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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작업에 착수한다. 흥분된다. 노리치의 줄리안이 남긴 ‘보여주신 것들’(Showings)을 한글로 옮기는 일이다. 세상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더란 말인가? “나는 세 가지 은총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고 싶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회고(回顧)하는 것, 둘째는 몸으로 병을 앓는 것, 셋째는 세 개의 상처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 것. …나는 뉘우침―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과 함께 육신의 병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서 앓게 되기를, 그것이 목숨을 잃을 만큼 중한 병이기를, 그 병을 앓는 동안 성교회가 나에게 주는 모든 전례(典禮, rites)를 받게 되기를, 동시에 내가 어떤 사람이나 땅위의 삶에서 위안을 받고 싶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내가 죽어간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병을 앓으면서 육신과 정신으로 겪는 온갖 아픔과 악마들한테서 오는 모든 두려움과 폭행, 영혼이 떠나는 것을 제외한 온갖 종류의 고통을 맛보고 싶었다.” 이런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고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이 책이다. 영문학에서 여인이 쓴 최초의 책으로도 알려져 있단다. (2017. 8. 16)
⎈ 버스터미널 주차장에서 차를 타는데 문이 옆 차 백미러에 살짝 부딪쳤다. 처음엔 부딪치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 차 운전석에 앉아있던 중년부인이 뾰족한 말투로 조심해서 차를 타라고, 여기 부딪쳤다고 말한다. 그제야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말하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계속 고개 조아리며 미소까지 지으며 사과했지만 소용없는 짓 같았다. 어쩔 것인가? 효선이 차를 앞으로 모는데 계속 뒤통수가 따가웠다. 아주 살짝 부딪친 것인데 그게 그렇게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자기보다 틀림없이 연장인 늙은이한테, 막무가내로 화를 낼 일인가? 어째서 많은 사람이 어디 화풀이할 곳을 찾는 사람처럼 그렇게 일촉즉발로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언제까지 세상에서 이 성화를 받아야 하느냐고 짜증 섞인 말을 하신 스승 예수가 생각난다. 한동안 묘한 서러움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 (2017. 8. 17)
⎈ 새벽 버스로 상경. 치과에 들러 나는 잇몸 손질하고 효선은 어금니 하나를 뽑는다. 볼이 부어오른 효선을 옆에 앉혀두고 류하(流下)와 둘이 추어탕으로 점심. 오늘 한살림 회장이던 고 박재일 선생 7주기 모임에 한 마디 하라고 해서 류하의 안내를 받아 간다. 무슨 연회장처럼 둥근 테이블들이 가득 찬 방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며 화기(和氣) 만당이다. 시간이 되어 단 위에 섰지만 별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몇 마디 횡설수설하다가 싱겁게 내려왔다. 나 아직 멀었구나 싶다. 뭐랄까? 내 눈에 조금이라도 소위 ‘럭셔리’하다 싶은 자리는 왠지 불편하다. 아직 그만큼 자유롭지 못한 거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여기가 현주소인걸. 뒤를 이어 청년들이 발제하는데, 앞으로 일에 사람을 맞추기보다 사람에 일을 맞추겠다는 말이 들려서 속으로 박수쳤다. 그래, 저런 친구들, ‘돈보다 사람’을 말이나 구호로만이 아니라 실질로 살아내는, 아무리 사회적 명분이 근사해도 번한 이익이 눈앞에 보여도 속에서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저런 ‘싸가지 없는’ 친구들이 다가오는 세상의 주인공으로 되겠다는 데 나는 아낌없는 찬성이다. 친구들, 우리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희는 그렇게 살기 바란다. 돈에 권력에 더 이상 홀리지 마라. 괜히 인생만 비참해진다.
