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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법사 마라스리(Somya Marasri)스님
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토픽이 남자들 군대 이야기요, 그보다 조금 더 싫어하는 것이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란 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생기초 상식.
다녀와본 적이 없어 상상하기도 쉽잖지만 군대라는 사회가 마음공부하기 빡빡한 공동체일 것이란 짐작은 간다. 게다가 전쟁터에라도 파병된다고 해보자. 총알이 빗발치는 생과 사의 귀로에 선 군인들… 아, 이제 바가지 그만 긁고 남자들에게 잘해줘야 할 것 같다.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간인들에게도 영혼의 안위는 존재의 뿌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데, 군대라는 특수사회의 구성원들에게야 어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호랑이 같은 훈련장교만 있을 것 같은 군대에 군종장교라는 특수직이 있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미국의 군대에 불교 군종장교와 군법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눈뜸이었다. 미국 전체 인구 중 불교신자의 비율은 1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미군(US Army) 내에서의 불교신자는 3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통계수치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눈으로 확인하는 군인들은 세상 만물이란 단지 인연에 따라 결집되었다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흐름일 뿐임을, 가부좌 틀고 앉아 명상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깨닫게 된 건 아닐까.
육해공군을 통틀어 3명뿐인 불교 군법사 가운데 삼야 마라스리(Somya Marasri) 스님이 우리들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가 올해 5월 27일, 한국불교태고종단의 일원으로 입종했기 때문이다. 종매스님을 은사로 태고종에 입종한 삼야 마라스리 스님의 한국식 법명은 혜정. 혜정스님이 태고종단에 들어온 의미를 한국불교태고종 해외특별교구의 종무원장 종매스님으로부터 들어보자.
“미군의 군법사는 현재 육군에 2명, 해군에 1명뿐입니다. 혜정스님의 태고종 입종은 태고종 전체로 볼 때 그 의미가 큽니다. 혜정스님의 태고종 입종으로 미국에서의 태고종 포교활동도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타일랜드에서 태어난 혜정스님은 1987년 태국 상좌부 마하니카야종에서 출가해 2000년 방콕의 마하출라롱콘 불교대학 졸업, 2001년 도미, 2005년 미군 입대, 2006년 미국불교교회(Buddhist Church of America)의 인증서 획득, 미국 육군 군법사로 임관, 웨스트 대학 군법사 프로그램 참가, 2010년 Divinity in Buddhist Chaplaincy의 석사과정 졸업 후 워싱턴 포트 루이스에서 정규군 군법사(대위)로 복무 중이다.
삼야 마라스리 스님(혜정스님)은 1970년 9월 11일, 타일랜드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였던 그는 위로 누나 셋과 형이 하나 있다.
당시 그의 고향집에는 TV, 냉장고, 컴퓨터 등 전기제품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 수돗물조차 없었을 만큼 현대문명의 혜택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환경 덕에 스님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을 했어야 했다.
“어린 시절, 전 상당히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걸어가서 식수를 길어와야 했었어요. 무거운 물동이를 지고 먼 거리를 오간다는 것이 고생스러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외려 제게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부잣집 아이들은 결코 해볼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됐거든요.”
훗날 스님이 될 그가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어린 나이였다. 그가 살던 마을에는 작은 불교사원이 하나 있었다. 스님들과 절의 어른들은 어린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먹을 것도 주곤 했었다. 사원에 가는 것이 즐겁다는 이미지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어쩜 어린 시절 사원에서의 좋은 기억이 훗날 그를 승려가 되게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어린 시절, 하던 놀이는 평범한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었다. 침대보를 스님들의 장삼처럼 몸에 두르고, 거리로 나가 발우에 공양 받아 오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니,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 뭐 뾰족한 여흥이란 게 있었을까. 사원은 그 마을 아이들에게 만남의 장소요, 놀이터였다. 고향 마을의 아이들은 돈과 선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원의 축일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단다. 한 마디로 사원은 마을 주민들의 여흥과 그 외 모든 활동의 중심지였던 것.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사원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사원에서 밤을 지새우는 건 사내아이들에게만 허락되는 특혜였다. 스님들은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수트라(불경) 독송법과 불교의 기본 교리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스님들과 함께 조석으로 불경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버거워 그는 사원에서 밤을 보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났던 훈련들이 감정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스님의 부모님들은 팔정도를 지키는 열성적이고 신실한 불교신자들. 3개월간 우기가 계속되는 하안거 때면 스님은 밤새 기도하고 오시던 부모님들께 음식을 가져다 드리기도 했고 가끔씩은 그 역시 사원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었다.
