위 산들과 혈처와의 절묘한 조화 등 정묘는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묘역은 공원으로 조성돼 개방돼 있다. 이는 명당과 적선(積善)이란 불가분의 관계를 생각게 한다. 더욱이 명당을 구한 이후의 조치이니 더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⑧안동 내앞마을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하면 비록 좋은 밭 만이랑과 넓은 집 천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봐서 구해야 한다.’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살집을 구하는 데 있어 제1조건으로 수구를 꼽았단 얘기다.수구는 청룡과 백호 사이를 흐르는 물의 통로다. 바람의 통로이기도 하다. 풍수에서 수구와 물은 재물로 통한다. 따라서 수구가 넓으면 그 터의 기운, 즉 재물이 새는 것이 된다.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 풍수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단 의미다. 수구가 터져 있으면 장풍이 되질 않는다. 물도 거침없이 빠진다. 명당국세의 기본이 엉성해질 염려가 있다.
내앞마을의 한가지 흠이 이 수구다. 이곳엔 서쪽에 수구가 있다. 백호 쪽이다. 그런데 이곳의 백호는 짧다. 게다가 터를 보듬지 못하고 달아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자연히 수구가 넓어지게 된다. 수구가 열렸다면 막아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모자람을 채우는 것, 즉 비보다.
마을 초입 반변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 임하댐의 보조 댐이 있는 곳에 조그만 섬이 있다. 그 속엔 수백년은 됨 직한 노송들이 줄지어 섰다. 이 소나무 숲이 내앞마을의 터진 수구를 막아주는 수구막이다. 개호송(開湖松),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이 ‘이 숲이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다’며 문중의 이름을 걸고 수백년을 가꿔온 숲이다. 홍수로 유실되고, 함부로 베어지는 일이 발생했을 땐 완의(完議)까지 만들어가며 문중 차원서 보호해 왔다고 한다. 즉 이 개호송이 부실한 마을 서편을 채우고, 마을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이 낸 명당에 인공을 보태 완벽을 기했다 하겠다.
내앞마을을 풍수형국으로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이라고 한다. 비단은 고귀한 이들이 입는 옷이다. 따라서 이런 형국에 살면 부귀를 다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고관이 나온다고 본다. 이 형국의 혈처에 의성 김씨 종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의 풍수’에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소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성 김씨의 중시조인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地處)란 말도 있는데 여기엔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김진이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살아서 벼슬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식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 말해 자신의 벼슬보다 자손의 영예를 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들들의 영달로 자신은 이조판서에 증직됐다고 한다.
개호송, 예전엔 반변천변에 조성된 숲이었을 터지만 지금은 접근조차 여의치 않다. 옛 사진 속 그 아름답던 노송 군락, 지금은 잡목의 침범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다. 하지만 그 의연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내앞마을 인걸들의 강직했던 성품은 선조들의 정성이 밴 저 소나무의 기상을 이어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국근 편집위원
▨ 내앞마을=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영남 사대길지(四大吉地) 중의 한곳으로, 마을 앞은 반변천이 둥글게 환포하며 흐른다. ‘내앞’이란 지명도 천전(川前), 즉 반변천 앞의 마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의성 김씨 동족마을로 형성돼 5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6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학봉 선생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의성 김씨 종택은 보물 제450호다. 이웃에 문화재로 지정된 소종택들이 즐비하다. 특히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원한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 앞에 최근에 건립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의령 솥바위
'큰 부자난다' 전해오던 전설이 현실로
▨ 솥바위=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남강(南江)에 있는 바위섬. 정식명칭은 정암(鼎岩)으로, 그 모습이 솥뚜껑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는 반쯤 물위에 드러나 있으며, 물 아래에 솥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 한다. 전설에 이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20리) 이내에서 큰 부자 3명이 난다고 전해진다. 예부터 도선장이었다 하며, 임진왜란 때 의령 출신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적을 물리친 승첩지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재벌기업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의령군 생가가 공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 최대 부자가 난 터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서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게재됐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말미에 한번씩 언급됐던 게 이 솥바위다.
풍수에서의 만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기운을 갖는다. 이 자연의 기운을 인간과 합치시키는 학문이 곧 풍수다. 예컨대 붓을 닮은 산이 있다면 그 산이 갖고 있는 기운은 붓의 기운이라 본다. 학식을 원했던 이들은 이런 봉우리가 보이는 곳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부자를 꿈꿨던 이들은 노적가리처럼 생긴 산봉우리들이 늘어선 땅에 살 집을 마련했다. 노적가리의 기운이 인간에게 전해지리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솥은 곧 밥을 의미한다. 이게 솥바위가 관심을 끄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정(鼎)은 세 갈래의 발이 달린 솥의 모양을 본 뜬 글자다. 이 세발솥은 중국 고대국가에서 왕권의 권위를 상징했다 한다. 그래서 ‘존귀하다’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따라서 이 ‘정’자가 의미하는 뜻도 최상급이다. 정보(鼎輔)는 삼정승, 정갑(鼎甲)은 과거에 최우등으로 급제한 세 사람, 정조(鼎祚)는 임금의 자리를 의미한다. 또한 정식(鼎食)은 귀한 사람의 밥 먹음이나 진수성찬을 일컫는 것으로 부귀를 뜻했다. ‘정암’도 세 개의 발을 가진 솥을 닮은 바위다. 삼정승에 버금가는 인물을 기대하는 조건이 된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머지 않아 이 바위를 중심으로 국부(國富) 3명이 난다’는 예언을 한 이후,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인근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LG 구인회, 그리고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의 효성 조홍제가 곧 그들이다.
하지만 솥바위로 인해 이들이 태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풍수논리엔 부합하지 않는단 얘기다. 풍수의 주체는 용맥이지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수를 적용시키려면 이들이 태어난 생가에 비중을 둬야 한다. 다행히도 이들 생가는 전설에서처럼 솥바위 주위로 둥글게 모여 있다. 그래서 답산하기에 이만저만 편리한 게 아니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특급 명당엔 대부분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성주 태봉산도 예외가 아니다. 원래 이곳은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소가 있던 곳이라 한다. 태실로 바뀐 과정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자리를 잡아주며 ‘아무리 자손들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지 말 것이며, 주위의 나무도 베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높은 벼슬길에 오른 후손들이 성묘를 할 때마다 너무 초라해 보이는 묘소에 결국 재실을 짓고 주위의 나무도 베어 시원하게 꾸미게 됐다.
그 후 세종대왕이 왕자들의 태실을 마련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 임무를 맡았던 지관들이 이 부근을 지나갈 때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피한 곳이 그 재실이었다 한다. 지관들이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결국 왕의 명령으로 묘를 옮기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엔 이 자리가 아닌 인근에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태실지로 고시가 되면 왕릉 조성 때처럼 주위의 묘를 이장케 했기에 그 결과는 같다. 특히 이곳은 이장경의 후손인 이정녕이 당시 풍수학제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묘소가 있음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태를 중요시한 것은 왕실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백성들은 태반을 왕겨 속에 넣고 태워 그 재를 이른 새벽에 강물에 뿌렸다. 태어난 아기의 복을 빌면서 말이다. 왕실에선 왕손의 무병장수 이외 순조로운 왕업 계승 등을 기원하며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태를 봉안했다. 즉 동기감응에 따라 유골처럼 중요하게 취급했단 얘기가 된다. 때론 왕실을 위협하는 인물의 배출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로 일반인들의 묘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성된 것이기에 태실은 당연히 명당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왕릉은 거리제한에 묶여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태실은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 차이엔 이러한 이유도 한몫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태실의 입지론 일반적인 명당의 제 조건 이외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 하나 더 있다. 반드시 돌혈(突穴), 즉 거북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태인 봉긋한 봉우리여야 했다는 것이다. 전국의 태실봉이나 태봉산이란 지명이 붙은 산은 모두가 이런 형태다. 마치 아이 가진 어머니의 배처럼 둥그스름하고 편안한 그런 산이다.
이곳 태봉산은 교과서적인 명당국세를 갖추고 있다. 주산이하 좌청룡, 우백호 등 주위의 산들이 모두 이 태실을 보듬고 있다. 어느 한곳도 배반된 곳이 없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내려온 물도 이 태실 앞에서 합해져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이룬다. 높이 솟구친 돌혈은 바람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이곳은 잘 짜여진 보국으로 그럴 염려도 없다. 그만큼 큰 자리다.
예전에 그토록 신성시됐던 태, 하지만 요즘은 병원 폐기물 처리장 신세가 다반사다. 심한 경우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기 위해 밀반출되기도 한다. 인터넷 창에 ‘태반’이란 단어를 쳐보라. 태반주사, 태반화장품, 태반건강주스…, 줄줄이 엮여져 나온다.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태실=조선시대 왕자나 공주의 태를 봉안한 곳. 당시 왕실에 아기가 출생하면 이를 관장할 관청이 임시로 설치되고 길일, 길지를 택해 태를 매장했다 한다. 태봉, 태실, 태장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대개 이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 말 일제는 태실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이는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민족혼을 훼손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실은 드물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이며, 비교적 온전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사적 제144호로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다.
경주 최부잣집
12대 300년 富 이어온 '積善之家'
▲ 최부잣집 전경. 이런 고택의 대문들은 집 안쪽으로 밀어 여는 구조를 하고 있다. 생기를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오른쪽 건물이 부의 상징이었던 곳간이다.
▲ 안산. 최부잣집 풍수의 백미가 된다.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우리가 일자(一字)인 이러한 산은 재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엔 반드시 경사스러움이 있다. 즉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이 뒷날 그에 따른 복을 받는다는 의미다. 풍수에서 흔히 인용되는 주역에 나오는 글귀다. 어렵게 주역을 들춰보지 않아도 좋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충분히 교감되는 글이 있기 때문이다. ‘남향 집에 살려면 3대를 적선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풍수를 떠나 남을 위한 마음가짐이 우선이란 우리 조상들 삶의 철학이 배어있는 글귀이기도 하다.
풍수에서든 사주에서든 동양학에선 이 ‘적선’을 중시한다. 삶 전체를 10할로 본다면 그 절반쯤은 이 ‘선 쌓기’에 양보한다. 마음을 예쁘게 써야 좋은 터를 얻을 수 있고,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후손도 태어난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수백 년을 이어오는 명문가엔 이 ‘적선지가’가 상용구처럼 따라다닌다. 그만큼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을 가슴 속에 되새기면서 가문을 계승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게다.
경주 최부잣집도 그런 가문들 중 하나다. ‘흉년엔 재물을 불리지 말 것이며, 사방 백리 이내에 굶는 이가 없도록 하라.’ 덜 가진 이들을 배려한 이 가슴 뭉클한 문구가 300년을 이어온 그들 가문의 가훈(家訓)들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말 그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12대 동안 만석을 일궈낸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여기에 지세까지 재물을 불러들이는 형태다.
풍수에서 재물은 백호가 관장한다. 백호가 튼실해야 재물이 모인다는 말이다. 최부잣집 백호는 활력이 넘친다. 집 뒤편에서 오른쪽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백호의 기세는 가히 압권이다.
그러나 이 집 풍수의 백미는 안산이다. 높지도 낮지도, 배반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이다. 두 팔을 벌린 형태로 이 집을 보듬고 있다. 봉우리가 일자인 이러한 산을 풍수에선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 부른다. 이는 곡식을 쌓아놓은 형태로 재물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쉼없이 그 재물의 기운을 이 집으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맑은 날엔 이 안산 위로 남산의 세 봉우리가 겹쳐서 보인다. 이중안산인 셈이다. 가운데 삐딱한 봉우리가 거슬리긴 하지만 나머지는 재물을 뜻하는 둥그스름한 봉우리들이다.
완전한 명당은 없다 했다. 풍수로 따져 이곳의 가장 큰 흠을 꼽으라면 계림에서 집 뒤로 내려오는 내룡(來龍)이 약하단 것일 게다. 조상들의 집터 조건 1순위는 배산임수(背山臨水)다. 그런데 이곳은 뒤가 허전하다. 즉 임수는 집 앞을 흐르는 남천으로 해결이 되는데, 배산이 되질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모자람을 채우는 것, 즉 비보다. 최부잣집 뒤는 수백 년된 아름드리 괴목 숲이다. 이 숲이 허약한 내룡을 보완하고, 차가운 북풍을 막기도 하는 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숲이다. 왜 거기에 집이 있는지, 숲은 또 왜 조성돼 있는지 풍수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렵던 일제강점기, 12대 마지막 만석꾼 최준은 막대한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당시 이곳 사랑채는 우국지사들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신돌석, 손병희, 정인보, 의친왕 이강…,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드나들었던 사랑채 마루에 앉아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은 뭔지,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권력으로 재물을 긁어모으고, 재물로 산 권력으로 으스대는 요즘 일부 지도층 인사들을 보면 씁쓰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최부잣집=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1700년경에 건립된 고택. 중요민속자료 제27호다. 원래 99간의 대저택이었다 한다. 1970년에 사랑채와 별당이 화재로 소실, 방치돼오다 2006년에 원형이 복원됐다. 원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일화가 전해지는 요석궁(瑤石宮)터로, 집 앞을 흐르는 남천 위로 원효가 건너다 옷을 적셨다는 월정교가 복원공사 중이다. 인근에 반월성과 계림, 경주향교, 내물왕릉 등이 있으며, 김유신 장군의 유허지인 재매정(財買井)도
<39>대구 인흥마을
五行기운 모두 갖춘 背山臨水 길지…일연선사 숨결어린 옛 절터
인흥마을의 주산인 천수봉. 그 아래의 집들이 인흥마을을 이루는 남평문씨가의 고택들로, 왼쪽의 숲이 비보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다. 주산으로 내려오는 맥이 아주 유연하다
마을 내부의 담장. 흙과 돌이 조화를 이뤄 정겹다. 가운데 보이는 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다.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1840년 전후 입향조(入鄕祖) 문경호(文敬鎬)가 터를 잡은 이래로 남평문씨(南平文氏)들만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다. 행정구역상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1리나 인흥마을로 많이 불린다. 보각국사 일연(一然)이 이곳에 있던 인흥사(仁興寺)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뼈대를 완성했다 한다. 국내에 드문 문중문고로 수만권의 전적을 수장한 인수문고(仁壽文庫)로 유명하다. 대구시 민속자료 제3호. 맞은편에 명심보감 판본(明心寶鑑 板本)으로 널리 알려진 인흥서원(仁興書院)이 있다.
주택이나 마을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우선시 되는 게 배산임수다.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물을 보는 지세다. 여기에 남향까지 보태어지면 최상이다. 배산임수 지형은 뒤가 높다. 이 때문에 그 땅은 자연히 안정감이 있게 되고, 햇볕과 바람의 순환도 용이하게 된다.
풍수에서 물은 무조건 그 터를 안고 돌아야 한다. 반대가 되면 물이 치는 형상이다. 물은 재물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땅에서 부(富)는 공염불이다. 물의 바깥쪽은 곧 화살을 맞는 지형이 되기도 한다. 이를 풍수에선 반궁수(反弓水)라 한다. 반궁수 지역은 밤낮으로 화살을 맞는 격이 돼 건강도 장담치 못한다.
배산임수와 함께 중시되는 것이 전착후관(前窄後寬)이다. 앞은 좁고 뒤는 넓어야 한다. 좁은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전체 보국(保局)으로 따지면 수구는 좁아야 하며 명당은 넓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만약 수구가 트여져 있으면 좁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땅이 된다. 비보풍수의 도입이다.
풍수에선 또한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을 중시한다. 그 터까지 내려오는 용맥(龍脈)이나 주위의 산세가 나무와 같이 우뚝 선 산형(山形)에서 정상이 뾰족하거나 바위가 많은 형태로, 다시 일자(一字)처럼 펑퍼짐해졌다가 초가지붕처럼 둥근 형태의 산으로 이어진다면 그 땅은 지기를 제대로 받는 땅이 된다.
인흥마을의 주산은 마을 뒤의 천수봉(天壽峰)이다. 천수봉은 둥근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금형의 산이다. 여기서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펑퍼짐해졌다가 다시 바위가 많은 산으로, 그 위엔 미끈하게 빠진 목성형의 산이 우뚝 서 있다. 주맥(主脈)의 오행상생이다. 따라서 인흥은 오행의 기운이 모두 뭉친 자리가 된다. 산과 물, 즉 음양의 조화도 좋다. 천수봉이 굽어보는 인흥마을을 앞의 천내천(川乃川)이 부채처럼 휘감아나간다.
