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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부도탑 (檜巖寺 浮屠塔)
앞서 몇 차례 썼지만 부도(浮屠)와 탑(塔)은 영어로 둘 다 Tsutupa 다.
(Tower 가 아니라) . 쓰투파는 산스크리트-고대 인도어로 무덤이니
불교가 인도의 서북부에서 아프간을 통해 중국의 서북으로 들어 올 때
음이 탑파, 탑으로 변하고, 남쪽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오면서
부도(浮屠)로 된 것이다. 부도, 탑, 탑파 또는 파고다가 모두 어원이 같다.
우리나라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묻는 곳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부도탑(浮屠塔)처럼 하나로 붙여 쓰기도 한다.
회암사지 부도
사진 : 회암사지 6,7,8 단지-1
모두 8개 단지로 나뉜 발굴 현장 뒷부분-6,7,8 단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이 절의 중심 보광전(普光殿)이 있는 6단지고
그 뒤 8단지-사진 왼쪽 위 숲이 시작되는 곳에 부도가 있다.
어원적으로 같다지만 석가탑이나 원각사 13층탑 같으면 탑,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을 부도로 구별할 때 부도는 일반적으로 탑에 비하여 작다.
그러나 회암사지 부도는 필자가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히 크다.
사진 : 회암사지 부도
발굴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멀리서 줌을 당겨 찍고 포토샵에서
주변을 잘라내니, 가까이서 찍는 것같이 선명하지는 않다.
일제시대 부서져 조각들만 이리저리 굴러 다니던 것을 해방 전후하여
마을주민들과 회암사 스님들이 힘을 합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99년에 부도를 해체 복원 할 때 조사하니 도굴 흔적이 있으며,
아마도 일제시대에 도굴로 인하여 붕괴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부도의 주인-어느 스님을 위하여 세웠는지 알지 못하며
과연 처음 모습대로 복원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회암사(檜巖寺)
회암사 옛터 발굴현장에서 천보산 쪽으로 약 1km 정도 올라 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다.
사진 : 회암사 대웅전. 뒤에 보이는 산이 천보산이다.
옛터의 웅장한 규모를 보고 나서 지금 회암사를 대하니
짝퉁 아니냐? 하는 소리도 하는데 절에 미안한 이야기다.
다만 조선 말기 19세기 초 순조 때 세운 절로 건물은 최근 것이다.
회암사 오른 쪽 등성이에 위에서부터 차례로 나옹, 지공, 무학선사(禪師)의
부도와 비(碑)가 있다. 세분은 스승 제자 관계로 순서는 지공, 나옹, 무학이다.
지공선사(指空禪師)
사진 : 지공선사 초상화-신륵사 조사당 세 선사 초상화에서 오려냄.
먼저 글 ‘회암사옛터’ 에서 지공 부분 일부 반복한다.
지공 스님(1300?~1363년)은 마다가국 만왕의 왕자로 태어나 나란다
사(寺)에서 수학한 뒤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백성들은 “석존(釋尊)이 다시 태어나 이곳에 도착
하셨으니 어찌 뵙지 않겠는가” 하며 “석가의 환생”이라고 추앙했다.
지공 스님은 인도 현지의 나란다와 회암사의 지형이 상통한 것에 주목,
바로 이곳에 나란다의 후신을 세우려 했다. 중략……
지공은 나옹에게 “‘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며 수기(手記)를 주었다….(경향신문에서)
지공선사부도(指空禪師浮屠)
위에서 차례로 있는 세 부도 중 가운데가 지공선사부도(指空禪師浮屠)다.
사진 :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
다시 앞에서 비석과 함께 본다.
사진 : 지공선사 비석
그런데 앞 부분이 이상하다.
사진: 지공선사비석 거북이
비(碑)는 보통 거북이 등위에 얹어 놓으니 이 거북이 등에도 꼽는 홈이 있다.
그런데 비는 왼쪽에 있고, 거북이는 하는 일 없이 괜히 와서 앉아 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으니 실록기사가 생생하여 그대로 인용한다.
지공, 나옹, 무학 세 선사 부도의 파괴
실록 -순조 21년 ( 1821) 7월 23일 신미
광주(廣州)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이 양주(楊州)의 회암사(檜巖寺)
부도(浮圖)) 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곳에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다.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 선사(禪師)의 부도(浮圖)와 사적비
(事蹟碑)가 회암사 북쪽 산비탈에 있었는데, 무학의 비석은 곧 태종(太宗)의
분부를 받아 글을 지어 세운 것이다. 경기의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자, 형조에서 법의 적용 여부에 대해 대신들에게 물었다.
