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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면] 정약전 사촌서당(복성재) 신안문화원 2006/3/16 191
정약전 (丁若銓)
1758(영조 34) 경기 광주~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다. 약용(若鏞)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김원성(金源星)·이승훈(李承薰)·이윤하(李潤夏) 등과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서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전적·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하고 있던 이벽(李檗) 등의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16년 만에 죽었다.
그는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幾何原本〉을 읽고 깊이 탐구했으며,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 天主實義〉·〈칠극 七克〉 등 천주교 관계 서적을 탐독했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 玆山魚譜〉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제로 조사·채집·분류하여 각 종류별로 명칭·분포·형태·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서 실제조사에 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관심이 실학적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밖의 저술로 〈논어난 論語難〉·〈동역 東易〉·〈송정사의 松政私議〉·〈영남인물고〉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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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
생애
1758년 3월 1일생
1783년 진사가 되었으나 대과 공부를 등한히 함
1784년 이벽 통해 천주교 접하게 됨, 영세를 받음
1790년 정조 14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오름
1797년 병조좌랑이 됨
1798년 정조 22년 임금의 명으로 『영남인물고』 편찬에 참여
1798년 낙향
1801년 신유박해. 신지도에 유배됨
1807년 흑산도로 옮김
1816년 59세의 나이로 죽음
가계도
나주정씨 정재원(1730~1792)
의령남씨 - 정약현(1751~1821)
해남윤씨 - 정약전(1758~1816)
- 정약종(1760~1801)
- 정약용(1762~1836)
정약전의 학문세계
1776년 아버지 정재원이 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星湖 李瀷의 학문을 접하게 되어 영향을 받았다. 권철신의 門下에서 학문을 닦았다. 같은 문도인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그가 권철신의 문하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권철신이 陽明學을 수용한 뒤였으므로 정약전도 자연스럽게 양명학을 계승하게 되었다. 정약전은 西學도 접하였는데 이벽을 통하여 알게 되었으며 종교 활동에 상당히 열심이었다.
<權哲身(1736~1801) : 본관 안동. 호 녹암(鹿庵). 세례명 암브로시오. 일신(日新)의 형. 이익(李瀷)의 문인(門人). 이승훈(李承薰)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였고, 1777년(정조 1)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벽(李蘗) 등의 남인(南人)의 실학자(實學者)들과 함께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열면서부터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정약용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및 중국인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정약전과 신유박해
1801년 정약전을 아끼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정순대비의 섭정과 함께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은 그의 아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취조를 받은 후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지고 정약전은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흑산도로 옮겨졌다.
<신유박해 :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자산어보
유배지에서 10여 년간의 정성을 쏟아 저술한 자산어보에는 흑산도 인근 해역의 226종의 해양생물을 망라되어 있다. 어류를 비롯하여 해조류․ 패류․ 새우류․ 복족류(腹足類) 및 기타 해양 생물의 자세한 특징과 쓰임새, 약성(藥性)까지 언급되어 있다. 자산어보의 머리글에 그가 이 책을 저술하는 의도와 바램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실학자로서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세의 선비가 이를 수윤(修潤)하게 되면 이 책은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치(理致)를 따지는 집안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로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산어보를 저술하는데 마을 사람이었던 장덕순(昌大)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 지역인들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양의 해양생물의 생태와 습성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것뿐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백성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이것을 ‘자산어보’가 아니라 ‘현산어보’라고 정정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유배지에서 아우와 주고받은 서신
정약용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정약전의 성품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유배생활에 대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학문세계는 정치, 경제, 천문, 수학, 과학, 지리 등을 아우를 정도로 넓었으며 그 깊이도 심오했다. 그러나 육지에 있었던 아우에 비해 고립된 섬에 있었던 정약전은 턱없이 부족한 서적과 지식 정보에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함께 보인다. 비록 지적으로는 굶주려 있었으나 그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여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연현상을 탐구하며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유배지에서 남긴 그의 저서로는 『자산어보』와 함께 정부의 소나무 정책에 대해서 쓴 『송정사의』와 우이도에서 홍어를 유통하던 문순득이라는 사람이 바다에 표류하였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거쳐 4년만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을 듣고 저술한 『표해록』등이 있다.
