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나 소도시에는 옛날부터 5일 장이 선다. 이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로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미풍양속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상거래는 기본이고 사람들이 만나 막걸리도 한잔씩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훈훈한 인정이 피어나고 그 지역의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이웃에 사는 절친 한 친구에게 문자를 날렸다. 모처럼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그 친구도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전화 통화도 통상 10초를 넘지 않는다. 가부(可否)만 알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만나서 양평을 가기로 의견일치를 봤다. 양평하면 기억나는 것이 있다. 90년대 어느 해 겨울, 우리나라에서 영하 29도 까지 내려갔던 가장 추운 곳이 양평 이라는 기사가 떴었다. ‘북극권이 된 양평’이라는 타이틀아래 상점의 음료수는 물론 소주까지 얼어붙었다고 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이 같은 혹한은 많이 수그러진 느낌이다.
양평 가는 전철을 타고 주위 산들을 보니 울긋불긋 온통 가을색이다. 논바닥의 벼들은 이미 다 베어지고 볏짚은 가축먹이로 흰 비닐로 둥그렇게 포장되어 있어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양평역에 내리니 마침 장날이었다. 전에도 한번 와 본적이 있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정말 장날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활기찬 삶의 현장이었다. 초입엔 개나 고양이 닭 등 가축들을 파는 곳이 있다. 강아지가 철창우리 안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 매우 귀엽다. 인류 역사상 인간과 가장 가까이 지낸 개,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들을 견공이라고 높이 부르기도 한다. 강아지와 고양이 새끼들이 어미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천륜을 강제로 떼어놓은 것 같아 측은하고 애처롭다.
이곳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볼 수 없는 각종 물품들이 모여 있다. 지역토산품은 물론 한약재와 인삼, 이름 모를 풀뿌리나 건강 차, 골동품에 이르기 까지 옛것과 현대의 물품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야말로 잡화상이다. 대형마트 진열장에 잘 정돈 된 상품들보다 장날 노점에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상품들이 정겹기만 하다. 대형마트가 오로지 기계처럼 정가에 찍힌 그대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삭막한 곳이라면 장에서는 상인과 구매자 사이에 흥정을 하느라 가벼운 실랑이도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에누리도 있고 덤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듯이 이곳에선 가장 기초적인 대인관계가 형성되고 사회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 친구는 장 구경을 하며 은행과 학자답게 붓 몇 자루를 샀다. 그는 어딜 가나 내가 보기에는 사지 않아도 될 물건들을 산다. 견물생심이라고 할까. 그의 집에 가보면 만물상 같다. 서적도 사다놓고 얼마 지나면 무엇을 샀는지 잊어버려 나중에 또 같은 책을 사와 도로 물려오기도 한다. 내가 옆에서 자네 덕분에 침체된 나라경제가 활성화되면 국가에서 표창이라도 주어야 되지 않을까 말했더니, 자기가 내수경기를 일으키는 장본인이라고 하며 웃는다. 나도 거기에서 두부 한모를 샀다. 별 것은 아니지만 수북히 쌓아 놓고 파는 두부가 그 지역 특산품 같아 어쩐지 마음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 지방에서 나는 음식물을 먹어봐야 체험도 되고 여행의 묘미도 있고 추억도 남는다.
해외여행을 가면서 김치나 김 등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물을 싸갖고 가 먹는 경우가 있다. 여행이란 그 나라 고유의 풍습 이라 던지 음식문화도 접해봐야 여행의 참맛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는 시장 한 바퀴를 돌고나서 천막을 치고 막걸리 파는 주막으로 들어갔다. 애주가는 그 고장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분위기에 젖어도 보는 빠트릴 수 없는 필수과정이다. 어디서 모여든 사람들인지 막걸리를 들이키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전형적인 시골장날 풍경이다. 우리도 막걸리 한 병과 빈대떡 한 접시로 그 분위기속에 끼어들었다. 늦가을 태양은 중천을 넘어 석양으로 기우는데 주막집여인의 손길은 바쁘게만 움직인다.
올해는 말의 해다. 질주하는 말처럼 벌써 11월에 접어들었다. 지는 해가 더욱 붉은 빛을 발하듯 이제 갑오년도 서산을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이해가 이울고 새해가 오는 세월의 수레바퀴는 전생윤회의 인생사와 흡사한 것 같다. 깊게 저물어가는 가을, 양평장날 노천의 주막에서 황혼기에 접어든 두 늙은이가 술잔을 서로 맞대며 지내온 인생길을 회고하고 환담하면서 때론 사색에 흠뻑 젖어들었다. 앞으로 이 같은 여유와 낭만을 즐길 날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 하면서 고개를 드니 늦가을 소슬바람에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가랑잎이 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였다.
- 작성일 2014-11-01 23:05
- 카테고리 전체
1970-01-01 09:00 2014-11-01 23:05
- 태그
- 댓글
-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