밤차로 순천까지 내려오는데 몸과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2017. 8. 18)
⎈ 노리치의 줄리안,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으로 어제의 피로를 푼다. 밤에는 반디 차로 학교에 가서 토요명상. 두더지가,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동감이다. 오랜만에 신난다를 학교에서 보니 반가웠다. (2017. 8. 19)
⎈ 새벽 재래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는 중에 갑자기 비가 내린다. 상인들이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차일(遮日)을 치는데 뜻밖에도 마음이 평온하다. 효선은 이것저것 자기가 살 물건들을 골라서 퍼런 종이 몇 장과 바꾼다. 가만 보니, 실파 한 묶음에 퍼런 종이 두 장, 무화과 한 소쿠리에 연두색 종이 한 장… 뭐 이런 식이다. 아하, 저래서 사람들이 퍼런 종이, 연두색 종이, 불그레한 종이를 좋아하는 건가? 사람들 살아가는 모양이 참 재미있다. 나중에 혹시 누가 지구별 여행에 대해서 어땠느냐고 물으면 오늘 본 광경을 얘기해줘야지.
중앙교회로 예배하러 갈까 하다가 그만둔다. 세상에 ‘종교다원주의자’로 알려진 내가 자주 나타나는 것이 홍 목사 목회하는 데 혹시 무슨 부작용이나 되지 않을까, 이런 웃기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후 3시. 두더지, 신난다, 반디, 소리샘 등이 와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잡역부 ‘최 사장님’을 초청, 준비했던 감사패를 드렸다. 함께 전어 찜으로 저녁 먹고 헤어짐. (2017. 8. 20)
⎈ 종일 내리는 비에 사랑어린학교 밥살림 위원들이 회의를 한다며 와 있다. 효선이 전하는 말에, 무슨 얘긴지 조곤조곤 잘하고 있단다. 한님이 저 모양으로 이 집을 쓰시는구나, 싶다.
밤에는 박소정 선생이 깨끗한 얼굴의 화엄사 비구니 스님과 다른 부인 한 명 동행으로 와서 차를 마시는데, 한 잔 얻어 마신다. (2017. 8. 21)
⎈ 오전, 남원의 정은 씨가 큼직한 배낭을 메고 왔다. 천안에서 갓 엄마 된 딸의 산후조리를 돕다가 내려오는 길이란다. 신생아 사진을 보여주는데, 아이가 제법 활기차 보이는 것이 장차 누가 뭐래도 고집스레 제 길을 가겠다는 기세(氣勢)다. 두 달 뒤면 기림이도 뱃속에 있던 아이를 가슴으로 안게 될 텐데, 아무쪼록 당신의 일을, 어리석은 인간들의 방해 없이, 잘 이루시라고 한님께 기도드린다.
오후, 바이칼을 무사히 다녀온 보리밥이 두더지하고 같이 왔다. 괜히 반갑다. 하룻밤 자기로 “생각을 바꾼” 정은 씨와 함께 묵은 김치 조림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
노리치의 줄리안을 오늘도 만난다. “그 뒤에 나는 시간의 찰나(an instant of time) 안에서 하느님을 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분이 모든 사물들(things) 안에 현존하시는 것을 환영(幻影)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정관(靜觀)하였고, 그 결과,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그분이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온순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 환영이 좀 이상하게 여겨졌고, 그래서 생각했다. 무엇이 죄인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모든 일을 하느님이 하시고,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전혀 없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끝없는 섭리인 것을 내가 진실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이루어진 일이 잘된 일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하느님은 죄를 짓지 않으신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아무것도 아닌 것(sin is nothing) 같았다.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에서 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랍다. 그리고 신통하다.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14세기에 이런 대담한 글을, 그것도 “무식하고 나약한” 여자가 쓰다니… (2017. 8. 22)
⎈ 아침 먹고 정은 씨 보내고 나서 곧장 번역에 매달린다. 나는 왜 이러는가? 뭐가 이리 급한가? 아니다, 급해서가 아니다. 출판사와 약속한 작업도 아닌데 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 돈이 되어서는 더욱 아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뿐. 재미있고 고마워서다. 이 좋은 글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서 옮기는 작업 자체가 내게 생기를 불어 넣어줄 뿐 아니라, 참으로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목포 동은 군이 와서 효선에게 몇 가지 레슨을 받고는 점심 먹고 서둘러 돌아간다. 한님이 그에게 주신 미성(美聲)을, 아무쪼록 그분 설계대로, 잘 쓰게 되기를 기원한다.
