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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이 의장에 자신은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그 후 소위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 불리는 반혁명 사건을 조작하여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 사형 선고까지 하고 스스로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에 올랐다. 이듬해인 1962년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한다. 또한 그해 1962년 3월에 혁명위원회가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것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물려 받았다. 7월부터 8월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을 역임하였다.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육군 대장으로 예편 후, 1963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대, 6대 대선에서 민주당으로부터 사상 공세를 당했으며 5대 대선에서는 15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민주당의 윤보선에 근소한 차이로 신승하면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월등한 것으로 드러났다.[출처 필요]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한일협정 체결 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7년 윤보선 등을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된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가까스로 이기고 3선에 성공한다.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고, 1970년에는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였다.
1972년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1973년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납치하여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다.[출처 필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쿄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하려다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오자, 부산에 풀어주었다.[출처 필요] 이 사건을 김대중 납치사건이라고 부른다.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출처 필요] 박정희는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2007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튿날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출처 필요]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1978년 정권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으로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러진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다른 야당인 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출처 필요] 1979년에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공작 정치’에 의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 제명, 그에 따른 부마 항쟁,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10월 부마 항쟁이 발생했으며 부마 항쟁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직후인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하였다. 당시 나이 만 62세였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민족 중흥의 기치 아래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6.25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수십여 개 재벌 기업이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과 러시아를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띄고있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은 인권, 민주주의, 사회복지 등 다른 모든 사회적 발전의 담보로 한것 " 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와 반체제 인사들을 감금·고문하였다.
군사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었고,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당시 한일 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 6.3 학생운동 ' 으로 불려졌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 이 사임하였다.
1965년 일본과 채결한 한일 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출처 필요]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출처 필요] 한일 협정을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종군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같이 어업문제 , 문화재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출처 필요] 현재, 일본 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1969년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11]
2000년대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반역자 및 기회주의자, 독재자, 지역주의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란 부정적인 평가와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통치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가 병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꼽힌다.[1]
대한민국 정치에는 박정희의 이념을 계승한 다양한 세력이 존재한다. 전두환의 경우 박정희와 같은 방식으로 집권하여 박정희 스타일의 통치를 해 왔으며, 이는 전두환과 같이 쿠데타를 일으킨 노태우에게까지 어느 정도 이어졌다.[출처 필요]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활동하던 주요 세력은 전두환 시대에 민주정의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각각 이동했으며, 이는 다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을 거쳐 현재의 한나라당으로 이어지고 있다.(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참조)
한편 박정희의 딸이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박정희의 생물학적 계승자임과 동시에 박정희의 5·16 군사 정변을 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평가하는 등, 박정희의 정치 이념도 계승하고 있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현재의 한나라당으로 계승되었지만, 박정희의 비공식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는 허경영은 박정희의 공화당을 자신의 경제공화당으로 계승하는 한편, ‘제2의 박정희’를 자처하고 있다.[출처 필요]
정당 외에는 뉴라이트 계열 정치 세력들이 박정희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많은 현행 국사 교과서 대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가 되는 자신들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12] 박근혜 역시 이들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