부모님들은 밤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스님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셨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가 고작이었지만 어찌나 흥미진진했던지, 스님은 눈을 반짝이며 부모님의 얘기를 경청했었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불교 축일, 그리고 마을 사원에서 한 달에 4차례 열리던 정기 법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대문 앞에서 스님들을 위해 공양을 바치시키도 했다. 부모님들은 사원의 법회와 축일에 자주 자녀들을 데려가시기도 했다. 타일랜드의 농부들에게 종교란 생활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거기다 스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기 전, 한동안 비구게를 받았었던 분. 자연스레 집안 분위기는 무척 종교적이었다. 스님은 어릴 적, 잠자리에 들기 전, 온 가족이 함께 불단 앞에 모여 삼보(부처님, 불법, 승가)에 예를 올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한 달에 4번 정기 법회 때도 자주 부모님을 따라 가곤 했다.
“왜 이런 것들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했고 또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부모님들이 하셨기 때문에 했을 뿐이죠. 훗날에야 이런 의식 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는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종교적인 성장배경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는 사원에 속해있던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각자 도시락을 싸가거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와야 돌아와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점심을 먹지 않고 학교가 끝날 때까지 있다가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거나 사원에 가서 스님들 공양하고 남은 음식을 먹곤 했다. 혜정스님은 사원에 가서 스님들의 남은 공양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저를 영적인 생활로 이끌었던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원의 사람들은 후하고 친절하죠. 특히 스님들은 아이들에게 절대로 소리를 지르지도 나쁜 말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6년이 지나갔다. 스님의 학교 친구들 가운데 반 이상은 4마일 떨어진 이웃 마을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학교는 자전거를 타거나 오랜 시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스님은 가정형편 상 중학교 진학은 이미 틀렸고, 부모님을 도와 소를 기르고 논일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부러움과 질투에 울기도 했었다.
스님은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을 도와 논에서 몇 년을 일했다. 그 후 스님은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 집에 보내졌다. 메카닉으로 일하고 있던 친척 어른을 도우며 일을 배우게 하려는 부모님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그곳에는 스님 말고도 7명의 견습생들이 더 있었다. 급여는 10달러뿐이었지만 친척 집에 머물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그는 만족하며 열심히 일했다.
시골 깡촌에서 자라 한 번도 도시에 가본 적 없는 스님에게 도시와 그곳의 사람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부모님, 그리고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음식, 마을의 사원이 모두 그리웠다. 그 시절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눈물로 지새우는 밤들이 많았다.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됐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지자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전기, 수도, 전화, 모토사이클, 자동차 등 현대적 시설과 물건들은 그를 감동시켰다.
“처음 내 손으로 전깃불을 켰던 순간, 얼마나 신났었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그 순간 기뻤던 감정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시골 촌놈에게는 그게 아니었죠.”
집에 전화가 없었던 관계로 스님은 가족들과 몇 달 동안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스님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도시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해드렸다. 첫 몇 달 동안은 거의 매일 편지를 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편지 쓰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몇 년의 도시생활 뒤, 그는 시골 고향마을에서의 삶을 완전히 잊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도시는 아름답고 놀라운 곳이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나이트클럽, 영화관, 컨서트에도 다녔다. 사원은 근처도 가지 않았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사원의 맛난 음식도 까맣게 잊었다. 밥은 친구들과 식당에서 먹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학교 다니고 부모님께 순종하고 사원 법회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던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술마시고 담배피우는 방탕한 젊은이였다. 그의 이런 나쁜 습관들은 친구, 환경, 그리고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명절과 종교축일 때면 부모님을 찾아갔지만 점차 부모님들께 편지쓰는 것도, 고향 마을 방문도 드물어졌다. 부모님들의 아들 걱정은 깊어만갔고 특히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근심으로 병까지 얻으셨다.