효선이 새로 시작한 ‘소리명상’을 위해 한 주일에 한 번 서울에 올라가 레슨을 받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다. 생각할 게 뭐 있나? 하고 싶으면,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러면 하는 거다. 다만 그 과정에 ‘선한 의욕’이 앞장서서 억지를 부리지 못하도록,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실은 그조차 맘대로 안 되겠지만… 효선이나 나나, 제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그래도 되는, 그런 경계는 고맙게도 이미 넘어섰다. 우리는 서로 말한다, 당신 만난 뒤로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고. 정말이고, 그래서 안심이다.
“당신이 저를 거미줄로 당겨도 끌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거미줄로 막아도 멈추겠습니다.” 이런 기도 아닌 기도를 젊어서 드린 기억이 나는데, 이제 그 기도를 “당신이 저를 거미줄로 당겨도 끌려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거미줄로 막아도 멈추게 해주십시오.”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게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일까? (2017. 8. 23)
⎈ 오전에 실상사 작은학교 교사들이 연수차 사랑어린배움터에 왔다가 두더지와 신난다 동행으로 집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돌아간다. 내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다고 앞장서서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쩍다. 그저, 이건 아니다, 이렇게는 더 살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 있고 그래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는 길을 모색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뭐 이런 말이 오고 갔다. 사람이 거대한 역사 드라마 앞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는 우선 겸손이겠다. 아주 작게,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공손한 마음으로 감당할 따름이다. 오후에는 온양의 김 목사네 식구들이 가족여행 길에 들렀다. 목회란 무엇이며 실수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나누다가 이른 저녁 함께 나누고 돌아간다. 오늘도 한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 집을 쓰시는구나, 생각하니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안방에서 건넌방을 바라보면 피아노 앞에 단정히 앉아 새 악기를 연습하는 효선의 모습이 보인다. 지긋이 응시하는데, 바로 저거다, 저게 종교다, 라는 음성이 속에서 들리는 것 같다. 한님께서 저 사람에게 다시, 하지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연주자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비슷한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싶지는 않다. (2017. 8. 24)
⎈ 오전에 류하가 신난다, 두더지, 보리밥 동행으로 와서 점심 같이 한다. 많이 웃다. 동은 군이 레슨 받으러 왔다. 유럽을 무대로 활약하는 허 아무 바리톤 가수가 내일 부산에서 오기로 했는데, 동은 군이 그를 만나러 다시 온단다. 혹시 무슨 인연일까? 오후, 슬기와 소리가 내려왔다. 소리가 먼 길을 혼자 운전하여 왔단다. 무사히 잘 와줘서 고맙고 반갑다.
오늘, 사랑어린배움터 학부모 여름공동수련이 ‘가슴으로 사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저녁 시간에 학교로 가서 가슴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많이들 오셨다. 보기 좋다.