마을의 안산(案山)은 토성형의 일자문성이다. 주위 산세에 이런 산형이 있으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난다고 했다. 그 너머 조산(朝山)은 말안장처럼 생겼다. 예전에 말은 벼슬아치들의 전유물이었다. 더욱이 안산 너머 조산 사이엔 예쁘장하게 생긴 금형의 산봉우리가 봉긋하다. 주산에 이은 또 하나의 부봉(富峰)이다. 부봉이 뜻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부자다.
인흥의 청룡은 주산에서 뻗어 내린 본신청룡(本身靑龍)이 되나, 그 끝이 마을을 치는 형상이 되어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겠다. 백호는 북서방향이다. 북서쪽은 인흥마을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방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백호가 되는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앉지 못하고 무정하다. 수구가 넓어 들판에 마을이 들어날 판이다. 또한 북서쪽은 찬바람이 매서운 곳이다. 허전한 곳은 채우고, 넘치는 것은 감하라고 했다. 풍수의 기본원칙이다. 그러기에 문씨 문중에선 그 쪽에다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이 송림은 들판과 마을을 구별시켜 주는 울타리 역할에 북서풍을 막아주는 방풍림, 터진 수구를 막아주는 수구막이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참으로 귀한 숲이다.
인흥의 주변 산세는 부드럽다. 부드러움은 무(武)보다 문(文)의 기운을 가진다. 그러기에 일찍이 일연선사에게 삼국유사를 집필토록 터전을 마련해줬을 터이고, 오늘날엔 ‘인수문고’를 통해 수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이는 힘을 갖게 해준 것일 터이다.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듯이 땅도 그마다의 쓰임이 다르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안동 임청각
▲ 임청각 전경. 이 지형을 잠두형(蠶頭形)으로 보기도 한다. 잠두형은 누에가 나방으로 변신하듯 훌륭한 인재의 출현을 상징한다. 또한 누에고치서 비싼 비단이 생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물도 번창하는 것으로 본다. 오른쪽 끝머리에 보이는 탑이 '신세동 칠층전탑'이다.
임청각의 평면도는 동쪽서 봐서 용자형(用字形)이다. 집 뒤로 상산(象山)이 있고, 동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풍수상 지극히 좋은 구조를 가진다. 무릇 집을 지을 때 일자(日字), 월자(月字), 길자(吉字)와 같이 좋은 글자 모양으로 지으면 복이 들어온다. 임청각은 아래쪽 반은 일자이고 위쪽의 반은 월자다. 이 일형과 월형의 합형인 용자형은 하늘의 해(日)와 달(月)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를 받고자 한 것이다. 일, 월을 합친 글자는 밝을 명(明)자가 맞겠지만, 용자로 한 것은 명자의 경우 일과 월이 따로 떨어져 병렬로 되어 있으나, 용자는 완전히 합쳐져 하나의 글자로 되어 분리하면 독립된 문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당시의 명당이론과 실례를 모아 엮은 ‘조선의 풍수’에 실린 임청각 소개 글이다.
임청각은 동향으로 비탈에 조성돼 있다. 용자형은 본채에 해당되는 말이다. 즉 본채의 비탈 위쪽이 월자, 아래가 일자부분이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전체 건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용자형이다. 그러고 보면 임청각의 이 용자형 설계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는 게 된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기원을 품고 말이다. 실제로 임청각의 마당은 다섯개나 된다. 위쪽 월자에 세개가 있고, 아래 일자에 두개가 있다. 용자형 가상(家相)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다.
만물엔 독특한 기운이 있다고 보는 게 풍수 물형론(物形論)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인근의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가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형태의 집 구조는 좋은 기운을 일으키고, 그 기운은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 일자형의 대표적인 가옥이 경주 양동마을의 향단(香壇)이다. 모두가 좋은 기운을 받고자 인위적으로 배치한 구조다.
임청각엔 특이한 방이 하나 있다. 3명의 정승이 난다고 전해지는 산실(産室)인 영실(靈室)이 그것이다. 이 방 앞마당엔 우물이 있다. 그냥 우물이 아니다. 영천(靈泉)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명당혈처에서만 나는 이 물의 정기를 받아서 인재가 난다고 한다. 실제 이 방에서 이상룡이 태어났다.
임청각 앞뜰엔 중앙선 철길이 지나간다. 일제 강점기 때 놓인 이 철길은 이 집안의 기운을 꺾으려 했던 단맥(斷脈)의 흔적이다. 여기뿐 아니다. 지도를 놓고 유심히 살펴보면 안동지역을 지나는 중앙선은 유난히 구불구불하다. ‘철길은 직선’이란 상식이 이 지역에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 이유는 풍수로 찾을 수 있다.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안동의 지맥을 끊어 일제에 항거하는 인물이 배출됨을 막으려 했던 게다. 쇠말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기상을 꺾으려 했던 문화적 침탈 현장인 셈이다.
안동시내서 안동댐으로 가는 길이 ‘석주로’다. 그 2차로 도로 한복판에 고목 한그루가 처량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철길이 기형으로 만들기 이전 임청각 대문을 지키고 있었을 회나무다. ‘위험 장애물’이란 이름표에 새끼줄 목걸이까지 걸고 있다. 암울했던 역사가 만든 천덕꾸러기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래 낙동강은 지금도 흐느끼듯 흐른다.
하국근 편집위원
▨ 임청각=조선 중종 14년 1519년에 고성 이씨 이명(李■)이 지은 집. 안동시 법흥동에 있다. 원래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훼손돼 지금은 50여칸이 남아있다. 본채와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물 제182호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당호(堂號)인 임청각(臨淸閣)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액자의 글씨는 이황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에 국보 제16호인 ‘신세동 칠층전탑’이 중요민속자료 제185호인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과 함께 중앙선 철길 아래에 있다.
<40> 의성 김용비 묘
사진1 의성김씨 중시조인 김용비 묘 전경. 가운데 묘가 김용비 묘다. 겹겹이 많은 산들이 둘러싸 있고, 곳곳에 부봉과 필봉이 줄지어 섰다.
사진2 김용비 묘 원경. 가운데 산줄기의 솟은 부분이다. 주산서 내려오는 용맥이 기세가 좋다. 전형적인 괘등혈이다.
김용비 묘=경북 의성군 사곡면 토현리 오토산에 있다. 김용비(金龍庇)는 의성김씨의 9세조로 중시조가 된다. 그의 생몰연대나 행적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고려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그가 의성 지방을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어 이를 감사하게 여긴 지방민들이 사후 300여년간 추모하는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한다. 이 묘는 실전(失傳)되어 오다가 김성일(金誠一)의 부친인 김진(金瑨)대에 이르러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 학자인 학봉 김성일과 동강 김우옹 등이 후손들이다.
예전에 묘터나 집터를 찾는 하나의 방법으로 매나 연을 띄웠다. 매를 날려 보내 내려앉는 자리나, 연이 떨어진 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김용비의 묘자리 선정엔 연을 동원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의 사후 노승이 나타나 ‘연을 띄워 떨어지는 곳이 명당일 것이니 그곳에 장사지내라’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과연 그 연이 떨어진 곳을 파보니 오색혈토가 나왔다는 것이다. 비석비토(非石非土)인 이 혈토(穴土)는 명당을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 또한 이 얘기는 주산인 오토산(五土山)의 지명 유래가 된다는 주장의 근원이 되기도 함.
김용비 묘의 주산은 오토산이다. 오토산은 한 지역의 명산답게 풍수에 얽힌 얘기도 많이 품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다섯 개의 명혈(名穴)에 관한 얘기다. 즉 오토산 정상엔 제비집 모양의 연소혈(燕巢穴)이 있고,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엔 등잔을 걸어 놓은 듯한 괘등혈(掛燈穴), 서쪽 가지엔 ㄱ자 모양의 곡척혈(曲尺穴), 남쪽 산줄기엔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봉요혈(蜂腰穴), 북쪽 지맥엔 개구리 발자국 모양의 와적혈(蛙跡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의 명당 중에서 동쪽 산줄기에 자리 잡은 것이 김용비의 묘다.
김용비의 묘는 괘등혈로 알려져 있다. 괘등혈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한다. 높은 곳에 있는 등불이 널리 비춘다는 뜻도 가진다. 풍수를 형국으로 조명할 때 안산이 중요하다. 범형에 개나 사슴 등을 뜻하는 안산이 있어야 하듯, 괘등혈엔 기름을 대신할 사격이 있어야 한다. 기름이 있어야 불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다. 이름을 붙이자면 유병안(油甁案)이다. 하지만 이 묘의 주위엔 이런 형태의 사격이 없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평범한 논일뿐이지만 예전에 앞들은 참깨 밭이었다 한다. 등잔에 소용이 닿는 기름의 대신이다. 이는 곧 비보풍수의 도입이 된다.
이 묘를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보기도 한다. 동북쪽 마을의 베틀바위가 옥녀의 베틀이 되고, 묘가 있는 곳이 등잔이 되어 옥녀가 밤낮으로 베를 짜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비단옷은 높은 벼슬아치들이 입는 옷이 된다. 따라서 이 형국에선 높은 관직의 인물이 난다고 본다.
경사지엔 혈이 없다. 용맥이 급하게 떨어지는 곳이라 기(氣)가 모일 새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지세엔 반드시 평평한 곳이 있어야 한다. 이 묘가 그러하다. 주산서 급격히 떨어진 용맥이 이곳에 와서 잠시 숨을 돌리다 다시 급격히 떨어진다. 그 평평한 곳에 3기의 묘가 있는데 가운데 묘가 김용비 묘다.
김용비 묘는 앞이 아름답다. 뚜렷한 안산은 없지만 펼쳐진 전경은 가히 압권이다. 겹겹이 늘어선 조산엔 부봉(富峰), 문필봉(文筆峰) 등이 줄지어 섰다. 이런 전경은 각 문중의 시조묘(始祖墓)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중출맥(中出脈)한 내룡(來龍)의 기세, 주위 산줄기나 물의 환포도 일품이다.
등불의 쓰임은 밝힘이다. 암울했던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절 의성김씨 문중(義城金氏 門中)이 보여준 항일과 독립에 대한 의지는 곧 우리 민족에 드리웠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이 아니었겠는가.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청도 주구산
개 콧등에 쇠말뚝…군민들 열패감 조장
▲ 청도읍 쪽에서 바라본 주구산. 달리는 개의 형상이다. 산의 오른쪽 정상부분에 있는 건물이 ‘떡절’이다. 그 아래에 쇠말뚝을 제거한 뒤 세운 표지석이 있다.
▲ 쇠말뚝 제거 표지석. 이곳에서 지름 4cm, 길이 1m 정도인 쇠말뚝이 발견됐다. 쇠말뚝은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제거됐다.도군 화양읍 토평리는 말발굽 명당이다.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이 들판으로 트여져 있는 마을이다. 기록으로조차 희미한 옛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이기도 하다. 이 이서국이 신라에 병합되기 전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이 폐성(吠城), 즉 지금의 주구산(走狗山)이다. 패망한 신라의 잔병들이 이곳에서 고려의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주구산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 때 청도군수로 부임한 황응규가 지었다 한다. 이름 그대로 이 산의 형태는 영락없이 달리는 개의 모양이다. 그런데 쫓아가든 쫓기든, 달리는 형상은 뭔가 불안하다. 주저앉혀야 한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개의 머리 부분에 떡을 상징하는 절을 세웠다. 떡절(德寺)이다. 개가 떡을 먹기 위해선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 떡절이 생긴 연유다. 그 뒤로 이 근방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늘고 인물도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넘치는 것을 억누르거나 깎아서 완벽한 땅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비보(裨補)의 반대개념인 염승(厭勝)이다. 그만큼 주구산은 전략상으로나 풍수로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청도의 명산인 셈이다.
일제는 조선침략을 위해 수십년에 걸쳐 한반도의 지형과 조선인들의 풍수관을 조사했다 한다. 전국적으로 수집한 그 자료들을 토대로 혈처라 여겨지는 곳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신사(神社)를 세웠다. 도로나 철도를 놓아 맥을 끊기도 했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믿어왔던 풍수를 역이용한 셈이다. 풍수에서 자주 언급되는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저서 ‘조선의 풍수’도 그 출간 목적에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포함됐다고 본다. 이 책은 일제의 문화침략이 활발히 전개됐던 1931년 조선총독부가 관권을 총동원해 자료를 수집, 출간한 풍수개괄서이기도 하다.
좋은 땅의 기운을 받으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고 부자가 난다고 보는 게 풍수다. 이를 뒤집어보면 좋은 땅의 기운을 꺾으면 더 이상의 발복이 없다는 게 된다. 일제의 풍수침략 의도는 ‘이 곳 명당은 쇠말뚝을 박아 혈을 파손시켰다. 그러니 이 곳에서 더 이상의 인물이나 재물을 기대하지 마라’라는 것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예로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도로로 인해 궁궐과 동떨어지게 된 종묘를 들 수 있겠다. 모두가 정신적, 문화적 패배의식이나 열등의식의 조장이다.
이 쇠말뚝 정기 끊기는 일제의 독창물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그 원조라 한다. 조선의 산세를 본 이여송이 데리고 온 지관들을 시켜 혈맥이라 여겨지는 곳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불을 피워 뜸을 놓았던 것. 빼어난 산천의 기운을 받아 인물이 속출됨을 두려워했다는 게다.
주구산 떡절 밑 절벽 위엔 표지석이 하나 서있다. 일제 때 박았던 쇠말뚝을 제거한 흔적이다. 그 위치가 개의 콧잔등이다. 콧등에 박힌 철심, 개는 떡이 있어도 먹을 마음이 없었을 게다. 아니 삶 자체가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상처는 다 아물었을까.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표지석이 선명하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주구산=청도군 화양읍에 있는 산. 그 형상이 달리는 개의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00m의 높지 않은 산으로 ‘떡절’이 있다.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예부터 전략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옛 이서국의 수도 방위의 전초기지로 추정되는 산성도 이곳에 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쇠말뚝 제거현장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41>영양 주실마을
단아한 文筆峰…지혜와 지조를 낳다.
주실마을 전경. 가운데 기와집이 몰려있는 곳에 종가인 호은종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와혈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매를 날려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실마을=행정구역상 명칭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선 중기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터를 잡은 이후 한양조씨들이 380년간 세거한 동족마을로, 박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일부가 소실됐으나 1960년대에 복원됐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이 마을 출신이며, 비보풍수로 조성된 마을 입구의 숲은 2008년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바 있다. 경북도기념물 제78호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북도민속자료 제42호인 옥천종택(玉川宗宅), 지훈문학관 등이 마을 내에 입지해 있다.
명문고택이나 명묘(名墓) 주위의 산세엔 대부분 한, 두개의 문필봉(文筆峰)이 있다. 붓은 곧 글이 되고, 문장이 된다. 즉 학식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신분이었던 ‘글 잘하는 선비’의 표상이 이 문필봉이다. 따라서 터를 고를 때 제1의 요건이 문필봉, 즉 필봉(筆鋒)이었다 하겠다. 따라서 그 당시의 명당 찾기는 곧 필봉을 찾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산세 뿐 아니다. 바위도 해당이 된다. 호남의 거유(巨儒)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향한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이 그것이다. 서원의 이름은 곧 붓 형태의 바위를 지칭한 것이 되고, 실제로 서원서 멀지않은 그가 태어난 마을 입구엔 붓을 닮은 바위가 있다.
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봉우리다. 붓을 닮은 그 산의 기운이 거주자에게 미친다고 보는 게 풍수다. 주위의 산세가 그 곳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것은 굳이 풍수를 들이대지 않고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이 좋은 예가 된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 동서양이 다를 바 없다.
문필봉하면 떠오르는 곳이 주실마을이다.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만도 하다. 박사가 많이 배출됐다고 하는, 즉 결과론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잘 생겼다는 말이다. 필봉은 삐딱해선 안된다. 수려하고 단정해야 한다. 그것도 이쪽에서 보나 저쪽에서 보나 한결같은 모습이면 더욱 좋다. 삐딱한 필봉아래선 학자가 나도 올바르지 않다. 곡학(曲學)하는 학자가 난다. 이는 곧 세상을 호도하는 사이비학자다.
풍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안산이다. 즉 좋은 산세가 좌우에 있는 것보다 집터나 묘터의 앞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실의 문필봉은 안산이 된다. 최적의 조건이다. 여기에 벼루에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연적봉까지 나란히 붙어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주실의 주택들은 대부분 이 필봉을 바라보고 서있다. 그만큼 주실에선 이 필봉을 중시한다.