생각해 볼 문제
정약전과 관련된 자료들이 근래에 발견되면서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립된 섬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달팠을 것이다. 그런 고난의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돌아보고 끊임없는 탐구의 자세로 학문적 호기심을 가졌다. 정약용과 주고받은 서신을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약전을 연구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상당히 많은데 그를 통해 조선시대의 천주교 유입을 알 수 있게 하며 당시 실학과 실학자들의 학문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만큼 당시 학문적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굴하지 않고 후세에 남길 책의 저술에 힘쓰고 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한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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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에서 배우는 교훈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정약전(丁若銓·1758∼1816)은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자 어류학 박물지인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1801년(순조 원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지금의 전남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기록문화 유산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의 유배생활 덕분(?)에 오늘의 우리들은 200여 년 전에 조선인들의 삶에 투영된 산림과 어족자원에 대한 실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소나무 정책에 대한 개인 의견'이라는 뜻을 가진 '송정사의(松政私議)'는 정약전이 유배생활 3년째인 1804년에 우이도에서 저술한 책이다. 송정사의는 지금까지 제목과 내용 중 일부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서울 세화고등학교 이태원 생물교사가 정약전의 유배지였던 흑산도에서 문모씨가 소장한 운곡잡저 문집에서 찾아냈다. 한편 영남대 한문교육학과 안대회(安大會) 교수는 '정약전과 송정사의'라는 논문을 국학 관련 학술 전문지(문헌과 해석 제 20호)에 최근에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짚었다.
송정사의를 통해서 오늘의 우리는 200여 년 전 조선 후기 한 지식인(양반)이 가진 산림에 대한 인식의 편편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리 정보가 옳게 정리되어 있지 않던 200년 전에 정약전은 이미 국토의 7할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산은 모두 소나무가 자라기 알맞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20년 사이에 나무값이 3-4배 올랐다는 기록이나 400-500냥에 달하는 관재를 도회지의 양반 권세가만이 쓸 수 있지, 궁벽한 시골 평민들은 태반이 초장(草葬)으로 장례를 치룬다고 밝힌 기록으로 소나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유배지에서 생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나무 정책에 대한 정약전 개인 의견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조선시대의 소나무 정책(송정:松政)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그의 저술 『목민심서』에서 "우리나라의 산림정책은 오직 송금(松禁) 한가지 조목만 있을 뿐 전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비자나무에 대해서는 하나도 문제삼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산림 시책은 대부분 소나무 벌채 금지(송금)와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산림시책에 대한 문헌도 송금사목(松禁事目)이나 만기요람의 송정(松政)처럼 대부분 소나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송정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정약전의 송정사의보다 14년 앞서 조선조정이 제정한 송금사목(정조 12년, 1788년)에 대한 학계의 인식을 엿보면 그러한 흐름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김영진은 송금사목을 '소나무를 보호, 육성하기 위하여 제정된 규정집'으로 해석하는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한 산림보호규정으로, 임정사와 임업기술사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임학계의 일각에서 조선시대의 송금정책을 '세계 임업사에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일'이나 송금사목을 '200년 전 소나무에 대한 국가 정책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례처럼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소나무 시책에 대한 학계의 시각은 대체로 우호적이며 긍정적이었다.
정약전의 송정사의의 숨은 진가는 오늘날 관행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조선시대 송금정책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결론적으로 정약전은 잘못된 송금정책 때문에 200년 전 이 땅의 소나무가 보호되고 육성되기보다는 오히려 고갈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그 용도가 긴요한소나무 육성을 중시한 사실은 경국대전, 대전통편 등의 조선시대 법전이나 만기요람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 보호와 육성을 위한 송금 정책은 조선 후기에접어들면서 질 좋은 소나무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지방관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방편으로 악용되곤 했음을 정약전은 송정사의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특히 송금정책을 수행하던 수영(水營) 등의 지방관이 송금에 대한 권한을 관할함으로써 그들의 탐학이 백성의 불만과 원성을 어떻게 초래하며, 그러한 탐학을 피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육성하기보다는 소나무의 씨를 말릴 수밖에 없는 사연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정약전은 소나무 숲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권한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국가 소유와 개인 소유를 가릴 것 없이 바닷가로부터 30리 떨어진 이내의 산(연해금산)에 대하여 소나무 벌목을 금하고 있는 국법도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있을 경우에나 유용하지 나무들이 없을 경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어서 아무 쓸모 없는 연해금산의 형편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정약전은 송금정책이 실패한 원인으로 첫째 나무를 심지 않는 것, 둘째 저절로 자라는 나무를 꺾어 땔감으로 쓰는 것, 셋째 화전민이 불태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세 가지 환난이 발생하는 이유로 완비되지 못한 국법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송금이 실현 불가능하므로 소나무 벌채 금지 정책을 포기하고 오히려 소나무 식목을 권장하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소나무 식목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정약전은 개인 소유의 산뿐만 아니라 국가 지정의 봉산까지도 개인들이 나무를 심어 스스로 사용하게 허락하며, 오히려 나무가 없는 산의 경우, 산주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천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기둥이나 들보감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기른 개인에게는 품계를 올려주어 포상을 하며, 주인 없는 산을 찾아서 한 마을에서 힘을 합쳐 1년이나 2년 동안 소나무를 길러 울창하게 숲을 이루어 놓았으면, 나무의 크기에 따라 그 마을에 대해 1년이나2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안도 제안하고 있다. 200년 전에 정약전이 제안한 이들 제도는 놀랍게도 오늘날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는 그린 오너 제도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정책을 수십 년만 시행하면 온 나라 산은 숲을 이루게 될 것이며, 공산의 나무를 백성이 범하는 일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고, 산림의 몰락과 더불어 조선왕조도 함께 몰락했음은 우리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국가의 재물인 봉산을 그저 버려 둘지언정 백성에게 줄 수 없다는 당시의 세태를 '내가 먹기는 싫지만 개한테 던져주기는 아깝다'는 속담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내용이나,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군사력이 강한 것이나 먹을 것이 풍족한 것보다 급하다'라는 주장은 산림과 연을 맺고 사는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은 아닐까.
