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속도 사이에서
마경덕
속도전이 치열하다.
디지털시대 남보다 빨라야 한다고 TV광고는 ‘빠름’ ‘빠름’을 외쳐댄다.
속도전은 최단 기간 양적 질적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는 사업방식,
‘메가’에서 ‘기가’의 시대로 바뀌고 우리의 일상도 빨라졌다. 인터넷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의 기술이 뛰어난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 불리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휴대폰도 컴퓨터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데이터 전송속도의 차이로 세대를 구분하는 무선이동통신은
1세대(1G), 2세대(2G), 3세대(3G) 현재 4세대(4G)에서 5G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는 신상품과 유행을 만들고 소비를 촉진한다.
속도는 자본과 같은 힘을 가진다. 편리한 인스턴트식품, 기능이 빼어난 가전제품,
배달앱, 교통카드, 지하철, 고속열차, 편의점, 모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상품이다. 노래도 빠르고 춤도 빠르다. 그 리듬에서 벗어나거나 합류하지 못하면 기성세대로 불린다. 왜 우리는 이토록 바빠야 하는 걸까. 읽고 생각하고 걷고 밤새 편지를 쓰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속도의 경쟁은 우리의 의식구조까지 바꿔놓았다. 이유도 없이 욱,
치미는 시대 느긋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제철이 아니어도 사철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시대에 기다림이란 옛이야기인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시대는 물경 속도가 세상을 지배한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죽어가는 고래는 2톤이나 되는 혀와
자동차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자동차만한 심장,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는 심장.
나는 잠시 쓸쓸해진다.
수심 4,812미터의 심연 속으로 고래가 가라앉으면서
이제 저 차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엔진은 조금씩 멎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은 어느 좌석에 앉아 있을 것인가.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가닿는 시간과
한 번의 호흡으로도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
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
무서운 속도다. 새벽의 택시가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져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무서운 속도로 들이받던 그 순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 깜깜한 심연을,
네 얼굴이 조금씩 일렁이며 멀어져가고
모든 빛이 한 점으로 좁혀져 내가 어둠의 주머니에
갇혀가는 것 같던 그 순간을,
링거의 수액이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지금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니
고래야, 고래야 너는 언제 바닥에 가 닿을 거니
─ 장만호, 「무서운 속도」 전문, 시집 『무서운 속도』(랜덤하우스. 2008)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속도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속도였다. 조금씩 가라앉을 때마다 가해지는 공포는 한없이 느린 ‘천천히’였다. 장만호 시인은 한 번의 호흡으로 30분을 견딜 수 있는 흰수염고래의 한 호흡의 길이,
그 사이에 서 있다. 숨이 막히는 고요한 죽음, 조금씩 몸에서 호흡이 빠져나간다. 심장에 물이 스미는 구간, 죽음의 공포를 한 눈금 한 눈금 체험해야 하는 가혹한 시간은 수심 4,812미터 빛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무덤보다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 때 마음은 어느 좌석에 어떤 모습으로 앉아있을 것인가.
시인은 빗길에 미끄러져 무서운 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던 그 순간 마음을 챙길 수가 없었다. 예정된 ‘죽음을 알고 가는 길’과 ‘느닷없이 벌어진 찰나의 일’은 모두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 회복되려면 느리고 느린 경로를 거쳐야 한다.
극한 상황에서 벌어진 느리고 빠른 속도는 죽음을 눈앞에 둔 ‘마음의 속도’이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시간이 서서히 오고 있다. 다급할 때 놓쳐버린 마음자리는 어디일까.
낳고 낳고 낳고…… 저 무서운 번식력, 전쟁 중에도 내일은 죽지 않는다 단명의 공식에 P는 내일을 보지 못하고 K는 어제를 넘지 못했지만,
답습된 예감이 내게 배달되고 서류 뭉치는 밤새 지루한 일거리를 낳았다 손에 달라붙는 급한 순서들 뒤섞인 생각을 스테플러로 가지런히 묶는다
어제의 목소리가 휴대폰으로 전송되고 나는 또 하품이 섞인 두 시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그림자는 동선을 따라 빙빙 돈다
어둠이 내리면 종종거리던 시간이 23.5°편안한 지구의 기울기로 채널을 돌리며 누군가의 트루먼 쇼를 기웃거린다
가끔 새로운 날을 요리해보지만 짜거나 맵다
자정 1분 전, 익숙한 표정이 문밖에서 대기 중이다
— 진순희, 「내일의 공식」 전문, 《미네르바》(2015. 여름호)
무한 재생되는 내일, 죽지 않고 날마다 태어나는 내일,
내일, 내일… 변신할 내일을 기다리며 우리는 절망을 견딜 수 있다. 값없이 흘려버린 나의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었다.
