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연수동은 예로부터 주요 길목에 위치하여 인마와 물류의 이동이 빈번한 곳이여서 역참(驛站)의 으뜸인 연원 도(道) 찰방(察訪)이 있던 곳이였다.연원이란 이름 자체가 이을連근원原이니 이곳을 통한 문물의 교류와 왕래가 많았음을 고찰케한다.
신작로(新作路[개화기 이후 일정시대에 닦은 도로] ) 가 없던 그 옛날
지금의 공설운동장 옆에서 주공2단지 사잇길로해서 연수암과 흥암사뒤 마근대미재(莫隱峴)를 넘어 용탄나루(龍灘津)로 제천(백운,금성) 원주(귀래,신림)를 갔고 주공4. 5 단지 사이에있던 길로해서 진양자동차학원 뒷길을지나 북창나루 (北津 [목행천주교앞])를 건너 목계와 월탄진으로 갔으니 연원은 교통과 행정의 요충이었음을 그 이름으로 미루어 알수있다.
오늘의 연수동 발전은 우연이 아니고 그러한 지리적 요건과 주거환경에 걸맞는 산야(山野)가 잘 어우러진 때문이며 그 옛날 北津(북진[北倉나루])과 龍灘津(용탄진[용탄나루])의 첩경에 자리하여 불과 2~3십년전에도 동량면과 용탄동 사람들은 마근대미재로 시장에 오고 학교를 다녔다.
連原驛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참의 시원(始原)과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평구도(平丘道)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李太祖와 世宗실록에 역참의 폐해로 革破(혁파) 되었다가 다시 복제(復制)되는 과정을 거친다. 세종지리지에 連原道所管六丹月用安安富可興坎原仁山(연원도의 관할역이 여섯이니 단월 용안[신니면용원]안부[상모면 대안보] 가흥 감원[음성]인산[괴산])이였고
世祖實錄 卷二十九8년8월5일 丁卯日에 兵曺에서 아뢰길"이보다 먼저 여러도의 참역을 혹은 역승(驛丞)을 없애고 각각 그 부근에 합하여 1개도를 만들어서 찰방을 두었쓰나 관할하는 역이많고 길이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 가 황폐화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대책을 세워 대.중.소의 역로및 원근을따져 보강하니 연원도 라하고 察訪을 두고 14개의 속역을 두었다. 연원 단월 황강(수몰) 수산 안음 안부 신풍 인산(괴산) 감원(음성) 용안 장림 영천 오사호 천남(제천) 이다.
연원에는 驛吏50명. 지인20.사령6.奴155.婢94. 大馬3필.騎馬4. 卜馬7.필을 관장 하였던 驛道였다 .
실록에 비친 연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成宗7년 1 월 21 일 丙寅日에 형조에 지시를 내려 연원역 등에 정역(定役)된 최응(崔應)등을 방면 하였다. 24년 6월 5일 정묘일에 충청도 경차관(敬差官) 정숙지가 복명하여 아뢰기를 지난 기유년에 봉상시 주부 노모(盧瑁)가 죽었을때 정윤이 말하기를 연원도 찰방 권 광필(權光弼)에게 들었다고 하였다....
연산(燕山) 9년 4월 22일 무오에 충주에 사는 군자감 직장(直長) 임 계번(林 季蕃)이 어버이가 늙었다고 봉양키 위하여 사직하니 가까운고을의 수령에 임명토록 하였다. 전에 효행으로 표창받고 참봉에 임명 되었는데 어버이가 늙어 사직함으로 집과 가까운 연원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중종 38년 6월 4일 정축에 연원 역자 김 윤산 등 두사람 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광해군 9년 3월 27일 임진일에 형조판서 이 경전을 지사(知事)로 이 정귀를 판중추부사로 유학(幼學) 박 춘수(朴春秀)를 연원찰방에 제수 하였다 .
인조1년 에 蔡楙(채무)가 문과에 급제 그몇년후 연원찰방이 되어 선정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일에 연원찰방 한종희(韓宗禧)는 한갓 착하기만 하고 나약하여 적의 공문이 처음 이르자 겁을먹고 어쩔줄을 몰라 하였쓰니 청컨데 파직 하소서 하니 그대로 하였다.
동왕11년 본관이 한산인 李象請이 司馬試 대과에 급제후 1737년에 연원 찰방에 제수 그 명성을 떨쳤다.
38년 11월 21일 기묘에 연원찰방 조 문우(趙 文宇)는 수백포나 되는 둔전의 곡식을 모두 배의 운임으로 돌렸으니 발고되어 공물값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직을 박탈하였다.