문필봉뿐만 아니다. 그 옆으론 노적봉(露積峰)도 솟구쳤다. 노적봉은 노적가리를 닮은 산이다. 문필의 문(文)에다 노적의 부(富)까지 갖춘 지세다. 골짜기의 좁은 지세에서 그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풍수의 위력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주실을 흔히 호리병 형국이라고 한다. 사실 골짜기의 모습이 꼭 닮았다. 가운데가 넓고 양쪽으로 좁다. 마을 입구 쪽이 주둥이가 된다. 병의 주둥이가 넓으면 속에 든 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물이 나가는 것이 보이면 재물도 사라지고 건강도 나빠진다. 기운도 함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꽉 막혀야 한다. 주실마을 입구에도 비보로 조성된 숲이 있다. 뿌리 내린 지 수백 년이 지난 느티나무, 소나무 등으로 빼곡하다. 수구막이 숲이다. 이 숲은 2008년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실조씨 문중엔 삼불차(三不借) 원칙이 지켜져 온다. 세 가지 빌리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이다. 인불차(人不借), 재불차(財不借), 문불차(文不借)가 그것이다. 사람을 빌리지 않고, 재물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가, 조지훈 하면 시인 이전에 먼저 ‘지조론(志操論)’을 떠올린다. 당당하게 산다는 것, 이게 곧 삼불차의 정신일 터이다
밀양 영남루
절경을 굽어보는 영남제일의 누각
▲ 영남루 전경. 능선 너머에 밀양시가지가 있다. 영남루 능선은 밀양의 좌청룡이 되며, 오른쪽 남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시가지에 생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산등성은 기운이 모이지 못하는 곳이기에 살림집 터로는 부적합하다.
▲ 안동 낙동강가에 있는 영호루(위)와 청도 동창천 암벽위에 있는 삼족대. 모두가 강을 끼고 절벽위에 자리 잡고 있다. 누각이나 정자는 대개 이런 절경에 위치한다.
▨ 영남루=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후기 누각으로 보물 제147호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혀왔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건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공간으로,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어졌다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 조선 헌종 때 새로 지은 건물이다. 주변 곳곳에 있는 석화(石花)는 돌의 형태가 국화꽃을 닮아 유명하다. 앞뜰에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신 천진궁(天眞宮)이, 누각 아래 대숲엔 아랑 전설이 깃든 아랑사(阿娘祠)가 있다.
땅은 제각각의 쓰임이 있다. 살림집, 정자 터, 절집, 무덤, 아니면 동물이나 식물들만의 거주지가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산등성이는 사람이 사는 살림집 터로선 부적합한 땅이다.
영남루(嶺南樓)는 시야가 트인 능선에 있다. 사방으로 바람을 맞는 이런 곳은 생기가 모이지 못한다. 주혈(主穴)을 맺는 본신룡(本身龍)이 아니란 얘기다. 영남루 능선의 오른쪽은 시가지고, 왼쪽은 시가지를 감싸고도는 남천강이다. 즉 영남루가 자리한 능선이 강바람과 들바람을 막고, 적당히 습도도 유지케 해 그 안의 시가지에 생기를 만들어 준다. 주체가 아닌 객체, 밀양 시가지를 형성시켜주는 좌청룡의 역할에 만족해야하는 땅이다. 바람이 시원한 곳, 경관이 아름다운 이런 곳은 한때의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그러고 보면 영남루는 옛날부터 그 용도를 땅의 쓰임새에 제대로 맞췄다고 하겠다. 전국의 유명 정자나 누각은 대개가 이런 곳에 위치한다.
물은 내가 활을 당기는 형태, 즉 내가 있는 곳을 빙 둘러 흘러야 한다. 그래야 물의 공격으로부터 내가 안전할 수가 있으며, 나아가 물의 보호구역 안에 있게 된다. 그 반대쪽은 물의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화살을 맞는 쪽, 이런 물의 형태를 반궁수(反弓水)라 한다. 안동의 하회마을을 참고로 하면 되겠다. 낙동강 건너 하회의 반대쪽은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물의 공격으로 인해 살집은 다 뜯겨나가고 뼈대만 앙상한 격이다. 물의 공격이 무서운 곳, 그러기에 살림집이 없다. 대신 절벽마다 정자를 지었다. 정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한폭의 그림이 된다. 산과 물, 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탁 트인 시야와 시원한 바람, 흘러오는 강물이 아름다운 영남루의 입지도 그러하다.
물이 직선으로 들이치는 곳은 바람 길이기도 하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준말이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남천강 물길이 직접 쏘아 들어오는 이런 곳은 장풍은 아예 물 건너간다. 또한 산등성은 물이 모이지 못한다. 물은 재물이다. 당연히 돈도 모이지 않는다. 이래저래 영남루 터는 살림집 터론 어울리지 않는다. 누각 터로 자리매김했기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장소가 됐을 게다.
산의 뒷면엔 생기가 없다. 사람의 중요기관이 앞부분에 있듯 산의 앞면에 양명한 기운이 모인다. 산의 뒷면은 큰물이 흐르고 큰 바위들이 많다. 땅의 표면도 무르고 대부분 가파르다. 산사태가 나는 곳은 대개 이런 곳이다. 산비탈에 지은 집이 앞에 물을 만났다고 해서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제대로 됐다고 하지 않는다. 배산임수 마을은 완만한 땅의 앞면에 물이 감싸 안는 그런 곳이다. 이런 땅만이 살림집 터로 된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산다. 사람은 사람이 살아야 할 땅에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연도 우리를 보듬어 준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성주 한개마을
산들이 겹겹이 에워싼 藏風形 명당
▲ 마을 뒤에서 바라본 한개의 전경. 층층으로 보이는 기와집들의 용마루가 정겹다. 정면에 말안장처럼 보이는 산이 안산이다. 말은 일정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탄다. 따라서 이런 형태의 안산은 고귀한 인물이 난다고 본다.
▲ 한개마을의 주산인 영취산. 봉우리가 봉긋한 이러한 모양을 옥녀봉(玉女峰)이라 한다. 여기에서 지맥이 많이 뻗어 내리면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 된다. 그래서 한개를 옥녀산발형 명당이라 보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의 주택입지 제1요건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했다. 뒤에 산을 두고 앞으로 물을 보는 곳이다. 한개는 완만한 경사지에 조성돼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이 흐른다. 또한 평야지임에도 앞이 확 트였다. 전저후고(前低後高)도 확실하다. 이래저래 한개는 풍수적 마을 입지로 제격이다.
한개마을의 주산은 영취산(靈鷲山)이다. 마을을 감싸는 청룡과 백호는 모두 이 영취산에서 직접 뻗어 내렸다. 풍수용어로 본신용호(本身龍虎)다. 이런 형태는 다른 산에서 내려와 감싸는 경우보다 그 기운이 훨씬 강한 것으로 본다. 그것도 겹겹이다. 청룡과 백호뿐 아니라, 마을 앞 안산과 조산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있다. 장풍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다. 전형적인 장풍형(藏風形) 명당이다. 더욱이 청룡과 백호는 거의 높낮이가 같다. 마을에서의 거리도 비슷하다. 좌우의 조화, 그래서 느끼는 분위기가 더욱 아늑한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다 적당한 높낮이에 마을을 향해 읍(揖)하는 안산의 아름다움은 주산의 배필로 그만이다.
한개마을은 서남향이다. 지세에 따른 자연스런 배치다. 주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온 중심 맥은 좌선(左旋)이다. 산의 능선이 왼쪽으로 굽었다는 뜻이다. 그곳에 마을이 들어섰다. 좌우에 산들이 감싸 안고, 그 중심에 마을이 위치한다. 이를 문자에 대입시키면 야자(也字)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 마을의 지맥은 야자의 가운데 획이다. 그래서 한개마을의 지형을 야자형 명당이라 보기도 한다.
물은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흐르는 형태가 좋다고 했다. 이른바 궁수(弓水)다. 하지만 백천은 마을을 환포하지 않는다. 외백호 끝자락서 외청룡으로 굴곡이 없이 곧장 흐른다. 다행히 외청룡이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을 막고 있다.
명당을 이루는 산과 물의 조화의 백미는 역수(逆水)다. 역수를 이루지 못하는 터는 명당을 이루지 못한다고 본다. 한개의 물이 역수다. 서쪽에서 이천과 합친 후 남동쪽으로 흐르는 백천은 마을 밖의 청룡에 부딪혀 곧바로 빠지지 못한다. 수구(水口)가 닫혀있다는 얘기도 된다. 물이 나가는 곳인 수구가 벌어져 있다면 생기를 저장하지 못한다. 물 따라 기운도 빠져나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개마을에 들어서면 아늑한 분위기를 먼저 느낀다.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산들…, 그 산들이 엮어내는 맑은 기운 때문일 게다. 마을과 산의 조화가 이처럼 아름다운 곳도 흔치 않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한개마을=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성산 이씨 집성촌,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개척한 이후 마을의 역사가 600년에 가깝다. 한개는 대포(大浦)의 순 우리말 표현으로 ‘큰 나루터’를 뜻한다. 옛날 마을 앞을 흐르는 백천(白川)을 이용해 나룻배가 오르내렸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한다. 한주종택(寒洲宗宅), 북비고택(北扉古宅), 교리댁(校理宅) 등 마을의 한옥들은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돌과 흙을 번갈아 얹어 쌓은 옛 담장은 등록문화재 제261호다. 인근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예산 남연군 묘
산천의 정기모아 2代 걸쳐 皇帝 배출
▲ 남연군묘 전경.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옥양봉이다. 묘의 좌향은 지세에 따라 주산이 아닌 이 봉우리에 맞추고 있다. 묘 앞 도톰한 반석(盤石)을 옥새로 보기도 함.
▲ 등 돌린 돌부처. 기이하게도 계곡을 향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둔덕이 남연군묘다. 그 뒤의 산이 백호가 되는 가야봉이다.
풍수에 학계에서 회자되는 말에 '탈신공개천명(脫神功改天命)'이 있다. 쉽게 풀이해 팔자(八字)를 고친다는 뜻으로, 좋은 터에 부모 시신을 모셔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이다.
대권(大權), 웬만큼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치고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게다. 요즘도 대선(大選) 철만 되면 '누구누구는 부모 묘를, 누구는 조부모 묘를 옮겼다더라'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지면에 오르내린다. 잘 되면 제 탓이요, 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 그 결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도 많다. 극적인 삶의 반전(反轉), 그 원초적인 곳에 흥선대원군이 있다.
안동 김씨들 세도가 서슬 퍼렇든 구한말 시절, 흥선군은 파락호 신세였다. 그 내심은 실추된 왕권을 되찾자는 열망으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천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풍수서적을 섭력했다. 발품팔기도 십여년, 지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찾은 군왕지지(君王之地)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절터였다. 갖은 계략으로 절에 불을 지르고 지금의 묘 자리에 있던 탑을 헐어내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시신을 모셨다. 조선의 국운(國運)과도 연관된 남연군묘는 이렇듯 사연도 많다.
남연군묘의 주산은 가야산 석문봉이다. 600여m의 이 봉우리는 좌우로 옥양봉과 가야봉을 시립시킨다. 임금의 자리를 걸출한 인물들이 보좌하는 격이다. 임금과 정승만 있다면 의미가 없다. 청룡의 뭇 봉우리들과 백호의 봉우리들도 신하가 되어 읍(揖)하듯 머리를 조아린다. 뒤를 둘러싼 산들은 옥좌 뒤의 병풍이 된다. 조정(朝廷)의 형태다.
신하만 똑똑해서도 안 된다. 우선 임금이 인물이 돼야 한다. 주산서 내려온 주룡(主龍)은 그 기운이 하늘을 찌른다. 산은 변화가 많을수록 힘이 강한 것으로 본다. 남연군묘 주룡이 그러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솟았다 엎드린다. 솟은 봉우리에서 소진했던 기운을 다시 보충시켜 또다시 나아간다. 기복(起伏)의 연속이다. 좌우로의 굴곡(屈曲)도 기세가 출중하다. 그 말미에 온힘을 다해 솟구쳐 혈장(穴場)을 만들었다. 둥그스레한 형태, 지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뭉쳤다. 그 위에 남연군묘가 있다.
남연군묘로 가는 입구에 마을이 있다. 수구(水口)다. 바깥으로 청룡이, 그 안쪽으로 백호가 물샐틈없이 둘러막았다. 완벽한 형태다.
청룡 쪽 계곡에 돌부처 한 기가 서 있다. 기이하게도 묘를 등지고 계곡을 향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특이한 배치다. 안내판에 대원군이 절을 불사를 때 그 꼴이 보기 싫어 등을 돌렸다는 글이 보인다. 그 곁의 두개의 산줄기도 특이한 모습이다. 주먹을 쥔 듯한 모습으로 묘를 향한다. 어쩌면 돌부처는 이 산들의 살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돌부처의 온화한 미소는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남연군묘=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소. 우리나라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독일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6년 두 차례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의 압박하기 위하여 1868년에 도굴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신과 부장품들을 협박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도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된 계기가 됐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으며, 충남도 기념물 제80호다. 인근에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군위 한밤마을
▲ 팔공산 한티재에서 내려다 본 한밤마을. 북풍을 피해 산줄기가 다하는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절벽에 군위 삼존석굴이 있다.
▲ 솟대. 행주형인 한밤마을을 지탱해주는 비보물. 돛이 되기도 하고 닻이 되기도 한다.
풍수의 목적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자연과 인간 간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좋은 땅에 집을 앉히고, 조상을 모심이 그 예가 된다. 그것은 자연에의 역세(逆勢)가 아닌 순응(順應)이 기본이 된다. 흔히 말하는 발복(發福)은 그 후의 문제다.
한밤마을은 사방이 팔공산 준령이다. 북쪽만이 물길을 따라 숨통을 틔우는 완만한 경사지형태다. 마을이 앉은 방향은 북쪽이다. 굳이 북향을 원치는 않았겠지만 지세에 따르다 보니 자연스레 잡힌 틀이다. 자연에의 순응이다.
북향 명당의 지세는 대개 마을로 내려오는 산줄기(來龍)가 길다. 햇볕을 잘 받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된 땅이다. 아산에 있는 맹씨행단이 그러하고, 고창에 있는 김성수 생가가 그러하고, 북향을 하고 있는 묘소들이 그러하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좋은 땅이라 할 수 없다. 북향의 제1요건이 되는 셈이다.
북향 마을은 북풍이 매서운 곳이다. 한밤이 완만한 경사지 대신 산줄기가 다하는 구릉지에 자리 잡은 이유 중의 하나다. 경사지는 바람에 노출된 지역이 된다. 차가운 기운이 밤낮 없이 몰아친다. 이런 곳은 생기(生氣)가 모이지 못한다. 풍수용어로 산기처(散氣處)다.
한밤마을의 동구엔 숲이 조성돼 있다. 북풍을 막는 기능이외, 풍수적으로 큰 의미가 내포된 숲이기도 하다. 풍수에선 물이 마을에서 곧 바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면 재물이 새는 것으로 본다. 대율리 숲은 새는 재물을 막는 비보(裨補)로 조성된 것이란 얘기다.
한밤에는 옥소덤이니, 보경들이니 하는 지명들이 눈에 띈다. 풍수 형국론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지명들이다. 주산격인 오재봉의 봉긋한 봉우리가 옥녀의 머리가 되고, 여기에서 뻗어 내린 지맥은 머리카락이 된다. 머리를 빗기 위해 필요한 빗이 청룡에 있는 참빗모양의 바위로 된 산자락, 즉 옥소덤이다. 백호쪽 물 건너 보경들은 옥녀가 보는 거울이 된다.
한밤마을 숲 들머리엔 진동단(鎭洞壇)이란 명패를 붙인 돌 솟대가 서 있다. 한밤의 또 다른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을 설명하는 유물이다. 배는 돛대와 닻과 키가 필요하다. 진동단은 출렁대는 마을을 진정시켜주는 닻이 되기도 하고, 배의 순항을 보장해 주는 돛이 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물이 넘쳐나지만 예전 이 마을엔 변두리에 서너개의 우물이 전부였다 한다. 이는 행주형의 또 하나의 특징인 ‘마을 복판엔 우물을 파지 않는다’를 실천한 것이라 봐도 되겠다. 배에 구멍이 생기면 배가 침몰한다. 그것을 막자는 의도였던 게다.
솟대 꼭대기엔 오리 한 마리가 덩그렇게 앉아 있다. 언젠가 그 오리까지 떼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다.
하국근 편집위원
▨ 한밤마을=부림홍씨 가문이 950년쯤에 개척한 집성촌으로 팔공산 산간 분지에 형성된 마을. 예부터 대식(大食), 대야(大夜) 등으로 불려졌다 한다. 처음엔 여러 성씨들과 함께 마을을 이뤘으나 고려 말 홍씨들이 득세, 600여년을 이어왔다고 전한다. 마을 입구의 숲은 임진왜란 당시 홍천뢰 장군이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이라 한다. 보물 제988호인 대율리 석불 입상이 마을 안에 있으며, 인근에 국보 제109호인 군위 삼존석굴이 있다. 돌담이 유명하며, 부계면 대율리가 행정구역명이다.
