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실천하는 부자경매(in부산)
 
 
 
카페 게시글
남연님의 길따라가기 스크랩 장산의 설화 - 천제단,마고당,제석당
남연(이술헌) 추천 0 조회 145 14.05.31 23:3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의 장산은 높이로만 따지면 부산에서 세번째이지만 설화는 풍부합니다. 이러한 설화들은 산행의 재미를 더해 주기도 하며 그저 지나치던 돌덩이에 불과하던 바위에 숨결을 불어 넣어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장산 억새밭 부근에 조성되어 있는 장산 마을 부근에 천년도 더 전의 신라시대때 장산국이라는 나라도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얘기꺼리가 많은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일일이 고증한 것은 아니고 인터넷에 공개된 사학자들의 연구들을 살펴보고 내용들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장산의 설화의 중심에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장산국, 마고당, 천제당, 제석당, 고씨할매, 고씨례, 옥녀격고, 선바위, 촛대바위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의 근원과 연관성을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레 장산이 품고 있는 얘기들을 알 수가 있겠지요^^

 

"이하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여 요약한 자료임"

 

1. 지리학적 장산

 

 

대략 6천 2백만 년에서 7천4백만 년 전에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장산은 지금 억새밭 일대 분지에는 삼한시대 장산국의 터전이었다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2. 마고당, 천제단, 제석당 

 

1) 마고와 천제의 기원

기원을 따져보면 마고는 지모신, 신모(神母)로 그 어느신 보다 오래된 전세계적인 모계 중심 농경문화의 창조신에 해당된다. 반면 천신은 부계 중심 북방 기마민족의 사상이니 이질적인 문화의 접목이라고 볼 수가 있다. 대부분의 농경민족은 기마민족에 멸망당해서 흡수되었기 때문에 마고의 사상이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마고는 중국의 반고에 해당하며 처녀생식으로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아 (우리 민족의) 삼신할미가 되어 마고성 이라는 낙원을 만들고 그에게서 현생인류가 태어난다. 단군이전에도 고대 사회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2) 마고당과 천제단의 위치

이 장산에는 너덜겅이 많은 데 해운대 신시가지쪽의 너덜 근처에 한민족의 기원인 마고 설화와 관련한 마고당(麻姑堂)과 천제단(天祭壇) 유적이 있다. 이 마고당과 천제단이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은 없으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창세신화와 제천의례와 관련하여 아주 귀한 유적이다.

 

이 마고당은 자연석으로 돌단을 쌓고 입석을 세워 신단을 조성하여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당집 바로 아래에 석간수(石間水)가 마르지 않고 솟아나고 있어 이 약수로 신단에 바치는 정화수로 쓰고 있다. 이 물은 산신이 마셔서 이 물을 마시면 건강하고 장수한다고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다. 천제단 아래에도 물이 있는 데 물맛이 아주 좋다.

 

위치는 아래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체육공원에서 오른쪽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정표가 보이고 이 곳에서 

너덜옆으로 나 있는 산길을 따르거나 너덜을 따라 올라 가다보면 마고당이 보이고 예전에는 없었지만 천제단 이정표가 있다. 마고당에서 좌상측으로 2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천제단>

<마고당>

마고당 옆에 조성되어 있는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아득한 1900여년전 신라 탈해왕 23년경 이 일대를 장산국이라 하여 거병30명의 부족 국가가 형성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조 중엽부터 봉산으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육림, 벌체하였으며 서기 1714년 이래 동하면민이 기우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마고 할머니를 모신 제당을 세워 정, 육월에 제를 모시고 질병예방과 풍농어를 기원하였다는 기록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4호'인 동하면 고문서 (좌동경로당 보관중 1992년 시립박물관에 기탁한 총 36책)가운데 '東下大洞中節 山神堂'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300년 가까이 좌, 우, 중동 등의 여섯 마을에서 윤번제로 제를 모셔 오던중 근년에 와서 음력 정월에 제를 올리고 그 연원을 이어 오고 있는 신성한 제당이다

 

3) 관련 기록

 

- 문화재청의 기록

 

