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 가정 전체를 뒤흔드는 불청객] 예방 및 대응 매뉴얼-1
이젠 가족 모두 조금이라도 고통의 짐을 덜자
박모(75)씨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전직 여교사다. 자식농사도 다 마친데다 교사로 정년 퇴직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편안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박씨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 것은 6년 전쯤이었다.
박씨가 함께 사는 장성한 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아들이 자신의 돈을 가져갔다고 주장하곤 했다. 망상(妄想) 증세였다. 한번 아들을 의심한 박씨는 자신의 돈을 은행에 예금해놓고 매일 조금씩 찾아 썼다. 박씨의 의심은 급기야 가족 전체로 옮겨갔다. 박씨는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전두엽에 장애가 생겨 발생하는 알츠하이머성(性) 치매였다. 박씨는 현재 경기도 일산의 치매치료전문병원 해븐리병원에서 3개월째 치료 중이다. 박씨의 증세는 그림치료, 원예치료, 음악치료 등을 통해 더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유모(86)씨는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왔다. 아들이 일찍 사망한 이후로는 손주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와 손주를 뒷바라지했다. 손주가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처음 치매 증상이 나타났다. 직장에 다니는 손주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어쩌지 못하고 집에만 있게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증상이 점점 심해져 집을 나가 배회하기 일쑤였고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개인생활이 엉망이 된 손주는 도저히 보살필 수가 없다고 판단해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현재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과 자녀이름, 고향 등을 기억하는 정도이며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지남력(指南力)이 상실되었고 인지기능이 떨어진 상태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집에 두고 온 손주들 걱정을 한다.치매환자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과대망상, 배회하기, 초조행동, 반복행동, 난폭행동 등이 대표적이다. 전직 대기업 CEO 출신인 김모씨는 치매 증상이 나타난 이후 부인에게 난폭행동을 보인 경우다. 김씨는 부인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일도 있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이다.
현재 김씨는 치매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3공화국 시절 장관을 지낸 C씨의 경우 부부가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씨 부부와 가깝게 지내온 한 인사는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제발 치매에 걸리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총리를 지낸 모 인사는 부인이 오래전 치매에 걸렸고, 전직 총리 자신도 최근 초기 치매 증상이 나타나 주위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나이, 학식, 재산, 지위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치매(dementia). 연로한 부모를 둔 자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몰라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노부부 역시 치매를 무서워한다. 아내는 남편이,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내 남편이…”라고 절망하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치매발병률이 매년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치매는 세계적으로 65세 이상의 연령층에서 5~10% 정도의 발병률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에서의 치매발병률은 8.2~10.8% 수준. 2007년 말 현재, 노인인구 430만명 중 35만명의 치매 노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시광역치매센터에 따르면 서울시의 노인인구는 78만7000여명으로 이 중 치매노인은 6만4000여명에 이른다.치매발병률은 65세를 기준으로 나이가 5살 많아질 때마다 2배씩 증가한다. 65~69세의 연령층에서 2~3%에 불과하던 것이 75~80세에는 8~12%, 80세 이상에서는 20%가 넘는다.
이미 한국사회가 고령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치매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80세 이상 장수를 원한다면 역설적으로 치매가 찾아올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2020년이 되면 치매환자는 8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사회에는 치매와 관련된 오해와 편견이 존재한다. ‘치매는 치료가 안 된다’는 그릇된 인식이 대표적이다. 치매의 10~15%는 초기 원인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하다. 가장 흔한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경우 약물 치료를 통해 증상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오래된 기억을 자극해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식물치료와 원예치료를 통해서도 진행을 지연시킬 수 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경우 발병 후 평균 10년 이상 생존이 가능하며 길게는 20년 넘게 생존하는 경우도 있다.자식들은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차라리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다’며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전문가들은 “치매는 치료를 포기한다고 빨리 돌아가시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경우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사지(四肢) 경직이 나타나는데, 치매치료전문병원에 와 보면 왜 치매를 치료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일반병실에는 치매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 품위 있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중환자실에는 치매 말기 환자들이 영면을 기다리고 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려 팔과 다리가 오그라들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 참혹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미 없는 소리만을 지르고 있었다. 해븐리병원 이은아 원장은 “24년을 산 알츠하이머 환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치료할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고 말했다.