그가 다시 종교적 삶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마지막으로 집을 방문했던 17세 때의 일이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병세가 깊어진 어머니는 스님의 손을 잡고 부탁을 하셨다고 한다. 술 담배를 끊고 더 이상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라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스님은 어머니가 부탁하신 것을 모두 지키겠으며 사원의 견습 승려로 들어가겠다고 약속드렸다. 당시 그는 아직 세상의 즐거움들을 버리고 싶지도, 승려가 되고 싶지도 않았었다.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런 약속을 드리고 수도승의 삶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1987년의 일이었다.
견습 승려로서의 새로운 삶은 무척 힘겨웠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다른 수도승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독송과 명상을 해야 했으며 불교와 팔리어 공부도 해야 했다. 불경을 공부하고 더 깊이 명상에 빠져들수록 그의 영적 생활은 더욱 진지하고 깊어졌다.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짧은 기간 동안 견습 승려가 되고자 했었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훗날 사원에서의 새로운 삶에 익숙해진 그는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진정으로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견습생활을 마친 그는 고향의 사원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타일랜드 남부지방인 크라비에 가서 좀 더 깊이 불교를 공부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었던 그는 불교 공부를 마친 후, 주말이면 GED 학교에 다녔다. 대학교육을 받고 싶다는 욕심에 스님은 방콕으로 이주, 마하출라롱콘 불교 대학에 등록해 2000년에 졸업장을 받는다. 어머니는 그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하셨고 자연스레 병세도 회복되어갔다.
2001년, 그는 미주 타이 불교 승가 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콜로라도의 덴버와 콜로라도 스프링즈, 유타의 레이튼, 네바다주 라스베가스의 타이 불교 협회 커뮤니티를 위해 타이의 문화와 불교를 가르치며 봉사했다. 유타 주의 레이튼 불교사원에 있었을 때, 스님은 파병 전, 축복을 받기 위해 사원을 찾은 불교신자 병사를 만났다. 불교 군법사라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군법사가 되기를 고려한 첫 순간이었다. 2004년, 라스베거스의 사원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또 한 명의 불교신자 군인을 만났다. 그는 스님에게 기초 훈련을 받는 동안 불교 군법사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는 군법사 취업 정보를 살펴보았다. 1991년 이후 불교 군법사 자리는 공석이 많았다. 군인들을 돕고 싶다는 바램에 그는 2005년, 입대한다. 군대의 기초적 지식을 얻기 원해 그는 하사관 계급으로 입대한다. 군법사 후보 또는 군법사가 되려면 미국 내 유일한 불교 군법사 인증 기관인 미국 불교교회(Buddhist Church of America)로부터의 인증을 받아야 했다. 스님은 2006년 5월, 인증서를 받고 같은 해, 11월 26일에 소위에 임관됐다.
캘리포니아 로즈매드에 있는 웨스트 대학에서 군법사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에는 현역군이 아니라 예비군으로 봉사했다. 2010년 5월에는 Divinity in Buddhist Chaplaincy의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다시 군의 불교 군법사로 현역군에 복귀한 것은 2010년 10월 18일의 일이었다. 현재 그는 워싱턴 포트 루이스에서 대위 계급의 군법사로 복무 중이다.
혜정스님은 조화의 종교인 불교가 다종교사회에서 여러 장점을 갖고 있는 만큼, 불교가 군불자들의 사기 진작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앞으로 군 포교에 전념할 예정이라는 스님에게서 미국 내 불교 포교의 커다란 희망을 본다.
태고종과의 인연은 웨스트대학에서 랑캐스터 박사와 함께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를 공부할 때에 맺어졌다. 예전에 일본의 젠 불교를 공부했었던 스님은 종매스님의 도움으로 한국의 선불교를 알게 되었고 이내 선불교에 매혹되었다.
혜정스님이 태고종단의 승려가 된 데는 종매스님의 공로가 크다. 제자가 태고종에 입종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자 종매스님은 일체의 서류작업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혜정스님은 올해 5월, 한국에 가보지도, 한국에서 공부하지도 않고 태고종단의 승려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태고종단의 일원이 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스님에게는 한국인 친구들이 여럿 있다. 대부분 LA의 웨스트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스님들이다. 스승이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한국인들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국 음식은 모두 입에 달지만 특히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
불교 승려로서의 궁극적 목적은 붓다와 아라한들들처럼 깨달음, 견성에 이르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이를 위해 매일 수행 중에 있다. 다른 수행자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지 모르지만 평생 붓다의 발자취 따라가기를 멈출 순 없는 일. 그는 또한 보디사트바(보살)를 따라 카운셀링, 법회 인도, 영적 필요 충족을 통해 중생들이 고해를 건널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가 존경하는 승가의 스승들은 태국불교의 등불로 불리는 바퐁사원의 아잔차 스님, 태국 불교사에 큰 영향력을 미친 아잔 붓다다사, 미얀마의 위빠사나 대선지식인 테라바다의 마하시 사야도, 에도시대의 임제종 승려인 하쿠인 선사, 숭산스님, 달라이라마, 틱냣한 스님 등이다.
