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우리가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수요일마다 거행되는 교련조회시 우람한 체격에서
뿜어저 나오는 목소리로 제식대열을 리더했던 연대장 김정수(20회) 선배의 글이다.
김 선배는 30여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대한통운 미주지역 지사장을 지냈다.
5년전, 현역에서 은퇴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하면서 한국일보 미주판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집필활동과 목회활동으로 여유롭게 황혼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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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의 용서 한국일보 미주판 | 김정수 칼럼
호랑이는 새끼를 세 마리 낳는다고 한다. 하나는 엄마 호랑이를 닮고, 또 하나는 아빠 호랑이를 닮고,
나머지 하나는 엄마도 아빠도 안 닮은 작고 비리 비리한 호랑이가 나오는데,
그런 것을 평안도 지방에서는 시라소니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호랑이 치고는 좀 띨띨한 호랑이란 뜻이다.
동양 최고의 협객 시라소니 이성순은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지금의 남송동) 태생으로
나의 아버지와는 바로 이웃에서 살았다.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은 시라소니는 나의 아버지와 교회 유년주일학교를 같이 다녔고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시라소니의 본명 성순의 성자는 성스러운 성(聖)으로 신앙이 좋으신 부모님가 자녀에게 주는 이름이다.
시라소니의 아버지 이기정 장로는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젊은 시절 씨름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우승을 해서 황소를 끌고 오셨다고 했고, 누님도 훤출한 미인이고,
바로 위의 형인 이성덕도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잘생긴 외모의 국가 대표급 스케이트 선수였다.
그러나 시라소니는 딴 식구들에 비해서 인물도 좀 빠지는 편인데다가 형보다 체구도 가늘었고
학교 공부도 별로 않했다.
아마 잘난 다른 식구들에 비해 좀 떠러진다고 해서 시라소니라는 별명이 붙은 것 같다.
당시 천석군 부자였던 시라소니 아버지 이기정 장로는 나의 할아버지 김덕엽 장로와
아주 가깝던 친구로 신의주의 삼일교회를 함께 세우고 섬기셨는데
(삼일 교회 부지는 나의 할아버지가 바친 것이다), 장로님이 무슨 보증을 잘 못 서서
집안이 기울게 되자 시라소니는 학업을 중단하고 신의주와 만주 사이를 오가는
기차 밀수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시속 140km로 달리는 기차에 난간을 붙잡고 올라타서 압록강 철교를 지나서
목적지에 다달을 즈음에 뛰어 내리면서 밀수를 했는데 자기 홀몸 만이 아니고
밀수품을 들러매고 뛰어 타고 뛰어 내리는 위험한 작업이니
여간 몸이 빠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시라소니 얘기가 나오면 나의 막내 삼촌은 신이 난다. 삼촌은 어려서부터
큰 형님의 친구 시라소니의 전설을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시라소니의 무용담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시라소니가 검도 몇 단의 일본 헌병을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거나,
하얼빈에서 동양 챔피언 권투 선수를 단 한번의 박치기로 묵사발을 만들었다는 얘기 등은
내가 어려서 삼촌에게서 듣고 또 들은 레파토리였다.
시라소니는 싸움을 할 때는 박치기 뿐만 아니고 손 발 무릅 팔굼치 등 9가지 신체를
자유자재로 모두 사용했다고 한다. 100 미터를 9초에 뛸 정도로 몸이 빨라서
상대가 시라소니에게 맞고 쓰러지는 것은 봤는데 정작 시라소니가 어떻게 때렸는지는
안보였다던가, 중국 마적패 20 여명을 혼자 제압했다는 얘기,
북경에서 18기의 명인 마오와 대결에서 이겼다던가 하는 등등의 전설은
낭만파 주먹들의 야사에서도 항상 등장하는 내용이다.
시라소니는 무기같은 것은 쓰지 않았고, 정면에서 싸워서 적을 제압했을 뿐
기습같은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는 절대 싸움을 걸지 않았다.
비록 어릴때는 같이 자랐지만 가는 길은 서로 달라서 나의 아버지는 그 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신의주 東中의 전신)으로 진학하고 다음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시라소니는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조선으로 떠돌며 협객의 길을 걷는다.
그 후 한동안 서로 소식을 몰랐는데 해방 후 평안도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서북청년단에서 다시 만났다.
가족없이 혼자 월남한 시라소니는 6.25 전쟁 전까지 스스럼없이 우리 집에와서
자주 식사를 하고 가셨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어머니에게 시라소니는
항상 “돼지 오마니, 돼지래 어디 갔씨요?”하고 나를 찾았다는데 평안도 지방에서는
아무거나 잘 먹고 탈없이 잘 커라고 네 댓살 되는 내 또래 남자 아이를 그렇게 불러준다고 했다.
시라소니가 이정재의 동대문파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사건은 드라마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부산 피난 시절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던 이정재가 동네 깡패 10여명과 싸움이 벌어져서
몰매를 맞을 위기에 있는 것을 우연히 지나던 시라소니가 싸움판에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 후로 둘은 형님 아우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서 시라소니는
이정재가 부산에서 걱정없이 장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정재 역시 “형님 생활비는 죽을 때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서울 수복후 이정재는 6.25 전쟁으로 파괴된 동대문 시장 일대를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구입하여 상인들을 입주시키면서 동대문상인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있었고, 원래 생업이 없는 주먹건달 시라소니는
주먹세계의 생리가 그렇드시 돈 잘버는 ‘아우’ 이정재에게 자연스럽게 용돈을 얻어 쓰고는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한 두번이지, 이정재는 매번와서 당연한듯 용돈을 띁어가는 시라소니 때문에
부하들 보기에도 좀 챙피했다.