진주 중촌마을 코끼리 석상
코끼리 석상 세워 호할의 분노 누르다
▲ 호랑이를 노려보는 코끼리 석상. 풍수에선 산을 살아있는 동물로 보기도 한다. 맞은 편 가운데 산의 채석장이 호랑이 얼굴이다. 뒤의 산 능선은 호랑이 등줄기가 된다.
▲ 문제의 호랑이 얼굴. 오른쪽 산줄기는 웅크린 호랑이의 앞발이 된다. 앞 강물은 남강이다.
서적에 조산(朝山)은 불가파두(不可破頭)요, 안산은 불가파안(不可破顔)이란 말이 있다. 마을 앞에 보이는 먼 산은 그 머리가 깨져선 안되고, 가까이에 있는 산은 얼굴이 깨져선 안된다는 의미다. 이는 풍수의 기본인 지기(地氣)가 사라진다는 것외에 뭇 신하들이 되는 조산과 주산의 배필이 되는 안산의 결함은 곧 보국(保局)이 깨진다고 보기 때문에 강조되는 사안이다.
처음부터 이런 형상이었다면 조금은 덜 하겠지만 마을이나 묘지가 조성된 이후에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면 그 파장이 크다고 본다. 자연이 모태가 되는 풍수입장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모체의 이상이 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쯤으로 보면 되겠다. 석산개발은 이런 의미에서 풍수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 안산이나 조산의 얼굴, 머리에 무지막지하게 생채기를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풍수 형국론에 오수부동격(五獸不動格)이란 게 있다. 다섯 마리의 짐승이 서로 대치한 상태서 평온을 유지하는 곳이다. 즉 호랑이는 개를, 개는 고양이, 고양이는 쥐, 쥐는 코끼리를 견제하는 땅이다. 이들 동물들은 서로의 천적이 되는 관계로 누구도 섣불리 부화뇌동 하지 못한다. 긴장관계 속의 평화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이상이 생기면 그 평온은 도미노 식으로 깨진다. 풍수 입장서 보면 재앙이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진주 대곡면 중촌마을 회관 마당엔 코끼리 석상 한 쌍이 전면을 노려보고 있다. 이 코끼리는 당시 신문과 잡지, 방송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반대편 산에는 요즘도 석산개발이 한창이다. 그 산은 호랑이를 닮았다. 그래서 복호형(伏虎形)이다.
1990년대 초 이 마을에선 변고가 잇따랐다고 한다. 자동차에 치여, 물에 빠져, 나무에서 떨어져 세상을 등진 이들이 속출했다. 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는 참변에 마을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그 원인을 찾았다. 귀착점은 채석장. 그때부터 회사와 주민들 간에 풍수다툼이 시작됐다.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90년대 중반에 세워진 이 코끼리 한 쌍이다. 코끼리가 호랑이의 분노를 잠재워 주리라 생각한 주민들의 요구를 회사 측이 들어준 거다.
코끼리 석상이 세워진 이후 변고가 많이 수그러졌다한다.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는 말이다. 마을사람들은 코끼리가 호랑이를 진정시켰다고 여겼다. 그런데 재작년, 2006년도에 또 다시 참사가 일어났다. 진저리나는 교통사고로 4명이 한꺼번에 참변을 당한 것. “아마도 코끼리의 힘이 다 했나 본데 더 강한 동물이 어디 없을까. 그러면 백호(白虎)면 어떨지….” 확장공사가 한창인 마을 앞 도로변서 만난 아주머니의 얘기다.
얼굴이 깨진 호랑이는 이제 목덜미까지 파였다. 남강에 비친 몰골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아니 아예 형체조차 없는 꼴이다. 상처 입은 호랑이를 달랠 방도는 어디에 있을까.
하국근 편집위원
▨ 비보염승(裨補厭勝)=모자람을 채우는 것, 즉 불완전한 땅을 고쳐서 주택이나 묘지로 쓰는 것을 뜻하는 풍수 전문용어. 비보(裨補)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벽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며, 염승(厭勝)은 너무 지나친 것을 억눌러 완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물이 빠지는 곳이 넓으면 기(氣)가 새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임의로 조성한 숲이 비보물이다. 안동 내앞마을 개호송이 대표적이다. 반면 마을을 위협하는 나쁜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세운 동물상 등은 염승물이 된다.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세운 광화문 앞의 해태상이나 구례 운조루 대문 앞의 연못은 뾰족뾰족한 안산(案山)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만든 염승물이다. 이 염승을 진압(鎭壓) 또는 압승(壓勝)이라고도 한다. 한 마디로 비보염승은 인위적으로 좋은 기운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안동 가일마을
▲ 정산과 가일마을 전경. 주민들은 정산의 세 봉우리가 학이 날개를 접고 둥지에 앉는 형상이라 했다. 왼쪽 긴 능선이 학의 부리가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짧은 능선에 안동 권씨 입향조 권항 묘소가 있다. 고택들은 주맥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 잡음.
▲ 마을의 기운이 새는 것을 막는 저수지. 고목은 보호수로 지정된 버드나무다. 그 옆의 돌이 남근석이다. 뒤에 앙증맞게 생긴 작은 남근석이 하나 더 있다.
주산은 한 나라의 국운에서부터 작게는 한 묘소에 이르기까지 그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풍수 잣대로 보면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 인왕과 북악의 한양 주산 논쟁을 실례로 들어도 되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마을이나 유명 묘소를 찾을 때 참고로 하는 것도 이 주산이다. 긴가민가한 경우 빼어난 산형을 보고 그 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론 혈처(穴處)를 찾을 때 적용되기도 한다. 주산이 균형 잡히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 혈이 된다는 게다.
가일마을 앞 도로에서 보면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저수지의 둑만이 덩그렇다. 다만 둥그렇게 솟은 정산의 세 봉우리가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그 모습을 보일 뿐이다. 주산만을 보고 작은 오솔길 같은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가면 마을이 있다. 주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풍수이론이다. 저수지에 비친 마을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마을 주민들은 가일을 학이 내려앉는 형국이라 믿는다. 마을이 학의 보금자리란 얘기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위성사진을 보면 뚜렷하다. 학이 날개를 접는 모습에다 긴 주둥이도 영락없다. 형국론으로 따져 마을 어귀 저수지는 학이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수원처라 보면 되겠다.
가일의 앞마당은 드넓은 풍산들이다. 앞이 확 트였다는 의미다. 뚜렷한 안산(案山)이 없다는 얘기도 된다. 이럴 땐 앞을 막아줘야 기운이 새지 않는다. 저수지는 설기(洩氣)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옛 책에 안산은 물로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수주작(水朱雀)이 그것이다. 이래저래 동구의 저수지는 맡고 있는 역할도 많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면 정산은 바위산이라 한다. 마을 어느 곳을 파더라도 물이 난다고도 했다. 정산 정수리에 언뜻언뜻 보이는 암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행의 법칙에 따르면 돌(金)은 물(水)을 생(生)한다. 그리고 금과 수는 음양(陰陽)으로 따지면 음(陰)이다.
저수지 옆 보호수로 지정된 버드나무 아래엔 크고 작은 남근석(男根石)이 두개 서 있다. 만물 중에 남자는 양기(陽氣)를 대표한다. 그러기에 이 남근석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것 이외에 왕성한 음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음양의 조화를 위한 비보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는 얘기다.
정산은 부봉(富峰)이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다. 정산과 같은 정감을 주는 주산도 보기가 쉽지 않다. 전형적인 부자가 나는 산이다. 지세도 삼태기 형상이다. 삼태기는 곡식을 담는 기구다. 말 그대로 이곳 지형은 재물을 모으는 형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산세가 단조롭다는 것. 하지만 들 복판에 솟은 산은 힘이 있다고 본다. 편편한 땅에서 솟구치기에 그렇다. 거기에다 산과 물, 들과 인위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뤘다. 그러기에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이 돼 6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이어오지 않았겠는가.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 가일마을=안동 권씨 집성촌. 입향조인 권항(權恒)이 15세기에 정착한 후 안동 권씨 역사만 500여년이다.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柳從惠)의 숙부인 류개(柳開)가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했다 한다. 이후 류씨와의 혼인관계에 의해 순흥 안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 등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습재, 수곡고택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주산인 정산(井山)을 사이에 두고 이웃에 안동 김씨 총본산격인 풍산읍 소산마을이 있다. 풍천들 건너에 하회마을이 있고, 정산은 경북도청 이전지의 청룡이 되기도 한다. 행정구역은 풍천면 가곡리.
(44) 경주 안강읍 창녕 조씨 시조 묘
꿩이 숲속에 엎드린 듯 아늑한 지세
▲ 조계룡 묘 원경. 한 마리의 꿩이 날개를 펼치고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산의 흐름이 물결이 이는 것처럼 부드럽다. 원내가 묘역이다.
▲ 산진처에 자리한 묘역. 앞으로 안강들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창녕조씨 시조 묘=경주시 안강읍 노당리에 있는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의 묘.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배후에서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역은 두 개의 분묘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의 분묘는 말무덤으로 전해진다. 재사(齋舍)인 종덕재(種德齋)의 정당(正堂)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91호다. 인근 옥산리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으며, 맞은편 안강들 너머 강동면엔 영남의 길지(吉地)로 알려진 양동마을이 위치함.
상서로운 날짐승하면 생각나는 게 봉황(鳳凰)이다. 천상의 닭을 상징하는 금계(金鷄)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상 속의 새다. 우리들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꿩은 아니다. 실제 존재하는 동물이고 잡아먹기도 한다. 예전엔 꿩도 상서로운 새였다. 악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영물이라 여겼단 얘기다. 그러기에 조선시대 왕비의 대례복에 꿩을 수놓았고, 초례상 신랑신부의 맞절 때도 등장했으며, 폐백 시에도 꿩고기 포(脯)를 놓고 신부의 절을 받았다 한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였던 무당의 모자에도 깃을 꽂아 권위를 상징했다. 그러고 보면 꿩은 영광과 위용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풍수 형국론 중 비봉포란(飛鳳抱卵),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 있다. 이 형국들은 봉황을 닮은 지세를 뜻한다. 한, 두 번 쯤은 들어봤음직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은 천상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꿩으로 나타나는 형국엔 복치형(伏雉形)이 있다. 말 그대로 산의 모습이 엎드려 있는 꿩을 연상시키는 지형이다. 이런 지세엔 꿩을 노리는 포식자가 구비되어야 한다. 매나 독수리가 된다. 매가 노리는 꿩, 꿩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긴장하면 기운이 모인다.
조계룡의 묘가 복치혈이다. 산의 생김새가 꼭 닮았다. 날개를 적당히 펴고 알을 품고 있는 어미 꿩의 모습 그대로다. 주맥 상의 산봉우리들 중엔 응봉(鷹峰)이란 명칭도 보인다. 이는 매를 대신함이다. 나약한 꿩은 몸을 숨겨야 한다. 여기에선 겹겹으로 두른 뒷산과 주변의 숲이 포식자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는 장막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좌우와 뒤쪽 산들의 환포성(環抱性)이 뛰어나다는 얘기가 된다. 풍수에선 원을 중시한다. 주위의 산이나 물이 둥글게 둘러싸야 명당이 된다.
용맥은 살아있어야 한다. 산의 변화다. 묘 뒤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보면 맥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솟을 곳은 솟았고, 꺼질 곳은 꺼졌다. 기복(起伏)의 확실함이다. 기복이 확실해야 땅의 기운이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흐름도 일품이다. 풍수서적 기본편에 언급되는 지현자(之玄字) 산세 흐름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이 묘는 야트막한 구릉지에 있다. 앞이 막힐 만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앞은 드넓은 안강들이다. 그 너머엔 양동마을의 주산이 되는 설창산도 보인다. 안조산(案朝山)인 셈이다. 그 모습도 아름답다. 둥근 듯, 일자(一字)인 듯 그 모두가 귀한 사격(砂格)들이다. 안산으로선 거리가 다소 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적당한 높이의, 아주 편안한 모습이다. 이는 묘가 있는 곳이 야산이지만 그만큼 앞이 트였다는 말도 된다. 즉 풍수용어로 산진처(山盡處)란 얘기다. 모름지기 지기(地氣)는 산이 끝나는 지점에 모인다 했다.
예부터 전해오는 얘기 중에 ‘꿩이 알을 품는 자리는 명당’이란 말이 있다. 이는 본능적으로 좋은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 이 힘을 꿩이 가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꿩이나 복치혈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묘역에 앉아보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게 아늑함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이 드는 명당은 전국서도 흔치 않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해남 윤선도 묘
▲ 고산 묘소의 안산. 균형을 이룬 다섯 개의 봉우리가 정겹다. 오른쪽 솟은 봉우리는 목성형인 귀봉(貴峰)이고, 왼쪽 봉우리는 화산형인 필봉(筆峰)이다. 가운데는 물결모양의 수산형이다. 귀봉을 향해 좌향을 잡았다.
▲ 고산 묘소 전경.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다정하게 묘를 보듬고 있다. 묘가 있는 혈장은 거대한 왕릉을 방불케 한다.
해남 윤선도 유적=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문학처. 고산은 이곳 금쇄동(金鎖洞)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지명이 금쇄동인 것은 고산이 금쇄석괘(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었는데 며칠 후에 꿈속과 똑같은 장소를 찾았다 하여 붙인 것이라 한다. 지금도 그가 남긴 건물지와 연못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금쇄동의 산 정상엔 고려시대에 축조된 산성이 있으며, 인근 해남읍 연동리에 그가 살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이 있다. 해남군 현산면 기시리, 사적 제432호다.
양택과 음택의 차이는 터의 크고 작음에 있다. 사방의 산들이 에워싼 장소가 넓으면 사람이 사는 살림집이 되고, 좁으면 죽은 자의 안식처가 된다. 해남엔 윤선도의 자취가 밴 음택과 양택의 손꼽히는 명당이 함께 존재한다. 그가 거처했던 녹우당과 그가 잠들어 있는 묘소다. 지척 간에 있는 이 두 곳은 지금도 풍수학계의 필수 답산 코스다.
고산은 풍수에서도 대가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장지 선정에 직접 간여하기도 했다. 그가 추천한 수원의 화산은 비록 반대파에 밀려 당시엔 채택되지 못했지만 그 뒤 정조 때 사도세자의 영면처로 선정된다.
그의 묘소는 그가 직접 잡은 신후지지(身後之地)다. 그러기에 명당일 것은 불문가지다. 명당엔 으레 뒤따르는 얘기가 있다. 고산 묘소도 예외일 수 없다.
광해군 시절 이의신(李懿信)이란 인물이 있었다. 고산의 처고모부로 알려진 이의신은 당시 ‘교하천도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명풍수였다. 고산 묘소엔 이들 두 사람에 얽힌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고산과 함께 녹우당에서 기거하던 이의신은 밤중에 나귀를 타고 나갔다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고산이 하루는 그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곤 대신 나귀를 앞세우고 갔더란다. 나귀는 평소 가던 길을 가다 어느 한 지점에 멈춰서고, 그곳에서 산세를 살피던 고산은 그 지점이 명당임을 알았다. 그 자리에다 표시를 해둔 고산은 다음날 이의신에게 자기가 봐둔 자리가 있는데 품평을 해달라고 했다 한다.
이의신이 고산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그 곳은 자기가 점찍어 둔 자리였고, 이에 이의신은 ‘명당은 역시 임자가 따로 있구나’라고 탄식하며 그 자리를 고산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고산 묘소다.
고산 묘소의 백미는 회룡고조(回龍顧祖)다. 묘소가 있는 혈장(穴場)이 자기가 처음 출발한 산을 되돌아보는 보는 형세란 뜻이다. 풍수에서 산은 좌우, 고저의 변화가 클수록 그 힘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으로 본다. 명당의 등급이 올라간다는 얘기다. 외청룡을 타고 온 고산 묘소의 혈장은 360도로 회전해서 다시 안산을 바라본다. 그만큼 힘이 강하다.
흔히들 이 묘를 달팽이 모습을 닮았다 한다. 똬리 튼 뱀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산들이 나선형으로 빙빙 감아 돈 그 중심에 묘소가 있다. 끝자락인 백호가 밖으로 삐져나감직도 하다만 그것마저 완벽하게 혈장을 감싼다. 하나의 산줄기로 에워싸인 묘소는 주룡(主龍)의 생기가 고스란히 뭉쳐있기에 혈장도 그만큼 넓고 크다.
