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바위 순교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오늘은 황새바위에 두 대의 버스로 성지순례를 하는 날이라 8시경 서둘러 성당으로 향했다. 인원 파악과 좌석 배치가 끝나고 모두 88명이 성모상 앞에서 신부님 강복을 받고 8시 40분경 출발 하였다. 먼지 낀 들판을 촉촉이 적시는 가을비가 차창 밖에 어린다. 출발예정시간 보다 20분 늦게 출발한 우리는 2호차에 수녀님 두 분과 주일학교 교사와 주로 아이들이 승차 하였고, 내가 탄 1호차는 신부님이 선탑하시고 안기현 유스티노가 오늘의 일정에 대해 안내를 하였다. 세가지 금이 있는데 아시는 분하며 퀴즈를 시작으로 두리번거리며 황금, 소금, 백금, 대금, 통금, 대장금 등등 한마디씩 던진다. 유스티노가 황금, 소금, 지금이라며 얼굴은 알아도 이름을 모르니 지금 자기소개를 뒤쪽 좌석에 계신 분부터 한사람 씩 하도록 권하여 자기소개를 하였다. 내 차례가 되어 오늘 주님의 배려로 먼지 날리지 않는 촉촉한 일기를 주셨다며 이러한 날씨를 가장 빨리 감지하는 남자, 전등을 반절만 켜도 주위가 환히 밝은 남자 박성규 프란치스코 라고 소개하니 모두 웃는다. 세레나에게 마이크를 넘기자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여자 강해정 세레나라고 소개를 한다.
모두 소개를 마치고 신부님의 인사 말씀이 끝나자 오늘 가는 성지 순례 오가는 동안의 안전운전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성인의 믿음을 본받고 각 개인이 지향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시길 기원하며 103위 성인의 기도와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5단을 바쳤다. 진행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텅 비며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레나가 기도문을 재빨리 내 밀었지만 안경 없이 보는 글씨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안경을 챙겨 왔었는데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점심 식사 후 산행 할 때 마다 하는 묵주기도는 막힘이 없었는데 내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준비성 없는 내 자신의 교만이 부른 실수 좀 더 겸손해야지 다짐해 본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나니 상기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아내가 왜 그랬느냐며... 그렇게 막힐 때가 종종 있어서 항상 기도문을 준비 하고 있어야 한다며 웃는다. 차창에 서린 김을 손바닥으로 지워 밖을 보니 황금빛으로 빛나던 논은 어느새 가을걷이가 끝나 텅 비어가고 하얀 억새가 을씨년스레 서 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도 하나 둘 떨어져 길 위로 주저앉고,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고구마 밭은 서리가 올라 거뭇거뭇 잎이 오그라들었다. 휘돌아 가는 산자락에는 구절초와 개미취가 물기를 머금어 희다 못해 옥빛으로 눈이 싱그럽다. 출발이 늦은 탓에 휴게실에 들르지 않고 논스톱으로 11시 미사를 맞추기 위해 황새바위 성지에 10분전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비가 아직 개지 않고 내린다. 성지 입구의 기와를 얹은 관리소에는 잎이 넓은 담쟁이가 순교 성인들의 성혈처럼 붉게 물들고, 줄기가 떨어진 이파리는 핏줄처럼 벽에 드러나 있다. 길옆에는 박찬호기 야구 ...뭐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보인다. 성당 들어가는 입구 좌측으로 돌로 꾸며진 길옆에 예수님 상 발 아래 노란 국화 화분이 선명하다. 현관 앞에는 우산을 놓을 수 있도록 탁상 위에 비닐이 깔려 있다.
오늘 순례 교우들은 우리 홍농성당 외에도 서울 아현동 성당 염리동구역, 서울 전농동 성당(ME) 라고 쓰인 게시판에는 위에 “반갑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현관에는 봉사자들이 자루에 담긴 밤을 팔고 있고 한편에는 후원금 모금 활동을 하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순교자 유물인 필사본 성서 유물과 십자가가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14처는 우리성당 14처 작품과 비슷하여 동일인 작품으로 보인다. 들어가는 정면에 둥근 유리가 보이고 유리창에는 우물정(井)자가 새겨져있다. 신앙 선조들이 피로서 이룩한 믿음의 우물을 나타낸 듯하다. 그 아래 십자가를 바라보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오른 편으로 벽에 신앙선조들의 그림이 붙어 있고 왼편에 성모상이 보인다. 오늘 독서를 하기로 되어 왼쪽 맨 앞에 독서 대 앞에 자리를 잡으니 미사 시작 전 줄리아 수녀님께서 오셔서 독서 후 화답송까지 하라신다. 오늘독서는 다른 때보다 좀 길어 보인다.