장산마고당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산 1-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는 제당. 2009년 12월 7일에 ‘부산광역시 민속자료 6호’로 지정되었다. 마고당에는 장산 일대 지역의 수호신인 상산마고할미, 천제당에는 천신(天神)·지신(地神)·산신(山神)을 각각 모시고 있다. 장산 중턱의 너덜겅(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에 자리한 장산마고당과 천제당은 우리 고유 민속신앙 제당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산과 천제당이 하나의 권역 속에 형성되어 있는 민속신앙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장산마고당은 마고할미를 모시는 본당을 중심으로 산신을 모시는 산신단과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천제당은 돌로 만든 제당으로 마고당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마고당 일곽은 본당을 제외하면 모두 인근의 자연석을 쌓아 올린 돌담으로 둘러쳐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돌담의 규모는 높이 2~4m, 길이 25m 가량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쌓아서 사다리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담장 왼쪽과 뒤에는 너덜겅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붉은 시멘트 벽돌 건물인 본당은 앞면 201㎝, 옆면 199㎝ 규모다. 청기와 맞배지붕 형태로 용마루 오른쪽에 치두, 왼쪽에 치미로 장식되어 있다. 본당의 정면 창방 위에는 ‘상산마고당(上山麻姑堂)’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창방 아래에는 광창을 길게 내고, 가운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문양에 둘러싸인 태극 문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본당 오른쪽 아래에는 돌로 만든 산신제단이 있다. 산신제단은 지상에서 48㎝ 높이에 앞면 50㎝, 옆면 57㎝, 두께 8㎝ 크기의 자연석을 올려 만든 것이다. 본당의 왼쪽 아래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부속건물이 있다. 부속건물은 앞면 221㎝, 옆면 230㎝ 규모의 시멘트 건물이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설치한 정면을 제외한 왼쪽, 오른쪽, 뒤쪽은 주변 막돌과 시멘트 몰타르를 쌓아 벽체 겸 담장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기와는 맞배지붕 형태이다.

 

천제단

 

마고당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좌상측 200m 떨어진 장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천제당은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신선바위 뒤에 바위 제단을 한 단 더 높게 쌓은 형태이다.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은 앞면 50㎝, 옆면 75㎝, 두께 8㎝ 규모의 직사각형 형태인 화강암 반석이다. 천제당은 제단 뒤편의 큰 바위로 벽체를 삼고 그 양쪽으로 자연석을 올려 쌓은 돌담이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돌담 뒤로는 소나무가 무성하여 장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돌담의 규모는 길이 130㎝, 높이 90㎝, 폭 13㎝이다. 제단 뒤쪽의 바위에는 천제당에 모신 신격의 신체인 3기의 입석이 세워져 있다. 가운데 입석의 크기는 높이 90㎝, 밑변 20㎝, 폭 15㎝이다. 왼쪽의 입석은 높이 61㎝, 밑변 20㎝, 폭 15㎝ 크기이다. 오른쪽의 입석은 높이 48㎝, 밑변 20㎝, 폭 17㎝이다. 이들 입석은 천신·지신·산신(山神)을 상징한다고도 하며, 천(天)·지(地)·인(人)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천제단 하단 길 아래에는 사방 1m 안팎 규모의 너덜겅 아래로 흘러 내려오는 석간수가 고이는 샘물이 있다. 이 샘물로 정화수를 올리고 제의 때 제물을 장만한다.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인 『동래부동하면고문서』 가운데 「동하대동중절장산신당중건록문」

 