노리치의 줄리안 번역하는데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죄를 보지 않았다(I did not see sin). 그것이 본체가 없고, 존재도 없고, 그것이 일으킨 아픔들 말고는, 인지(認知)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아픔 또한 그것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고, 우리가 자신을 알아서 자비를 구하도록, 일정 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반(反)하여, 우리 주님의 수난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그것이 구원받을 복된 자들을 위한 당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서슴없이 그리고 달콤하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하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되고, 온갖 종류의 일이 잘될 것이다(But all will be well, and every kind of thing will be well).” (2017. 8. 25)
⎈ 창해가 아들 동은 군과 함께 와서 바리톤 허 선생 만나고 점심 같이 나누고 한 쪽은 부산으로 다른 쪽은 목포로 돌아간다. 한님이 오늘도 이 집을 이렇게 쓰시는구나, 싶어 다만 고마울 따름이다. 한평생 자기에게 주시는 한님의 선물을 마다않고 받아 모시며 살아가면 그분한테서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된다고, 노리치의 줄리안은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느 정도라도 자원하여 하느님을 섬긴 영혼들이 하늘에서 누릴 지복을 세 등급으로 내게 보여주셨다. 첫째 등급은, 그가 고통에서 건짐 받을 때 우리 주 하느님께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는 영예(榮譽)다. 그 고마움이 어찌나 고상하고 영예로운지, 그는 그로써 더없이 흡족함을 느낄 것이다, 마치 세상에 다른 어떤 행복도 없다는 듯이.” 어떻게 살면 한님으로부터, 네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토요명상. 오늘은 학부모 수련회에 참석한 이들이 함께 모여 강당이 그들먹하다. 명상을 왜 하는지, 그게 어떤 건지, 이야기 끝에 잠시 문답 시간을 가진다. 둘러앉은 학부모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여러분의 선한 기운이 이 배움터의 울타리라고… (2017. 8. 26)
⎈ 슬기 소리가 아침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주차장에서 방향을 돌려 우리를 등지는 순간, 차 꽁무니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짠하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머니 모습을 지금 내 몸이 연출하고 있는 걸까? 떠나는 자식을 그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문간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시던 하얀 옷의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는 지금도 돌아오는 자식 기다리며 여전히 하얀 옷 입고 문간에 서 계실 것이다. 인생이란, 어머니한테서 떠나와 한바탕 가상(假想)의 소풍 마치고 다시 어머니한테로 돌아가는 고달프고 아름다운 여정인 것인가?
오후 3시, 낮잠에 빠져 있는데 사람들이 왔다, 예배를 위해서. 오늘은 기성멤버들(?) 말고 서울에서 부산에서 낯익은 손님들이 왔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되었다. 우리 어머니 집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도대체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무슨 말이든 했다 하면 벌써 아니니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도 온갖 아픈 이들을 위무(慰撫)하시는 한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안수집사’ 반디가 예배도중 한 구석에 누워 잠을 잔다. 어제 오늘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예배당에 누워 잠자는 모습이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오늘 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이른바 ‘은혜’를 입었으리라. 괜찮다, 괜찮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한님의 이런 음성이 그의 귀가 아니라 몸으로 여과 없이 스며들었을 테니까. 서울과 부산에서 오신 분들은 차 시간 때문에 일어서고 나머지는 밥을 해서 저녁 먹고 늦게까지 이야기 나누다가 돌아간다. 그저 고마울 따름. (2017. 8. 27)
⎈ 기림이 김 목사와 함께 해산하기 전에 다녀간다며 기차로 내려왔다. 그 심하던 아토피가 말짱하게 사라지고 배가 불러서 오히려 날씬해 보이는 기림이 몸매가 더없이 예쁘다. 효선이 새벽같이 장에 가서 사온 바닷장어로 샤브샤브를 만들어 맛있게 점심. 마침 리플릿 때문에 와있던 신난다와 두더지가 자리를 함께 하여 즐거운 밥상이 되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없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박소정 선생이 소개한 호텔로 두 사람을 보내고, ‘세기의 대결’이라는 투사(鬪士)들의 게임을 텔레비전으로 본다. 자본주의의 화려한 꽃을 보는 것 같다. 잘 봐두자, 어쩌면 마지막 구경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참 별난 종자다.