최상순 비오 신부님이 제대 앞에서 내려오시면서 강론이 시작 되었다. 소에서 나온 고기는 다 소고기지요 라는 질문으로 부위 별로 등심, 안심, 족 등 아무 곳에서나 한 근씩 주면 받는 사람이 똑같이 생각 하겠느냐는 선 문답식 물음을 던지신다. 개념에 대한 정의를 신부님이 달변으로 설명하신다. 증거자는 신앙을 널리 알리고 증거한 사람이며, 순교자는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를 명명 하신다며, 그래서 성지와 순교성지는 격이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순교 성지를 서소문, 새남터, 숲정이 등은 순교 성지이고,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솔뫼성지, 신부님이 되셔서 제주도까지 배가 흘렀다가 최초로 발을 디딘 나바위 성지 등 성지로 부르지만 새남터에서 순교 하셨기에 순교성지는 다른 성지와 다르며 특히 그동안 248명의 순교자 명단에서 추가로 89명의 공주 충청감영 기록이 공개되면서 신유박해가 있었던 1801년 순교한 이존창 루도비코를 포함하여 병인박해까지의 337명의 순교 선조들의 이름이 밝혀진 이곳 황새바위 성지야 말로 격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다른 곳에 가셔서는 말씀 하시지 말라고 부탁 하신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자체로 기록을 수집한 것이 아니고 조베르나르도 사제가 공주에 부임 하면서 기록을 꼼꼼히 모으기 시작 했었단다. 외방 선교 신부님의 순례가 증가하면서 박해 유물의 위치를 묻는 순례 행렬에 일일이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공무원들이 고귀한 역사적 가치와 중요한 순교 유물을 훼손하였단다. 신부님은 교육청을 지을 때에도 수많은 유골이 나왔었는데 그 마저도 가루로 뿌려졌다며 아쉬움을 토로 하신다. 강론을 듣는 동안 마음에 뭉클 고이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이 놀라울 뿐이다.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견디며 10살 어린아이부터 80이 넘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증거 했다니 놀라운 믿음이다.
박해를 피해 인적이 드문 산중으로 들어가 백자며 청자, 숯 등을 구워 팔고, 화전을 일구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병마와 영양실조로 죽은 이름 모를 믿음의 선조들은 주님만 아실게다. 당시엔 양반만이 기록에 남았을 뿐 평민이나 천민 계급의 교우들이 얼마나 많이 유명을 달리 했을까? 또 양반들은 고대광실 집과 호의호식을 버리고 친지들과 이별한 채 항쇄를 목에 걸어 바위 구멍에서 숨이 끊어지는 형벌을 받고 죽어갈때,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을까? 죽음이 영원한 삶의 시작이었음을 지금의 신자들도 이해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제민천에 버려진 시신들의 피가 금강을 붉게 적셨다니 비오 신부님 말씀처럼 한국 교회의 신앙의 심장이 공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신부님 말씀에 다시금 숙연해진다.
신부님은 얼마 전에 발견 된 오래된 성물인 십자고상을 보여주시며, 그 당시 프랑스 외방 선교에서 조선에 파견 된 사제 분들과 가족들의 마음을 되새겨 본다. 이 땅에 파견이 곧 죽음이었음을 아시고 주님을 순교로 증거하신 거룩한 분들의 영혼이 숨 쉬는 황새바위 순교지 미사가 끝나는 파견 성가가 피아노와 대금 협주로 끝나자, 비오 신부님은 날씨 때문에 마땅한 교육관과 식당이 없어서 이곳이 바로 성당이며, 식당이요 교육관이라 말씀 하시며 음식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비닐 위에 식사를 올려놓고 드시라고 당부하신다. 충청도 사람들은 말이 느리다고 들었는데 이제까지 강론을 들었던 기억중 신부님의 스피드가 가장 빠른 것 같다. 요즘 개그 콘서트에서 뜨는 애매한 것을 정리 해주는 남자 애정남과 좀 닮은 “애정신” 애매한 것을 정의를 내리주시는 신부님 별호를 드려야 할 것 같다. 하얀 쌀밥에 배추김치 버섯이 들어간 숙주나물 호박과 고등어조림 그리고 된장국이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배식이 시작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가 개고 우리는 세 그룹으로 나누어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했다. 바위로 된 14처는 철지난 영산홍으로 쌓여 있다. 돌무덤 경당과 순교 기념탑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부소산성을 향해 차에 올랐다. 놀 차는 1호차 졸 차는 2호차로 옮겨 타고 계획보다 30분 정도 늦게 출발하였다. 3시 25분경 도착한 부소산성 입구에는 돌로 부소산성 이라고 새겨 백제의 왕도 부여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고 화장실도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표지판의 고란사 낙화암 표지를 따라 재촉하는 길 가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기분마저 상쾌하다. 잘 정돈된 굽은 길마다 고목들이 정취를 더한다. 낙화암에는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에 세웠다는 육모정이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바위 위에서서 굽은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노란 은행잎과 붉게 물든 단풍이 바람에 흩어져 낙화한 궁녀들의 치맛자락처럼 날린다. 신부님과 수녀님 교우들이 속속 낙화암에 도착해서 기념 촬영을 하고나니 4시 가까이 되었다. 저 멀리 백마강에는 판옥선에 집을 얹은 듯한 배 한척이 연무로 흐려진 노을 속을 미끄러지듯 흘러온다. 우리는 어둠이 찾아드는 길을 되짚어 서둘러 주차장을 향했다.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터라는 현판을 지나 부소산성 출입문 가까이 서있던 노란 은행나무가 누군가인지 대상 모르는 엘로우 카드를 한 장씩 던진다. 우리는 버스 옆에서 모여 가져온 오리발 튀김에 술 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다섯 시 경 버스에 올랐다. 오는 도중 군산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홍농에 도착하니 일곱 시가 지났다. 버스에서 내려 한아름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토요일 하루 성지순례와 부소산 산책 너무 좋았고요 기사님 두 분과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진행하신 분들 그동안 행사 준비하신 분들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