장산은 조선시대 중엽부터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육림·벌채하다가 서기 1741년 이래 동하면민이 장산에 기우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조선 중엽 이후부터 마고할미를 모신 제당을 세워 정월과 유월 두 차례에 제를 모시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장산 마고당은 조선 중엽에 건립되어 제의가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에는 현재의 제당이 1924년에 중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4년에 제당을 중건한 연유는 당시 당사가 노후에 비바람을 막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중건은 마을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마고당 현판의 낙관 ‘중원갑자칠월중건(中元甲子七月日重建)’과 제당 안 천장부의 상량문 ‘중원갑자칠월육일미시입주상량(中元甲子七月六日未時立柱上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52년 6월에 인근 군부대의 탄약고 야적장에서 폭발된 탄약의 파편 일부가 날아와 당사 지붕이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 당시 당사는 군부대의 관할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훼손된 지붕을 보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을 주민의 꿈에 마고할미가 나타나 “내가 비를 맞고 있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며 꾸짖었고, 그 일을 계기로 마고할미의 꿈을 꾼 마을 주민이 군부대 사령부에 간곡히 요청해 사비를 들여 지붕을 지금의 것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천제당의 건립 시기에 대한 문헌자료와 구전자료는 달리 없다. 그러나 마고당에 제를 올릴 때 천제당에서 먼저 제를 올리는 것이 오랜 관행인 것으로 보아 천제당의 건립 시기는 마고당사의 건립 시기와 동일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해운대구에서 설치한 안내문에는 “천제단은 2천 3백년 전 장산국이 씨족끼리 형성된 마을공동체로서의 일체감과 수렵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자연숭배사상에서 천신과 산신에게 제천의식을 일 년에 두 번(1월과 6월)씩 올리던 곳이다”라고 쓰여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 자료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2009.11.12, 국립민속박물관

 

마고당 본당 내부에는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이 디귿(ㄷ) 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단 위 벽면에는 ‘상산마고령상신위(上山麻姑靈上神位)’라 쓴 나무위패가 걸려 있다. 그 아래 제단 위에는 정화수 그릇 두 개, 촛대 세 개, 쌀을 담은 제기 한 개, 향로 한 개 등이 놓여 있다. 현재 제의를 모실 때 사용하는 제구(祭具)는 마고당의 부속건물에 보관되어 있다. 2005년 이전에는 제구를 마을에서 따로 보관하였다고 한다.

 

제의는 장산 일대의 운촌, 중동, 미포, 장지, 오산, 좌동 등 여섯 마을에서 윤번제로 매해 음력 1월 3일과 6월 3일 두 차례 제의를 베풀어 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는 이들 여섯 마을의 동장들이 회의를 거쳐 제의를 좌동에서 일임하도록 하여 이후로 좌동에서 제의를 모시고 있다. 좌동에서 제의를 전담하여 모시게 된 이후로 1996년까지는 좌동마을 주민을 대신해 폭포사의 주지스님이 망제 형식으로 제의를 대행해 왔다.

 

1995년 좌동 주민들이 장산마고당과 천제당의 전통 민속문화적 가치를 절감하고 보다 발전적인 계승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일환으로 ‘장산신당보존관리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1997년부터는 장산신당보존관리위원회(2010년 6월 10일 ‘장산향토문화보존사업회’로 개칭됨)에서 제의를 주관하여 모시고 있다.

 

마고당과 천제당 제의는 매해 음력 정월 3일과 6월 3일 두 차례에 행해진다. 정월에 행하는 제의는 전염병 예방과 각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데 목적을 둔다. 6월에 행하는 제의는 풍해, 충해, 병해 등 삼재를 막고 풍어와 풍농 등 기풍을 기원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의의 절차는 원래 천제당제-마고당제-거릿대제(현 국민은행 신시가지 지점에 있던 당산나무) 순이었으나 좌동에서 제의를 일임하여 모시면서부터는 천제당제-마고당제-산신단제- 제석당제 순으로 변화하였다. 과거와 달리 거릿대제를 지내지 않는 이유는 해운대 지역의 개발 과정에서 거릿대장군의 신체(身體)가 없어지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제석당제를 지내는 것은 제석당이 좌동의 당산이며, 좌동에서 제의를 일임하면서 좌동의 당산제가 마고당제로 흡수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거릿대 장군은 길에서 죽은 걸신의 우두머리를 말하며 청사포 해변로 어느횟집 담벼락 부근에 제단이 있음, 제석당은 대천공원 관리 사무소 건너편 조금 윗편의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있음. 거릿대 장군을 모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음. )

 

제석당 설명

 거릿대장군 단

 

 

좌동 당산인 제석당은 1993년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사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장산의 산기슭으로 이전되었다. 제당 안에는 ‘장산산왕대신신위(?山山王大神神位)’라고 쓴 나무위패와 신석(神石)인 자연석이 봉안되어 있다.

 

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제의 열흘 전에 마을 주민 가운데 생기복덕을 보아 부정이 없는 깨끗한 이를 선정하며, 선정된 제관은 제물을 운반할 이를 지명하여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이는 제의를 지내기 전후로 열흘동안 부정을 가리는 금기를 행한다. 제의에 진설하는 제물은 신격에 따라 각기 다르게 준비한다.