옛날 조상 산소자리에 관심이 지나쳐서 남의 산에 몰래 묻기도 하고
기껏 발복할 터를 잡아 파 놓았더니 시집간 딸이 밤에 살짝 가서 물을 부어
다음 날 물 나온다고 버렸더니 딸네 집에서 쓰고 복이 그리로 갔다는 둥
구구절절 여러 가지 많은데 옛 절터가 좋다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이응준이란 사람이 지관(地官)이야기를 듣고 세 선사의 부도를 헐어 버리고
자기 아버지 산소를 쓴 모양이다. 당시 회암사는 이미 폐허라 바로 몰랐고
몇 년 지나서야 알게 되어 경기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렸던 것 같다.
아무리 조선 후기 불교가 천대 받았다지만 무학대사는 왕사(王師)로,
부도는 태조대왕, 비석은 태종대왕이 세웠으니 당연히 문제가 된 것이고
위 실록기사는 그 과정을 적은 것이다.
다시 실록을 읽어 본다.
영의정 한용귀는 말하기를,
“이응준은 매우 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중죄에 처해야 합당하겠습니다만,
그 형량을 참고할 만한 법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 심리를 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사리를 훔친 짓에 대하여 논한다면 관(棺)을 열어 시신을 본 죄에
비길 만하고, 그 비석을 파괴한 죄에 대하여 논한다면 임금이 지은 글을
훼손한 죄에 해당되므로, 모두 사형(死刑)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그를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모든 것을 망라 할 수는 없으니
부도 부시면 어떻다는 규정은 경국대전에 없는 모양이다.
따라서 부도파괴는 남의 산소 열어 송장 본 죄 (부도가 곧 무덤이므로)
비석 부순 것은 임금 글을 함부로 한 죄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그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똑 부러진 법률조항이 없으니 감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록 순조 21년( 1821) 7월 27일 을해
좌의정 남공철과 우의정 임한호이 말하기를,
“대체로 정해진 법이 없으면 의심쩍은 것으로 돌리어 가벼운 벌을 적용하는
것이 참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위대한 성인의 인(仁)에 부합됩니다. …중략 “
이래서 죄는 사형이지만 감하여 귀양 보내고 비석은 다시 세운다.
그러나 원 비석은 복원할 수 없게끔 부서졌으니 왼쪽에 새로 만들고
옛 비가 있던 거북이등 위는 비워 두니 위 사진 모양이 된 것이다.
실록 순조 21년( 1821) 7월 27일 을해
하교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변괴 중에서도 가장 큰 변괴이다.
이 비문(碑文)이 매우 소중한 것인데도 어려움 없이 손을 댔으니,
그의 안중에 국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장지(葬地)를 어느 곳에다 정해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꼭 이곳에다가 이런 변괴를 저지른단 말인가?
솥도 귀가 있는데 그래도 감히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법(漢法)에 준해 볼 때 과연 불경(不敬)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신들의 의논은 모두 가벼운 벌을 주장하니, 이응준은 엄형을
가하여 자복을 받은 후 사형을 감하여 외딴섬에 정배하라.
이른바 지사(地師)란 자도 그 죄가 이응준보다 더 심하지만 단지 주객의
구별이 있으니, 그도 엄형을 가하여 자복을 받은 후에 외딴섬에 정배하고
사면의 은전을 입지 못하도록 하라.
파괴된 비석은 건국 초기에 명한 것인데 오늘에 와서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송구스럽다. 경기 감영에 분부하여 다시 세우도록 하라.
하략
옛날 귀양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볼기도 맞아야 하니 ‘유삼천리’에는
앞에 ‘장일백’이 관용구처럼 붙어 다녔다. - 장일백유삼천(丈一百流三千)
추사나 다산 정도라면 몰라도 이응준은 좀 맞고 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사형을 면하니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온다.
즉 왕실에서 아주 옛날 능을 쓸 때 이응준 네 조상 묘를 이장하게 한
빚이랄까 원죄랄까 이런 것이 있어 봐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설(傳說)일 것이다.
조선왕조의 통치는 같은 동양이라도 중국 황제같이 가혹하지 않았다.
선조 때 누가 대궐에 바짝 붙여 집을 지으니 임금이 화를 내고
대신들은 미안해 한다. 이에 대하여 율곡 선생인가(?) 백성이 잘못 한 것은
맞지만 임금은 기본적으로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는 기록을 남긴다.
궁에서 간혹 능을 쓴다던가 대궐을 넓힐 때도 박통때 철거반
같이 한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값도 다 후하게 쳐 주었다.
