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자비행사찰순례단의 순례장소는 송광사와 선암사입니다.
송광사는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본사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대사가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대사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수우(守愚)대사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때까지 송광산이라 불렸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렸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대사가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 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취봉(翠峰)·금당(錦堂)대사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순천 송광사 국사전, 순천 송광사 경질, 순천 송광사 경패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에 있다. 2009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선암사는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 소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때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탁,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1660년에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세분의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워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菴), 도선암(道詵菴)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년)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스님과 서악(西岳)스님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스님은 중창불사 뿐만 아니라 1734~35년 두 차례에 거쳐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景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등의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써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 순례일시 : 2024. 3. 3(일) 07:00 대전세무서 출발
- 순례장소 : 송광사, 선암사
- 순례코스 : 대전(07:00) - 송광사(10:00) - 사시예불(10:30~11:20) - 점심공양 (11:30~12:30) - 선암사(13:30~14:30) - 대전(18:00)
* 점심공양 : 송광사
- 순 례 비 : 40,000원
- 입금계좌 : 하나은행 740-910157-83807(정인자) 010-5454-4560
자비행사찰순례단 회장 최종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