노리치의 줄리안 번역. 오늘은 이 대목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내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은 보여주셨지만, 나는 그것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다. 여기에서 나는 얼마쯤 두려움을 느꼈고, 그에 대한 답으로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그것은 내가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랑을, 그리고 내 영혼에 대한 보호를, 언급하신 것이었다. 내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 처음 계시될 때, 나와 내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증과 위로가 아울러 계시되었다. 하느님 안에서 그분이 모든 구원받을 자들을, 그들 모두가 한 영혼인 것처럼, 사랑하시는 것을 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나로 하여금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게 할 수 있으랴? 구원받을 영혼들마다, 죄에 동참하지 않고 동참하지 않을 선한 의지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더 낮은 부분에는 아무 선도 뜻하지 못하는 동물의 의지가 있고 더 높은 부분에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위격들처럼, 아무 악도 뜻하지 못하고 언제나 선하기만 한 선한 의지가 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옹근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다는 것을, 그렇다, 장차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 거기서 당신의 복되신 얼굴을 마주 뵈올 때, 우리를 사랑하실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에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셨다.” (2017. 8. 28)
⎈ 새벽부터 몇몇 사랑어린배움터 어머니들이 함께 김치를 담근다며 분주하다. 마당에 옹기종기 앉고 서서 열무를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두더지가 안내하여 송기득 교수 댁 방문. 두더지 말이, 얼마 전에 부인을 먼저 보내고 나서 많이 수척해지신 모습이라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얼굴은 매우 깨끗하시다. 이번에 다시 출판된 당신의 ‘거지방랑기’를 화제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식당에서 주문해온 돌솥 밥으로 점심. 당신은 건강 때문에 유동식을 드신단다. 오래 전부터 순천에 왔으니 한번 찾아뵈어야지 했는데, 오늘 잘 다녀온 것 같다.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항상 구해라!―항상 주어라! 그러면 어떤 해(害)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로이 줄 때, 그때 나는 하느님이다. 주는 것이 본성인 하느님의 ‘손’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냐, 주자. 주고 또 주자. 하지만 유념할 것. 내가 만들어서 주는 게 아니다. 받아서 넘겨주는 것이다. (2017. 8. 30)
⎈ 태수 화백 내외가 오셨다. ‘그때 그랬지’ 편집과 그림에 관한 의견 교환. 글을 읽고 나서의 생각이나 느낌을 그려보라고, 글 내용을 그림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삽화’는 사양한다고 말해주었다. 나연 씨가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이라고 운을 떼었을 때, 신중히 들어보지도 않고서,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냐고 말했다. 경솔했다. 그렇게 건방떠는 게 아니었다. 미안하다. 하긴 신중히 들어봤자 무슨 신통한 답이 나에게 있을 리도 없지만. (2017. 8. 31)
⎈ 아침 시간, 효선이 흥분해서 말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을 연습했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오히려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고, 자기 몸이 하나의 구멍인 줄 이제 알았다고, 그 구멍은 아래위로 뚫려 있어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지만, 그래서 덕분에 울릴 수 있는 거라고, 내 몸이 먼저 울려야 따라서 악기도 울리는 거라고, 어제 오늘 공명, 공감, 울림, 구멍이란 단어들이 자기를 감싸고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것 같다고…
내일이 정향(丁香) 6주기인데 광주 집회 때문에 하루 앞당겨 오늘 추모하기로 했다. 대전에서 생시에 가깝게 지내던 현미와 양순 씨가 와주었다. 고맙고 반가웠다. 기림이 만삭의 몸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있다. 제 엄마가 저를 자궁에 품고 바로 저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스케치한 기억이 난다. 한 동안 그 그림이 어디엔가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사라진 스케치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몸으로 엄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지금은 또 다른 저를 자궁에 모시고 저렇게 앉아있다. 아, 이것이 인생인가?