혈관성 치매는 뇌혈관 질환에 의해 뇌조직이 손상을 받아 발생하는 병이다. 현재 70세 이상 되는 세대는 어려운 시절을 보낸 탓에 건강관리라는 개념을 모른 채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혈관 관리가 엉망인 경우가 많다. 혈관성 치매와 관련된 위험 요인으로는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흡연, 심장병, 비만, 운동부족 등이 거론된다.
1970년대 치매환자가 발생하면 강제수용이나 방치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치매 부모는 고스란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고통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치매 문제에 발벗고 나섰다. 2006년 서울시는 서울시광역치매센터를 출범시켰고,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치매협회 최징자 치매간호사회장은 “한국사회에는 아직도 치매라는 질환을 노망 또는 불치병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집안의 수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최징자 회장은 “주위에 병을 알리고 친지, 이웃, 시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면서 “치매는 노망이 아닌 뇌질환이기 때문에 인지기능에 이상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시광역치매센터는 ‘치매환자와 즐겁게 사는 법’이라는 소책자까지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화장실이 아닌 딴 곳에서 대소변 보는 문제’를 비롯해 37가지 상황별로 가족이 치매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안내했다.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이동영 센터장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데 꼭 필요한 정보를 얻고 다양한 문제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요령을 익힐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책자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2000년에 작고한 미당 서정주(徐廷柱) 시인은 생전에 아침, 저녁으로 세계의 유명산 이름을 외우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또 영어성경을 읽었고 러시아어 공부도 시작했다. 미당이 그토록 열심히 세계의 산 이름을 외우고 외국어 공부를 한 까닭은 스스로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치매
이전에 비해 기억력을 포함한 여러 인지기능이 지속적으로 저하돼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나타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건망증의 경우는 대화 내용이나 경험한 일 중에서 일부분이 일시적으로 망각되지만 얼마 뒤에 차분하게 생각하면 다시 생각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치매의 경우는 대화 사실 자체 또는 경험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치매의 종류
원인 90여가지… 알츠하이머성이 절반
치매는 하나의 질병이 아니라 특정 증상의 집합인 일종의 ‘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 치매라는 임상 증후군을 유발하는 원인 질환은 90여가지에 이른다. 이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알츠하이머성 치매(50%)와 혈관성 치매(20%)다. 이밖에 루이체ㆍ전측두엽ㆍ파킨슨성 치매가 20%를 차지하고 기타 치매 10% 등이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이상 단백질이 뇌 속에 쌓여 생기는 병으로 서서히 나타나고 진행도 점진적이다. 고령으로 갈수록, 직계 가족 중 이 병을 앓은 사람이 있는 경우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낮은 학력, 우울증 병력, 두부손상의 과거력 등이 있는 경우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보고도 있다.
발병 초기에는 최근 일에 대한 기억력에서부터 문제를 보이다가 다른 인지기능도 점차 이상증상을 보인다. 성격변화, 초조행동, 우울증, 망상, 환각, 공격성 증가, 수면장애 등도 흔히 유발되며 말기에 이르면 사지경직, 보행이상 등의 신경학적 장애와 대소변 실금, 감염, 욕창 등 신체적 합병증까지 동반한다. 종국에는 모든 일상생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혈관성 치매
뇌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혀 나타나는 허혈성 뇌혈관질환과 뇌혈관의 파열로 인해 출혈이 발생하는 출혈성 뇌혈관질환에 의해 뇌조직이 손상을 받아 치매가 발생하는 경우. 초기부터 발음장애, 안면마비, 시력상실, 보행장애, 실금 등 신경학적 증상을 동반한다.
루이체 치매
뇌 조직에서 루이체(Lewy body)라는 조직병리 소견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주로 60대 이후에 발생한다. 생생한 환시와 인지기능의 악화와 호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운동기능 이상, 혼돈이나 실신 증상의 반복도 나타난다.
전측두엽 치매
뇌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에 병변이 발생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40~50대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발병한다. 주변에 무관심해지거나 충동적 행동을 보이고 말수가 줄거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주변 사람들이 종종 “기억력은 여전한데 성격이 변했다”는 식의 반응을 한다.
파킨슨성 치매
뇌의 도파민 세포가 점차 소실되며 발병하는 파킨슨병에 의한 치매. 파킨슨병의 경우 손이나 팔이 떨리고 관절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불편해지는 게 초기 증상이다.
/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