낮은 현무를 가진 고산 묘소는 정북향에 가깝다. 북향은 뒤가 낮아야 한다. 햇빛을 고려함이다. 지세를 따른다면 북향 땅도 얼마든지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실례가 된다.
고산은 오우가(五友歌)에서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을 다섯의 벗이라 했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 그러기에 이 둘은 둘이 아닌 하나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김천 청암사
▲ 수도암 전경. 가운데 산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는 가야산 상왕봉. 연꽃 봉우리를 닮았다. 수도암을 형국론으로 옥녀직금형으로 보기도 한다. 옥녀가 앉는 자리는 대적광전, 앞마당 쌍탑은 베틀의 두 기둥, 연꽃 봉우리는 끌개가 된다.
▲ 와우형의 배 안에 들어앉은 청암사의 전각들. 와우형은 대개 땅이 후덕하다. 푸른 기와집이 대웅전이다.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鼻祖)로 흔히들 도선국사(道詵國師)를 꼽는다. 한국 자생의 토종 풍수에 중국에서 도입된 풍수를 접목, 집대성한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한다. 도선국사를 얘기하자면 항상 비보사탑(裨補寺塔)이 따른다. 병든 신체에 침이나 뜸을 뜨듯, 허약한 국토 마다마다에 사찰이나 탑을 세워 병든 곳을 치유했다는 게다. 이렇게 건립된 것이 전국에 3천여곳에 달했다 하니 도선과 비보사탑 연계에 무리가 없다 하겠다. 이게 도선의 풍수를 개인 발복을 위주로 하는 오늘날 풍수와는 달리 호국풍수라고도 하는 이유다.
청암사(靑巖寺)나 수도암(修道巖)은 도선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들에 비보의 의미가 부여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물이 남아있지 않으니 정확하게 고증할 길은 없다. 최근 들어 시도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청암사는 와우형(臥牛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평화롭게 누워있는 소의 형태다. 일주문을 막 벗어나 절로 향하다 보면 우비천(牛鼻泉)이란 샘물이 있다. 이곳이 소의 코 부분에 해당되고, 대웅전 등 전각들이 있는 자리가 소의 배 부분이 된다. 대개 와우형의 지세는 후덕하다. 흙이 많고 돌이 없다. 대웅전 뒤의 산세가 이러하다. 둥그스름한 형태가 꼭 소의 등줄기를 닮았다. 이런 와우형은 재물복이 많은 것으로 본다.
내청룡 끝자락엔 바위가 감아 돌아 기운이 새나감을 막고 있다. 이런 지세는 장풍(藏風)에도 제격이다. 들어온 바람은 어느 한 곳으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 옛날 도선이 수도산 정상부의 명당 터를 보고 7일간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곳, 곧 수도암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천년을 훌쩍 넘어선다. 그 역사만큼이나 불상이나 풍수에 얽힌 얘기도 많다. 수도암 풍수의 백미는 앞으로 보이는 가야산 상왕봉이다. 그 모양이 흡사 연꽃을 닮았다. 이 모양은 대적광전 앞마당에서만 제대로 나온다. 안·조산정혈법(案朝山定穴法)으로 제대로 입지했다는 얘기도 된다. 전해오는 형국론으로 따져 이를 베 매는 데 실을 켕기는 제구인‘끌개’라 보기도 한다. 이는 수도암을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으로 보기 때문이다. 앞마당의 쌍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고, 대적광전은 옥녀가 앉는 자리가 된다.
산속에선 장풍이 우선이라 했다. 바람이 무섭다는 얘기다. 그래서 산속에선 평지가 명당이 된다. 높은 곳에선 낮은 곳, 낮은 곳에선 높은 곳을 찾는 게 풍수의 기본이다. 수도암은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포근하다. 산이 다한 평평한 곳에, 청룡과 백호가 적당한 높낮이로 알맞게 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옛 서적에도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명당이 있다 했다.
청암사 일주문 못 미처 오른쪽으로 옛 도로가 있다. 하지만 이 길은 담장으로 폐쇄돼 있다. 그 까닭이 우비천과 관계가 있다. 길이 소의 목덜미를 짓누르기에 샘물이 마르고 절이 쇠락해졌다는 게다. 이에 그 길을 막고 새 차도를 냈다 하니, 곧 비보인 셈이다. 비보로 창건된 청암사는 비보의 맥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하국근 편집위원
▨ 청암사=신라 헌안왕 3년, 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있다. 1980년대에 설립된 비구니승가대학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보광전(普光殿)은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가 됐을 때 그의 복위를 기원하던 원당(願堂)으로 건립됐다 한다. 경상북도지정문화재로 대웅전, 다층석탑 등이 있다. 인근 수도리 수도산 정상부에 있는 수도암도 청암사와 함께 도선이 창건했다 한다. 동학혁명 당시 전소됐다 1900년대에 중수됐다. 보물 제296호인 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나자불좌상이 있다. 경내로 수도산 등산로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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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와 구천십장
▲ 남사고 묘 앞 전경. 거대한 문필봉이 압권이다. 그 앞 좌우로 길게 뻗은 산이 안산인 일자문성이다. 하지만 가운데가 꺼진 이러한 형태는 기운의 분산으로 본다.
▲ 구천십장의 당사자인 남사고 부친 남희백 묘. 나무에 매달린 과일 형태의 유혈이다. 오른쪽 백호 쪽이 낮아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아홉 번 이장하고 열 번째 장사 지내는(九遷十葬) 남사고(南師古)야,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飛龍上天) 명당으로 여기지 마라. 마른 뱀이 나무에 걸려 있는(枯蛇掛樹) 땅이 이곳 아니더냐.’ 지금도 회자되는 남사고의 부친 남희백(南希伯) 묘소에 얽힌 얘기다. 부언하면 부친상을 당한 남사고가 그 묘소를 선정하는 과정서 아홉 번을 이장한 끝에 열 번째로 마음에 드는 땅을 골랐는데, 막 산일을 끝내고 내려오는 도중 한 일꾼이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한다. 놀란 남사고가 그 터를 돌아보니 정말 죽은 땅이라, ‘명당은 임자가 따로 있구나’라며 탄식했다 한다.
부친 남희백의 묘는 남사고의 생가 터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대현산(大峴山·일명 한티) 중턱에 자리 잡았다. 실제로 묘비 뒷면엔 ‘구천십장은 와전된 것’이라 적혀있기도 하다. 또한 지금의 묘 터는 남사고가 사전에 답사해서 잡은 터가 아니라, 이장 당일 안개의 천재지변으로 인해 바뀐 터로 추측하기도 한다.
부친 묘는 과일이 나무에 매달린 형태의 유혈(乳穴)이다. 풍수에선 좌우균형이 잡힌 혈장을 중요시한다. 봉분이 만들어질 부분이 둥그스름하고도 단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묘소는 백호 쪽이 낮다. 그래서 축대를 쌓아 보완했다. 또한 청룡 쪽이 석맥으로 된 지각이 뻗어 지탱해 주는 데 비해 백호 쪽은 급경사의 골짜기다. 새로 난 길로 인해 파인 것을 고려하고라도 불균형이다. 거기에다 묘를 쓴 능선은 힘없이 길게 뻗어 쓸데없이 땅의 기운을 빼내고 있다.
이 묘소는 높은 산봉우리에 있기 때문에 앞이 확 트였다. 뭇 산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격이다. 그러나 수구(水口)의 왕피천도 문제가 있다. 모름지기 물은 나가는 것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게 풍수의 원칙이다. 아쉽게도 왕피천의 물길이 묘소 앞 저 멀리로 돌아나간다. 귀봉(貴峰)의 형태인 주산인 대현산과 겹겹으로 보국을 감싸는 산세, 봉긋봉긋하게 솟은 전후좌우의 산봉우리들은 상급이라 하겠다.
남사고 자신의 묘는 인근 구산4리 마을 야산에 있다. 앞으로 거대한 문필봉이 보이고 그 앞엔 일자문성이 보듬고 있다. 지세에 따라 정남향이다. 문필봉은 험한 바위에 너무 높아 압살(壓殺)의 기운을 띠고, 안산은 가운데가 꺼졌다는 게 흠이다. 중앙이 낮고 좌우가 높으면 기운의 분산으로 본다.
또한 내청룡과 내백호가 약하다. 이런 형태에선 바람막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혈 그 자체가 그 흠을 보충하고 있다. 묘가 있는 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가 바람을 직접 피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묘를 와혈(窩穴)로 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힘 있게 뭉친 묘 앞의 전순과 좌우 균형을 이룬 혈장도 아름답다. 그러나 주산서 급하게 내려오는 산세는 거의 변화가 없어 무기력하고, 묘 앞 오른쪽으로 보이는 규봉(窺峰)도 볼썽사납다.
기인으로 살다 간 삶만큼 그의 묘 조성경위도 남다르다. 남사고의 묘는 그의 사후 친구들이 시신을 서울서 운구해와 조성했다고 한다. ‘모든 땅엔 임자가 있다’란 말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하국근 편집위원
▨ 남사고=조선 중기 때 사람으로 호는 격암(格菴).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출신이다. 풍수, 천문, 복서(卜筮)에 능했다 한다. 예언가로도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의 발생과, 당쟁, 그리고 남명 조식과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운은 없어 번번이 낙방하다 죽기 전에 잠깐 천문학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은 실제 후세인들이 가탁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현재 생가 터는 경북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돼 관광자원화됐다.
十勝之地 풍기 금계촌
▲ 십승지로 알려진 풍기 금계리 일대. 가운데 높은 능선이 주맥이다. 이 맥은 멀리 풍기읍 시가지까지 흘러간다. 금계촌은 인근 욱금리와 삼가리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맥 능선 오른쪽에 보이는 고개가 삼가리로 가는 길이다.
▲금계촌을 나타낸 십승지 지도. 사방으로 소백산이 둘러싸고 있다. 통로는 오직 물이 나가는 수구쪽 뿐이다.
십승지=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 등이 돌아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으로, 일상 생활터전과는 달리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열 곳을 말한다. 지형이 험준한 태백산과 덕유산 사이에 절반이상이 분포한다. 십승지는 조선후기 크게 유행했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의 핵심내용 중의 하나로, 여러 비결서(秘訣書)에 모두 60여 곳이 수록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명이 구체적으로 표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쉽지 않다. 그 중 풍기 차암 금계촌(豊基 車岩 金鷄村)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로 인해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인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정감록은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책이다. 소설로, 논문의 주제로 이 만큼 관심을 끄는 책도 아마 드물게다. ‘감결’'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등 전해져오던 여러 비결서들을 모아 1920년대에 한권으로 묶어 통칭 ‘정감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잦은 외적의 침입과 끝없이 이어지는 흉년, 거기에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조선 후기의 민중들에게 희망 보다는 암울함을 안겼다. 이들 민중들의 염원을 충족시켜준 게 정감록이다. 지긋지긋한 조선왕조의 몰락과 새 지도자의 탄생, 좋은 세상을 기원하며 힘든 세상을 잠깐 등질 수 있는 이상향의 제시는 이들에게 삶의 새 활력소가 됐을 지도 모른다.
정감록의 기원은 평안도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론이다. 조선왕조의 서북지방 홀대와 잦은 대륙과의 마찰, 때맞춰 계속 된 가뭄 등은 자연스레 이상향을 꿈꿀 수밖에 없었을 거란 얘기다. 19세기초 홍경래의 난이 좋은 예다. 좀 더 나은 삶을 원했던 그들은 그 이상향의 땅을 찾아 남쪽으로 이주했다. 그것도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산간을 찾았다. 실감나게도 십승지로 꼽히는 지역엔 지금도 그들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한다.
십승지의 특징은 첫째로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거다. 외부와의 차단, 좋은 세월을 기다리기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그러기에 통로는 단 한 곳이 된다. 통로라 해도 병뚜껑처럼 좁다. 이런 지형은 안에선 밖의 동정을 알 수 있지만, 밖에선 마을이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저 가파른 능선만이 보일 뿐이다.
다음으로 물이 흘러야 한다. 자손대대로 이어살기엔 다소 미흡하지만 새 세상이 올 때까지 의식주는 해결돼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얼마간의 논밭이 필수적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략적으로 무가치한 곳도 주요 조건이 된다. 그만큼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십승지는 양기(陽基) 풍수이론, 즉 취락입지 조건엔 대체로 어긋난다. 발전보다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요, 피난과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땅이란 얘기다.
풍기 금계촌은 십승지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주위 산세를 보면 그 조건에 딱 들어맞기도 하다. 사방으로 소백산의 험준한 능선들이 둘러싼다. 오직 전면의 물이 나가는 한 곳만이 통로가 된다. 거기에다 적당히 논밭이 있어 의식주 해결에도 문제가 없다. 죽령으로 통하는 길이 인근을 지나도 백호 쪽에 긴 능선이 있어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금계촌을 지금의 풍기읍 금계리와 욱금리, 삼가리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법 넓은 명당이 있는 금계리와는 달리, 소백산 등산의 시발점 중 한 곳인 삼가리는 전혀 딴판이다. 좁은 V자형 협곡에 바람소리만 매섭다. 그러나 그곳엔 소백산이 있다. 넉넉한 소백산이 품은 나무열매, 갖가지 나물 등을 무한정으로 인간에게 안긴다. 그러기에 세상사에 찌든 육신을 한때나마 이런 곳에서 재충전해 봄직도 하다. 십승지를 음미하면서 말이다. 격암 남사고는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라 했다.
하국근 편집위원 hkk@msnet.co.kr
벌명당 나주 반남박씨 시조묘
▲ 반남 박씨 시조 묘 전경. 넓은 명당에 안대도 혈장에 맞춰 나지막하게 자리 잡았다. 청룡과 백호가 팔짱을 끼듯 교쇄되어 명당의 기운이 새는 것을 막고 있다.
▲ 박응주 묘 입수의 석맥. 묘 주위 단단히 박힌 이런 작은 돌멩이를 요석(曜石)이라 한다. 요석은 귀(貴)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 나주지방에 박의(朴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부친이 세상을 뜨자 이웃에 사는 지관(地官)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했다. 지관이 이리저리 지세를 살펴보다 천하의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천기(天氣)를 누설하게 돼 화(禍)가 닥칠 것을 두려워 한 지관은 실제보다 약간 위쪽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자리를 잡는 동안 지관의 불안한 모습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주는 한밤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지관 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때마침 그날 묘지를 잡아준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게다. 지관이 그의 부인에게‘ 지금의 묏자리보다 조금 아래쪽이 천하의 명당자리요. 하지만 그곳을 가르쳐주면 천기를 누설한 죄로 내가 벌을 받게 될 것이요'라 했다. 이 말을 듣게 된 박의는 이튿날 지관이 말한 그 아래쪽에다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지관은 사색이 됐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주에게 다가가 '내가 집에 도착하게 될 때까지 땅 파는 것을 늦춰 주시오'라며 부탁을 했다. 이를 받아들인 상주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지관이 집에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시점에 다시 땅 파기를 시작했다. 그때 수많은 벌 떼가 땅속에서 나오더니 미처 고개를 넘어가지 못한 지관을 쏘아 그 자리서 숨지게 했다. 이에 사람들은 지관이 벌에 쏘여 숨진 고개를 벌고개(蜂峴), 그 명당을 '벌명당'이라 부르게 됐다.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자미산 기슭 동쪽엔 큼지막한 두 개의 묘가 아래, 위로 나란히 있다. 아래 묘가 전설 속 벌명당으로 알려진 반남 박씨 시조 박응주(朴應珠) 묘이고, 위는 손자인 박윤무(朴允茂) 묘다.
나지막한 자락에 터 잡은 박응주 묘는 앞은 시원하게 트이고 뒤는 산자락에 기댔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원칙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얘기다. 앞이 트였다고 해도 그냥 밋밋하게 트인 게 아니다. 길게 뻗어나간 청룡과 백호가 팔짱을 끼듯 서로 교쇄(交鎖)하고 있다. 수구도 완벽하단 뜻이다. 혈장을 빼곡히 둘러싼 주위 산세는 생기를 챙기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명당을 둘러싸고 내려간 외백호는 안(案)을 겸하고 있다. 백호장안(白虎長案)은 재물이 풍성함을 뜻한다. 청룡은 일자문성(一字文星) 형태다. 일자문성이 있는 지형에선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난다 했다.
이 묘는 평야지대로 내려온 평강룡(平崗龍)이다. 평강룡은 평평한 등성이로 내려왔다는 뜻을 가진다. 그렇다고 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벌판에서 솟았기에 그만큼 힘이 있다. 돌은 지기의 집합체다. 힘을 모은다는 뜻이다. 묘 주위의 단단하게 박힌 돌은 그 만큼 큰 힘을 실어 준다. 그렇다고 주위의 모든 돌이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잡석이나 뜬 돌은 이롭기는커녕 되레 손해를 끼친다.
