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가르침을 불법佛法이라고 하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주고 중생을 계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스님僧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전하거나, 잘못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스님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불교가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등 종파가 나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불교는 불법승佛法僧을 ‘삼보’라고 하는데 스님을 ‘부처님-부처님 가르침’과 같은 반열에 둔 것은 그만큼 스님이 중요하다는 것일게다.
조선 시대에는 ‘중’이라고 불렀으나, ‘스님’이라고 깍듯이 존칭으로 부르는 것만 봐도 불자들에게는 스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스님에 따라서 마음을 곱게 먹고 살라거나, 마음 가는 대로 살라거나, 마음을 비우고 무소유로 살라거나 하는 것은 사람은 마음먹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一切唯心造라고 있는데, 고승들은 물론 선지자들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살지 손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니까 자기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문제다.
이 책의 저자 월도 스님은 구인사로 출가하여 종단의 일은 물론 불교 TV에서 생활법문을 강의하기도 하고, 현재는 분당 대광사 주지로 있으면서 중생을 계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서 책 감상에 대신하기도, 그리고 불교를 아는데, 수양하는데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스님의 이야기 가운데는 부처님 말씀을 옮긴 것도 있지만, “오늘 필요한 걸 오늘 할 수 있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이 천 원밖에 없으면, 천 원으로 가족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 또한 찾을 수 없으니라.”
- 금강경(金剛經) -
퇴근한다는 것은 출근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은 좋아하고 죽는 건 싫어하지만, 알고 보면 그게 그거예요.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다는 이분법칙 논리는 독선일 뿐입니다. 출근을 했으니, 퇴근을 하듯이 인생도 한 번 왔으면 한 번 가는 게 당연하죠. 태어남과 죽음은 결코 둘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그저 만나는 인연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줄 알아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설사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픔이 희망이라면 믿을까? 당신은 죽어서 천당 간다면 믿을까? 아마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천당이나 극락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죽어서 가는 그곳보다는 살아있는 현실에서 행복해야 미래가 있다. 행복을 바란다면 인간답게 행동해야 한다. 인간다운 행동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부처님께서는 ‘남을 위한 마음’이 곧 행복이라고 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주의는 인간답다고 할 수 없다. ‘나를 위해 살면 중생이요, 남을 위해 살면 보살이다.’남을 위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하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계산해서는 안 된다.
오직 오늘 마땅히 할 바를 열심히 하라.
그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랴.
참으로 저 죽음의 대군과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도다.
능히 이렇게 아는 자는 마음을 다하여
밤낮없이 게으르지 않고 실천하나니.
이러한 자를 현명한 자라하고
또한 마음을 평정한 자라 하느니라.
- 아함경(阿含經) -
천당에 가지 말라 막지 않아도 가는이 적은 것은
탐진치(貪瞋痴) 번뇌로써 집과 재산을 삼기 때문이요.
지옥으로 오라고 꼬시지 않아도 가는이 많은 것은
온갖 탐욕을 쫓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니라.
- 원효대사(元曉大師) -
행복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믿음은 어떤 절대 신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자연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는 믿음, 어머니와 아내가 해주는 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굶어야 한다. 의심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믿음 여부에 따라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는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잘 속는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진 게 있으니 속이려 드는 것이다. 속아 주는 것은 결코 억울한 일이 아니다.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속는 걸 배우는 것이다. 믿음을 배우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공양도 베품도 아니다.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공양이다. 이만큼 했으니 결과가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야 한다. ‘씨뿌리고 김매고 했으니 이런 모양으로 열매가 열려야 하는데…’하고 조바심도 내지 말아야 한다. 믿음을 가지고 가꾸다 보면 실망 주지 않고 열매가 열리듯이 깨달음도, 소원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원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체를 따르듯이.