41년 3월 10일 을유에 임금이 충청도 연원역과 전라도 청암역의두 찰방을 六品의 자리로 승격 參上의 길을 틔웠다.
정조3년 5월 29일 임자.. 飢饉(기근)구제소를 차려놓고 正月부터 시작 이 때에 마쳤다 많은 고을과 연원 율봉 등 의 역 관할의 굶주린 백성 수는 1만 3천38가구 구제곡은 8천9백 30석이다.
10여년전 80년대 후반 연원찰방 관터(3통 東便마을회관 주위)에서 가까운 4통 小橋樑(소교량)교체 사업장에서 찰방 李 升烈(이승열)遺愛碑(유애비)가 출토 되었다. 가경(嘉慶[淸의年號]) 十九年 순조 14년 1월에 세운 송덕비로 강원도와 삼남(三南)에 水害가 심한 해에 자기의 급여로 民生을 구휼한 뜻을 기리는 내용이다.
同王 33년 6월 12일 신해에 관리의 실정과 선정의 書啓(서계)에 연원의 전찰방 채 홍면(蔡弘勉)등의 失政을 규탄 하고있는 것으로 보아 연원도 찰방의 영향력과 그 관리업무가 방대 하였씀을 추정케한다.
사료(史料)에 의한 連原道 察訪에 관한 기록은 이것으로 한정되어 一目되고 정리된 시대의 연결성을 고리짓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연원은 왕조실록에 자주 기록되고 찰방의 功過(공과)에 대한논란이 빈번함을 미루어 중요 驛站으로서 중간 파발의 직능은 물론 정보의 수집과 감찰기능과 세곡의 집행으로 인한 물산의 유통과 빈민 구제등의 민생의 후생 복리에도 무관치 않은것 같다.
연수동 洞名의 어원은 물론 연원의 連자와 東守마을의 守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불과 몇십년전(1914) 행정구역개편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꼭 하나 밝혀 두고 싶은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東,西便마을을 연안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연원을 경(輕)음화 시킨 변음의 잘못된 발음임을 지적 하고자한다 .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과 蘂城春秋(예성춘추)에 邑北五里虛連原城皇堂 읍의 북쪽 오리 허에 연원과 성황당이 있다 . 연원은 이미 언급한바 동편마을(3통)에 있었고 성황당은 70년대 초반까지 주공1단지 남서쪽 끝머리에 있어 그옆 정미소에서 해마다 고사를 지냈었는데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폐치되었다.
3~4십여년전 연수동은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목가적인 환경의 산자수명한 그야말로 산좋고 물좋은 천혜의 옥토였었다. 그러나 그후 공영 토지 개발로 인한 집단 주택이 밀집화 되면서 주거의 명소로 각광 받아 많은 外形의 발전을 하여왔으나 아직도 불균형적인 미개발의 동북 지역은 온천개발이 불투명 해지고 토지 구획정리사업이 지지부진 하여 침체와 답보를 면치 못하고 있다 .
차제에 필자는 동민과 市民의 一者로서 提議컨데 지난 역사적인 사실과 중요한 목으로서의 지리적 특성으로 볼때 그옛날 부터 용탄 나루와 동량면 조동과 開天안(하천)을 통해 원주(신림) 제천(금성,백운) 영월 방면으로 가기 위한 제일첩경인 마근대미재(莫隱峴)[갱고개길을 이어 그으면 이곳으로 연결된다]나,
금곡 재개울에서 용탄공단으로 통하는두루봉재(周峰峴)[안림LG아파트 옆에서 부익주택 옆의36M 동부우회 도로를 연장선으로 이으면 이곳으 로 연결된다] 나,
더 나아가서는 금곡 뒷거리에서 용탄으로 통하는 작은 민재 (小岷峴)를 통과하는 터널이나 간선도로가 하나라도 만들어 진다면 충주 동북지역권의 丘陵지대 발전은 불을보듯 명확관화한 사실이 될것이며
긴 안목으로 볼때 목행을 번번히 돌아서 가던 댐과 동량면 지역과의 접근성이 용이 하게 되므로 언제고 여건이 성숙되어 뜻있는 시민들이 힘을모아 이길을 관통 시키는날 .... 연수동의 옛 이름 연원 본래의 역할과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
또한편 연원도 찰방이 그 옛날 武學堂(무학당)에서 해마다 시연 했던 무술시범을 오늘에 다시 재현하여 우륵 문화제와 세계 무술 축제 행사의 하나로 발전 시켜 나아가고
連原道 察訪 出行 等을 다시 시현 연수동민 단합과 결속을 다지는 한마당 잔치로 승화 재 조명 하므로서 우리의 전통 문화 를 되살리는데 힘을 다 하여야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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