위 박윤수 묘에서 박응주 묘로 이어지는 입수(入首)에 석맥(石脈)이 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하게 박혔다. 다소 펑퍼짐하게 내려온 입수룡을 보완해 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명당이 넓고 주위 산세에 험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묘 뒤에 서면 맨 먼저 느끼는 감정이 편안함이다. 아늑한 땅, 복 받은 땅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그러기에 조선조 그 많은 왕후, 정승 등 인재를 배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국근 편집위원 chonjjja@hanmail.net
▨ 벌명당=뒷산의 봉우리가 멍덕(토종 벌통 위를 덮는 뚜껑, 짚으로 바가지 비슷하게 틀어 만듦) 모양이며, 주변의 산세가 꽃을 닮은 지역을 말한다. 즉 묘가 있는 등성이 벌통이 되고, 주위 산들이 꽃이 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런 곳에 묘를 쓰면 벌 떼처럼 그 자손이 번창하며, 벌 떼들이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뒤따르게 된다고 본다. 하지만 풍수설화에선 벌명당의 묏자리를 잡아준 지관은 기이하게도 모두 벌에게 쏘여 죽음을 맞는다.
玉女端坐形 예천 정사 묘
▲ 정사 묘 전경. 전체적으로 오목한 형태다. 묘는 그 중심, 볼록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에 솟은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 오른쪽 높은 산이 옥녀봉의 배필이 되는 조산인 비봉산이다. 들 복판으로 청룡이 길게 뻗어 안대를 형성하고 있다. 건물이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다. 음과 양의 배합으로 천지만물의 순환이 이어진다고 본다. 자연의 순리란 얘기다. 남자와 여자가 배필이 되듯, 땅도 마찬가지다. 남성을 닮은 우람한 산이 있다면 여성을 닮은 부드러운 산이 있어야 조화가 이루어진다.
정사의 묘는 여성을 닮은 산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수려하고 단정한 주산이 그러하며, 묘소가 들어선 혈처가 그러하다. 반대편에 있는 조산인 비봉산(飛鳳山)은 우람한 남성형이다. 마을 주민들은 탕건을 쓰고 버티고 앉은 남정네라 했다. 그렇다고 이 묘의 주산인 옥녀봉(太乙峰)이 나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작지만 들판에 우뚝 선 힘 있는 산이다. 주위의 산세가 모두 그러하다. 어디 한군데 험한 곳이 없다. 어머니와 같이 한없이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부드럽고도 강건한 산이다. 남녀가 만나 짝을 짓듯 태을봉과 비봉산의 정기가 합쳐 정씨 가문을 조선조 명문(名門)으로 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묘의 혈장은 여성의 하체를 닮았다. 쭉 뻗은 두 다리며 오목한 혈처가 영락없다. 흘깃 돌아다보는 남정네에게 치부가 보일까 부끄러워 청룡을 길게 끌어 가리기도 한다. 이는 여자에게 필요한 거문고다. 이른바 횡금안(橫琴案), 풍수용어로 청룡장안(靑龍長案)이다. 이런 국세에선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오목하게 파인 형태가 모두 혈(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곳은 그저 물길일 뿐이다. 반드시 돌출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오목함 속의 볼록하게 솟은 곳, 여기서도 적용되는 음과 양의 조화다. 정사의 묘가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오목한 가운데 그 중심, 묘가 들어선 부분은 남성의 하체를 닮았다. 이 묘의 음양배합은 어느 곳보다 긴밀하다 하겠다.
산은 물을 만나야 조화를 이룬다. 그것도 직선으로 흐르거나 치고 들어오면 재미가 없다. 둥글게 감싸 안듯 흘러야 한다. 이 묘의 바깥을 감싸 안는 물은 낙동강이다. 큰 명당에 큰 물인 셈이다. 비봉산 아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말 그대로 환포다. 거기에다 단단한 토질에 꿈틀거리는 내룡맥(來龍脈), 청룡과 백호도 두 팔을 벌려 혈장을 잘 감싸고 있다. 이만한 길지(吉地) 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 그러기에 8대 명당에 든 것일 게다.
이 묘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지보리다. 조금은 어감이 이상한 이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여자의 하체를 닮은 묘 주변의 생김새에 연유한다는 게다. 이것은 풍수학계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얘기다.
땅도 좋은 땅이 있고 나쁜 땅이 있다. 인간은 좋은 기운이 감도는 땅에서 살아야 하고, 죽으면 그런 땅에 묻혀야 한다. 그래야 자연과 인간이 교감이 된다. 발복(發福)은 그 후의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 정사 묘=부산 화지산에 있는 정문도(鄭文道) 묘와 함께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는 명묘(名墓).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있다. 정사(鄭賜)는 조선초 예문관 직제학,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직계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이 난 것으로 유명하다.
풍수에서 옥녀는 젊은 여자, 천상의 여자이며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낸다. 옥녀형국은 둥그스름하게 솟은 주산을 가지며, 혈장(穴場)은 여성의 하체형상을 띠는 곳이 많다. 이런 곳은 혈장이 오목한 모습이며, 와혈(窩穴)이나 겸혈(鉗穴)이 이에 속한다. 정사 묘는 통상 와혈로 보지만 주변 정황상 겸혈로 보기도 한다.
안동 소산마을
▲ 소산마을 전경.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정면 언덕 위에 있는 고택이 삼소재이고, 오른쪽 산기슭에 보이는 건물이 양소당이다. 뒤쪽 높은 산은 정산(鼎山)으로 경북도 새 도청소재지의 청룡이 된다.
▲ 삼구정. 볼록한 언덕위에 자리 잡았다. 센 바람이 몰아쳐 일반 살림집으론 부적합하다. 이런 땅은 정자 터로 제격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등학생도 외는 시조다. 이 시조를 지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서 돌아와 은거했던 곳이 이 소산마을이다. 청음은‘청나라를 멀리하고 싶다'는 의미로 거주했던 집도 청원루라 했다. 또한 소산은 조선후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이 마을 신김 후손들이 조정에 진출, 60여년 왕권을 능가하는 실권을 행사했던 게다.
소산마을의 원래 이름은 금산촌(金山村)이었다 한다. 청음이 낙향하여 거주할 때 그 이름이 너무 화려하다 해서 검소한 뜻으로 소산으로 고쳤다 한다. 주위의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들판에서 솟았기에 산중의 그 어느 산 못지않은 힘을 가진다.
소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마을 앞, 청룡 끝자락에 지어진 삼구정이다. 정자인 삼구정은 도톰한 언덕에 위치한다. 엎어놓은 가마솥, 거북의 등처럼 생긴 이러한 땅을 풍수에선 돌혈(突穴)이라 부른다. 정자 터의 제1요건은 시원하고도 풍광이 좋은 곳이다. 절경에 위치한단 얘기다. 이러한 곳은 일반 살림집 터로 부적합하다. 오며가며 땀을 식히고 답답한 마음을 푸는 곳, 그러기에 이곳에서도 정자가 섰다.
마을이나 묘의 혈처는 주맥(主脈)을 탄다. 주맥으로 가장 왕성한 기운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소산마을의 중심, 높직한 언덕 위에 구김의 종택인 삼소재가 있다. 이 마을의 혈처다. 증명이라도 하듯 구불구불 이어져 이 집으로 들어오는 용맥은 가히 일품이다. 얼핏 보아서도 확실히 살아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힘이 넘친다.
산을 타고 온 지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 그러기에 그 안의 땅이 명당이 되는 것이다. 산과 물의 조화, 그 조화가 걸출한 인물을 낳는다. 소산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세다. 꽉 짜인 주위 산세에 마을 앞으론 매곡천이 흐른다. 풍수이론에 딱 들어맞는 지형지세인 셈이다.
조선 8대 명당,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는 여덟 기의 묘다. 그 중 하나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김번(金■) 묘다. 풍수학계에선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인 이 묘가 워낙 명혈(名穴)이라 신안동김씨가 조선후기 명문거족으로 클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이 묘는 자리를 만들고 다시 솟아올라 본신안산(本身案山)을 만든다. 풍수에선 이런 안산을 가진 묘 후손들 중에 권력가가 난다고 본다. 김번은 김상헌이 중건한 청원루를 처음으로 건립한 이이기도 하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 소산마을=행정구역으론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다. 병자호란 때 척화주전론의 거두였던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서 돌아와 은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본관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구·신 두 안동김씨 가문이 함께 사는 동족마을이다. 구안동김씨의 종택인 삼소재(三素齋)와 신안동김씨의 종택인 양소당(養素堂), 김상헌이 거주했던 청원루(淸遠樓) 등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즐비하다. 마을 앞 정자인 삼구정(三龜亭)엔 고인돌로 추정되는 3개의 돌이 있어 유구한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고산서당 전경. 멀리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조산인 팔공산 초례봉이다. 이런 산형을 문필봉이라 한다. 이런 산세가 보이는 명당에선 학자가 난다고 본다.
▲ 두사충 묘. 주위의 보국이 아름다운 곳이다. 양쪽에 서있는 작은 문인석들이 특이하다.
▨ 두사충=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손. 임진왜란 때 이여송 등과 함께 명나라 원군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주임무는 지리참모로 알려져 있다. 임란이 끝난 뒤 귀국했다가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와서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은 현재의 대구 경상감영공원 일대서 살다 중구 계산동으로 옮겼으며, 이때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인근이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그 뒤 다시 앞산 밑으로 옮겨 살았는데 대명동(大明洞)이란 이름도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의미로 그가 지었다 한다. 묘는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남부시외버스터미널 뒷산에 있다.
독산(獨山)은 불가장지(不可葬地)라 하여 묘를 쓰지 않는다. 들판에 우뚝 서 있어 바람을 막을 수 없다. 사면팔방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생기(生氣)도 휘몰아간다. 더욱이 이런 곳은 지기(地氣)가 이어지지 않았을 확률도 높다. 지기는 일반적으로 용맥(산줄기)을 타고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기를 중시하는 음택은 이런 곳을 아예 묘터 후보에 거론치도 않는다. 하지만 독산 내에 사신사가 구비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충분히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산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임
대구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고산서당 터가 그러한 자리다. 독산인 고산(孤山)은 자체적으로 내청룡과 내백호를 뻗어 혈을 보호하고 있다. 비록 백호가 조금 짧은 듯해 아쉬움이 있지만 대신 청룡이 길게 뻗어 안(案)을 형성한다. 앞으로 흐르는 남천도 터를 보듬고, 조산인 팔공산 초례봉은 단아한 필봉(筆峰)의 모습을 띤다. 그 무엇보다 이곳은 혈장이 뚜렷하고 후덕하다. 이 고산사당 터는 두사충이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장소로 택했던 곳이다. 전쟁터에서 지형을 보고 진을 치는 참모로 활동했을 정도로 이름 높았던 명풍수가 잡은 자리, 그러기에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풍수학계에서 회자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유택은 다른 곳에 있다. 이설(異說)이 있지만 그 사연도 명풍수답게 풍수적이다. 그는 죽음을 얼마 앞두고 아들과 함께 미리 보아둔 묘터, 즉 고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했던 몸이라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그곳이 지금의 담티고개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들에게 오른쪽 형제봉을 가리키며 ‘저 산 기슭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유언을 따라 뒤에 아들이 그 자리에 묘를 쓰니 현재의 묏자리가 된다.
두사충 묘의 주산은 형제봉이다. 멀리서 봐도 우뚝하니 아주 아름다운 산이다. 주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비슬산에서 나온 형제봉의 이 용맥은 두리봉을 거쳐 담티고개를 지나 형제봉에 이르러 갑자기 방향을 튼다. 이른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다. 자기가 지나온 산들을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다. 이런 지세는 힘이 넘친다고 본다. 웬만한 힘으론 가던 방향을 멈추고 꺾을 수 없다는 논리다. 보국(保局) 또한 수려하다. 부드러운 주위의 산들이 모두 정겹다. 그러나 당판에 와선 다소 미흡한 감이 든다. 혈장(穴場)이 분명치 않고 내룡(來龍)도 펑퍼짐하단 얘기다. 하지만 입수맥의 단단한 토질은 명당의 조건에 부합된다 하겠다.
두사충 묘 옆엔 낡은 신도비가 하나 서있다. 마지막 구절은 ‘삼도통제사 이인수찬'(三道統制使 李仁秀撰)이다. 이인수는 이순신의 7대손이 된다. 두사충은 이순신과도 친교가 깊었다. 이순신의 처음 묘터도 그가 잡았다 한다. 전쟁터에서 맺은 선조들의 인연, 그 아름다운 인연을 후손들이 이어간 셈이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장성 민씨 할머니묘
▲ 민씨 할머니묘 전경. 우리나라 돌혈의 대표적인 곳이다. 오른쪽 봉분처럼 보이는 언덕 위에 묘가 있다. 앞쪽 건물은 재실이다.
▲ 묘 뒤쪽에서 바라본 민씨 할머니묘. 거대한 용(龍)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이를 풍수용어로 비룡입수라 한다. 풍수에선 산줄기를 용이라 한다.
▨ 민씨 할머니=울산 김씨 중시조 김온(金穩)의 부인으로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의 비(妃)인 원경왕후의 사촌동생. 김온은 태종의 외척 척결 당시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무구·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돼 화를 당했다. 당시 위기를 느낀 민씨 부인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한양을 떠나 장성으로 피신, 정착했다. 민씨 부인은 부친과 친분이 있던 무학대사로부터 천문과 지리, 복서 등을 배웠으며,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의 집터와 이곳 신후지지(身後之地)도 직접 잡았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의 5대 조모가 된다.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로 등이 후손이다. 묘는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명정마을에 있으며, 호남 8대 명당의 한 곳으로 꼽힌다.
‘여기 백두대간의 한줄기가 서남으로 달려와 온 정기를 뭉쳐 이룩한 복부대혈이 곧 중시조 흥려군(興麗君)의 배(配) 정부인(貞夫人) 민씨 할머니의 유택이다. 할머니께서 친히 잡으신 터로서 말을 탄 자손이 이 앞들에 가득하리라는 말씀 그대로 후손이 번성하고 가문이 흥왕하여 오늘에 이르고 앞으로도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이곳은 실로 우리 가문 존립의 근원이요, 자손 창성의 원천으로…’. 전북 장성에 있는 울산김씨 문중의 ‘민씨 할머니 묘역정화’ 기념석에 새겨진 문구다. 이는 울산 김씨 문중의 민씨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친근감, 그리고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도를 잘 표현해 놓은 글이라 하겠다.
대명당엔 전설 같은 얘기가 항상 뒤따르듯이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이곳을 민씨 할머니가 직접 잡았다는 것 외에 이런 얘기도 전해져 온다. 하서의 조부가 명당을 쓰기 위해 당대의 유명한 지사(地師)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는데 갈 때마다 지사가 집에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명당자리를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찾아다니다 보니 지사의 부인과 친하게 되었고, 지사의 부인은 하서 조부에게 남편의 신후지지를 알아내 알려주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지사가 돌아오자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당신이 먼저 죽으면 당신이 잡아놓은 신후지지에 묘를 쓸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 그곳을 내게 말해 달라’고 말해 그 자리를 알아내게 되고, 이를 하서 조부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하서의 조부는 그 명당에 민씨 할머니를 모시게 됐다고 한다.
민씨 할머니묘는 복부혈(覆釜穴)로 유명하다. 형태가 마치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놓은 듯 둥그스름한 언덕에 자리 잡았다. 솥은 재물을 뜻한다. 요즘도 이사를 하거나 새집을 지어 옮길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게 솥단지다. 이사 날이 마땅치 않으면 솥이라도 먼저 좋은 날에 거는 게 일반적인 풍속도다. 따라서 이런 땅에 묘를 쓰면 후손들에게 반드시 부귀가 이어진다고 본다.
