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칠전리 학계철비(珍島 七田里 學契鐵碑)
보통 비석(碑石)이라고 해가꼬 비(碑)는 돌(石)에 새겨서 맨드는 것이로 으레껏 생각한다.
그란데 녹이 스는 철 즉 쇠로 만든 철비(鐵碑)가 있는데 진도에도 이러한 철비가 현존하고 있다.
진도에선 예로부터 웬만한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고, 이미 116년 전 1904년에 돔바께(읍성 동문 밖) 양사재 터에다 세운 광신학교를 전신이로 설립된 진도초등학교 역시 전국에서 10번 째 안으로 손꼽히게 일찍 세워진 신식교육시설이다.
기록상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도군읍지』의 자료 에는 진도군에서 공적으로 운영하는 향교와 서원의 학생 수가 나와 있는데, 향교(鄕校) 학생 80명, 봉암서원(鳳岩書院) 60명으로 적혀 있다.
또한 1658년(효종 9년)에 돔바께다가 세운 양사재(養士齋)가 있었고, 웬만큼 큰 마을에는 각각 서당들이 있었던 바 칠전마을의 노암재(露岩齊)는 1684년(숙종 10년)에 세웠는데 이에 대한 철비(숙종 40년 건립)가 현존하고 있어서 이는 진도 농촌 향리의 높은 교육열과 서당에 대한 소중한 기록물이기에 소개한다.
◈진도 칠전리 학계철비(珍島 七田里 學契鐵碑)◈
진도 칠전리 학계철비(珍島 七田里 學契鐵碑)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철비(鐵碑)이다.
2002년 4월 19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1684년(갑자, 숙종 10년)에 서재(露岩齋, 서당)를 운영하기 위하여 창립한 학계의 운영에 관한 비석으로 1714년에 건립하였다.
철비의 규모는 높이 140cm, 폭 47cm, 두께 7cm이다. 이 칠전리 학계철비에는 56자가 7자씩 8행으로 주조되어 있다.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11명(박씨 9명에 양씨와 이씨가 각 1명씩)의 이름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학전(學田) 15필지 52.947㎡를 모은 내력과 목록이 적혀 있다. 이 학계는 박윤순(朴允淳)의 아들 6형제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뒤 친인척 5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비문을 통해서 1684년 학계(學契) 창립 이후 1714년까지 30년간 25필지 1.7결(結)의 재산을 모은 것으로 적혀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동계(洞契)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서당을 운영하거나 교육 활동을 하였다. 동계의 시초로는 1601년(선조 34년) 경상도 예천 고평동에서 정탁(鄭琢)에 의해 만들어진 「고평동동계갱정약문(高坪洞洞契更定約文)」을 처음이라 보는데,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른 시기에 도서 지역인 진도의 향촌에서 동계보다 먼저 학계(學契)를 만들어서 사학 교육기관으로서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 재원을 갹출하여 학전(學田)을 만든 뒤 이를 영속하도록 철제비(鐵製碑)까지 세운 것은 극히 드물고 귀한 일이다. 더군다나 발견되는 대부분의 철비가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이고 이 비들이 모두 선정을 베푼 수령에 대한 감사의 표식이라기보다는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도 많았고, 19~20세기 혼란기에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뒤 자신에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었기에 이러한 가운데서 현존하는 유일한 학계철비(學契鐵碑)로 이 경우는 그야말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지난 2007년 포스코 역사관이 ‘잊혀진 문화재-철비(鐵碑)’에서 국내에 보고된 철비 수를 23개 지역에 47개로 보고했고 이후 95개까지 확인된다. 기록상으로 최초의 철비(鐵碑)가 언급됨은 1621년(광해 13년)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광해군일기 168권, 8월 17일 기록으로 유생 송락의 상소문 가운데 ‘而兩西民生, 感其蒙惠, 至欲立銕碑而記功(양서의 민생들이 이첨의 은혜에 감사하여 철비(鐵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려고 했었습니다.)’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는 1654년경(제작 시기의 기록이 없으므로 도거원이 현감에서 물러난 연도를 기준해서 추정)에 세운 고흥군 고흥읍 행정리 149번지 소재 ‘현감 도거원 청덕선정비(縣監 都擧元 淸德善政碑)’이며 그 다음은 1661년에 제작된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현감 원만춘 청백선정 영세불망비(縣監 元萬春 淸白善政 永世不忘碑)’로 알려져 있다. 17세기를 시작으로 19~20세기까지 많이 만들어진 철비는 ‘쇠는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세웠으며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풍수의 목적으로도 조선시대 후기에 철비가 사용되었다.
칠전리 학계철비(七田里 學契鐵碑)는 현존하는 유일한 학계철비로 철비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철비이다. 이곳 칠전의 노암재(露岩齋) 서당은 1680년대에 시작되었고, 1714년 그 내력을 적은 학계철비를 세우기까지 30년간 25필지 1.7결(結)의 전답을 모았으므로 10명 내외의 집안 아이들 교육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은 1922년 5월 의신 개량 서당이 되고 그 이듬해 1923년 면 소재지인 돈지에 의신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많은 서당학생을 신식 교육을 하는 이곳에 빼앗겼다. 그러다가 1937년 결국 노암재 서당은 폐쇄(閉鎖)되었다.
유후각(裕後閣)은 학계철비를 잘 보호하기 위하여 일제강점기에 세운 비각으로 마을 앞 속칭 ‘서당까끔’내에 있으며 넓이가 58㎡이고 이 비각 안에 철비를 두었다. 이로써 비바람에 철이 녹이 슬지 않도록 실내에서 잘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철물 공출 때 전국의 많은 철비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 학계철비는 학계원들이 결사적으로 보존해서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는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위토답은 8마지기가 있는데 임사가 경작하면서 제물을 장만한다.
또한 이 비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와 오지벽촌의 교육사 연구 및 사회 변화를 살피는데 큰 자료로 쓰이고 있다. 여러모로 이 철비는 3백여 년 전 도서벽지라 할 진도의 향리 사람들에 높은 교육열을 보여주는 한 기념물로 평가받을 만 하며,
특히 석비가 아닌 철비를 주조해 세운 점에서도 잘 보존할 만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진도 송현리 출신 조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