또 그 정도 사정이 있었다면 논의과정이 실록에 실릴 텐데 전혀 없다.
그러나 일반사람이 듣기에는 그쪽 설명이 더 솔깃했으리라.
나옹선사부도(懶翁禪師浮屠)
사진 : 나옹(懶翁)선사 초상화
나(懶)는 훈이 '게으르다'니 부지런히 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원나라에 유학할 때 지공의 제자가 되었다.
나옹이 원나라를 떠나 고려로 돌아 올 때 지공을 찾아 물었다.
“제자가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지공화상이 이르기를
“귀국하여 삼산양수지간에 거주하면 불법이 스스로 크게 일어나리라.’
먼저 글에서 썼지만 이들은 삼산양수지간의 삼산은 삼각산,
양수는 한강과 임진강으로 풀었다.
이래서 회암사를 중창하니 그 규모는 이색이 글을 남기기를 일찍이
중국에도 없던 굉장한 규모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암사 중창하고 나서
“회암사는 서울(개경)과 매우 가깝고, 남녀 신도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이로 인해 생업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하는 것이
좋겠다.’ 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는다.
이때가 우왕 때니 정국의 주도권은 이성계를 옹립하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있었다. 이 탄핵으로 나옹은 귀양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든다.
사진 :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나옹의 부도는 세 부도 중 제일 위에 있다.
무학대사부도(無學大師浮屠)
사진 : 무학대사 초상화-신륵사 조사당 세 선사 초상화에서 오려냄.
보통 무학대사로 알려져 있지만 법명은 자초(自初)인 듯 하고
조선 태조는 왕사(王師)로 책봉하며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나, 한양 정도(定都)할 때
무학대사가 어쨌다는 이야기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무학대사가 권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다.
또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 좌청룡 백악(=북악), 우백호로 남산으로 하려 하나
정도전이 임금이 남면(南面)해야지 어떻게 동쪽을 바라 보느냐고 반대하여
오늘 날 보는 바와 같이 배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자 무학은 한탄하며
2-3백 년 지나면 반드시 후회하리라 한다. 과연 좌청룡-동쪽이 약하여
조선조는 맏아들이 계승하는 일이 드물고 일본의 침략마저 받는다.
이상 다 아는 이야기 요약해 보았다. 그러나 맞을까?
이야기가 옛날부터 있다는 것과 실재로 그러했다는 것은 별개다.
위 나옹 선사가 고려 말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뒤에는 유생들이 있었다)
귀양을 갈 정도로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태조를 옹립할 성리학자들의
분위기는 불교를 극도로 싫어하였다. 바로 이들의 힘으로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는데 무학대사가 임금의 스승이라 하지만 한양 정도 같이 중요한
일에 끼여 들며 더군다나 조정 신료들과 대면하여 이래라 저래라 한다?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다.
태조대왕의 왕사로 인생의 도움말을 주는 것이야 모르지만
일상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분위기도 시스템도 아니었다.
사진 : 무학대사비 안내판
위 안내판 마지막 줄에 한양 정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녀 보면 우리나라도 일을 제법 했는지 웬만하면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러나 전설과 사실의 검증 없이 섞여 있다는 점이 조금 갑갑하다.
사진 : 무학대사 비.
오른쪽 대석은 밑에서 잘려 나가고 비는 왼쪽에 있다.
위 지공선사비 경우와 같이 순조 때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부신 것을
복원하지 못하고 옆에 새로 만든 탓이다.
사진 : 무학대사 부도
새겨진 용이 힘차게 꿈틀거리며 난간석(欄干石) 마저 둘러져 있으니
일반 무덤이라면 왕릉 급이다. 정치에 끼어 들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무학대사는 태조대왕의 둘도 없는 친구요 인생의 상담자였음은 틀림없다.
왕자의 란 이후 세상에 회의를 느낀 태조는 무학대사가 머무는 회암사에
행차하는 일이 잦으니 먼저 글에 쓴 것 같이 회암사가 행궁(行宮)적 성격을
갖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태조는 무학대사를 위하여 위 부도를 생전에
미리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사진: 무학대사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석등은 등불을 놓아두는 곳으로 주로 불전 앞에 세웠다.
죽은 이를 위하여 등불을 밝히면 다시 태어나 청정(淸淨)을 얻기에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긴다고 한다.
사진 : 무학대사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아래 부분
이상
첫댓글 감사합니다 묘자리가 참 중요하긴 하나봐요 무학 대사 역사적인 인물임에는 좋은글 공부하고갑니다^^스크랩 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