 

천제당에는 생쇠머리, 조리하지 않은 생선, 떡, 삼색과일, 제반, 술 등을 올린다. 마고당에는 육류와 어류를 일절 올리지 않고 떡, 메, 나물, 과일, 제반, 정화수를 진설한다. 산신단에는 쇠고기, 메, 나물, 정화수 등으로 간소하게 차린다. 제의 방식은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동일하지만 천제당·산신단· 제석당에는 삼배를 올리며, 마고당에는 구배를 올린다. 제의를 마친 뒤에는 제석당에서 제관들이 음복한 다음 당일 진시(辰時)를 경과한 뒤에 하산하여 마을 경로당에서 남은 제수음식으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음복한다.

 

구전하는 영험담으로는 운촌 마을에서 제를 주관하던 어느 해에 제물로 쇠머리를 올리지 않고 돼지머리를 올린 탓에 제관이 신벌을 받아 다시 제를 모셨다고 한다. 또 광복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해 유월 제의 때 노인들의 모임인 갑계에서 제물로 쓸 송아지를 잡아 제를 올렸다. 이때 날이 더워 제관들이 두루마기를 벗어 신당 옆 바위 위에 얹어 놓자 갑자기 두루마기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라 양운폭포 아래 가마소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몰려가 소에 빠진 두루마기를 건지기 위해 긴 막대기 두 개로 휘저었으나 끝내 두루마기를 찾지 못하였다. 소에 빠진 두루마기의 주인은 당시 자신의 처가 임신하였음에도 제에 참여하여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소에 빠진 두루마기 주인은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3. 고씨할매, 고시례, 촛대바위 (영감할매바위), 선바위

 

1) 고씨할매의 얘기

고씨할매 얘기는 해운대 구청에서 장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장산 너덜길을 조성하면서 나무팻말 일곱개를 설치하여 길을 걷는 사람들의 흥미를 더해준다. 대천 체육공원 입구의 첫번째 고개 팻말로 시작되어 반송 경동 아파트까지 걷다보면 모두 일곱개의 팻말을 볼 수 있는 데 장산국의 건국신화를 담은 재미있는 얘기다. 아래는 그 얘기

 

아득한 옛날 해운대 장산 기슭 장자벌에서 고씨 성을 가진 처녀가 홀어미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다가 그치더니 멀리 동쪽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고씨 처녀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빠져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단옷을 입은 선인이 나타나더니 무지개를 타고 곧장 고씨 처녀의 집 앞에 다가섰다.

 

선인은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다. 고씨 처녀는 물그릇에 물을 떠주면서 얼굴을 돌려 선인을 외면하였다. 선인은 물그릇 속에 거울처럼 비친 외면한 처녀의 얼굴을 보았다. 선녀보다 아름답고 옥처럼 빛나는 처녀 모습에 선인은 그만 매혹되고 말았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혼인을 하였다.

 

이들 부부는 장자벌의 땅을 모두 일구어 식량을 마련하였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동안 이들 사이에는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이 태어났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자식들은 모두 장성하였고 제각기 스무 곳의 마을에 흩어져 그 마을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제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부족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다. 그리고 처녀를 만나 결혼한 지 60년이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 때부터 고씨 처녀는 선인의 뒤를 이어 부족을 다스리는 고씨 할매가 되었다. 고씨 할매는 선인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자녀를 낳던 제왕반 바위에 제단을 차려놓고 날마다 옥황상제께 선인의 귀환을 간절히 빌었고 외가리절에 가서 불공도 드렸다. (불공을 들인다는 말은 조금 잘못된 것 같음 이후 장산국이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도 불교가 들어 오지 않은 때라 조금 이상함 ... 후에 각색을 한것인지?)  또 산정에 있는 큰 바위(영감 할매 바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선인의 하강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고씨할매는 그 바위 밑에서 선인을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셨다. 20곳 마을에 살던 아들 딸들은 고씨할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씨족들을 이끌고 와서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상여바위)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지금도 그 제왕반 바위, 상여바위, 영감할매 바위가 있고 그 묘가 있다. (묘가 있다는 말은 좀 이상함.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 묘가 남아 있다는 말은 이상함)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고씨할매의 넋을 고을의 질병을 막아 주고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의 후손들은 마을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날에 고당 할머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제사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망있는 부부를 택해서 제관으로 선택하고 제관은 궂은 일을 보지 않고 당일에는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제수물은 흥정하지 말고 값대로 치러 마련토록 하였다. (고씨할매 사당은 재송동 현대아파트, 관음정사 남서쪽 초록공원 내에 있음) 

