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동벌이(黨同伐異), 화이부동(和而不同), 그리고 구동존이(求同存異)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희 집 가훈은 좀 어렵다고는 생각했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정해두고 있습니다. 사실 제대로 이해 하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만, 화합을 되새기고 자신만의 개성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어지러웠던 지난 해를 마감하고, 맞이하는 새해여서 그런지 모두들 유난히도 화합을 강조하더군요. 특히 학식 높은 교수님들이 지난 한해를 '동당벌이(同黨伐異)'라는 4자성어로 압축하여 표현했었습니다만, 이는 쉽게 표현하자면 한 해가 온통 ‘패싸움’으로 점철한 한해였다는 말에 다를 바 없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적당한 긴장을 가지게 하는 갈등은 건강한 사회적 긴장을 유지시켜주고, 문제의 제기는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이 없는 '조용한 사회'는 자칫 '정체'의 단초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나 모두 앞다투어 화합을 강조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화이부동, 동이불화(和而不同, 同而不和: 군자는 같지는 않더라도 화합하며, 소인배는 부화뇌동하여 화합하지 못한다)’라는 공자의 논어 한 구절을 인용하며 화합과 협상을 강조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대통령도 야당 대표도 이제 싸우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고 합니다.
흔히 협상과 타협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타협 없는 원칙은 독선이지만, 원칙 없는 타협은 야합’이라고 선을 그어두고 있는 걸 봅니다. 결국 타협을 하지 않으면 독선이라고 욕을 먹어야하고, 타협을 하면 또한 야합이라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 겁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타협’이란 해도 욕먹고 안해도 욕먹는 일이 되어버렸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동이불화'를 극복하고 '화이부동'을 실현하기란 실로 어려운 지고지난의 과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제가 한학(漢學)에는 무지하지만, '화이부동, 동이불화(和而不同, 同而不和)'라는 논어의 자로편에 나오는 말은 대강 '군자(君子)는 서로 뜻이 달라도 화합하고, 소인배는 부화뇌동할 뿐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이 쉬워 '화이부동'이지 그 '경지'가 얼마나 지난한 것이기에 그것을 '보통사람'이 아닌 '군자'의 덕목으로 제시하였을까요?
요즈음 어지러운 현실에서 자주 '화이부동'의 정신이 정치인들의 입에서 제시되는 것도 어쩌면 우리사회가 플라톤의 아테네 시대나 혹은 공자의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혼란 상태임을 자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화이부동'에 대한 기대를 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기대치를 다소 현실적으로 낮추어 '화이부동'의 이상적인 경지를 구현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으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현실적 협상론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른지요.
흔히들 협상에 능숙한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협상의 기본이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구동존이'란 본래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구동(求同)은 상대방과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존이(存異)는 지금 당장 생각과 입장이 다른 것이 있어도 잠시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즉, 협상을 할 때 서로 같은 점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의견 차이나 입장의 차이는 잠시 보류해 놓는다는 뜻일 겝니다.
우리가 늘 상대를 바라보면서 '다름'보다는 '같음'에 대해 찾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견은 한층 좁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점이 있더라도 우선 같은 점을 취하면서 서로 이견을 좁혀나간다'는 '구동존이'의 현실적 인식이 아쉽습니다.
---> 더끈이의 오늘의 생각 :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드높은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구동존이(求同存異)는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