가마솥같이 생긴 땅은 혈의 사상(四象) 가운데 돌혈(突穴)을 지칭한다. 돌혈은 산중에 있는 것보다 평지에 있는 것을 더 상급으로 친다. 평지에서 솟구치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돌혈엔 반드시 사방으로 지각(支脚)이 갖춰져야 한다. 솥의 다리인 셈이다. 이를 풍수에선 현침사(懸針砂)라 한다. 이런 곳은 그 가운데가 혈(穴)이 된다. 즉 볼록한 정상에 묘를 쓴다는 얘기다. 민씨 할머니 묘엔 이들 요소가 빠진 게 없다. 돌혈의 대표적 묘인 셈이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도 흠 잡을 곳이 없다. 솟을 땐 솟고, 꺼져야 할 곳은 꺼졌다. 묘 뒤에서 솟구쳐 오르는 입수맥은 말 그대로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다. 더욱이 조산(朝山)서 뻗은 맥이 한바퀴 돌아 다시 그 지나온 산을 뒤돌아보고 있으니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도 된다. 그만큼 힘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너무 넓은 명당이나 희미한 안산, 묘 앞에서 완전히 감싸주지 못한 청룡과 백호는 다소 부족한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좌의정 약포 정탁의 묘도 대표적인 돌혈 중 한곳이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삼척 준경묘
▲ 준경묘 전경. 단단하게 뭉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형태의 혈을 유혈(乳穴)이라 한다. 주위엔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들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나무 숲길이기도 하다.
▲ 이양무의 부인 묘인 영경묘. 준경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 준경묘=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인 이양무(李陽茂)의 묘. 원래 이양무의 묘는 실전돼 왔는데 조선 개국 이후 여러 왕들의 노력으로 찾긴 찾았으나 공식으로 인정을 않고 있다가 사후 600여년이 지난 조선말 고종 때에 와서야 묘역을 정화하고 준경묘(濬慶墓)라 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다. 3, 4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 그의 부인 묘인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이 일대는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유명하다. 이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사용됐다고 하며, 최근엔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쓰일 재목으로 벌채되기도 했다. 보은의 정이품송(正二品松)과 소나무결혼식을 올린 신부 소나무가 묘의 들머리에 있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익히 들어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첫 구절이다. 목(穆) 익(翼) 도(度) 환(桓) 태(太) 태(太), 이 글자들도 학창시절 한번쯤 외어보았던 것일 게다. 맨 앞의 목은 곧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된다.
이 묘는 조선 개국을 예언한 전설로 유명하다.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에 얽힌 얘기다. 일찍이 목조가 터전이던 전주서 상관과의 불화로 삼척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런데 삼척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별세하게 된다. 이곳저곳으로 좋은 땅을 찾아 헤매던 목조는 이곳에서 한 도승과 동자승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이 땅은 길지(吉地)다. 이곳에 장사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자리다. 그런데 발복을 제대로 받으려면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百牛)를 제물로 바쳐야 하며, 금으로 만든 관(金棺)을 사용해야한다.’ 땅은 탐이 났지만 현실로선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목조는 안절부절못했다.
궁리 끝에 100마리의 소 대신에 흰 소(白牛)를, 금으로 만든 관은 황금빛이 나는 귀릿짚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장사를 지낸 후 목조는 또 다시 함흥 땅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악연인 전주시절 그 상관이 강원도로 오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양무의 묘는 실전이 됐지만 예언대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된다. 이양무는 곧 태조의 5대조가 된다.
준경묘는 산 정상에 가까운 분지에 있다. 금강송이 자태를 자랑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난다. 그곳에 묘가 있다. 산 정상 부근이라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주위에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산 아래선 이런 땅이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할 땅이다.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자고 갈 마음이 생길만큼 안온하고 평안하다.
명당의 요건도 골고루 갖췄다. 묘 아래에 우물은 혈(穴)의 기운이 새나감을 막는 명당수가 되고, 혈장을 돌아가며 요석(曜石)은 수도 없이 박혔다. 요석 하나에 정승, 판서 한 명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한 돌이다. 그러고 보면 물과 돌이 합심해 설기(洩氣)를 막는 셈이다. 두툼한 입수는 지기를 한껏 모은다. 그러기에 입구에 들어서면 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힘이 느껴진다. 600년을 훌쩍 넘긴 묘에서 그런 강한 힘을 느끼기도 결코 쉽지 않다. 수구는 막혀야 한다. 준경묘의 수구는 첩첩으로 막혔다. 거기에다 양쪽으로 곧추선 바위들은 말 그대로 수문장 역할을 한다.
청룡과 백호가 다소 위압적이긴 하다. 특히 백호가 더 하다. 가까이 붙은 백호는 청룡과 혈장을 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청룡은 남자와 장남이 되고 백호는 여자와 차남이 된다. 조선의 왕통을 되새겨 보면 무심히 지나칠 사안만은 아니다.
준경묘엔 풍수 외에 금강소나무의 아름다움이 있다. 산길 내내 이어지는 그네들의 향기는 인간들의 활력소가 되고, 그네들의 자태에서 자연의 미를 느낄 수 있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52)의왕 안동 권씨 묘
4代 6政丞(정승) 배출한 조선 8대 명당
▲ 청룡 자락서 본 안동권씨 묘역. 새둥지처럼 생긴 와혈이다. 와혈은 이곳처럼 약간 돌기한 부분이 혈처가 된다. 뒤로 주산인 오봉산이 보인다.
▲ 묘 뒤에서 본 전경. 안산과 조산이 평안하고 아름답다.
안동 권씨 묘=증이조판서 김인백(贈吏曹判書 金仁伯)의 부인인 안동 권씨의 묘로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꼽힌다.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의왕시청 옆에 있다. 이 묘의 후손들 중에서 부자(父子) 영의정을 포함해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다 하여 풍수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묘 뒷산의 봉우리가 5개라 오봉산(五峰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6개라 한다. 이 6개 봉우리의 기운을 받아 6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인근 왕곡동에 있는 손자 김징(金澄)의 묘도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가들은 묘비(墓碑)의 증(贈)자를 좋아한다. 증은 곧 증직(贈職)을 말하는 것이 되고, 사후(死後)에 관직을 부여받는 것을 말한다. 가문을 빛나게 하는 일종의 명예직인 셈이다. 즉 묘의 후손들이 잘됐다는 얘기다. 이를 풍수에 적용시키면 발복(發福)과 연관시킬 수 있다. 안동 권씨의 묘비에 이 '증'(贈) 자가 들어 있다.
자손들의 영달이다.
8대 명당에 거론되는 명묘(名墓)들엔 널리 알려진 얘기든, 문중에만 전해지는 얘기든 명당을 얻는 과정에 전해지는 설화가 뒤따른다. 이 묘도 예외가 아니다.
옛적 중국의 한 지관이 죄를 얻어 조선으로 도피를 한다. 몸만 겨우 빠져나온 상태라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하게 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이곳까지 흘러온다. 때마침 청풍 김씨 한 사람이 이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가 보살핀다. 그 집에는 노마님이 병환이 깊어 위독한 상태였다. 이에 그 지관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명당자리를 잡아주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집터였다. 청풍 김씨는 집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집터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한다. 집주인은 노발대발하고, 결국 그는 사과를 하고 돌아온다. 기이하게도 그날 저녁 그 집은 화재로 소실되고, 병중의 노마님도 세상을 뜬다. 우여곡절 끝에 양가는 합의를 하고 그곳에 묘를 조성하게 된다.
장사를 치르기 전날 지관이 ‘구덩이를 팔 때 널찍한 바위가 나올 것이니 절대로 그것을 치우지 말라’는 부탁의 말을 한다. 그러나 구덩이를 파 보니 돌이 너무 얕은 곳에 있어 그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안의 구수회의가 열린다. 그동안 상주 중 막내가 광중(壙中·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을 지키게 된다. 호기심으로 바위를 살짝 든다. 그 밑엔 동자 다섯과 좀 더 큰 동자가 있었다. 놀란 막내가 얼른 돌을 놓는다. 목이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지관이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친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역적 날 자리를 점지해 줬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조선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장을 얘기하게 된다. 그때 막내가 그 일을 얘기한다. 이에 지관은 한숨을 돌린다. 그 일로 인해 역적 날 자리가 6명의 정승이 날 자리로 변했다는 것이다.
안동 권씨의 묘는 와혈(窩穴)이다. 마치 새둥지처럼 생겼다. 이런 곳엔 뒤에서 힘을 받쳐주는 것이 필요하다. 바위나 작은 산줄기가 그것들이다. 여기선 두개의 바위가 아름답다. 묘 뒤엔 기운을 모으는 결인속기도 확실하다. 그곳에서부터 도톰히 솟아오른 입수처는 기운을 모으는 곳이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도 기운이 새나감을 막아준다. 다만 그 틈이 다소 벌어진 듯한 느낌은 아쉽다 하겠다.
안산과 조산도 편안한 기운이다. 왕후장상이 난다는 일자문성도 중후한 모습이고, 귀봉도 주위에 첩첩이다. 주산인 오봉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솟아올라 주위를 압도한다. 평평한 땅에서 솟아오르려면 큰 힘이 필요하다. 기운이 강하단 얘기다.
풍수에선 산의 변화를 가장 중시한다. 변화가 없는 산은 죽은 산이다. 회룡고조(回龍顧祖)는 산이 자기가 지나온 곳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나아가다가 360도로 산세의 흐름이 꺾인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가 확실하다는 것도 된다. 이 묘가 회룡고조형이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54>청원 청주 한씨 시조묘
千年세월 지켜온 ‘三韓甲族’의 뿌리
▲청주한씨 시조묘 원경.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사진 가운데 왕릉처럼 생긴 곳이 묘가 있는 산의 끝자락이다. 묘소는 그 위에 있다.
▲한란묘 전경. 조선 숙종 때에 묘역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곡장(曲墻)이 인상적임..
◇ 청주한씨 시조묘=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의 묘.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머미마을 뒤쪽에 있으며, 조선 8대 명당 중의 한 곳으로 꼽힌다. 한란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치려고 집 앞을 지나갈 때 군량미를 공급하고, 종군하여 삼한통합에 큰 공을 세웠다 한다. 청주한씨 문중은 조선조 정승 12명과 가장 많은 6명의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조, 예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한명회(韓明澮), 조선 중기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石峯 韓濩), 독립운동가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한용운(韓龍雲) 등이 후손들이다.
명당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이 편안함이다. 그곳이 음택이든 양택이든 피부에 와 닿는 분위기는 같다. 집에 사람이 북적대는 것은 거주하는 사람의 인품도 인품이거니와 그 땅이나 가상(家相)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산자락 뒷면에 위치한 집은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인데도 들어서기가 뭔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발길이 끊긴 이런 집은 살기에 부적절한 곳이다.
옛날 땔감을 구하러 산을 오르내리던 시절 지게꾼이 땀을 식히던 장소는 일정한 장소였다. 어느 누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그곳에 지게목발을 놓았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거세지 않으면서도 앞은 가급적 트인 그런 곳이었다. 어려운 산서(山書)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마음이 찾은 명당인 셈이다. 편안한 장소다.
머미마을 들머리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이 이 편안함이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그러하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주위의 산세가 그러하다. 따스한 햇볕에 나지막한 뒷산, 봉황이 나래를 펴고 알을 품듯, 좌우로 펼쳐진 산세가 정겹다. 묘 뒤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압권이다. 높지 않은 곳인데도 앞은 시원하게 트였다. 그것도 앞은 낮고 그 뒤는 층층으로 높아져 마치 그림을 그린 듯하다. 안산과 조산의 절묘한 조화다.
앞이 시원하게 트였다는 것은 바람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뜻도 된다. 풍수에선 바람이 치는 것을 우선적으로 피한다. 이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순전(脣氈)이다. 순전은 지기를 마지막으로 갈무리하는 역할도 하지만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한란묘의 순전은 신라 왕릉을 방불케 한다. 묘 앞이 치솟아 역할 수행에 완벽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지형은 지기가 너무 강해 역(逆)한 기운을 띠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순전에 솟으면 권력가가 난다고 했다. 이것은 혈(穴)을 만들고 남은 여기(餘氣)가 뭉쳤다는 의미가 되고 그만큼 그 땅의 기운이 강하다는 뜻이 된다. 묘 앞이 치솟은 이런 순전을 자기안(自己案)이라고도 한다. 안산은 혈처의 짝이다. 혈이 부(夫)가 되고 안(案)은 처(妻)가 된다. 이곳은 하나의 땅이 부부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더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짝이다.
물이 나가는 곳이 수구(水口)다. 수구는 물길이 되기도 하지만 바람길이 되기도 하다. 따라서 수구는 무조건 막혀야 한다. 청룡과 백호가 팔짱을 낀듯한 형세가 최상이다. 이곳의 수구가 그렇다. 교쇄 그 자체다. 막힌 수구와 둥글게 감싸 안은 국세는 꽉 짜인 한폭의 명당도(明堂圖)다. 그래서 더욱 아늑한 기운이 감도는 지도 모f른다
풍수에서 백호는 여자 자손을 뜻하기도 하고 외손(外孫)을 뜻하기도 한다. 왕비와 인연이 깊다는 의미도 된다. 한란묘는 백호가 청룡보다 강하다. 길게 묘 앞까지 이어져 전형적인 백호작국(白虎作局)이다. 그것도 겹겹이다. 더욱이 봉긋봉긋한 봉우리들이 이어져 마치 옥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다. 그만큼 아름답다. 이곳의 발음(發蔭) 때문 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조선조 잇단 왕비 배출은 이와 무관하지만은 아닐 터이다.
땅은 거짓을 모른다. 가진 것 만큼,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준다. 따라서 땅에 대한 지나친 욕심도 화를 부르고 홀대도 인간을 병들게 한다. 땅은 땅 그대로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이야기 명리학
오행이 순환하는 사주…평생 건강에 부귀영화
어느 한쪽으로 오행이 편중된 사주는 질병이 잦고 운(運)에 따라 부침도 심하다. 예컨대 사주의 여덟자 중에서 금(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오행은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목(木)은 금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아 죽음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고, 토(土)는 금에게 힘을 뺏기게 되어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여기에 운마저 금운으로 간다면 헤어나기가 벅차다.
목은 인체의 오장육부 중에서 간과 담을 관장한다. 따라서 목이 금에게 두들겨 맞는 사주를 가진 사람은 간과 담에 관련된 질병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토는 위장과 비장을 담당하기 때문에 평생을 위병에 노출돼 있다고 봐도 되겠다.
또한 목이 사주에서 인성이라면 인성은 문서나 학업, 가족 중에선 모친, 직장에선 상사 등을 의미하므로 이와 관련된 일은 불만족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모친이 병약하거나 상사와의 관계도 소원해 지기 쉽다. 재성이라면 재물과 여자, 부친과의 인연이 박(薄)하기 때문에 이성에 빠지기 쉬우며 재물복도 많다고 볼 수가 없다.
좋은 사주는 오행이 골고루 분포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생하는 오행이 연이어 인접하면 최상의 사주가 된다. 이를 순환상생(循環相生)이라 한다. 이런 사주는 오행이 고루 분포하기에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따라서 질병에 시달릴 우려도 적다. 운에서 나쁜 작용을 하는 오행이 와도 물리치거나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부귀가 따른다.
재운(財運)이 오면 재물이 늘어날 것이요, 관운(官運)이 오면 지위가 올라갈 것이다. 인운(印運)이 오면 문서가 늘어날 것이고, 학자라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사주는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조선시대 황희(黃喜)정승이 순환상생의 사주였다 한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56)포항 파평 윤씨 시조묘
貴峰·筆峰(귀봉·필봉)의 天馬에 앉은 蛾眉砂(아미사) 일품
▲파평 윤씨 시조묘 전경. 앞에 보이는 건물은 재실인 봉강재(鳳岡齋)다. 맑은 날엔 천마사가 들판 너머로 보인다. 일부 생각이 짧은 사람들로 인해 봉분에 길이 났다.
▲오른쪽 두 봉우리 사이로 둥근 산형이 정겹다. 천마사와 아미사가 이뤄낸 조화로움이다.
파평 윤씨 시조묘=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묘.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봉좌산(鳳座山) 아래에 있다. 윤신달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왕건의 사후 경주서 관직생활을 하다 이곳에 안장되었다 한다. 이 묘는 투장(偸葬)으로 인해 실묘(失墓)했다 조선 영조 때 되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파평 윤씨 문중은 조선시대 왕비 5명(폐비 윤씨, 연산군의 생모 포함), 정승 11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고려시대 윤관 장군과 근대의 윤봉길 의사, 윤동주 시인 등이 후손들이다.
파주 파평면에 있는 용연(龍淵)은 윤신달의 탄강설화(誕降說話)가 깃든 곳이다. 이 용연에서 어느 날 구름이 일면서 옥함(玉函)이 떠올랐다. 윤씨 성을 가진 노파가 이상히 여겨 건져내 열어 보니 그 속에 옥동자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오색의 우모(羽毛)로 쌓인 옥동자의 겨드랑이엔 81개의 잉어비늘이 나 있었다 한다. 그 옥동자가 바로 윤신달이다.