제관은 마을에 살고 있는 각 성씨 이름을 봉송하면서 동태민안을 기원하고 재앙
과 질병이 없도록 시주종이를 불살라 비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들에서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첫숟가락에 밥을 떠서 "고시례"(高氏禮)라
고 고씨할매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야만 식후에 탈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아
들이 없는 부인이 제왕반에 가서 촛불켜고 기도한 후 외가리절에 가서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고, 영감할매 바위에 가서 공을 드리면 부부의 정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선인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장산 넘어 먼 하늘
가에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남자가 왔다는 것을 신격화 하였고 고씨 할매와 그
딸 고선옥은 원시 사회의 제사를 맡은 제관할매와 신딸로서 큰딸(크슬아기=구술아
기)의 뜻을 전하고 제왕바위는 신당의 뜻이고, 10남 10녀가 이웃 마을에 흩어져 살
았다는 것은 그 선인은 대추장(큰촌장)이 되어 그 씨족들로 하여금 20개 마을을 다
스리게하여 씨족공동사회를 형성하였다는 뜻이고 외가리 절은 그당시 이미 금관가야
국과 친교하여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상여바위와 고씨묘는 왕비의 석곽
묘를 뜻하고 영감할매 바위는 선인과 고선옥을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다는 뜻이고, 고
씨례는 고수례의 풍습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전설은 장산국(長山國)의 건국신화로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동래
동쪽 십리지점에 장산국의 옛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장산기슭에 있는 재
송동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장산국이라는 작은 나라 이름은 이곳에 있는 장산이라
는 산 이름과 같고 이산을 상살미, 자류미라는 속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속명은
큰산, 높은산, 동쪽산의 뜻의 옛말로 해석된다.

장산국은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조에서 "옛장산국은 일명 내산국(來山國)으로, 대군
을 일으켰는데, 삼십명으로 가야국을 쳤다. 그리고 신라는 이를 쳐서 거칠산군(居柒
山國)을 두었다."라고 적혀 있고, 동국사를 살펴보면 신라 4대 탈해왕 23년에 이웃
국경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있어 신라왕은 이 두나라가 걱정이 되어 거도장군을
변관으로 삼아 항상 장토야(기장)에서 말을 모아 달리게 하여 말타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하여 두나라가 여기에 대비가 없도록 해놓고 거도장군이 습격하여
거칠산국을 멸망시켰다. 거칠산국은 아마 장산군의 일명 일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장산국(래산국)은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일명으로 보고 있고 거칠산국이라는 나
라 이름은 망미동에 있는 황령산의 옛이름은 거칠뫼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촛대바위또는 영감할매바위라고도 부름

장산 정상에서 성불사가는 방향으로 30미터쯤 내려가다 좌측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있음  

촛대바위 아랫편의 모습 

 

  

촛대바위에서 아랫편으로 200-300 미터정도 내려오다 보면 나타나는 바위 군락 

장산의 크기에 비해 제법 기묘한 바위들이 많이 있음

제왕반이라던지, 상여 바위라던지 하는 바위가 아닌가하는 추측만 함 

 

2) 선바위(장군암)

촛대바위에서 성불사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장산의 기암들과 만나게 되고 끝자락에 장군암을 만나게 된다

이 선바위는 기우제와 관련된 얘기만 있으니 앞의 얘기들과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또 다른 얘기들이 숨어 있는지는 찾아봐야겠다.

선바위(장군암)

 

4. 지도 / 트랙

 

마고당천제당촛대바위.gpx트랙은  최선의 라우트가 아니므로 참고만 하세요

 

 

 
다음검색
댓글
  • 14.06.01 00:41

    첫댓글 우와.. 장산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ㅎ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 14.06.01 20:42

    답사한번 갔다 오겠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