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 길음동 본당 공원묘지 내에 자리한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의 묘소가 있다.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 호 雨村, 1783~1866, 아우구스티노)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도호부사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젯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1814~1866, 토마스), 이유일(李惟一, 1819~1868, 안토니오) 등과 논의하여 영국,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 聯佛防俄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베르뇌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체포되어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과 새 역사의 추진을 위해 러시아 남침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남종삼의 처형 후 가족을 노륙지전(奴+子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규희(南揆熙)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 가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처 이조이(李召史)와 차남 남명희(南明熙)와

2004년 인천교구에서도 성인의 유해 일부를 교구 내 성지에 봉안했다. 이 유해는 성인의 후손인 남기윤(베네딕도)씨가 큰고모인 남형우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게 인도받아 기증한 것으로 척추 뼈 1점, 치아 4점, 슬개골 1점, 머리카락과 부위가 불명확한 부스러기 뼈 등이다. 유해 중 일부는 방부 처리 후 제1회 교구 순교자현양대회 때 갑곶 성지에 봉안됐으며, 일부는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에 나누어 봉안되었다.
▒ 알뜰히도 가난한 사람되어 (묘재에서 남종삼 성인을 노래함)(김영수) ▒
산 너머 배론의 향기 넘어오는 곳
그리움의 강 길게 펼치던 이의
마을은 비장히도 고요합니다
세상 것 다 뿌리치고
알뜰히도 가난한 사람되어
멀리 서소문밖 광장에서
순간 통해 영원 밝히던 빛
이곳 소나무 숲에도 우거져 있습니다
땅과 하늘 잇는 운하, 사랑에서는
용서의 계절 무르익고
숲 속의 작은 새들은 영원의 틈 쪼며
비밀의 문 날고 있습니다
운하를 흐르는 햇살이
나의 목덜미에 조금씩 쌓여
세상은 이윽고 투명한 눈물이 됩니다
■ 순교자
◆ 성 남종삼 요한(1817∼1866)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 성 남종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남종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정치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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