윤관은 전쟁터에서 잉어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윤관이 북방 야인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 도피하던 중 강가에 다다르게 되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때마침 잉어떼가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뒤에 야인들이 뒤쫓아왔지만 이미 잉어떼는 사라지고 없었다.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탄생과 후손 윤관의 일대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잉어와 연관된 설화의 대강이다. 잉어가 선조들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후로 윤씨 문중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윤신달의 묘소가 있는 봉좌산은 봉황이 나래를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여기에 알을 나타내는 둥근 모양의 산형이나 바위 등이 있었다면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지세로 어긋남이 없을 터이다. 여기선 그런 형태를 찾을 수 없지만 용맥의 기세나 주위 산세는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다.
천마사(天馬砂)는 둥근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잇달아 있는 형태를 말한다. 마치 말안장처럼 생겼다. 예전에 말은 벼슬아치들이 탔다. 집이나 묘소 주변에 이런 형태의 산세가 있으면 귀(貴)가 보장된다고 보는 이유다. 파평 윤씨 시조묘의 조산엔 거대한 천마 형태의 산세가 구비돼 있다. 지세와 다르게 묘의 좌향도 이곳을 향한다. 외명당 너머로 뭇 산이 배알하는 그림 같은 안대(案對)다.
아미사(蛾眉砂)는 산세가 여인네의 눈썹처럼 생겼다. 그러기에 아미는 집안 남자들보다 여인들의 귀함을 나타낸다고 본다. 묘소 백호 쪽엔 천마에 아미가 걸린 형태의 산세가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여인의 극귀(極貴)다. 더욱이 백호는 재물과 여자를 관장한다. 같은 가지에서 갈린 한 갈래가 묘소 오른쪽을 휘감아 안산까지 이어졌으니 금상첨화다. 이곳의 영향만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조선조 숱한 왕비 배출과 연관지을 수 있는 풍수이론이다. 더하여 귀봉과 문필봉도 백호 쪽에서 아름답게 솟았다.
용맥의 기본은 기복과 굴곡이다. 산세의 변화를 말한다. 변화가 없는 산줄기는 죽은 용이다. 집이든 묘든 사용불가다. 역동적인 산세, 이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그러하다. 팔짱을 낀 청룡과 백호의 형태는 막힌 수구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투장은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것이다. 요즘도 투장에 관한 얘기가 심심찮게 떠도는 것을 보면 땅의 덕을 보자는 인간의 욕심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겠다. 풍수에선 명당을 얻는 최우선 순위로 적선(積善)을 꼽는다. 살아생전 그 땅에 누울 만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다. 발복은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이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묘에 투장을 한 사람이 예가 된다. 이 지방의 토호가 흔적을 없애고자 묘비마저 동강내고 투장을 했지만, 주인 될 자격이 없었기에 결국은 쫓겨났다. 큰 자리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차지해야 탈이 없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57)강릉 김주원·최입지 묘
백두대간 精氣받아 가문을 일으키다
김주원·최입지 묘=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으로도 불리는 김주원(金周元)의 묘는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시조가 된다. 원성왕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한 후 강릉으로 이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들 헌창(憲昌)과 범문(梵文)이 이로 인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강릉 최씨(江陵崔氏)의 중시조인 최입지(崔立之)의 묘도 인근 성산면 금산리에 있다. 최입지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왕위 계승 1순위, 왕이 되지 못한 사람, 그러나 왕릉으로 불리는 묘소….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연결고리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글자의 배열이다. 그 사연은 역사 속 기록으로 남아 있다.
◆360도 U턴 산세…回龍顧祖形
왕이 후사 없이 죽는다. 차기 왕 옹립이 시급하다. 중신회의가 열린다. 그런데 계승이 유력한 사람은 홍수로 길이 막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다음 순위로 왕통이 넘어간다. 뒤늦게 왕궁에 들어왔지만 벌써 대사는 끝난 뒤다. 왕궁을 떠나 연고권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간다. 왕이 그를 군왕(郡王)으로 봉하고 식읍(食邑)을 준다. 이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중앙에 반기를 든다. 실패한다. 그의 손자가 또 반기를 든다. 또 실패한다. 명주군왕릉이 이곳에 있게 된 까닭이다. 명주(溟州)는 강릉의 옛 지명이다.
명주군왕릉은 그다지 높은 곳이 아니지만 묘역에 들어서면 산정(山頂)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주위를 둘러싼 산들로 인해 외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겹겹이 둘러친 산들은 모두가 이곳을 향한다. 어느 한 곳도 등을 돌리지 않는다. 속세와 동떨어진 별천지 같은 곳, 반쯤 핀 모란꽃과 흡사하다. 이로 인해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 이름이 붙기도 한다. 청룡과 백호는 서로 얽혀 들어왔던 길조차 제대로 분간키 어렵다. 막힌 수구다. 모름지기 수구는 막혀야 제격이다.
백호가 아름답다. 뒤를 돌아 전면으로 휘감아 돈다. 전형적인 백호작국(白虎作局)이다. 백호는 재물을 풍성하게 하고, 본손(本孫)보다는 외손(外孫)쪽에 발복(發福)의 무게가 실린다. 묘 뒤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닿은 곳이 전면(前面)이다. 자기가 떠나온 곳을 바라보는 산세, 회룡고조(回龍顧祖)다.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자애가 가득한 눈길로 손자를 보듬어 주는 형상이 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는 손자는 평화로움 그 자체이다.
◆男仙-女仙이 정다운 玉女彈琴形
옥녀(玉女)는 천상의 여인이다. 선인(仙人)은 신선이다. 천상의 여인과 신선, 거기에 거문고가 어울리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옥녀가 튕기는 거문고를 즐기는 신선, 글 그대로 선경(仙境)이다. 여유로움과 평화, 안정이 깃든 땅에 풍수를 가세시키면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 이루어진다. 강릉 최씨 중시조 최입지 묘가 그러하다.
옥녀는 둥근 산형이다. 옛 시골 초가집의 형태다. 이러한 산형은 오행(五行)을 빌리면 금산형(金山形)이 된다. 노적가리를 닮아 부자를 낳는 산이라 했다. 부봉(富峰)이다. 묘의 뒷산이 옥녀다. 안산은 길쭉한 언덕이다. 거문고를 닮았다. 그 뒤 옛 가마솥의 모습인 조산은 우람한 남성이 정좌를 한 형상이다. 단아한 모습의 옥녀는 거문고를 튕기고 위엄을 갖춘 신선은 그윽한 시선으로 음미한다. 따뜻한 봄날처럼 정겹고도 편안한 모습이다.
산과 물은 부딪혀야 제 구실을 한다. 적어도 풍수에선 그렇게 본다. 지기의 새고 나감을 막는 연고다. 명당도(明堂圖)는 원형이다. 원형은 세상 이치나 모든 자연 만물의 기본이 된다. 산수동거(山水同去)는 원형을 이룰 수가 없다. 최입지의 묘역이 있는 산줄기는 왼쪽으로 틀고, 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른다. 역(逆)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강릉 김씨 시조묘와 강릉 최씨 중시조묘는 모두 백두대간 품 속에 있다. 웅장한 백두대간의 정기가 두 가문을 흥륭케 한 기운일 터이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59)순창 김극뉵 묘
天馬의 기세가 등등한 조선 8대 명당
김극뉵 묘 앞 명당. 시원하게 펼쳐진 명당 너머로 천마사, 필봉 등이 줄지어 섰다. 보국내의 모든 물들이 이곳에서 모였다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맨 아래쪽이 김극뉵의 묘다.
※김극뉵 묘=조선 전기 대사간을 지낸 광산 김씨 김극뉵(金克 마음심변 소축)의 묘.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다. 김극뉵은 연산군 때 김일손 등과 함께 문종왕비 권씨 복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광산 김씨 가문은 후손 김장생-김집 부자가 부자로선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고, 정승 5명에 벼슬의 꽃이라 불리는 대제학 7명 등을 배출한 명문가다. 묘 아래에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순창지역에는 인촌 김성수 9대조 및 증조모 묘 등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당이 많다.
천마시풍(天馬嘶風), 용마등공(龍馬騰空), 갈마음수(渴馬飮水) 등 김극뉵의 묘를 나타내는 형국은 모두 말과 관련이 있다. 번거롭다 여기는 사람들은 아예 ‘말명당’이라고 한다. 주산이 용마산(龍馬山)이고, 마을 이름도 마흘리(馬屹里)에 대마마을이다.
◆당찬 주산에 문필·귀봉 등 줄이어
주산인 용마산은 빼어난 산이다. 지리를 잘 몰라도 경계에 들어서서 산봉우리를 살펴 가장 눈길을 끄는 산으로 찾아가면 영락없다. 두 개의 둥근 산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중 앞 봉우리를 말의 이마로 보고 뒤의 봉우리를 말의 등이라 보기도 한다. 말이 상징하는 의미가 힘이 되듯이 마을 어귀에 서서 주산을 바라보노라면 그 장엄한 기세에 기가 눌린다. 그만큼 힘이 강하다. 바위산이라 지기도 강하다. 그 강한 지기를 단번에 털어버리려는 듯이 급하게 내리꽂힌다. 그냥은 아니다. 그 사이에 작은 언덕을 세워 살기(殺氣)를 턴다. 살기를 그대로 품은 산은 감히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산이다.
명당엔 결인(結咽)이 중요하다. 기운을 좁게 모았다가 한꺼번에 뿜어내는 역할을 한다. 산에서 보는 고갯마루다. 김극뉵의 묘 뒤쪽엔 짧지만 강하게 결인된 고갯마루가 있다. 그 앞으로 둥그스름한 입수처가 자리한다.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증거다. 김극뉵의 묘가 있는 자리는 말의 콧구멍 부분이다. 물형론에서는 그 동물의 기운이 모이는 곳을 혈처(穴處)라 본다. 말의 형국에서는 코에 힘이 실리는 것으로 보고 그 위치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쓴다. 물론 형국만으로 풍수를 보는 시각은 위험한 일이다.
◆장인에게 물려받은 外孫發福之地
당판서 내려다보는 전경도 압권이다. 보국내의 모든 물이 명당으로 모여든다. 갈마음수의 이름이 무색치 않다. 뚜렷한 안산이 없는 게 흠이 될 듯도 하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넓은 앞뜰이 편안한 기분을 준다. 집터이든 묘터이든 편안한 기분을 주는 땅이 좋은 터의 우선 조건이다. 문필봉, 천마사, 귀봉, 부봉 등도 줄지어 서서 혈을 호위한다. 어깨가 꺼지고 달아나는 듯한 청룡의 지세와 쏘아 들어오는 듯한 백호 끝자락이 다소 거슬리기는 하지만 백호도 겹겹이고 청룡도 겹겹이다. 가히 조선 8대 명당에 손색이 없는 지세다.
명당에 걸맞게 전해오는 얘기도 흥미롭다. 옛날 풍수지리에 일가견을 가진 박씨 성을 가진 삼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각자 일정 기간을 갖고 사후의 안식처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 기간이 끝난 후 모두 자신들의 신후지지(身後之地)는 구했지만, 맏형이었던 박감찰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사후에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맏형은 외손(外孫)들을 발흥케 하여 그들이 자신의 제사를 대신 받들어 주도록 사위에게 그가 찾은 명당을 양보하게 된다. 지금의 김극뉵의 묘가 있는 자리가 그곳이다. 대신 자신은 위로 올라가게 된다. 말끔하게 단장된 박감찰 묘를 보노라면 그 의미가 새롭다.
김극뉵의 묘 아래 청룡쪽으론 긴 지각이 뻗어나간다. 여기엔 그의 아들 등 후손들의 묘가 조성돼 있다. 그러나 그 끝머리의 묘비는 김씨가 아닌 정씨, 김극뉵의 사위 음택이다. “몇해 전이던가, 저 묘의 후손인 정권의 실세가 여기를 다녀갔지요.” 어스름 저녁에 마을 어귀에서 만난 주민이 건넨 말이다. 이래저래 외손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땅인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60>김제 진묵대사 모친 묘
후손 없어도 천년동안 향불 오르는 땅
연꽃의 꽃술에 자리한 진묵대사 모친 묘. 너른 들판에 위치한 연화부수형 명당이다. 왼쪽 건물이 고시례전이다. 진묵대사 모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성모암 원경. 구릉 중앙에 진묵대사 모친 묘가 있다. 바다에 떠 있는 한 개의 섬과 같은 형상이다.
진묵대사 모친 묘=조선 중기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어머니 묘소.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성모암(聖母庵) 경내에 있다. 진묵대사는 많은 기행을 남긴 승려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이곳도 후손이 없어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잡은 자리라 전해진다. 향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속설로 인해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풍수가에서 필수 답산 코스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선사(草衣禪師)가 그와 관련된 설화 등을 수집해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가 전한다.
한 스님이 있었다. 장날이 되면 바랑을 걸머지고 장을 보러 간다. 고승이라 굳이 장 볼 일이 없을 터이지만 그래도 간다. 기웃기웃 장터를 둘러본다. 진열대에서 갖고 싶은 물건이 보인다. 마음이 동했다는 얘기다. 그러면 ‘장을 잘 못 본 날’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날이면 그날은 ‘장을 잘 본 날’이다. 속세 속에서의 수행이다.
그 스님이 길을 간다. 냇가에서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이고 있다. 스님이 탄식하며 말한다. ‘무고한 물고기들이 끓는 물에서 고생을 하는구나’. 그때 한사람이 말을 붙인다. ‘스님도 먹고 싶지 않은가’ 이에 스님은 ‘나도 잘 먹는다’라고 하면서 그 고기를 먹어치운다. 그리고는 물가에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쳐 갔다.
그 스님은 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고 반드시 ‘곡차’라고 해야만 마셨다.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었다. 스님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술을 거르던 스님이 스님을 시험하기 위해 술이라 대답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었다. 이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술을 거르던 스님을 혼냈다. 이 얘기들의 사실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설화는 설화로 받아들이면 족하다.
김제 불거촌(佛居村)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3년 동안이나 주위의 초목이 시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혈처(穴處)에 묘를 쓰면 주위 초목이 시든다는 게 풍수학계 이면에 내려오는 하나의 이론이다. 주위의 지기를 흡수해가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초목이 말랐다는 것은 그 아기가 지기를 흡수해갔다는 얘기가 되고, 평범한 아기가 아니란 의미도 된다. 어쨌든 그 아기는 어릴 적 출가를 해 스님이 되었다. 그가 진묵대사다.
진묵대사 모친 묘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분류된다. 연화부수형은 대개 낮은 곳에 있다. 주위는 평야지대나 강물 등으로 둘러 싸여야 한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곳은 평야지대다. 뒤론 만경강이 흐른다. 너른 벌판 곳곳의 구릉들은 청룡이 되고, 백호가 된다. 특별한 주산도 필요가 없다. 트인 앞면을 향해 좌향을 놓고 예쁜 봉우리가 있으면 안(案)으로 삼는다. 주위의 봉긋한 구릉들은 연꽃잎이 되고 물고기가 되고, 거북이 되기도 한다. 혈처는 꽃술이다. 구릉 중에서도 약간 볼록한 부분이 그곳이다.
좋은 땅에 묻힌 이의 기운은 후손이 이어받는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이다. 그러나 진묵대사에겐 후손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어머니 묘를 돌보는 사람들이 모두 후손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땅의 복을 나누어 받기 위해 지금까지 세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을 터이다.
진묵대사가 드넓은 만경평야를 지나가면서 공양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고수레’를 한다. 사람들도 따라서 한다. 실상 고수레는 진묵대사가 고씨 성(제주 고씨)인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한 행동이다. 고씨례(高氏禮)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통력이 높은 고승이었기에 따라서 하면 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게다. 이는 요즘도 들판에서 행해지는 풍습이다.
묘 곁에 하나의 건물이 있다. 한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 전례시고가 무슨 뜻이야?” 엄마가 편액을 쳐다보지만 막연한 모습이다. 가로로, 한글로 된 편액이다. 왼쪽서 읽으면 ‘전례시고’가 되고, 오른쪽에서 읽으면 ‘고시례전’이 된다.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忸:1. 익다, 익히다 2. 익숙해지다 a. 부끄러워하다 (뉵) b. 부끄럽다 (뉵) c. 교만(驕慢)하고 방자하다(放恣--)
1. 훔치다, 도둑질하다 2. 사통하다(私通--: 남녀가 몰래 서로 정을 통하다) 3. 탐내다(貪--) 4. 구차하다(苟且--) 5. 교활하다(狡猾--) 6. 깔보다 7. 야박하다(野薄--), 인정(人情)이 박하다(薄--) 8....
[부수]亻(사람인변)
[총획]11획
1. 장사(葬事) 지내다 2. 매장하다(埋葬--) 3. 장사(葬事)
[부수]艹(초두머리)
[총획]13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