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늘 그리운가? 좋았던 나빳던 하루라도 더 젊은날의 이야기이니 미련이 남는걸까.... 20여년전 걸었던 길을 걸으며 마음이나마 그시절로 되돌아가 추억을 회상하다.
마이산(687m)은 진안군 마령면에 있는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특이하게 생긴 산으로 두개의 봉우리가 말의 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마이산으로 불린다.
그 기슭에 은수사와 100년전 이갑용 옹이 쌓은 80여개 탑이 있는 탑사는 너무 신비스럽고 이국적이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이산은 CNN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오늘은 남부주차장에서 출발 고금당.비룡대.봉두봉을 거쳐 사람이 오를수 있는 암마이봉 정상에 오른후 은수사를 거쳐 원점회귀하는 시계방향의 산행이다. (20년 전에는 반대방향 )
진안tg에서 내려 약 10분여만에 마이산 남부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대구에서는 2시간이 걸렸다.
몸을 풀고 걷는데 가장 안쪽에 자리한 1주차장은 벌써 만원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다.
하도 오래되어 어느쪽으로 내려 왔는지 삼삼한데 그냥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무심코 탑영제 (저수지)아래 금당사까지 올라왔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지도를 자세히 보니 고금당 가는 길을 지나쳤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니 우측으로 고금당 가는 길이다. 잠시 알바한 셈이 되었네. 세월은 모든걸 앗아간다.
평지길을 5분정도 걸으니 산아래 도착인데 비로소 들머리다. 아무도 이길은 가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지그 재그로 나있는 오르막을 약 15분 정도 오르니 금새 고금당이다.
능선 시작 부근이라 봐도 될듯 한데 너무 힘들지 않고 빠르게 올라 온것 같아 이상하기도 하다. 보통 산에서는 능선 시작점까지는 1시간이상 걸리는게 정상인데 15분만에 왔으니 어리둥절 할 정도다.
고금당은 산아래에 있는 금당사가 원래 있던 자리인데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의 수도처란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스님은 없고 지붕을 금색으로 누렇게 칠해 놓아 특이 한데 수도처인 자연동굴(나옹암)속에 부처님이 있다.
그것보다 이곳의 풍광이 장난이 아니다. 마이산이 번듯이 보이고 주변의 모든 산들이 한눈이다. 너무 멋지다. 다만 숫마이봉은 암마이봉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다 내려 가는데 남녀 두쌍이 각각 올라온다. 능선과 산 허리를 따라 비스듬히 30 여분을 크게 힘들지 않고 걸으니 고래등처럼 긴 암벽이 보이며 약간은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철계단이 나타나고 이산의 전망대 비룡대다.
비룡대는 나봉암이라는 커다란 바위 암릉군 위에 팔각정으로 설치해 놓은 조망처로 마이산을 한눈에 볼수있고 주변의 산야들을 360도 볼수 있는 멋진곳이다. 멀리는 덕유산 장군봉과 남덕유 정상도 보인다.
이곳이 산행지 인지 아님 관광지 인지 사람이 많다. 대체로 젊은 사람이 많다. 그것도 남녀 둘씩 온사람이 많다. 참 좋은 시절이다. 나도 저런때가 있었나 싶다.
이곳에 와 본지도 거의 20년이다. 세월은 간듯 아닌듯 실감 조차 할수 없는데 잠시 희미하게 나마 그 시절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젊음 이라는 그 단어가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누구나 그시절이 최고라는걸 그땐 모른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더욱 그시절이 그리워 지는것을... 한참 상념에 젖는다.
그냥 머무르고만 싶은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내리막 암릉이 50여미터 이상 이어진다. 혼자인 듯한 여자가 지나 가길래 말을 붙이니 서울에서 혼자 왔다고 하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도 많다.
오늘도 그전 속리산에서 처럼 천천히 걷는다. 나무와 바람과 함께 호흡하고 20여년전의 조금은 더 젊었던 그 시절을 상념하며 되 돌아갈수 없는 그길을 마음속에 그득 품으며 ....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부근에서 단체로 같이 산행온 여자 하나가 쥐가 나서 걷지 못해 누군가가 업고 내려 간 사실이 어제 처럼 또렸하다. 그 여자가 어린애 처럼 엉엉 울어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비룡대지나 살짝 오르내림을 거친 후 재를 만난다. 사람들이 다수 쉬고 있다. 비룡대에서 600미터 온 거리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 되는데 등로는 완만하게 길게 이어진다. 이산은 전구간이 대체로 평이한 능선이지만 봉우리를 지나칠 때는 급하게 올랐다 내려야 한다.