지금여기교회 성서순례. 마련된 걸상 숫자만큼 둘러앉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는다. 누가 덕을 베풀었다거나 누가 죄를 지었다는 말은 입이 말했다거나 손이 주물렀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착각의 산물이라고… 내 안에 사는 것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그 착각에서 깨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2017. 9. 1)
⎈ 새벽꿈에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서울대 출신 중고등학교장 친목단체에 주던 보조금을 끊어버렸다. 난리가 났다. 이유를 따지기에, 비(非)서울대 출신 중고등학교장 친목단체가 있어서 거기에도 보조금이 지급되었으면 끊지 않았을 거라고, 저 아닌 건 없고 저만 있는 건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서울대 출신 중고등학교장 친목단체란 세상에 없는 단체인데 세상에 없는 단체에 무슨 보조금이냐고, 그러다가 문득 한 편의 짧은 시(詩)를 만났다.
바람,
바람이 분다.
바람,
바람이 멎는다.
바람,
그래서 바람이다.
계속되는 성서순례. 어제와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모세와 바울로의 경험과 증언을 통해 듣는다. 왜 젖먹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인가? (2017. 9. 2)
⎈ 주일예배 마치고 부암동 집으로… 기와가 깨어져 빗물이 벽을 타고 방으로 들어온 걸 효선이 혼자서 수습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장 목사와 윤 선교사가 이 집사와 함께 지붕에 올라 임시로 땜질. 덕분에 뒤뜰이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고마운 사람들. (2017. 9. 3)
⎈ 치과에 들러 인조 어금니를 심기 위한 수술. 웃는 얼굴로 설명하는 류 원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 무슨 하느님 은혜란 말인가. 효선이 고단한 몸으로 무사히 차를 몰아 순천에 도착. 짐도 풀지 못하고 저녁 식사도 생략하고 곧장 쓰러진다. (2017. 9. 4)
⎈ 9학년 친구들이 마지막 순례 길에 오르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뵙고 가겠다기에 학교로 갔다. 두더지와 신난다가 초대를 받아서 함께 간단다. 순례의 목적은 스승과의 만남이라고. 한님이 너희가 만날 스승들을 미리 예비해두셨을 터인즉 열린 마음과 준비된 자세로 그분들을 놓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뜻 깊은 순례가 되기를 기원. (2017. 9. 5)
⎈ 수요일은 술 빚는 날이라고… 세 부부와 두 아내가 와서 남자들은 쌀을 씻고 여인들은 누룩을 손질하며 담화하는 모습이 다정하고 행복해 보인다. 토요일에 다시들 와서 술밥을 짓고 추석에 마실 술을 담근다고 한다.
오랜만에 ‘천사들…’ 번역. 1944년에 벌써 풍요로운 물질의 병폐를 말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너무 많음(too much)에 대한 구역질이 물질을 파열시킨다.” 그렇다, 뭐든지 너무 많으면 욕지기가 나게 마련이다. 물질을 파열(explode)시키다니? 물질이 스스로 깨어지게 한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대표적인 물질이 사람 몸이니… (2017. 9. 6)
⎈ 꿈에 한 남자를 보았다. 방금 직장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 남자가 나였는지 다른 누구였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가 말했다. “좋다, 알몸이 되겠다. 그런 다음, 나에게 오는 것은 정체를 묻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겠다. 그게 굶어죽는 거라면 굶어죽겠다.” 그러고 나서 몸에 달라붙은 옷을 벗는데, 삶은 밤 속껍질 벗기는 것처럼, 예리한 면도칼을 피부에 얹고 칼의 무게만으로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손에 조금만 힘을 줘서 칼을 아래로 누르면 피부에 상처가 나고 칼을 위로 들면 옷이 벗겨지지 않는다. 내 손이 힘을 주지도 안 주지도 않으면서 칼질을 하다가, 이건 꿈인데 내가 꿈을 꾸면서 손을 움직이는구나, 생각했다. 꿈에서 어떻게 깨어났는지 모르겠다. 꿈꾸는 동안 실제로 손을 움직였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칼이 닿기만 해도 깨끗이 벗겨지던 껍질의 가벼운 촉감은 이토록 선명한데…
오늘 구례로 소풍가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효선이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조금 서운해서 두세 마디 구시렁거렸다. 오, 망할 놈의 두세 마디! 이것이 언제 나한테서 사라지려나? 힘을 주지도 안 주지도 않으면서, 오직 칼의 무게로 알몸을 만들 것!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돌아갈 인생인데 알몸으로 살기가 이토록 어렵구나.