- 법구경 -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억지로 끌려가듯 초라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음 자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의연하고 편안하게 가는 사람도, 현실의 삶을 무한히 긍정하는 사람은 죽음도 잘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아서도 힘들고 죽음도 불행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후회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
자기야말로 자신이 의지할 곳
말 장수가 좋은 말을 다루듯
자기 자신을 잘 다루리.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 법구경 -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예의 바르고
참된 진리를 구하는 도반을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예의 바르고
참된 진리를 구하는 진정한 도반을 얻지 못한다면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수타니파타 -
늙기 싫고, 병들기 싫고, 죽기 싫고, 좋은 사람과 이별하기 싫고, 미운 사람과 만나기 싫고, 재물은 늘어나기만 바라고, 줄어드는 건 싫고 …‧.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내 바람과 관계없이 세상은 변하여 흘러가고 있다. 나의 괴로움은 세상 때문이 아니고, 변화를 거부하는 욕심 때문이다. “세상을 탓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세요. 그러면 자연스러운 인생,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변화가 실감나지 않는다면, 내 이름을 불러주던 ‘애기야’하고 나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 ‘할아버지’하고 부르는 손자들을 생각해 보라. 그래도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또 내가 보는 게 세상의 참 모습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깨달은 이들은 그대로 보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다. 하늘에 뜬 보름달은 아름답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시름에 잠긴 사람이 보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처지에 따라서 내 수준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인다. 연애시절에는 달을 보고 맹세도 하고 축복을 기원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지지고 볶고 하고 난 뒤 바라보는 달은 아름답기는커녕 처량하기까지 할 것이다. 연애시절 그 아름답던 달이 왜 처량한 달로 변한 것일까? 그것은 달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교가 어렵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학문적으로 교리를 배워야 하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냥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수행도 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니까 그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편한지 모른다. 모르면 지킬 게 없다. 알면 아는 만큼 지킬 게 많아진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완벽히 알려고 하니까 어렵지 그렇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 없다. 실천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 얻는다면 어려울 게 없다. 그냥 힘닿는 대로 꾸준히 실천하면 되는 것이 불교다.
세계 모든 종교는 착하게 살라고 하고, 믿음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착하게는 종교가 아닌 초중학교에서도 배운다. 불교의 믿음은 어떤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우월한 존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 모두가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든 그 성품만 드러내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희망을 말한다. 마치 구름이 가려진 달이 구름을 걷어내면 온 천지가 환하듯이 우리 마음속 번뇌와 망상을 걷어내면 그냥 그대로 부처라는 것이다. 불교는 누가 나를 비춰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기 위해 먹구름을 걷어내는 종교다.
책의 저자인 도일 스님이 들려주는 마지막 이야기. “회정懷正 스님은 의상대사가 했듯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천일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쳐 갈 무렵 꿈에 귀부인이 나타나 ‘양구로 가라. 거기에 가면 몽골옹, 해명방, 보덕낭자 세 명이 있는데, 그들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한걸음에 양구로 가서 초라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몽골옹이었다.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뒤, 노인이 일러준 대로 해명방을 찾아갔더니, 어여쁜 낭자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스님이 자초지종을 말하자 ‘해명방은 저의 아버지인데 성품이 워낙 사나워서 무슨 말이든 순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것입니다.’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잠시 후에 해명방이 나뭇짐을 지고 오더니 ‘어떤 놈이 감히 내 딸에게 수작을 부리느냐?’며 작대기로 마구 때렸다. 겨우 말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관세음보살을 만나려면 내 딸과 혼인을 해야 한다.’며 우기는 것이었다. 스님은 출가한 몸으로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낭자와 결혼했다. 3년이 지나도록 허송세월만 보내던 회정스님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며 ‘떠나겠다’고 했다. 부인도 해명방도 잡을 생각을 안 하자 스님은 그곳을 떠나 몽골옹에게로 가서 그간의 일을 말하고 하소연했다. 이에 몽골옹이 ‘그대가 데리고 살던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인데 그것도 몰랐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해명방은 대세지보살, 자신은 보현보살이라고 하여, 깜짝 놀란 스님이 곧바로 자기가 살았던 집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이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보현보살이라도 만나볼 생각으로 몽골옹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아무흔적도 없었다.”
주변에는 올바른 지혜를 줄 관세음보살도, 부처도 널려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부처가 아닌 존재가 없다고 한 부처는 이미 우주 법계에 꽉 차 있는데도 내 눈이 멀어서 부처를 보지 못할 뿐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착한 며느리를 보려면 내가 좋은 시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시어머니에게 잘해야 하고, 자식이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세상사 모두가 내 마음에 답이 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지금 생에 받는 이것이라네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지금 생에 짓는 이것이라네
- 법화경 -
아마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고 생각한 말이 보살행(菩薩行)이다. 그것은 보살처럼 살자는 것인데, 보살과 중생의 차이는 알면 보살행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중생이고,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 알면 보살이다. 여자라서 보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보살행을 해야 보살인 것이다. 하지만 중생도 한 마음 바꾸면 보살이 될 수 있다. 밥을 먹을 때 영양학적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먹지 않듯이, 숨쉴 때 자연스럽게 하듯이, 수행도 그런 과정으로 정진할 따름이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을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 얼굴은 생기에 넘쳐 맑아진다.
오지 않은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 일야현자경(一夜賢者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