들머리에서 고금당. 비룡대전망대.봉두봉 등 봉우리 전후로는 다소 급하게 올랐다 내리고 마지막 봉두봉을 지나면서 급하게 내려 와 암마이봉 아래 부분까지 돌계단을 오른 후 아래부분에서 암마이봉 정상까지 다시 20여분간 계단 및 암벽을 최고로 힘들게 올라야 한다. 약 다섯군데의 오르막이 있다. 하지만 힘이 많이 부칠정도는 아니다.
비룡대 600미터 지난 재에서 다소 길다 싶은 오르막을 오르는데 숲으로 쌓여 조망은 없고 소나무 대신 딱갈나무 천국이다.
넓은 봉우리터에 벤치도 설치 해놓은 쉼터 같은곳이 나타 나는데 봉두봉 이다. 어느쪽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많다. 바로앞에 암마이봉이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다. 암마이봉이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한다. 경관과 추억에 빠져 1시간 20분여를 머물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조용한데 약간 가파르게 한참을 내려 가다 긴오르막 돌계단을 오르니 암마이봉 밑부분이다.
그옆을 끼고 돌아 다시 힘겹게 오르니 암마이봉을 오르는 들머리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많은데 이곳은 탑사나 북부주차장쪽에서 온 관광객들이 암마이봉을 오르는 초입으로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잠시 숨을 고르다 본격 진입이다. 정상까지 20년전에 없던 나무계단이 무수히 설치되어 있다. 하긴 이 급격한 봉우리 오르막을 계단없이 오를 수가 있겠는가?
20년전에는 그냥 줄잡고 오르고 지그재그 소로길로 오른 기억이 난다. 멀리서 봤을때 도저히 올라 갈수 없을것 같았던 이길도 오를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자연도 위대 하지만 인간도 대단하다 싶다.
크게 힘든거 없이 계단의 연속길을 걸어 20분만에 정상에 도착한다. 6~7전에도 관광차 와본 정상이다. 정상은 남부쪽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산아래 저수지 주차장 등이 조망되며 북쪽 방향으로는 숲에 가려져 있다. 정상엔 사람들이 다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사진을 부탁하고 잠시 머물다 하산 한다. 정상바로 아래 가족인 듯한 사람 다섯명이 컵라면을 먹고있다. 초등학교 2학년 애도 있는데 서산에서 2시간반 걸려 왔다고 한다. 멋진산에서 산에 대한 멋진 경험을 시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북부에서 돌탑으로 내려가는 천황재(수.암마이봉 사이)로 내려와 다시 넓은 계단을 내려 가니 은수사다. 암마이봉(687)과 수마이봉(681)사이에 위치해 있다.
은수사는 마이산 탑사 덕에 아마도 전국사찰중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사찰이 아닐까 싶다. 은수사는 천연기념물인 청실배나무가 유명하다. 절 뒷편쪽에서 나를 향해 덮칠것 같은 두 봉우리도 과히 장관이다.
표 끊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은수사에서 탑사쪽으로 내려 가는길에 매표소가 자리 하고 있는데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나를 보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다.
웬 홍두깨야? 난 매표소를 우회하여 산을 오르고 내려 가는길 인데 내려가는 사람에게 표 보여 달라니?
아마도 여기는 탑사가 시도지정문화재라서 탑사를 중심으로 관람료(3000 원)를 징수하는것 같았다. 검문 하듯 지나가는 사람에게 표 끊었느냐고 묻는것 같은데 아마도 등산복을 착용해서 이지 않은가 싶다. 남부에서 매표하고 암마이봉을 올라 다시 내려 가려면 영수증을 잘 보관해야 할것 같다.
탑사는 이갑용옹이 30년에 걸쳐 쌓은 탑들인데 인위적인 요소 없이 자연 그대로 쌓은 탑인데 태풍에 무너지거나 하지도 않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탑이다. 과히 한국에서는 볼수 없는 신비한풍광이다. 탑사 주변은 시장바닥 처럼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잠시 둘러볼 틈도 없이 사진을 찍고 바쁘게 하산한다. 물이 흐르는 개울 옆으로 새로이 난 나무데크 위를 걸어 저수지를 지나 가는데 아침녁에 기타 치며 노래 하던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대단타! 모금함에 돈이 많이 모였는지? 주차장까지 30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가장 신기한 모습으로 불가사의한 돌탑이란 사찰을 품고 있는 신비스러운 산. 봄의 탑영제 벚꽃은 촬영장소로 유명하며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적적하지 않는산. 크게 어려움이 없는 산행경로를 가져 초보자도 부담없이 산행할 수 있는 산으로 웬지 그 신비함에 끌려 늘 마음에 남아 있는산이다.
20년전 추억에 젖어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하루로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