저녁 먹고 효선과 중앙시장 산책. 점포들이 아직 문을 닫지 않았지만 고객의 발길이 뜸하여 한참 쓸쓸하다. 여기가 단종(端宗) 때의 읍성 옛터라는 팻말도 쓸쓸하다. (2017. 9. 7)
⎈ 삼인 홍사장이, 절친한 친구라는 출판인을 동반하여, 편집된 ‘카비르의 노래’를 들고 왔다. 원고뭉치를 묵직하게 받아드는데 가슴이 설렌다. 드디어! 카비르가 한글로 된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는구나! 그의 친구가 리처드 로어 신부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판권을 샀다면서 책으로 출판하겠다기에 고맙다고 했다. 리처드 씨가 머잖아 아담한 책으로 서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만날 모양이다. 모든 것이 인연 좇아 흐르는 강물이다. (2017. 9. 8)
⎈ 술 빚는 날. 어머니 아버지들과 아이들이 한바탕 모여 술밥도 찌고 수다도 떨고 재미있게 놀다 간다. 보기 좋다. 이십여 명이 비빔밥을 나눠 먹는데 아직 빈 공간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이 작은 집이 아니구나? 하긴 ‘엄마의 품’이라는 게 본디 가장자리가 없는 거지. 효선이 이 집에 ‘살롱 37〬 C, 엄마의 품’이란 별명을 붙여준 게 우연이 아닌 모양이다.
‘카비르 노래’ 머리말, ‘위쪽으로…’ 각주, 노리치의 줄리안, ‘천사들과…’ 번역.
토요명상 시간. 댕댕이, 동물맘, 반디, 은하수, 소리샘, 효선, 비파 등이 둘러앉았다. 저마다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2017. 9. 9)
⎈ 오후 예배. 반디 내외, 민들레, 바람빛이 왔다. 땅에서 쌓아올린 ‘낡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고 또 주고 다시 주는 삶. 되돌려 받을 마음 전혀 없이, 그저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서 기회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주는 삶.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의 행복한 백성으로 될 것이다.
―새 사랑, 새 심장박동은 다르다.
그것은 계속되는 줌(giving), 계속 뛰는 맥박, 계속되는 씨뿌리기다.
새 리듬이 세 세계를 창조한다.
새 기관들이 새 설계에 따라서 자란다.
세계가 새로워진다, 빛나고, 그리고 넓어진다.
한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을 줄 수 있는 능력이다.
모든 풀이 열매를 준다.
모든 피조물이 준다.
그들 모두가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다, 우리는 자유로이(freely) 준다.
전에 있던 모든 것과 다르다, 완전 다르다.
한님의 가슴이 고동친다.
동맥이 심장에 닿고 그 안에서,
모든 신성한 피가 제 자리를 찾는다.
주어라!
계속 자꾸 주어라!
피가 고단해지면 심장으로 돌아가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워진다.
하지만, 계속 주지 않으면 응고된다, 엉겨 붙는다. (‘천사들과 말하다’에서)
1944년이면 20세기에서도 가장 캄캄했던 시절인데, 그럼 그것이 낡은 예루살렘의 종언과 새 예루살렘의 개벽을 알리는 최후의 어둠이었던 것인가? 아아… 옴… (2017. 9. 10)
⎈ 효선은 박소정 선생과 고흥에 일 보러 가고, 나는 학교에 남아 도서관을 지키며(?) 폴 틸리히 번역.