그러던 차에 시라소니가 고향사람들이 동대문 시장에게 점포를 얻어 장사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 일까지 있자 상당히 불쾌했던 모양이다.
이정재는 이것을 시라소니자기 자기의 이권을 침해하려는 것으로 보고
한번 손을 봐주기로 맘을 먹었다.
우선 부하를 시켜 시라소니에게 동대문의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전하고
동대문 정예 멤버 30 여명을 사무실과 그 주변에 포진시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흉계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던 시라소니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삽, 쇠파이프, 손도끼들을 든 이들 30 여명이 기습으로 공격했다.
시라소니 전투력의 특징은 엄청난 타격과 스피드이다.
그러나 이좁은 공간에서는 그의 장점인 스피드를 살릴 수 없다.
동대문 패거리들은 온갖 무기로 시라소니를 난타하여 반송장으로 만들어 놓고
백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동양 제일의 주먹이 순간의 방심으로 이렇게 당한 것이다.
백병원에 입원한 시라소니에게 동대문파 행동대장 이석재가 문병을 왔다.
“형님 미안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시라소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은게 머이가? 왼 쪽 다리 하나 남고 다 부서져서야.”
이때 이석재는 품에서 망치를 꺼내어서 성하게 하나 남았다는
왼 쪽 다리 마저 내려쳐 부러뜨리고 도망했다. 참으로 쪼잔한 양아치 짓이었다.
이석재가 그후 시라소니의 보복이 무서워서 꼭 칼을 품고 다녔다고 고백한다.
드라마 <야인시대>에는 시라소니가 입원한지 6개월 후 기적적으로 완쾌되고
피나는 재활훈련 통해서 체력을 되찾은 다음 동대문파에 혼자 쳐들어가서
마침 모여있던 간부들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다음날 이정재 집에게까지 찾아가서
이정재의 항복을 받고 용서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상당한 픽션이다.
설사 시라소니가 재활훈련을 통하여 체력을 회복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때는 이미 이정재가 <동대문 사단>이라고 불리우는 막강한 조직에 둘러싸여있고
자유당 정권의 비호까지 받고 있어서 시라소니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라소니의 주먹은 아직 녹이 쓸지 않아서 인천의 주먹들로 구성된
자유노조원 300여명이 몰려왔을 때 시라소니가 단검을 들고 호통을 쳐서 물리친적도 있었고,
이정재가 자유당의 하수가 되어 폭력을 휘둘을 때 조봉암의 경호원,
뒤에 신익희와 조병옥의 선거운동 겸 경호를 맡기도 했다.
경호업무를 할 때에도 임무가 끝나자 조용히 사라졌을 뿐 무슨 보수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정재에 대한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래서 시라소니는 기회만 있으면 이정재를 쏘려고 항상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이정재가 몇번이나 시라소니의 저격권 안에 들어오지만
시라소니의 간증 대로 “하나님이 이정재를 살려주어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이 누구에게 증오와 원한을 품으면 우선 자신에게 먼저 독(毒)이 되는지
시라소니는 58년 콩팥과 간에 이상이 생기고 장질부사까지 겹치는 합병증으로
사경을 헤메였으나 교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후 전국적으로 깡패 소탕령이 내려져서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과 함께 이미 신앙 생활에 열중하던 시라소니까지 잡혀갔었으나
시라소니 만큼은 교인들의 탄원으로 곧 풀려난다.
감방에 있을 떄 시라소니를 만난 이정재가 무룹을 꿇고 사죄를 했다.
그때 시라소니는 “내래 다 잊어서. 나가면 술 한잔 하자우” 하고 시원스럽게 용서했다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취조실에서 한 손에 성경책을 끼고 등장한 시라소니가
린치사건 묻는 심문관에게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고,
취조실을 나가는 이정재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정재, 힘내라우. 다 잘될기야”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이정재 등은 “나는 깡패입니다”하는 패를 달고 조리돌림을 당한 다음
8월 17일 혁명정부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시라소니는 그 후 영락교회 집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정재를 전도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뜨게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여기면서 ‘
주먹으로 흥한 자 주먹으로 망한다’는 간증으로 교회를 눈물 바다로 만든 적도 있었다.
시라소니의 나머지 성한 다리까지 부러뜨리고 도망간 이석재가 찾아와
무릅을 꿇고 눈물로 사죄를 하자 시라소니는 이석재를 두손을 잡고 일으키며 용서를 했다.
1983년 1월 25일 시라소니 이성순은 금호동에 있는 두 칸 짜리 셋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라소니는 평생 무슨 폭력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폭력에 관련된 잇권에 개입해서
돈을 번적도 없다. 그리고 전과기록 역시 없다.
그 시절 낭만파 주먹으로 아무 것도 가진것 없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가 훌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라소니는 부인 이진옥 여사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이의현은 경기도 일산에서 현재 목회를 하고 있다.
카페지기 註 | 중간 부분에 쓰여진 목회활동부분을 일부 생략했다.
첫댓글 정말 보고싶은 분 입니다. 자유인, 자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