2006년 군법사 고용 정보에 따르면 미군에는 3100명의 불교신자인 군인들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숫자는 이것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 군대는 현역군, 예비군, 주방위군 등 3종류가 있다. 미군 전체에서 불교 군법사는 단 3명뿐이다. 해군의 신 군법사, 주방위군의 다이어 군법사, 그리고 미 육군의 마라스리 군법사(혜정스님)가 그들이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는 다른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군에는 부군법사가 있어 군법사인 혜정스님의 안전을 지켜준다.
군법사들의 모토는 ‘살아있는 군인들에게 양육을, 상처받은 군인들에게 보살핌을, 추락한 군인들에게 영광을(Nurture the living, Care for the wounded and Honor the fallen.)’이다. 그는 군법사로서 이 모토에 따라 모든 병사들과 그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그의 일과를 살펴보자.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운동 훈련(PT)를 하고난 후 월~금요일 9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사무를 본다. 상담, 법회 인도, 병원방문 등이 그의 주요 일과이다. 병원에 있는 불교신자와 비신자 군인들을 방문하고, 기독교 군법사들과의 만남을 원치 않는 무신론자 군인들을 만나 도움을 주는 것이 그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행복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불교법회를 주도한다. 법회는 수트라 독송, 참선, 법문,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진다. 상당히 많은 수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그가 이끄는 법회에 참가하고 있다. 최근 그의 부대로 배치된 여군은 주말에 불교법회가 있다는 걸 알고는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했다. 지난 5월에는 약 200명이 한 자리에 모여 군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축하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도 부딪힘 없이 순조롭게 군법사 생활을 해온 것에 대해 그는 감사함을 느낀다. 군대 내부의 사람들은 모두 불교 군법사라는 특수직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불교신자인 군인들은 군에 불교 군법사가 상주하는 것에 대해 큰 만족을 표현한다.
미군은 더 많은 군법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군법사가 되기 위해선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할까.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은 당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 인증서는 1)당신이 그 신앙 공동체의 종교지도자라는 것과 군법사로 봉사할 수 있을 만한 영적 도덕적 지적 감정적 요건을 갖추었음을, 2)군인 군인가족 군대를 위해 일하는 민간인들을 위해 종교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종교의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줘야 한다.
또한 120시간 이상의 교육시간을 이수하고 대학공인입학자격시험의 학위를 소지한 자 또는 신학이나 종교학 석사학위 소유자, 72시간 이상 종교 분야 석사 과정을 이수한 자라야 한다. 현역군 주방위군 군법사는 미국 시민권자만 지원할 수 있다.. 영주권자는 예비군에 지원 가능하다.
지원자들은 국가 에이전시 시큐리티 클리어런스에서 좋은 결과를 받아야 하며 군 입대 처리스테이션(MEPS)에서 실시하는 건강진단에서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소속된 종교 단체에서 최소 2년간의 풀타임 직업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주방위군은 해당사항 없음.) 종교지도자로 임명됐을 때의 나이는 21세 이상 45세 이하여야 한다.
군법사는 그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인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의 신도들을 이끌고 종교의식을 치루는 능력이 요구된다 군법사는 자기 신앙의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이들이 그들의 신앙을 고수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란 다원화된 환경이다. 랍비, 목사, 신부들은 신념과 헌신으로 군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군 내부의 신앙 그룹에 봉사하는 동안, 군법사는 미국 법과 규정에 의거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방위군과 예비군에서 필요한 군법사의 숫자는 약 300명. 불교 군법사 역시 다수가 필요하다. 불교 군법사에 정보는 http://www.goarmy.com/chaplain/about/requirements.html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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