―나는 바흐의 ‘마태오수난곡’을 듣다가 “제자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본문과 음악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부르짖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를 예고한다. 모든 사람한테 버림받은 사람이 하느님한테 버림받은 느낌을 호소한다. 실제로, 사람들 모두 그를 떠났고 가장 가깝던 측근들이 가장 멀리 달아났다. 평상시에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어머니와 다른 여인들과 적어도 남자 제자 하나가 함께 있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십자가 형장(刑場)을 상상한다. 현실은 달랐다. 문자 그대로 모두가 달아났고, 몇 여인들이 멀리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의 생애와 업적이 산산이 부서지는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외로움만 거기 있었다.
이 제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마도 우리의 첫 반응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리라. 그들은 어떻게 자기 입으로 메시아, 그리스도, 새 시대의 창시자라고 부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던 사람을 등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번에 음악으로 그 노랫말과 억양을 들었을 때 나는 제자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읽는 본문이 바로 그들한테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달아난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을 간단한 문장 하나에, 평생토록 자기들을 따라다니며 심판할 한 마디 말에, 담아놓았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재미와 흥분, 여기에 내 번역 작업의 이유가 있다. (2017. 9. 11)
⎈ 대구 바른이치과에서 문화강좌. 질의응답 시간에 누가 묻는다, “여의도 조 아무 목사는 하루에도 수만 명씩 전도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전도하는가?” 대답한다, “전선(電線)으로 전기(電氣)가 옮겨지는 건 맞다. 하지만 전선이 전기를 옮기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를 통해서 도(道)가 옮겨질 수는 있겠지만 내가 도를 옮기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전도하지 않는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도 기특하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서?
밤늦게 거창 주 선생 집에서 반가운 환담 나누다가 잠자리에 든다. 올해 마을 사람들 권고에 밀려(?) 논마지기를 더 장만하게 됐다고, 논이 두 배로 커졌다면 일은 네 배로 커졌다고… 하지만 온몸을 땀으로 목욕할 때의 쾌감은 뭐라고 말할 수 없단다. 건강한 농부의 얼굴이 엿보여서 고마웠다. 부인 김 선생도 얼굴이 편안하고 살도 좀 올랐다. (2017. 9. 12)
⎈ 이른 아침 밥상에서 화제가 다양하고 재미있다. 주 선생 학교 재직 시절 이야기가 사람을 감동시킨다. 좋은 별미를 여럿이 함께 나누었으면 싶어서, 풍경소리에 ‘그때 그랬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오는 차에서 효선이 말한다, 어제 들은 ‘말씀’이 자기 안에서 아무튼 뭔가를 바꿔놓은 것 같다고. 먹고 입을 것 걱정하는 대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속으로 고마워 가만 웃었다. (2017. 9. 13)
⎈ 일정은 바쁘게 돌아가지만 마음은 오히려 한가했던 하루. 11시 버스로 서울행. 치과에 들러 실밥 뽑고 수유리 한신대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40회) 참석. 15분 지각. 이야기 마치고 정희 집에서 차 한 잔 마시고 10시 열차로 순천 도착하니 영시 10분. (2017. 9 14)
⎈ 청주 홍승표 목사 내외가 아들 데리고 같이 공부하는 동료 목사들과 함께 왔다. 창원 김유철 선생도 동참. 두더지와 신난다 합류. 효선이 장만한 음식으로 밥을 먹으니 이름 그대로 ‘말씀과 밥’이다. 한님의 은총이 느껴진다.
노리치의 줄리안, ‘짧은 텍스트’ 번역 마치고 곧장 ‘긴 텍스트’로 들어간다.
밤에는 정읍 ‘사랑방’에서 임락경 목사 일흔 세 번째 생일잔치, 보리밥이 운전하여 효선과 함께 다녀옴. 신축한 지 얼마 안 된 한옥 때문일까? 효선이 세 시간 만에 갑자기 알레르기를 일으켜 모두 마치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오다. (2017.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