민중과 하나 된 선비, 정약전
이 덕 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필자는 가끔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약용 3형제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과람(過濫)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둘째 정약종이 걸었던 순교의 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길이니 제외하고, 유배지에서 정약용과 정약전의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민중의 세상 속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은 불의한 세상과 절연하고 학문을 피안의 세계로 삼았다. 정약용은 『상례사전서』에서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이윽고 나는 창문을 닫아 걸고 밤낮으로 혼자 앉아 있게 되었다”라며 문을 걸어 잠근 채 경학(經學)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그러지 않았다.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양반 사대부의 세상을 버리고 민중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정약전이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시간은 동생 정약용이 초고를 마친 원고를 인편에 보내 감수를 부탁할 때였다. 그 때면 정약전은 방을 깨끗이 쓸고 정약용이 보내온 원고를 보았다. 변변한 참고서적이 있을 리 만무했던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보낸 답변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정약용이 “내가 공(정약전)께서 말씀해주신 것을 조용히 생각해보니 정말로 확실하여 고칠 수 없는 것이어서 지난번의 원고를 없애버리고 말씀해 주신대로 따랐더니···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다”라고 쓴 것처럼 정약전의 학문수준도 동생처럼 당대 최고의 것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논어난』이나 『자산역간』 등의 글은 이런 답서를 모은 것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세상에서 정약용의 진가를 알아 준 인물도 역시 정약전이었다. 정약용이 『주역사전』을 보내오자 “가령 미용(정약용)이 편안히 부귀를 누리며 존귀한 자리에 올라 영화롭게 되었다면 반드시 이런 책을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며 당대에 정약용의 유배에 더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안목은 정약전에게만 있었다. 자신의 저술에는 큰 관심이 없던 정약전이 드디어 집필계획서를 보내왔는데, 물고기와 해초 등에 관해 그림을 덧붙인 『해족도설(海族圖說)』이었다. 이 책이 오늘날 유명한 『자산어보(玆山漁譜)』가 되는데, 이에 대해 정약용은 “『해족도설』은 매우 뛰어난 책으로 이 또한 하찮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라는 실학자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는데, 그 결과 해족‘도설(圖說)’이 자산‘어보(漁譜)’가 된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즉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 연구를 계속했다···이것을 이름하여 『자산어보』라고 불렀다”라고 이 책이 장덕순과 사실상 공저임을 밝혔다. 저작권법도 없던 그 시기에 양반도 아닌 일반 평민의 이름을 적시하면서 공저임을 밝힌 것은 그가 사람을 신분이 아닌 인격체로 바라보는 자세를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태도 를 지녔기 때문에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에 “(정약전이)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주기를 원했다”라고 묘사되는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정든 흑산도 사람들 못 가게 막아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解配:유배가 풀림)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로 하여금 두 번이나 배를 건너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다’며 흑산도 앞의 우이도로 건너가려 했는데, 흑산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못 가게 막았다. 할 수 없이 정약전은 안개 낀 야밤에 몰래 우이도로 떠났는데, 안개가 걷힌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흑산도 사람들 이 급히 추격대를 편성해 다시 모시고 돌아갔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람들에게 겨우 애걸해 우이도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정약용의 해배소식은 헛소문이어서 정약전은 동생을 보지 못한 채 유배 약15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정약용은 슬퍼했다. “나를 알아주는 분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경집(經集) 240권을 새로 장정해 책상 위에 보관해 두었는데, 나는 장차 그것들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정약전의 죽음은 정약용에게 유일한 비평가이자 독자를 잃은 240권의 경서를 불태우겠다고 할 정도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선중씨묘지명」에서 “오호라,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인데다 겸하여 지기(知己)까지 되어 주신 것도 또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썼던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호라! 현자가 그토록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그 원통한 죽음 앞에 목석(木石)도 눈물을 흘릴텐데 다시 말해 무엇하랴!”라고 정약전의 죽음을 원통해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이굉보(李紘父)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문 받은 죄인으로서 압송하던 장교들을 울며 작별케 한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형님뿐이었다······온 섬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으니, 이 마음 아프고 답답한 바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듯이 그의 장례는 사실상 우의도장(葬) 이었던 것이다. 신분제의 나라 조선에서 신분을 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그래서 마침내는 민중과 하나가 되었던 정약전은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민중을 사랑한 선비’이자 ‘민중이 사랑한 선비’, 곧 ‘민중이 된 선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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