진순희 시인의 「내일의 공식」은 늘 반복되는 일정에 묶여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고단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보여준다. 보지 않아도 예감할 수 있는 내일, 똑같은 표정으로 대기 중인 내일,
하지만 평범한 일상마저도 행복임을 깨닫는다. 늦은 밤 23.5°편안한 지구의 기울기로 소파에 누워 채널을 돌리며 누군가의 트루먼 쇼를 기웃거리는 작은 즐거움을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늘 똑같은 속도로 출발하고 마감되는 일과들,
생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일일드라마가 내게는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일상을 일탈해보지만 잠시뿐, 속도를 벗어난 행복은 입에 맞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 그렇게 비슷한 무늬로 운용되었듯이 또 그렇게 길들여진 속도일 때 우리는 안심한다. 내일이 오기 1분 전, 또 그렇게 내일은 나의 몫으로 온다.
시간의 가치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A에게 빈둥거린 오늘이 내일을 위한 충전이라면
B에게 주어진 휴식은 노동 못지않은 고역일 수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요란하지 않다. 늘 평범한 얼굴로 찾아온다.
냉장고 안에 보관된 꽃들,
입이 열린 꽃들은 불안하다
미모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개화를 억제하고 죽음을 늦춰야 한다
걸러낸 물에 담겨 얼음과 약을 섭취한다
체온을 낮추고
예정된 죽음은 잠시 연장된다
색상에 따라서 등급이 결정되는 꽃들
마침맞게 핀 화사한 꽃은 행사장에 초대되어 존재를 빛낸다
그러나 냉장고를 빠져나간 순간 체온이 오르고
빠르게 소멸이 진행된다
안과 밖의 기온만큼 몸값은 내려가고 때를 놓친 꽃들은
헐값에 팔려가거나 배설물처럼 버려진다
더러는 벽에 거꾸로 매달려
남은 피를 다 말려야 한다
모든 꽃들은 순리대로 살기를 소원한다
─ 신미애, 「소멸의 속도」 전문, 《시에》(2013. 겨울호)
속도는 태어나고 소멸한다. 조금씩 생기가 새어나가는 꽃들, 뜨거운 속도로 달려온 것들이 빠르게 식어간다.
꽃은 적잖은 시간을 거쳐 피어나지만 잘리는 것은 순간이다. 예정된 죽음들이 가지런히 묶여 상품으로 팔려나간다.
‘꽃들의 죽음’을 모아놓고 우리는 아름답다는 찬사를 얹어 꽃들을 위로한다. 한정된 시간을 부여받은 짧은 목숨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빤하다.
향기로운 죽음을 감상하는 시간, 생의 속도는 빠르게 진행된다. 마지막 낙화마저 허용하지 않는 우리는 준비된 목록으로 갈아치우거나 벽에 거꾸로 매달려 피를 말리는 고문을 화려한 리본으로 장식한다.
벽에 걸린 꽃의 미라들, ‘꽃의 나라’에서는 제자리에서 피어 시드는 것을 순리라고 부른다.
산길을 내려오는 폭포
물길은 순식간에 은빛의 속도를 낸다
추위로 몸을 꽁꽁 싸매고
그 은빛 외투 속으로
흘러내려 가는 물소리가 있다
늦가을부터 그곳은 은빛이다
세상 바람은 그곳에 와서
억새꽃으로 낡아간다
보풀이 인다
나는 찬란함을 헤치고 들어가
은빛으로 누워 보았다
오늘, 생의 남은 빛깔들은 다
은빛이라는 걸 알았다
억새밭에서 불던 바람이 귀밑으로 흐른다
이렇게 맑은 것인가
이렇게 맑아도 되는 것인가
남은 생애가 은빛이라는 걸
가장 빛나는 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억새꽃 바다로 가고 있다
— 박무웅, 「은빛의 속도」 전문,
시집 『지상의 붕새』(작가세계 2014)
낙차와 속도 기온 차로 물빛깔이 변한다. 무리지어 쏟아지면 은빛이다. 세상 바람이 다 모여드는 늦가을 억새밭도 은빛이다. 갈대밭에 누워 박무웅 시인은 깨닫는다. 남은 생의 빛깔들은 다 은빛이라는 걸.
은빛이 가장 빛나는 때라는 걸. 노년의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 그때쯤 생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지혜가 생겨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두 맑아지고 맑아져서 억새꽃 바다로 가는 중이다. ‘은빛의 속도’는 ‘은빛의 나이’에만 만날 수 있다. 잘 살아온 노년은 젊음보다 더 아름다운 완숙이다. ‘비움’으로 알찬 생을 보여주는 「은빛의 속도」는 생의 마무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신발論』 『글러브 중독자』 gulsam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